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50자)

육백칠십 걸음

접근금지 백 미터 · 하윤슬

2028년 5월 12일 금요일 새벽 열두 시 오십팔 분⁠, 배성진은 안양 비산동 언덕 위 아파트 담장 끝에 서서 휴대전화 지도를 보고 있었다⁠.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동그라미는 없었다⁠. 동그라미는 성진의 머릿속에 있었다⁠. 청우빌라 정문에서 오백 미터⁠, 계단길 백여덟 칸 위 언덕 너머 버스 정류장을 지나 아파트 담장이 끝나는 자리⁠. 성진은 담장 끝 보도블록에서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발목의 검은 장치는 아직 조용했다⁠. 보랏빛 남색 조끼는 2주 전에 점주에게 돌려주었다⁠. 회색 후드티 소매 끝의 풀린 실밥이 바람에 흔들렸다⁠.

박달동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이십팔 분이었다⁠. 반지하 방을 나설 때 성진은 이불 위에 종이 한 장을 두고 나왔다⁠. 오백 미터⁠, 육백칠십 걸음⁠, 한 시 십일 분⁠. 지난밤 성진은 비산동 큰길 끝에서 언덕까지 오백 미터를 실제로 걸어 보았다⁠. 오백 미터 원 밖의 길이었다⁠. 걸음 수를 세며 걸었고⁠, 육백칠십에서 멈췄다⁠. 같은 걸음으로 원 안을 걸으면 한 시 사 분에 출발해 한 시 십일 분에 정문에 닿았다⁠. 성진은 그것을 약속 시각에 맞추는 일이라고 불렀다⁠.

후드티 주머니에 박카스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유리병이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차가웠다⁠. 병목에 고무줄로 쪽지를 감아 두었다⁠. 「⁠이제 오백 미터예요⁠. 괜찮아요⁠.⁠」 이 년 반 전 현관 손잡이에 매단 쪽지와 같은 끝말이었다⁠. 성진은 같은 끝말을 일부러 골랐다⁠. 약사님이 기억할 말이었다⁠.

열두 시 오십구 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성진은 세 번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받았다⁠.

“⁠성진아⁠, 어디야⁠? 너 지금 어디 있어⁠?⁠”

“⁠엄마⁠, 약 먹었어⁠?⁠”

“⁠약 얘기 하지 마⁠. 너 그 아가씨 집 쪽이지⁠? 엄마가 다 알아⁠. 엄마가 주임님한테 말했어⁠. 관제센터 주임님한테⁠. 엄마가 말했어⁠, 성진아⁠.⁠”

엄마의 숨이 가빴다⁠. 투석 다음 날의 숨이었다⁠. 성진은 담장 끝 보도블록의 금을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말했다는 말이 귀에서 한 번 튕겨 나갔다가 돌아왔다⁠.

“⁠엄마⁠, 나 금방 와⁠. 약속만 지키고 와⁠. 이번이 마지막이야⁠. 오해만 풀고⁠.⁠”

“⁠무슨 약속⁠? 그 아가씨는 너랑 약속한 적 없어⁠. 엄마가 판결문 다 읽었어⁠. 그 아가씨는 너한테 오지 말라는 말밖에 안 했어⁠. 열네 번 길 바꾸고 일곱 번 문 번호 바꿨어⁠. 그게 그 아가씨 대답이야⁠. 성진아⁠, 돌아와⁠. 엄마가 버스 정류장에 나가 있을게⁠. 너 어릴 때처럼⁠.⁠”

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귀에서 뗐다⁠. 화면 속 통화 시간이 「⁠00⁠:48⁠」에서 「⁠00⁠:49⁠」로 넘어갔다⁠. 엄마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성진아⁠, 성진아⁠. 성진은 통화 종료를 눌렀다⁠. 한 시 사 분까지 오 분이 남아 있었다⁠. 성진은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성진이 잘하는 일이었다⁠.

*

한 시 사 분⁠, 성진은 담장 끝 보도블록을 넘었다⁠.

한 걸음⁠. 발바닥이 원 안에 닿았다⁠. 무엇이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백 미터 안에 처음 발을 디딘 3월 밤과 같은 서늘함이었다⁠. 성진은 입술만 움직여 셌다⁠. 하나⁠, 둘⁠, 셋⁠. 열을 넘었다⁠. 열하나⁠, 열둘⁠. 열을 넘기고도 성진은 멈추지 않았다⁠. 숫자가 처음으로 성진을 막지 않았다⁠. 스물에서 발목의 장치가 짧게 진동했다⁠. 서른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아니었다⁠. 관제센터 번호였다⁠. 성진은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받지 않았다⁠. 세 번째에 성진은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과천 관제실 화면에 지금 무엇이 떴을지 성진은 알았다⁠. 빨간 창⁠, 짧은 경보음 세 번⁠, 수화기를 드는 손⁠. 파란 줄을 목에 건 남자는 이제 관제실 의자에 없었다⁠. 토론회에 다녀온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성진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백 걸음까지 엄마의 번호와 관제센터 번호가 번갈아 떴다가 꺼진 화면 안으로 사라졌다⁠.

언덕 너머 버스 정류장을 지났다⁠. 약사님이 퇴근길에 내리는 정류장이었다⁠. 계단길 위 끝에 닿았다⁠. 가로등 세 개 가운데 하나가 아직 나가 있었다⁠. 성진은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백여덟 칸⁠. 약사님이 밤마다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내려가던 계단이었다⁠. 칠 분 걸리는 길을 이십오 분 돌아서 걷던 길⁠. 성진은 처음으로 계단길을 걸었다⁠.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약사님의 발이 놓였던 자리를 밟는다고 생각했다⁠. 예순하나⁠, 예순둘⁠. 약사님의 이십오 분은 성진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고⁠, 성진은 아직 그렇게 읽고 있었다⁠. 학원가 정류장에서 약사님이 한 말이 계단마다 따라왔다⁠. 제 시간을 가져갔어요⁠. 제 퇴근길이랑 제 잠이랑 제 이름이요⁠. 성진은 약사님의 말을 고쳐 읽으려 했다⁠. 가져간 것이 아니라 함께 쓴 시간이라고⁠. 고쳐 읽은 문장은 계단 세 칸을 못 버티고 원래 문장으로 돌아왔다⁠. 성진은 다시 고쳤다⁠. 다시 돌아왔다⁠.

계단 중간쯤에서 성진의 발이 한 번 미끄러졌다⁠. 저녁에 내린 비로 계단 모서리가 젖어 있었고⁠, 젖은 나뭇잎이 칸마다 몇 장씩 붙어 있었다⁠.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쇠 난간이 차가웠다⁠. 난간 기둥에 무엇이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작은 손전등이었다⁠. 누가 계단 중간에 손전등을 감아 둔 것이었다⁠. 꺼진 가로등 대신⁠. 성진은 손전등을 보며 그것을 감은 손을 떠올렸다⁠. 이십오 분을 걷던 사람이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감아 둔 손전등이었다⁠. 성진의 발이 잠깐 멈췄다⁠. 멈춘 발은 다시 움직였다⁠. 백여덟⁠.

계단 아래로 골목 위 끝이 내려다보였다⁠. 청우빌라 정문⁠, 정문 위 2층 왼쪽 창⁠.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블라인드가 끝까지 올라가 있었고⁠, 흰 레이스 커튼이 옆으로 묶여 있었다⁠. 창 안에 사람이 서 있었다⁠. 약사님이었다⁠. 약사님은 숨지 않고 서 있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화면을 성진에게 향하고 있었다⁠. 왼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성진은 정문을 향해 걸었다⁠. 육백육십⁠, 육백육십오⁠. 정문 앞 빨간 십자는 화면 속에만 있었다⁠. 아스팔트에는 아무것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성진은 주머니에서 박카스를 꺼냈다⁠. 쪽지가 병목에서 펄럭였다⁠. 한 시 십일 분이었다⁠.

*

골목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왔다⁠. 뛰는 발소리였다⁠. 성진은 고개를 돌렸다⁠. 큰길 모퉁이 밝은마트 불빛을 등지고 키 큰 남자가 골목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남색 점퍼가 펄럭였다⁠. 경차 두 대⁠, 전봇대 세 개⁠, 대문 여섯 개⁠. 벚나무 아래를 지날 때 남자의 어깨에 젖은 잎이 스쳤다⁠. 남자는 성진과 정문 사이로 뛰어들어 멈췄다⁠. 숨이 거칠었다⁠. 목에 파란 줄이 없었다⁠. 하동욱이었다⁠.

“⁠배성진 씨⁠. 여기서 멈추십시오⁠.⁠”

동욱은 두 팔을 벌리지 않았다⁠. 정문을 등지고 서서 두 손을 몸 옆에 내리고 있었다⁠. 성진과 동욱 사이는 한 걸음이었다⁠.

“⁠비키세요⁠. 약사님한테 이것만 드리고 가요⁠.⁠”

“⁠못 드립니다⁠. 지금 계신 곳은 오백 미터 안입니다⁠. 경보가 울렸습니다⁠. 경찰과 신속수사팀이 오고 있습니다⁠.⁠”

“⁠주임님이 왜 여기 있어요⁠? 주임님은 이제 관제센터 사람도 아니잖아요⁠.⁠”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있습니다⁠.⁠”

성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골목 맞은편 다세대 2층 창에 불이 켜졌다⁠. 청우빌라 3층 창에도 불이 들어왔다⁠. 누가 창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가 다시 닫혔다⁠.

성진은 동욱을 밀었다⁠. 박카스를 쥔 손으로 동욱의 가슴을 밀었다⁠. 동욱은 뒤로 반 걸음 밀렸다가 발을 버텼다⁠. 정문 철문이 동욱의 등에 닿아 덜컹 소리를 냈다⁠. 성진은 다시 밀었다⁠. 이번에는 어깨로 밀었다⁠. 동욱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고⁠, 뿔테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 아스팔트에 부딪쳤다⁠. 안경알 한쪽이 금 가는 소리가 났다⁠. 동욱은 안경을 줍지 않았다⁠. 정문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약속이에요⁠. 한 시 십일 분에⁠. 약사님도 깨어 있잖아요⁠. 저기 서 있잖아요⁠. 이 년 반 동안 깨어 있었어요⁠. 저를 기다린 거예요⁠.⁠”

“⁠성진 씨⁠, 위를 보십시오⁠.⁠”

성진은 위를 보았다⁠.

2층 창 안의 약사님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레이스 커튼을 묶은 끈이 창틀에서 흔들렸다⁠. 약사님의 왼 손목에서 작은 불빛이 깜박였다⁠. 스마트워치의 신고 버튼이 눌려 있었다⁠. 약사님의 얼굴은 성진이 머릿속에서 고쳐 온 얼굴이 아니었다⁠. 놀란 얼굴도⁠, 알아들은 얼굴도 아니었다⁠. 무서워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성진을 끝까지 찍고 있는 얼굴이었다⁠. 증거를 남기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성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박카스가 미끄러져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유리병이 깨지지 않고 굴렀다⁠. 금 간 안경 옆에서 멈췄다⁠. 쪽지가 병목에서 풀려 아스팔트 위로 펼쳐졌다⁠. 「⁠이제 오백 미터예요⁠. 괜찮아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쪽지의 글씨가 읽혔다⁠. 성진은 자기 글씨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누가 괜찮은 것인지 성진은 쪽지 앞에서 처음 물었다⁠.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답할 사람이 창 안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골목 아래에서 빨간 불빛과 파란 불빛이 번갈아 올라왔다⁠. 순찰차 한 대가 골목 입구를 막고 멈췄고⁠, 두 번째 차가 큰길에 붙었다⁠. 경찰 둘이 뛰어 올라왔다⁠. 앞선 사람은 3월 31일 새벽에 이 빌라에 왔던 젊은 순경이었다⁠. 순경은 성진의 이름을 불렀고⁠, 성진의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

“⁠배성진 씨⁠, 접근금지 준수사항 위반과 스토킹범죄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수갑이 손목에 닿았다⁠. 발목의 장치보다 차가웠다⁠.

“⁠엄마한테 전화해도 돼요⁠? 엄마가 정류장에 나가 있다고 했어요⁠.⁠”

“⁠지구대 가서 하세요⁠. 어머님은 경찰이 연락드릴 거예요⁠.⁠”

순경의 목소리는 반듯했다⁠. 성진은 엄마가 지금 박달동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을 것을 알았다⁠. 투석 다음 날의 숨으로⁠, 털모자를 쓰고⁠, 막차가 끊긴 정류장에서⁠. 어릴 때 성진이 엄마를 기다리던 정류장이었다⁠. 성진은 끌려 내려가며 한 번 고개를 들었다⁠. 2층 창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약사님은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았다⁠. 경차 두 대⁠, 전봇대 세 개⁠, 대문 여섯 개⁠. 벚나무 아래를 지나 문턱 앞⁠, 흐려진 노란 선 위에서 성진의 운동화 끝이 한 번 턱에 채였다⁠. 순경이 성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밝은마트 계산대 안의 대학생이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밖을 보고 있었다⁠. 성진이 서던 포스기 옆이었다⁠.

순찰차 뒷좌석 문이 닫혔다⁠. 차 안에서는 소독약 냄새와 식은 커피 냄새가 났다⁠. 앞좌석 사이 칸막이에 손자국이 여러 겹 남아 있었다⁠. 성진은 수갑 찬 손을 무릎에 올리고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등이 젖어 있었다⁠. 차창 너머로 성진은 골목 위를 보았다⁠. 정문 앞에서 동욱이 몸을 숙여 금 간 안경을 줍고 있었다⁠. 동욱은 박카스 병과 쪽지에는 손대지 않았다⁠. 신속수사팀 차가 큰길에 붙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동욱은 안경을 썼다⁠. 한쪽 알이 하얗게 금 가 있었다⁠. 동욱은 금 간 알 너머로 2층 창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창 안의 약사님이 휴대전화를 내렸다⁠. 화면 녹화가 끝나는 것을⁠, 성진은 순찰차 창 너머 백 미터 아래에서 보았다⁠. 차가 출발했다⁠. 큰길로 꺾기 직전⁠, 성진은 습관처럼 시각을 셌다⁠. 한 시 십구 분이었다⁠. 아무도 구 초를 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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