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40자)

사겠다는 사람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토요일 아침 아홉 시⁠, 현관 벨이 두 번 울렸다⁠. 문을 열자 커다란 분홍 토끼 인형이 먼저 들어왔다⁠. 인형 뒤에서 라윤의 아빠가 얼굴을 내밀었다⁠. 버킷햇에 통 넓은 청바지⁠, 발목까지 오는 흰 양말에 굽 높은 운동화였다⁠. 소정은 속으로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진짜 영포티는 따로 있었다⁠.

“⁠라윤아⁠, 아빠 왔다⁠!⁠”

라윤이 방에서 뛰어나와 인형에 얼굴을 묻었다⁠. 인형이 라윤보다 컸다⁠. 라윤은 인형을 안은 채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나 이거 작년에도 받았어⁠.⁠”

“⁠그건 곰이었지⁠. 이건 토끼야⁠.⁠”

“⁠색이 똑같아⁠.⁠”

전남편은 머쓱하게 버킷햇을 벗었다 썼다⁠. 소정을 보지 않고 신발장을 보며 말했다⁠.

“⁠이번 달 양육비는 다음 주에 넣을게⁠. 회사가 좀 그래서⁠.⁠”

“⁠지난달에도 다음 주였어⁠.⁠”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야⁠.⁠”

소정은 대꾸하지 않고 라윤의 가방을 건넸다⁠. 가방 안에 깁스 한 할머니에게 받은 용돈 봉투와 받아쓰기 공책이 들어 있었다⁠. 공책 사이에 끼워 둔 두 장은 어젯밤 소정이 다시 꺼내 노트 파일에 넣었다⁠. 라윤이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다가 돌아보았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이야⁠? 화장했어⁠.⁠”

“⁠엄마 회사 사람 만나⁠.⁠”

“⁠안경 아저씨⁠?⁠”

전남편의 눈썹이 올라갔다⁠. 소정은 못 본 척했다⁠.

“⁠아니⁠. 화분 할아버지⁠.⁠”

라윤이 소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토끼 인형이 둘 사이에 끼어 찌그러졌다⁠.

“⁠엄마⁠, 천천히 걸어⁠. 그리고 이겨⁠.⁠”

*

열한 시⁠, 여의도의 호텔 라운지는 피아노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창가 자리에 인곤이 앉아 있었다⁠. 주말이라 코트 대신 짙은 갈색 카디건을 입었고⁠, 탁자에는 분재 대신 작은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주말에 불러서 미안해⁠. 회사에서는 귀가 많아서⁠.⁠”

“⁠35층 계단에도 카메라가 있다면서요⁠.⁠”

인곤이 웃었다⁠. 소정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랐다⁠. 찻물이 잔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표 수석⁠. 아니⁠, 표 팀장이라고 하지⁠. 이제부터는 다시 팀장일 테니까⁠.⁠”

인곤은 서류 봉투를 탁자에 올렸다⁠. 봉투를 열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러 두었다⁠.

“⁠소비재팀 돌려주지⁠. 권고사직은 거두고⁠. 연봉은 이십 퍼센트 올려⁠. 표 팀장 어머니 손목 다쳤다며⁠? 아이 돌봄도 사람 쓰려면 돈이 들지⁠. 그리고 하나 더⁠.⁠”

인곤이 찻잔을 들었다⁠.

“⁠진 선임⁠. 본부장으로 돌려놓지⁠. 본부도 다시 세우고⁠. 자네가 원하면⁠.⁠”

소정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피아노가 다른 곡으로 넘어갔다⁠.

“⁠제가 원하면요⁠.⁠”

“⁠자네 둘 사이 일은 내 알 바 아니라고 했지⁠. 그래도 알고는 있어⁠. 표 팀장이 이사회에 메일을 들고 오면⁠, 진 선임은 앙심 품은 사람이 되고 다시는 이 업계에서 본부장 못 해⁠. 표 팀장이 안 오면⁠, 진 선임은 월요일에 다시 유리방에 앉아⁠.⁠”

인곤은 그제야 봉투를 열었다⁠. 종이 세 장이 나왔다⁠. 「⁠인사 조치 합의서⁠」 「⁠비밀유지 약정서⁠」 「⁠이사회 의견서 제출 철회서⁠」

“⁠이것만 쓰면 돼⁠. 노트는 이제 안 받아도 돼⁠. 구 팀장이 이미 이백십사 장을 줬으니까⁠.⁠”

“⁠두 장은 안 줬죠⁠.⁠”

“⁠두 장은 사람이 채우면 돼⁠. 표 팀장이 채워⁠. 팀장으로⁠.⁠”

인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소정도 알았다⁠. 리서치센터는 한 해에 사십억을 잃었다⁠. 작년에 회사의 신용등급 전망이 한 단계 내려갈 뻔했고⁠, 내려가면 회사채 이자가 오르고⁠, 이자가 오르면 사람을 더 내보내야 했다⁠. 인곤은 이 사슬을 끊으려는 사람이었다⁠. 인곤이 끊는 방식이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부사장님⁠,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저 하나 내보내면 끝나는 일인데⁠.⁠”

“⁠자네 하나 내보내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인곤은 처음으로 찻잔을 끝까지 비웠다⁠.

“⁠나는 삼십오 년 동안 회사 셋이 망하는 걸 봤어⁠. 셋 다 사람 때문에 망했어⁠. 정 때문에 못 자르고⁠, 의리 때문에 못 줄이고⁠, 그러다 한 번에 다 잘렸지⁠. 천 명이⁠. 표 팀장이 이사회에서 이기면 센터는 이번엔 살아⁠. 그리고 3년 뒤에 통째로 죽어⁠. 나는 그걸 막으려는 거야⁠. 나도 사람 지키는 거야⁠. 단위가 다를 뿐이지⁠.⁠”

소정은 비밀유지 약정서를 끌어당겼다⁠. 습관대로 맨 뒤를 먼저 펼치려다 멈췄다⁠. 맨 뒤를 펼치는 손이 떨릴까 봐⁠, 앞에서부터 한 줄씩 읽었다⁠. 네 번째 조항⁠, 다섯 번째 조항⁠. 일곱 번째 조항에서 눈이 멈췄다⁠.

「⁠을은 3월 조직 개편에 따른 다른 휴직 복귀자들의 인사 처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다른 휴직 복귀자들⁠. 곽두찬⁠. 5월에 돌아올 채권팀 차장⁠. 그리고 아직 휴직하지 않은⁠, 앞으로 휴직할 사람들⁠. 솔미⁠.

“⁠구 팀장 각서에는 언제 서명하세요⁠?⁠”

인곤의 손이 찻주전자 위에서 잠깐 멈췄다⁠.

“⁠이사회 끝나고⁠.⁠”

“⁠일곱 번째 조항이 있는데요⁠. 이의 없이 처리할 사람 안에 솔미가 들어가잖아요⁠. 솔미가 휴직하면요⁠.⁠”

인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소정은 약정서를 봉투에 도로 넣었다⁠. 세 장을 모서리까지 맞췄다⁠. 승겸에게 배운 손이었다⁠.

“⁠저 하나를 사시려고 넷을 내주시네요⁠. 아니⁠, 넷이 아니죠⁠. 앞으로 쉬려는 사람 전부요⁠.⁠”

“⁠표 팀장⁠.⁠”

“⁠거절할게요⁠. 월요일에 출입 권한 막으세요⁠. 수요일에 올라갈게요⁠.⁠”

소정은 일어났다⁠. 인곤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깝다⁠. 가지가 제일 좋은데⁠.⁠”

소정은 라운지를 나오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로비 회전문을 밀 때 피아노가 같은 곡을 처음부터 다시 치기 시작했다⁠. 회전문이 한 바퀴 돌아 소정을 바깥의 찬 공기 속에 내려놓았다⁠.

*

호텔을 나와 여의도공원을 가로지르며 소정은 두찬에게 전화했다⁠. 두찬은 놀이터에 있었다⁠. 그네 삐걱거리는 소리와 쌍둥이 웃음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소정은 일곱 번째 조항을 그대로 읽어 주었다⁠.

“⁠다른 휴직 복귀자들의 인사 처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전화 너머에서 그네 소리가 멈췄다⁠. 두찬이 그네를 붙잡은 것이었다⁠.

“⁠저를 팔려고 한 거네요⁠. 팀장님 팀장 자리랑 바꾸려고요⁠.⁠”

“⁠팔려고 한 거죠⁠. 안 팔았어요⁠.⁠”

“⁠떡뻥 값도 안 쳐 주고요⁠.⁠”

두찬이 웃었다⁠. 웃음이 떨렸다⁠. 쌍둥이 하나가 「⁠아빠⁠, 밀어⁠!⁠」라고 소리쳤다⁠. 두찬은 그네를 다시 밀며 말했다⁠.

“⁠팀장님⁠, 수요일에 저도 35층 갈게요⁠. 쌍둥이는 장인어른한테 맡길게요⁠. 아버님이 이번엔 기저귀 갈아 보고 싶대요⁠. 칠십 평생 처음으로요⁠.⁠”

“⁠아버님 괜찮으시겠어요⁠?⁠”

“⁠모르죠⁠. 근데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사위가 싸우는 날 애 보는 건 장인이 할 일이라고⁠.⁠”

소정은 공원 벤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벤치 등받이에 누가 두고 간 아이 장갑 한 짝이 끼워져 있었다⁠. 찾으러 올 사람이 보기 좋게⁠, 엄지가 하늘을 향하게 끼워져 있었다⁠.

“⁠두찬 씨⁠. 진정서는 수요일 오후에 넣어요⁠. 이사회 결과 보고⁠. 이기든 지든⁠.⁠”

“⁠이기면 왜 넣어요⁠?⁠”

“⁠이기면⁠, 다음 사람이 덜 싸우게요⁠.⁠”

전화 너머에서 그네가 높이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두찬이 쌍둥이를 밀며 대답했다⁠. 「⁠네⁠.⁠」 한 글자였는데 길었다⁠.

오후 세 시⁠, 승겸이 사는 오피스텔은 마포대교 건너 공덕에 있었다⁠. 문을 열어 준 승겸은 회색 니트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집 안은 승겸의 책상처럼 반듯했다⁠. 책장의 책이 키 순서대로 꽂혀 있었다⁠. 현관 옆 의자 등받이에 코랄색 줄이 걸쳐져 있었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줄은 보이는 데 두는 사람이었다⁠.

“⁠부사장님 만나셨습니까⁠?⁠”

“⁠네⁠. 본부장님 돌려준대요⁠.⁠”

“⁠선임입니다⁠.⁠”

“⁠그것도 돌려준대요⁠. 본부장으로⁠.⁠”

승겸이 부엌으로 가다 멈췄다⁠. 등을 돌린 채 물었다⁠.

“⁠받으셨습니까⁠?⁠”

“⁠아니요⁠.⁠”

승겸이 몸을 돌렸다⁠. 소정은 현관에 선 채 신발을 벗지 않고 있었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유리에 부딪쳤다⁠.

“⁠받으셨어도 됐습니다⁠. 저 때문이면⁠.⁠”

“⁠본부장님 때문에 거절한 거예요⁠. 본부장님이 다시 유리방에 앉으면⁠, 이번엔 서명 없이도 넷을 내주는 사람이 되잖아요⁠. 그거 못 보겠어요⁠.⁠”

승겸이 다가왔다⁠. 소정이 신발을 벗었다⁠. 한쪽이 잘 안 벗겨져서 승겸의 팔을 붙잡았다⁠. 붙잡은 팔이 뜨거웠다⁠.

“⁠이번엔 계산 안 해요⁠?⁠”

“⁠안 해요⁠. 오늘은 각주 없이 읽을래요⁠.⁠”

승겸이 안경을 벗었다⁠. 벗은 안경을 책장의 가장 낮은 칸에 접어 놓는 손이⁠, 처음으로 아무 데나 놓았다⁠. 소정은 아무 데나 놓인 안경을 보고 웃었다⁠. 웃는 입술 위로 승겸의 입술이 내려왔다⁠. 계단참에서보다 느렸고⁠, 느려서 더 깊었다⁠. 빗소리가 굵어졌다⁠. 소정의 손이 승겸의 니트 밑으로 들어가 등을 더듬었다⁠. 일주일 동안 기둥에 기대던 등이었다⁠. 따뜻했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는 켜지 않았다⁠. 비 오는 오후의 회색 빛이 창으로 들어와 둘의 어깨에 얹혔다⁠. 승겸은 소정의 단발을 귀 뒤로 넘기고⁠, 넘긴 자리에 입을 맞췄다⁠. 왼쪽 귀 뒤⁠, 소정이 하루에 스무 번은 머리를 넘기는 자리였다⁠. 소정은 숨을 들이쉬다가 웃었고⁠, 웃다가 숨이 끊겼다⁠. 승겸의 손바닥이 소정의 허리를 천천히 지났다⁠. 서두르지 않는 손이었다⁠. 숫자를 셀 때만 빨라지던 사람이 오늘은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두 사람의 숨이 엇갈렸다가 맞춰졌다⁠.

해가 지고 나서 소정은 승겸의 팔을 베고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 빗물 그림자가 흘렀다⁠.

“⁠본부장님⁠.⁠”

“⁠선임입니다⁠.⁠”

“⁠진 선임님⁠. 서른넷이죠⁠?⁠”

“⁠네⁠.⁠”

“⁠저는 마흔하나예요⁠. 일곱 살 차이예요⁠.⁠”

“⁠숫자 세지 마십시오⁠. 오늘은⁠.⁠”

“⁠세는 게 일이라서요⁠.⁠”

승겸이 소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소정의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일곱 개를 접고 나서 손가락을 다시 펴 주었다⁠.

“⁠다 폈습니다⁠. 이제 없습니다⁠.⁠”

*

밤 여덟 시⁠, 소정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석계환이었다⁠. 영상도 음성도 아닌 문자였다⁠.

「⁠표 팀장⁠. 수요일 이사회 소문 들었다⁠. 사외이사 하나 소개해 줄게⁠. 회계학 교수 출신이고 각주 읽는 사람이야⁠. 내 대학 동기⁠. 사탕 세 개 먹고 하는 소개다⁠.⁠」

문자 끝에 전화번호가 하나 붙어 있었다⁠. 소정은 승겸의 팔에서 일어나 니트를 걸치고 창가로 가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다섯 번 갔다⁠. 낮고 마른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석 운용역한테 들었어요⁠. 개편안 반대 의견을 내고 싶다고요⁠.⁠”

“⁠네⁠. 숫자로요⁠.⁠”

“⁠이사회 안건에 리서치센터 개편안이 있어요⁠. 회사 쪽 설명은 부사장님이 하실 거고요⁠. 반대 의견을 숫자로 가져오면 십 분 드릴게요⁠. 감정은 빼고요⁠. 이사회는 감정을 들으면 잡니다⁠.⁠”

“⁠십 분이요⁠.⁠”

“⁠십 분⁠. 출입은 이사회 사무국에서 열어 줄 거예요⁠. 그 전에 사무국 직원이 막으면⁠, 그건 나도 못 막아요⁠.⁠”

전화가 끊겼다⁠. 소정은 창에 이마를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등 뒤에서 승겸이 일어나 앉는 소리가 났다⁠. 안경을 찾는 손이 책장 아래 칸을 더듬었다⁠.

“⁠몇 분입니까⁠?⁠”

“⁠십 분이요⁠.⁠”

승겸이 안경을 썼다⁠. 쓰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 불빛이 승겸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충분합니다⁠. 각주는 하나면 되니까요⁠.⁠”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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