14화(5,346자)

이사회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3월 10일 수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35층 유리문은 흰 줄 방문객 출입증에 빨간 불을 켰다⁠. 소정은 두 번 대 보지 않았다⁠. 한 번이면 충분했다⁠. 이사회 사무국 직원이 문 안쪽에서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사무국 출입 명단에 표소정이 없다고 했다⁠. 어젯밤 늦게 누군가 지웠다고 했다⁠.

“⁠아홉 시 안건이 리서치센터 개편안이라⁠, 발표자 등록은 부사장실에서 하셨거든요⁠.⁠”

소정 뒤에 넷이 서 있었다⁠. 승겸의 코랄색 줄⁠, 두찬의 코랄색 줄⁠, 솔미의 남색 줄⁠. 아무 줄로도 35층은 열리지 않았다⁠. 두찬의 왼쪽 어깨에는 오늘도 트림 수건이 얹혀 있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두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장인의 영상 메시지였다⁠. 화면 속에서 장인이 쌍둥이 하나의 기저귀를 들어 올리며 카메라를 보았다⁠. 「⁠성공했다⁠. 사위⁠, 너도 성공해라⁠.⁠」 기저귀가 거꾸로 채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해옥이 내렸다⁠. 왼팔 소매를 걷지 않았다⁠. 해옥은 소정의 흰 줄을 보고⁠, 닫힌 유리문을 보고⁠, 자기 사원증을 꺼냈다⁠.

“⁠센터장 줄이 이럴 때 쓰는 거지⁠.⁠”

문이 초록 불을 켰다⁠. 해옥이 문을 몸으로 붙잡았다⁠. 다섯이 차례로 지나갔다⁠. 사무국 직원이 막으려다 해옥의 얼굴을 보고 손을 내렸다⁠. 해옥이 말했다⁠.

“⁠리서치센터장이 데려온 사람들이야⁠. 명단에 없으면 지금 적어⁠.⁠”

*

이사회 회의실의 탁자는 길었다⁠. 의장과 사내이사 셋⁠, 사외이사 넷이 앉아 있었고⁠, 탁자 끝 화면 옆에 인곤이 서 있었다⁠. 인곤은 짙은 회색 정장을 입었다⁠. 다섯이 들어오자 인곤은 놀라지 않았다⁠. 해옥을 보고 한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사외이사 가운데 마른 체구의 여자 하나가 소정을 보고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십 분이라는 뜻이었다⁠.

인곤의 설명은 이십 분이었다⁠. 리서치센터는 지난해 사십억을 잃었다⁠. 운용사들이 보고서에 내는 돈은 해마다 줄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큰 은행들은 이미 리서치 인력의 상당수를 인공지능으로 바꾸었다⁠. 브레인포지는 사람 한 명 연봉으로 한 해 보고서 수천 건을 쓴다⁠. 시범 발행에서 오류가 있었지만 학습 자료를 보강해 이미 고쳤다⁠. 회사의 신용등급 전망은 작년에 한 번 흔들렸고⁠, 다시 흔들리면 회사채 이자가 오른다⁠.

“⁠감정으로 미루면⁠, 3년 뒤에는 반이 아니라 전부를 정리하게 됩니다⁠. 표소정 수석 같은 사람은 둘이면 됩니다⁠. 마흔 명은 필요 없습니다⁠. 둘에게 인공지능을 붙이면 마흔 명보다 많이 씁니다⁠.⁠”

인곤의 말에는 빈 곳이 없었다⁠. 사내이사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장이 펜을 내려놓았다⁠. 소정은 탁자 아래에서 해옥이 준 아몬드를 손바닥에 쥐었다⁠. 땀에 젖어 미끈거렸다⁠.

“⁠반대 의견 있다고 들었습니다⁠. 십 분⁠.⁠”

사외이사가 말했다⁠. 소정이 일어났다⁠. 흰 줄이 가슴께에서 흔들렸다⁠. 몇몇 이사가 방문객 출입증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표소정입니다⁠. 리서치센터 수석연구원이고⁠, 오늘은 방문객입니다⁠.⁠”

누군가 웃었다⁠. 소정은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부사장님 숫자는 다 맞습니다⁠. 센터는 사십억을 잃었습니다⁠. 사람은 비싸고 인공지능은 쌉니다⁠. 저도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개편안에 매도 의견을 드립니다⁠. 숫자가 틀려서가 아니라⁠, 숫자 옆이 빠져서입니다⁠.⁠”

화면에 첫 장이 떴다⁠. 「⁠리서치센터 3월 조직 개편안 — 투자의견 매도⁠」 의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첫째⁠, 매출입니다⁠. 지난 일 년 전략리서치본부가 두 배로 늘린 수수료의 칠 할이 운용사 여섯 곳에서 왔습니다⁠. 여섯 곳은 계약 메일에 사람의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사람을 빼면 칠 할이 빠집니다⁠. 첫 고객은 지난 금요일에 이미 빠졌습니다⁠.⁠”

화면에 석계환의 편지가 떴다⁠. 짧았다⁠. 「⁠사람이 쓰지 않은 새마루 보고서는 우리 펀드가 돈을 내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맨 아래에 박하사탕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사외이사가 그림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둘째⁠, 비용입니다⁠. 브레인포지 계약은 첫해에 십이억을 아낍니다⁠. 리포트 한 건당 요금이 해마다 오르게 묶여 있어서 3년째부터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비쌉니다⁠. 중간에 끊으면 남은 기간 요금의 절반을 물어냅니다⁠. 채권팀 차장이 계산했습니다⁠. 출산휴가 중에 아기를 안고요⁠.⁠”

“⁠셋째⁠, 정확도입니다⁠. 브레인포지가 지난달 다른 증권사에 낸 리포트 마흔 개 가운데 여덟 개에 근거 없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 이름으로 나간 모아린 리포트에는 있지도 않은 해외 대리점 열네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화면에 표 하나가 확대되었다⁠. 「⁠재고자산회전률⁠」

“⁠제 오타입니다⁠. 열세 해 동안 고치지 못한 오타를 인공지능이 배웠습니다⁠. 인공지능은 제 글씨를 배웠습니다⁠. 제 눈은 못 배웠습니다⁠. 부사장님 말씀대로 둘이면 됩니다⁠. 그런데 둘의 눈은 마흔 명이 열세 해 동안 서로 틀린 데를 짚어 주면서 생긴 겁니다⁠. 마흔 명을 빼면 둘도 안 생깁니다⁠.⁠”

“⁠넷째⁠, 위험입니다⁠.⁠”

화면에 메일이 떴다⁠. 2026년 3월 1일⁠. 「⁠휴직자 넷은 조직 개편 형식으로 처리할 것⁠. 개인 불이익으로 보이면 노동청 문제가 생기니⁠」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첫 메일 아래 두 번째 메일이 떴다⁠. 「⁠보직 보장 확인서 건⁠. 조건⁠: 표소정 수석 휴직 중 노트 원본 또는 사본 전량⁠」

인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메일은 보직에서 해임된 진 선임이 갖고 있던 겁니다⁠. 앙심을 품고 흘린 메일입니다⁠.⁠”

승겸이 일어났다⁠. 코랄색 줄이 한 번 꼬여 있었다⁠. 승겸은 줄을 바로 펴지 않았다⁠.

“⁠제가 받은 메일이고⁠, 제가 서명했습니다⁠. 2026년 3월 2일⁠. 넷을 내주고 서른을 지키겠다고 계산했습니다⁠. 제 계산이 틀렸습니다⁠. 넷을 내주는 계산은 다음 해에 다섯이 됩니다⁠. 앙심은 없습니다⁠. 책임은 있습니다⁠. 같이 지겠습니다⁠.⁠”

승겸이 앉았다⁠. 해옥이 일어나 서류 한 장을 의장 앞에 내려놓았다⁠. 「⁠동의 철회 — 2027⁠. 3⁠. 9⁠. 마해옥⁠」

“⁠센터장으로서 1월에 낸 감축 동의를 거둡니다⁠. 그때 저는 위에서 내려온 대로 갔습니다⁠. 오늘은 아래에서 올라온 대로 가겠습니다⁠.⁠”

솔미가 일어났다⁠. 남색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소비재팀장 구솔미입니다⁠. 임신 십 주입니다⁠. 내년에 휴직합니다⁠. 돌아올 자리를 각서로 받지 않겠습니다⁠. 규칙으로 받고 싶습니다⁠. 저만 말고⁠, 다음 사람까지⁠.⁠”

두찬이 따라 일어나다 어깨의 트림 수건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하얀 수건이 이사회 탁자 한가운데로 미끄러졌다⁠. 사외이사가 수건을 집어 들었다⁠.

“⁠아기 키우세요⁠?⁠”

“⁠쌍둥이요⁠. 반도체 담당 곽두찬입니다⁠. 오늘 아침에 장인어른이 처음으로 기저귀를 갈았습니다⁠. 거꾸로요⁠.⁠”

“⁠그럼 이 안건에 이해관계가 있으시네요⁠.⁠”

“⁠네⁠. 아주 많습니다⁠.⁠”

이사 몇이 웃었다⁠. 이번 웃음은 소정을 향한 웃음과 달랐다⁠. 사외이사가 수건을 반듯하게 접어 두찬에게 돌려주었다⁠.

“⁠다섯째⁠, 각주입니다⁠.⁠”

소정이 마지막 장을 띄웠다⁠. 브레인포지의 투자 유치 자료였다⁠. 고문단 줄 하나가 노랗게 칠해져 있었다⁠. 「⁠2027년 하반기 합류 예정 — 국내 대형 증권사 경영지원 부사장 출신(⁠현직⁠)⁠. 첫 증권사 고객 계약 주도⁠」

“⁠이름은 없습니다⁠. 추측이라고 하시면 추측입니다⁠. 그래서 질문으로 드리겠습니다⁠.⁠”

소정이 사외이사를 보았다⁠. 사외이사가 펜 뚜껑을 닫았다⁠.

“⁠편 부사장님⁠. 브레인포지에서 퇴임 뒤 고문 제안을 받으셨습니까⁠?⁠”

회의실의 모든 눈이 인곤에게 갔다⁠. 인곤은 화면을 보았다⁠. 노란 줄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부정하지 않았다⁠.

“⁠받았습니다⁠. 퇴임 뒤 일입니다⁠. 계약 판단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하셨다는 거죠⁠.⁠”

“⁠네⁠.⁠”

인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정은 인곤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질문으로 물었다⁠. 인곤의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았다⁠. 계산하는 사람이 계산 안에 있었을 뿐이었다⁠.

“⁠표 수석⁠. 대안은 있습니까⁠? 반대만 하면 이사회는 잡니다⁠.⁠”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초안까지 씁니다⁠. 각주는 사람이 읽습니다⁠. 센터 비용은 4월까지 센터가 직접 줄이는 안을 내겠습니다⁠. 운용사 여섯 곳에 각주를 먼저 보여 주는 유료 구독을 따로 열겠습니다⁠. 석 운용역 펀드가 첫 구독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휴직에서 돌아오는 사람은 쉬기 전의 보직으로 돌아온다는 규칙을 개편안 첫 줄에 넣어 주십시오⁠. 맨 끝 줄 말고요⁠.⁠”

*

이사회는 사십 분 동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전에 인곤이 먼저 나왔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표결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사외이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인곤은 복도에 나란히 앉은 다섯 앞을 지나다 솔미 앞에서 멈췄다⁠.

“⁠구 팀장⁠. 몸 조심해⁠. 이건 진심이야⁠.⁠”

솔미가 고개를 들었다⁠. 인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엘리베이터 홀 끝의 창가로 가서 등을 돌렸다⁠. 창밖으로 한강이 하얗게 빛났다⁠. 인곤은 손을 뒷짐 지고⁠, 화분이 없는 빈 창턱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다섯은 35층 복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승겸이 소정의 손등에 자기 손등을 댔다⁠. 손을 잡지는 않았다⁠. 손등끼리 닿은 채로 승겸이 낮게 말했다⁠.

“⁠방문객이 이사회 탁자에서 발표한 건 이 회사 처음일 겁니다⁠.⁠”

“⁠기록이요⁠?⁠”

“⁠각주에 넣겠습니다⁠.⁠”

소정은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물었다⁠. 손등이 따뜻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줄 알았는데⁠, 솔미가 보고 있었다⁠. 솔미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떡뻥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두찬이 소정의 등을 두 번 토닥였고⁠, 승겸의 등을 두 번 토닥였고⁠, 솔미의 등을 토닥이려다 해옥의 눈치를 보고 해옥의 등을 토닥였다⁠. 해옥이 측정기를 들여다보았다⁠.

“⁠백오십⁠. 이건 기다리느라 오른 거야⁠.⁠”

문이 열렸다⁠. 다섯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 다섯 개가 동시에 뒤로 밀렸다⁠. 쇠 다리가 복도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사무국 직원이 결정문을 읽었다⁠.

「⁠1⁠. 리서치센터 3월 조직 개편안은 보류한다⁠. 2⁠. 브레인포지 계약은 감사위원회가 다시 검토한다⁠. 3⁠. 휴직 복귀자는 휴직 전 보직으로 복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번 개편에 따른 보직 해제는 모두 거둔다⁠. 4⁠. 리서치센터는 4월 말까지 비용 절감안과 유료 구독안을 낸다⁠.⁠」

솔미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두찬이 휴대전화를 꺼내 장인에게 한 글자를 보냈다⁠. 「⁠됨⁠」 해옥은 왼팔을 내려다보지 않고 천장을 보았다⁠. 곧바로 장인의 답장이 왔다⁠. 「⁠기저귀 다시 갈았다⁠. 이번엔 바로⁠.⁠」 두찬이 화면을 들어 보이며 울다 웃었다⁠. 소정은 주먹을 펴 해옥에게 아몬드를 내밀었다⁠.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해옥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땀 묻은 건 네가 먹어⁠. 이긴 사람이 먹는 거야⁠.⁠”

의장이 회의실 문가로 나왔다⁠. 회색 머리의 의장은 다섯을 차례로 보다가 흰 줄 방문객 출입증에서 눈을 멈췄다⁠.

“⁠표 수석⁠. 3번은 곧바로 시행합니다⁠. 그런데 전략리서치본부가 폐지됐다더군요⁠. 4번을 하려면 본부가 있어야 하는데⁠.⁠”

의장의 눈이 소정에게서 승겸으로 갔다가 다시 소정에게 돌아왔다⁠.

“⁠본부는 누가 맡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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