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5자)
내 자리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의장의 물음이 복도에 떨어진 뒤로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해옥이 측정기를 보려다 그만두었다. 두찬은 트림 수건을 두 손으로 쥐었다. 솔미는 소정을 보았다. 승겸은 바닥을 보았다. 바닥의 대리석 무늬를 세는 사람처럼.
“본부는 진 선임이 다시 맡는 게 순서 아닙니까? 숫자를 낸 사람이니까.”
사내이사 하나가 말했다. 의장이 승겸을 보았다. 승겸이 고개를 들었다. 코랄색 줄이 꼬인 채였다.
“사양하겠습니다.”
“이유는요?”
“저는 일 년 동안 남의 자리에 앉아 봤습니다. 이번에는 남의 자리를 데워 두는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승겸이 솔미를 보았다. 솔미가 놀라 남색 줄을 쥐었다.
“구솔미 팀장이 9월에 휴직합니다. 휴직하는 동안 소비재팀을 제가 대행하겠습니다. 구 팀장이 돌아오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돌려드린다는 데에 서명하겠습니다.”
의장이 소정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표 수석.”
소정은 흰 줄 방문객 출입증을 내려다보았다. 1월 4일 아침, 인사팀 대리가 코랄색 줄을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봄 신상 색이래요. 기둥 앞에서 처음 맞은 복합기의 더운 바람. 열세 해와 일 년과 석 달. 소정은 출입증을 목에서 벗어 손에 쥐었다.
“맡겠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제 책상은 유리방으로 옮기겠습니다. 대신 유리방은 지금처럼 방음 안 되게 두겠습니다. 다들 듣게요.”
의장이 처음으로 웃었다.
28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다섯이 탔다. 문이 닫히자 두찬이 장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 속에서 장인이 쌍둥이 둘을 양팔에 안고 소리쳤다. 「됐다며! 됐다며!」 쌍둥이가 할아버지 중절모를 잡아당겼다. 해옥은 거울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측정기를 보지 않았다.
솔미가 소정의 옆에 붙었다. 남색 줄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선배. 저 9월에 들어가면 제 자리, 진짜 진 선임님이 지켜요?”
“서명한다잖아. 이번엔 ‘ㅁ’ 네모로 닫아서.”
“선배는요? 선배는 어디 있어요?”
“유리방. 방음 안 되는.”
솔미가 웃었다.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로 작게 말했다.
“선배. 그 노트, 이백십사 장. 제가 다시 읽어도 돼요? 이번엔 몰래 말고요.”
“달라고 하면 줄게.”
“주세요.”
엘리베이터가 28층에서 열렸다. 소정은 내리면서 대답했다. “줄게.” 솔미는 소정보다 반 뼘 큰 키로, 소정의 반 걸음 뒤에서 따라 내렸다. 신입 때와 같은 거리였다. 다른 것은 솔미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3월 10일 오후 네 시, 두찬은 기둥 앞에서 노동청 누리집에 진정서를 올렸다. 떡뻥 옆에 넣어 두었던 봉투의 글을 한 줄씩 옮겼다. 이사회가 정한 3번을 맨 위에 적고, 2026년 3월의 메일을 맨 아래에 적었다. 진정인을 넣는 마지막 줄 앞에서 두찬이 소정을 돌아보았다. 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찬은 진정인 옆에 표소정을 함께 넣었다. 화면에 「접수 완료」가 떴다. 두찬이 소정의 등을 두 번 토닥였다.
“다음 사람이 덜 싸우게요.”
*
3월 마지막 금요일 오후 다섯 시 반, 소정과 승겸은 나란히 학교 돌봄교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승겸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맸다가 다시 풀었다. 소정이 보다 못해 넥타이를 빼앗아 자기 가방에 넣었다.
“여덟 살 앞인데 왜 떨어요?”
“이사회보다 무섭습니다.”
라윤이 실내화 가방을 메고 나왔다. 승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한참 승겸을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반 돌려줬어?”
승겸이 무릎을 굽혔다.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다 돌려줬습니다.”
“다? 반만 해도 되는데.”
“반만 하면 계산이 틀려서요.”
“그럼 아저씨는 어디 앉아?”
“기둥 옆에요.”
라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등 따뜻하다며. 엄마가 그랬어. 아저씨 추위 타?”
“조금 탑니다.”
“그럼 잘됐다.”
라윤은 왼손으로 소정의 손을, 오른손으로 승겸의 손을 잡았다. 셋은 교문까지 천천히 걸었다. 승겸의 걸음이 자꾸 빨라질 때마다 라윤이 손을 잡아당겼다. 「천천히. 천천히 걸으면 아무도 안 봐.」 승겸은 걸음을 늦추면서 소정을 보았다. 교문 앞의 학부모 둘이 셋을 보고 수군거렸다. 다 보고 있었다.
소정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석계환이었다. 「표 본부장. 각주 구독 첫 계약서 보냈다. 서명해서 보내. 오늘은 사탕 안 먹었다. 먹을 필요가 없어서.」
*
3월 31일 수요일 오후 여섯 시, 35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28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안에 인곤이 있었다. 상자 하나를 안고 있었다. 상자 안에 소나무 분재가 다섯 개, 크기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감사위원회 조사가 시작되고 이틀 뒤 인곤은 사표를 냈다고 했다. 사표에는 이유를 한 줄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소정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혔다. 거울 벽에 두 사람과 분재 다섯 개가 비쳤다.
“표 본부장.”
“아직 내일부터예요.”
“하루 일찍 불러 주지. 나는 내일 없으니까.”
인곤은 상자를 고쳐 안았다. 분재 잎이 흔들렸다.
“내 계산은 아직 맞아. 센터는 올해도 돈을 잃을 거야. 인공지능은 내년에 더 싸지고. 3년 뒤에 이 이사회가 또 열릴 거야. 그땐 내가 없으니 더 쉽게 잘라.”
“3년 뒤에도 각주 들고 올라갈게요.”
“그때 자네 마흔넷이야.”
“영포티예요. 아직.”
인곤이 소리 내 웃었다. 소정이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날이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피곤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웃음 끝에 인곤은 분재 잎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끝으로 털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아침마다 해 온 손놀림이었다.
“나는 사람을 지킨다고 했어. 단위가 다를 뿐이라고. 그 말은 거짓말 아니었어.”
“알아요. 거짓말 안 하시는 거.”
“그래서 이사회에서 졌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문이 열리기 직전, 인곤이 상자에서 가장 작은 분재를 꺼내 소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날 인곤이 「흔들리지 마라」고 말을 걸던, 손바닥만 한 소나무였다.
“가지가 제일 좋은 놈이야. 아깝다고 다 두면 나무가 죽는다고 했지? 그래도 자네는 다 둬 봐. 죽는지 사는지 나도 궁금해.”
인곤은 상자를 안고 로비를 걸어 나갔다. 회전문이 인곤을 바깥으로 내려놓았다. 소정은 분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회전문이 멈출 때까지 서 있었다. 화분 흙이 아직 축축했다. 오늘 아침에도 물을 준 흙이었다.
*
저녁 일곱 시, 소정은 분재를 들고 마포 엄마 집에 들렀다. 엄마는 깁스한 왼팔을 식탁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귤을 까고 있었다. 깁스 위에 라윤의 종이학과 「엄마 천천히 걸어」와 소정의 「표소정 이김(10일 예정)」이 나란히 있었다.
“그 화분은 뭐야?”
“진 사람이 준 거.”
“진 사람이 주는 걸 왜 받아?”
“진 사람도 사람이니까.”
엄마가 매직을 내밀었다. 소정은 「예정」 두 글자 위에 줄을 두 번 그었다. 그은 자리 옆에 작게 덧붙였다. 「(10일 완료)」 엄마가 깁스를 들어 보더니 혀를 찼다.
“너는 이겨도 괄호를 치니.”
“숫자는 맞아야 돼.”
“얘는 끝까지.”
엄마가 귤 한 조각을 소정의 입에 넣어 주었다. 셨다. 라윤이 방에서 나와 분재를 들여다보았다.
“엄마, 이거 이름 뭐야?”
“이름 없어.”
“그럼 내가 지어도 돼?”
라윤은 분재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천천히. 얘 이름은 천천히야. 소나무는 천천히 큰대.”
*
4월 1일 목요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2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소정은 오른쪽으로 열한 걸음을 걸었다.
열한 걸음 끝에 「소비재팀」 명패가 돌아와 있었다. 명패 밑의 책상들에 솔미와 팀원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솔미의 책상 칸막이에는 2027 소비재 표지가 여전히 붙어 있었고, 표지 옆에 초음파 사진 한 장이 새로 붙어 있었다. 사진 아래 솔미의 글씨가 있었다. 「9월 휴직, 3월 복귀 — 같은 자리」 반도체 창가 자리에는 두찬의 머그잔이 돌아와 있었다. 머그잔 옆에 떡뻥 봉지가 놓였고, 모니터에는 쌍둥이 사진과 장인이 보낸 거꾸로 채운 기저귀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해옥의 센터장실 문에는 「정년까지 다섯 해 — 혈당 백 이하로」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해옥의 글씨였다.
유리방 문에는 흰 글씨가 바뀌어 있었다. 「전략리서치본부장 표소정」 인사팀 대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사원증을 내밀었다. 줄이 남색이었다.
“본부장님은 남색이세요. 팀장이랑 같은 색이에요. 본부장 색은 따로 없대요.”
“잘됐네요. 색 늘리면 다들 헷갈려요.”
소정은 남색 줄을 목에 걸었다. 걸고 나서 왼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막내들의 단체방이었다. 이번에는 실수로 초대된 것이 아니었다. 단체방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4월 1일 커피 내기 — 본부장님 첫날 몇 시 퇴근?」 공지 밑에 표가 붙어 있었다. 「다섯 시 정각 9명 / 다섯 시 반 3명 / 야근 1명(진 선임님)」 소정은 단체방에 한 줄을 올렸다. 「다섯 시 정각. 돌봄교실 여섯 시까지.」 곧바로 곰 이모티콘이 박수를 쳤다. 누가 보냈는지 소정은 알았다. 베이지 트렌치코트 안에 흰 셔츠를 입었다. 소매에 다리미 자국은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라윤이 다림질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대신 현관에서 소정의 운동화 끈을 묶어 주었다. 천천히 걸으라고.
유리방 화이트보드 귀퉁이에 라윤의 그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창가의 단발머리 사람, 기둥 옆의 안경 쓴 사람, 둘 사이의 줄, 받침이 거꾸로 붙은 「반」 소정은 지우지 않았다. 창가 책상 위에 이름 없는 소나무 분재를 올려놓았다. 「천천히」였다.
소정은 노트 파일을 가슴에 안고 유리방을 나왔다. 일 년 동안 라윤이 잠든 밤마다 채운 파일이었다. 두 장이 휘지 않은 파일이었다. 사무실 한가운데를 지나 복합기 옆 기둥 앞까지 걸었다.
기둥 앞 책상에 승겸이 앉아 있었다. 뒤로 넘긴 검은 머리, 짙은 남색 정장, 가는 검은 테 안경. 목에는 코랄색 줄. 책상 위에 펜 다섯 자루가 길이 순서로 누워 있었고, 펜들 옆에 성수 매장의 커플 할인 영수증이 투명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경비 청구는 끝내 하지 않은 영수증이었다.
소정이 노트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펜 다섯 자루 위로 파일이 덮였다. 펜들이 흐트러졌다.
“각주 읽는 법이요. 9월까지 다 배워 두세요. 구 팀장 자리 데우려면.”
“글씨가 오른쪽으로 누운 종이부터 읽겠습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장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소정이 돌아서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유리방을 등지고, 기둥을 마주 보았다. 기둥 앞에서 일어나던 승겸이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춰 소정을 보았다. 석 달 전 1월 첫 아침과 같은 자리였고, 자리의 주인만 바뀌어 있었다. 둘 사이로 4월의 아침 햇빛이 통유리를 넘어 하얗게 쏟아졌다. 복합기가 첫 출력을 뱉으며 더운 바람을 뿜었다. 승겸의 코랄색 줄이 바람에 한 번 꼬였다. 승겸은 줄을 바로 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