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35자)

기둥 옆 자리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목요일 밤 열한 시⁠, 진승겸은 유리방 불을 끄고 모니터 불빛만 남겼다⁠. 화면에 메일 두 통이 나란히 떠 있었다⁠. 하나는 어제 받은 최종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 년 전⁠, 2026년 3월 1일 밤에 받은 메일이었다⁠. 보낸 사람은 편인곤이었다⁠. 승겸은 이 메일을 일 년 동안 지우지 않았고⁠, 일 년 동안 다시 열지도 않았다⁠.

「⁠진 본부장⁠. 본부 신설 건 승인⁠. 조건 하나⁠. 리서치센터 휴직자 넷은 3월 개편 때 정리한다⁠. 개인 불이익으로 보이면 노동청 문제가 생기니⁠, 조직 개편 형식으로 처리할 것⁠. 보직 재검토라고 쓰면 된다⁠. 넷의 자리는 비어 있으니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본부장 동의 서명 받아 둘 것⁠. — 편인곤⁠」

다음 날 아침 승겸은 동의서에 서명했다⁠. 「⁠2026⁠. 3⁠. 2⁠.⁠」 펜을 길이 순서로 눕혀 두고⁠, ‘⁠ㅁ⁠’을 네모로 닫았다⁠. 서른 명이 상자를 들고 로비를 지나가던 아침을 생각하면서⁠. 넷을 비우면 서른을 지킨다고⁠, 승겸은 2026년 3월 2일 아침에 그렇게 계산했다⁠.

승겸은 메일의 한 구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넷의 자리는 비어 있으니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일 년 전에는 숫자였던 문장이었다⁠. 오늘 밤에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기둥 앞에서 펜 뚜껑을 이로 무는 사람⁠, 트림 수건을 어깨에 걸고 출근한 사람⁠, 화장실 세면대를 붙든 사람⁠.

승겸은 서랍에서 개인 휴대용 저장 장치를 꺼냈다⁠. 메일 원본을 옮겼다⁠. 화면의 진행 막대가 사 초 만에 끝까지 찼다⁠. 일 년 동안 열지 못한 메일이 사 초 만에 손바닥만 한 물건 안으로 들어갔다⁠.

*

금요일 아침 여덟 시⁠, 부사장실 창가의 분재 하나가 탁자 위로 옮겨져 있었다⁠. 가장 작은 분재였다⁠. 인곤은 가지 끝의 새순을 핀셋으로 하나씩 뜯어내고 있었다⁠.

“⁠서명해 왔나⁠?⁠”

승겸은 최종안 출력본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맨 끝 줄 옆의 서명 자리가 하얬다⁠.

“⁠못 했습니다⁠.⁠”

인곤은 핀셋을 내려놓지 않았다⁠. 새순 하나를 더 뜯었다⁠.

“⁠못 한 건가⁠, 안 한 건가⁠?⁠”

“⁠안 했습니다⁠.⁠”

“⁠이유를 들어 보자⁠.⁠”

“⁠숫자가 바뀌었습니다⁠. 본부 실적 두 배의 칠 할이 표소정 수석의 옛 고객입니다⁠. 표 수석을 내보내면 칠 할이 나갑니다⁠. 부사장님 계산대로면 열여섯이 아니라 스물을 내보내게 됩니다⁠.⁠”

인곤은 그제야 핀셋을 내려놓았다⁠. 웃었다⁠.

“⁠진 본부장⁠. 내가 왜 자네를 데려왔는지 알아⁠? 하버라인 서울 지점⁠. 서른 명 상자⁠. 나도 들었어⁠. 그 아침에 혼자 사원증 열린 사람⁠. 상자를 아는 사람은 상자를 안 만들려고 무슨 일이든 하거든⁠. 그래서 자네였어⁠.⁠”

승겸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칠 할이 표소정인 거 나도 알아⁠. 그러니까 표소정 노트를 브레인포지에 다 넣고⁠, 표소정은 내보내는 거야⁠. 그럼 칠 할이 사람 거에서 회사 거가 돼⁠. 사람은 나가도 숫자는 남아⁠. 이게 내 계산이야⁠. 틀렸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승겸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인곤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아서 서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는 서명 안 합니다⁠.⁠”

“⁠그럼 오늘부로 본부장 보직 해임이야⁠. 본부는 없애고 소비재팀으로 합친다⁠. 구솔미가 맡아⁠. 표소정은 대기발령⁠. 이사회는 10일이야⁠. 자네 없이 가⁠.⁠”

인곤은 분재를 창가로 도로 옮겼다⁠. 옮기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그 메일⁠. 일 년 전 거⁠. 자네가 가지고 있는 거 알아⁠. 가져⁠. 보직 해임된 사람이 앙심 품고 흘린 메일⁠. 이사회는 그렇게 읽을 거야⁠. 숫자는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정하거든⁠.⁠”

승겸은 일어났다⁠. 일어나서 인곤에게 허리를 굽혔다⁠. 정중하게⁠, 끝까지 정중하게⁠.

“⁠부사장님 계산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주가 하나 빠졌습니다⁠.⁠”

“⁠뭔가⁠?⁠”

“⁠사람이요⁠.⁠”

인곤은 핀셋을 다시 집었다⁠. 대답하지 않고 새순을 하나 더 뜯었다⁠. 뜯긴 새순이 탁자 위에 초록색 점으로 남았다⁠. 인곤은 점을 손가락으로 쓸어 화분 흙 위에 떨어뜨렸다⁠.

승겸은 문을 닫고 나왔다⁠. 35층 유리문을 지날 때 사원증이 한 번 울었다⁠. 「⁠출입 권한이 변경되었습니다⁠」

*

오전 열한 시⁠, 28층 사내 게시판에 인사 공지가 두 줄 떴다⁠. 소정은 기둥 앞에서 읽었다⁠.

「⁠진승겸 — 전략리서치본부장 보직 해임⁠. 전략리서치본부 폐지⁠, 업무는 소비재팀(⁠팀장 구솔미⁠)이 이어받음⁠」 「⁠표소정 — 특별분석팀 폐지에 따라 대기발령⁠. 출입 권한 3월 8일부터 정지⁠」

막내들이 모니터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커피 내기 단체방이 조용했다⁠. 해옥이 센터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가 측정기를 보지도 않고 도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서 견과류 봉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찬이 의자를 흔들다 멈췄다⁠.

“⁠팀장님⁠. 대기발령이 뭐예요⁠? 애들 낮잠 같은 거예요⁠?⁠”

“⁠일 없이 기다리는 거예요⁠. 회사 밖에서⁠.⁠”

“⁠그럼 육아휴직이랑 똑같네요⁠. 애만 없고⁠.⁠”

두찬은 웃으려다 말았다⁠. 서랍을 열어 떡뻥 옆에 넣어 둔 서류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겉봉에 「⁠진정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넣을 때 됐죠⁠?⁠”

소정이 대답하기 전에 유리문이 열렸다⁠.

*

승겸이 상자 하나를 들고 유리방에서 나왔다⁠. 상자 안에 펜 다섯 자루와 서류 세 묶음⁠, 성수 매장 영수증을 끼운 지갑⁠, 회색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회색 목도리는 소정의 것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소정이 돌려받은 목도리와 같은 회색이었고⁠, 끝에 가격표가 아직 붙어 있었다⁠.

인사팀 대리가 따라 나와 코랄색 줄을 내밀었다⁠.

“⁠진 선임님⁠. 소비재팀 소속은 이 색이에요⁠.⁠”

대리는 「⁠본부장님⁠」이라고 할 뻔하다 「⁠선임님⁠」이라고 고쳤다⁠. 승겸은 남색 줄을 벗어 대리 손바닥에 올리고 코랄색 줄을 받았다⁠. 목에 걸었다⁠. 줄이 한 번 꼬였다⁠. 승겸은 줄을 바로 펴지 않았다⁠.

승겸이 걸어왔다⁠. 사무실 한가운데를 지나 복합기 옆 기둥 앞까지⁠. 걸음이 1월 4일 아침 소정의 걸음과 같은 수였다⁠. 두찬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의자를 비켰다⁠.

“⁠본부장님⁠, 여기 앉으세요⁠.⁠”

“⁠선임입니다⁠.⁠”

“⁠아⁠, 네⁠. 선임님⁠. 상자 주세요⁠. 들어 드릴게요⁠.⁠”

두찬이 상자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제 쌍둥이 둘보다 가벼워요⁠.⁠”

“⁠일 년 치입니다⁠.⁠”

“⁠저 일 년 치 쌍둥이는 십일 킬로였는데요⁠.⁠”

승겸이 웃었다⁠. 상자를 기둥 앞 책상에 내려놓았다⁠. 복합기가 마침 누군가의 출력을 뱉으며 더운 바람을 뿜었다⁠. 바람이 승겸의 등에 닿았다⁠. 승겸은 놀란 듯 등을 한 번 펴더니⁠, 천천히 기둥에 등을 기댔다⁠.

“⁠등이 따뜻하네요⁠.⁠”

“⁠온열 좌석이에요⁠. 다들 그렇게 불러요⁠.⁠”

소정이 말했다⁠. 승겸은 안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저장 장치를 꺼내 소정의 손바닥에 올렸다⁠. 저장 장치는 승겸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일 년 전 메일 원본입니다⁠. 부사장님 지시요⁠. 「⁠조직 개편 형식으로 처리할 것⁠」⁠”

“⁠이거 주면 본부장님은요⁠?⁠”

“⁠선임입니다⁠. 그리고 이미 됐습니다⁠.⁠”

“⁠앙심 품고 흘린 메일로 읽힐 거라면서요⁠. 부사장님이⁠.⁠”

“⁠그렇게 읽히겠죠⁠. 제가 혼자 내면요⁠.⁠”

승겸이 소정을 보았다⁠. 안경알에 창밖 하늘이 하얗게 비쳤다⁠. 1월 4일 아침과 같은 하늘이었다⁠.

“⁠표 수석님이 내시면 다르게 읽힙니다⁠. 각주부터 읽는 사람이 낸 거니까요⁠.⁠”

*

저녁 일곱 시⁠, 마포 엄마 집 거실에서 엄마는 왼손 깁스를 소정 앞에 내밀었다⁠. 하얀 석고 위에 라윤이 그린 종이학과 「⁠할머니 빨리 나아⁠」가 벌써 적혀 있었다⁠.

“⁠이기고 와서 이름 써 준다며⁠. 이겼니⁠?⁠”

“⁠아직⁠. 엄마⁠, 나 대기발령 받았어⁠.⁠”

“⁠그게 뭔데⁠? 잘린 거야⁠?⁠”

“⁠아직 안 잘렸어⁠. 잘리기 전에 기다리는 거⁠.⁠”

엄마는 깁스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소정은 엄마가 「⁠그러게 팀장 받으라고 했잖아⁠」라고 말할 줄 알았다⁠. 엄마는 다른 말을 했다⁠.

“⁠너 아빠 닮았다고 했지⁠. 남 걱정하다 제 무릎 나가는 거⁠. 근데 너 아빠는 끝까지 걱정만 했어⁠. 너는 뭐 하는 거 있니⁠?⁠”

“⁠있어⁠. 10일에 35층 올라가⁠.⁠”

“⁠그럼 써⁠.⁠”

엄마가 매직을 내밀었다⁠. 소정은 깁스 위⁠, 라윤의 종이학 옆에 썼다⁠. 「⁠표소정 이김(⁠10일 예정⁠)⁠」 엄마가 글씨를 보더니 웃었다⁠.

“⁠예정은 왜 써⁠? 그냥 이겼다고 써⁠.⁠”

“⁠엄마⁠, 숫자는 맞아야 돼⁠.⁠”

“⁠얘는⁠. 너 글씨 또 오른쪽으로 눕는다⁠.⁠”

라윤이 방에서 나와 깁스를 들여다보더니 소정의 글씨 밑에 작게 덧붙였다⁠. 「⁠엄마 천천히 걸어⁠」 ‘⁠ㄹ⁠’이 꼬불꼬불했다⁠.

*

밤 아홉 시⁠, 소정은 노트 파일을 챙기러 다시 28층에 올라왔다⁠. 8일부터는 문이 열리지 않을 터였다⁠. 사무실에는 불이 세 군데 켜져 있었다⁠. 기둥 앞에서는 승겸이 상자를 아직 반도 풀지 못하고 펜 다섯 자루를 책상에 눕히고 있었다⁠. 두찬은 쌍둥이 재울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정서 봉투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유리방에 솔미가 있었다⁠. 소비재팀장 겸 옛 본부 업무를 이어받은 사람의 첫날 밤이었다⁠. 솔미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둘러보다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멈췄다⁠.

화이트보드 한쪽 귀퉁이에 라윤의 그림이 남아 있었다⁠. 창가의 단발머리 사람⁠, 기둥 옆의 안경 쓴 사람⁠, 둘 사이의 줄 하나⁠, 받침이 거꾸로 붙은 「⁠반⁠」 승겸이 한 달 동안 지우지 않은 그림이었다⁠.

솔미는 보드 지우개를 들었다⁠.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유리벽 너머에서 소정은 솔미의 손을 보았다⁠. 지우개를 쥔 손가락이 하얬다⁠.

솔미는 지우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기둥 앞으로 걸어왔다⁠. 소정 앞에서 멈췄다⁠. 승겸과 두찬이 숨을 죽였다⁠.

“⁠선배⁠. 대기발령 받아들이실 거예요⁠?⁠”

“⁠아니⁠.⁠”

“⁠그럼요⁠?⁠”

소정은 손바닥의 저장 장치를 쥐었다⁠. 따뜻했다⁠.

“⁠10일에 35층 올라갈 거야⁠. 출입 권한은 8일에 막히고⁠.⁠”

솔미가 소정의 손을 보았다⁠. 무엇을 쥐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솔미의 남색 줄이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오르내렸다⁠.

“⁠선배⁠. 그 노트 두 장⁠, 제가 일부러 뺐어요⁠.⁠”

복합기가 출력을 멈췄다⁠. 사무실이 한순간 조용했다⁠.

“⁠알아⁠. 종이가 안 휘었더라⁠.⁠”

“⁠그 두 장은 선배가 콜에서 이긴 거잖아요⁠. 처남 각주⁠. 그건 선배 눈이라서요⁠. 글씨는 줘도 눈은 못 주겠더라고요⁠.⁠”

“⁠그럼 나머지는 왜 줬어⁠?⁠”

솔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대신 사원증 줄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각서 받았어요⁠. 2년 보장⁠. 근데 부사장님 서명이 아직 안 들어왔어요⁠. 이사회 끝나면 해 주신대요⁠.⁠”

“⁠이사회 끝나면⁠.⁠”

“⁠아무튼요⁠. 저 아직 부사장님 편이에요⁠. 각서 때문에요⁠. 그 그림은 못 지우겠지만요⁠.⁠”

솔미는 돌아서 유리방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1월 아침 비상계단에서보다 느렸다⁠. 기둥 앞에서 승겸이 펜 다섯 자루를 길이 순서로 눕히다 손을 멈췄고⁠, 두찬은 진정서 봉투를 서랍에 도로 넣지 못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솔미는 유리방에 들어가 화이트보드 앞에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지우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라윤의 「⁠반⁠」 글씨 옆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서 있었다⁠. 거꾸로 붙은 받침이 솔미의 손바닥 밑에 가려졌다가⁠, 손을 떼자 다시 드러났다⁠.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기둥 옆 자리 ·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