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71자)

알람

접근금지 백 미터 · 하윤슬

2028년 5월 13일 토요일 오후 두 시⁠, 최소영은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1층 로비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2층 법정 옆 심문실에서 배성진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이 열리고 있었다⁠. 피해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장서희가 소영의 의견서를 들고 들어갔다⁠. 의견서 마지막 줄은 소영이 직접 썼다⁠. 「⁠저는 5월 12일 새벽 한 시 십일 분에도 깨어 있었습니다⁠.⁠」

소영 옆에는 엄마 박정란이 앉아 있었다⁠. 아침 첫 기차로 대전에서 올라왔다⁠. 엄마는 소영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소영의 패딩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쥐고 있었다⁠. 오월 낮에 패딩은 더웠다⁠. 소영은 벗지 않았다⁠. 엄마도 벗으라고 하지 않았다⁠.

로비 유리문이 열리고 회색 털모자를 쓴 작은 여자가 들어왔다⁠. 한경자는 로비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다가 소영을 보았다⁠. 경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로비 반대편 긴 의자 끝에 앉았다⁠. 두 의자 사이는 열 걸음쯤이었다⁠. 엄마가 소영의 소매를 더 세게 쥐었다⁠.

“⁠저 사람이야⁠?⁠”

“⁠응⁠. 그 사람 어머니⁠.⁠”

엄마가 일어났다⁠. 소영이 잡기 전에 엄마는 열 걸음을 걸어가 경자 앞에서 멈췄다⁠. 경자가 고개를 들었다⁠. 두 여자는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댁 아드님 때문에 우리 딸이 두 해 반 동안 집에 못 갔어요⁠. 집에 있어도 못 갔어요⁠. 나는 대전에서 밤마다 전화만 했어요⁠. 우리 딸은 전화를 받으면 계단을 세고 있었어요⁠. 백여덟 칸이요⁠. 그걸 엄마가 전화로 다 들었어요⁠.⁠”

경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털모자 끝이 무릎에 닿을 만큼 숙였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들으러 온 거 아니에요⁠.⁠”

“⁠알아요⁠. 그래도 해야 돼요⁠. 나는 우리 애가 기다리는 애라서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 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애⁠. 그게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몰랐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고요⁠.⁠”

소영이 다가와 엄마 옆에 멈췄다⁠. 경자가 소영을 올려다보았다⁠. 경자는 소영에게 아무것도 내밀지 않았다⁠. 봉투도⁠, 종이도⁠, 약 처방전도⁠.

“⁠약사님⁠, 처벌불원서 그거⁠, 다시는 안 내밀게요⁠. 약국에 두고 온 봉투는 경찰이 증거로 가져갔대요⁠. 우리 애 일은 이제 판사가 정하게 둘게요⁠.⁠”

소영은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 이제 저를 약사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 사람이 부르던 말이에요⁠.⁠”

경자는 입을 다물었다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소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엄마를 보았다⁠.

“⁠따님 이름이 뭐예요⁠?⁠”

“⁠최소영이요⁠.⁠”

엄마가 대답했다⁠. 경자는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 한 번 따라 했다⁠. 최소영⁠. 소영은 자기 이름이 다른 사람 입술에서 처음으로 무섭지 않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저녁 일곱 시 이십 분⁠, 서희의 전화가 왔다⁠. 소영은 엄마와 함께 비산동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에는 엄마가 대전에서 싸 온 반찬통이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영장 발부됐어요⁠. 판사가 재범 우려가 크다고 봤어요⁠. 접근금지 오백 미터 결정 이틀 만에 선을 넘었고⁠, 오백 미터를 걸음으로 재서 시각을 맞춘 종이가 나왔대요⁠. 유치장에서 바로 구치소로 가요⁠.⁠”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소영 씨가 찍은 영상이 제일 컸어요⁠. 창 앞에서 끝까지 찍은 거요⁠. 그건 고마워하지 마세요⁠. 소영 씨가 한 거예요⁠.⁠”

전화를 끊자 엄마가 반찬통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멸치볶음⁠, 장조림⁠, 깻잎⁠, 오이소박이⁠. 엄마는 말없이 밥을 펐다⁠. 소영은 밥을 먹었다⁠. 바나나 반 개가 아닌 밥을 한 공기 다 먹었다⁠. 엄마가 숟가락을 놓고 오래 소영을 보았다⁠. 소영은 빈 밥공기를 들고 일어나 싱크대에 넣었다⁠. 수돗물을 틀자 창밖 골목에서 누가 자전거 벨을 두 번 울리고 지나갔다⁠. 소영은 창을 내다보지 않았다⁠.

*

6월 9일 금요일 오전 열 시⁠, 약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서희의 전화를 받았다⁠. 배성진이 구속 기소되었고⁠, 첫 공판이 7월 둘째 주로 잡혔다고 했다⁠. 증인으로 나가게 되면 가림막을 설치해 달라고 미리 신청할 수 있다고⁠, 영상으로 증언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가림막 없이 할게요⁠.⁠”

“⁠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날 아침에 바꿔도 돼요⁠.⁠”

“⁠바꾸지 않을 거예요⁠. 두 해 전에 가림막 뒤에서 말한 건 판사님만 들었어요⁠. 이번엔 그 사람도 들어야 해요⁠. 제 얼굴로요⁠.⁠”

서희는 잠깐 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게 적어 두겠다고 했다⁠. 버스 창밖으로 평촌 학원가 간판들이 지나갔다⁠.

같은 날 오후 세 시⁠, 동안구청 도로관리 차가 밝은마트 비산점 앞 골목 입구를 막고 멈췄다⁠. 작업복 입은 두 사람이 내려 원판 달린 기계를 들고 문턱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기계가 돌기 시작하자 귀를 긁는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흐려진 노란 선이 아스팔트 가루와 함께 뿌옇게 날렸다⁠. 받침이 다 번진 「⁠접근금지 100m⁠」의 글씨가 한 자씩 갈려 나갔다⁠.

소영은 2층 창이 아닌 골목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셋째 전봇대 옆⁠, 벚나무 그늘이었다⁠. 벚나무는 잎이 짙었다⁠. 꽃이 피던 밤에 소영은 블라인드 틈으로 이 나무를 보았다⁠. 지금은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분리수거함은 문턱에서 한 걸음 바깥으로 옮겨져 있었다⁠. 점주 이정호가 뉴스가 나간 다음 주에 옮겼다⁠. 소영은 정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고⁠, 정호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정호는 오늘 유리문 안에서 팔짱을 끼고 기계가 도는 것을 보았다⁠.

작업자 한 사람이 기계를 멈추고 소영을 돌아보았다⁠.

“⁠여기 칠하신 분이에요⁠? 구청에서 지우고 비용 청구 들어간다는 거 아시죠⁠?⁠”

“⁠알아요⁠. 제가 낼게요⁠.⁠”

“⁠락카라 잘 안 지워져요⁠. 이 정도면 꽤 버틴 거예요⁠.⁠”

작업자는 다시 기계를 켰다⁠. 노란 가루가 마지막으로 날렸다⁠. 문턱 앞 아스팔트는 주변보다 조금 더 밝은 회색이 되었다⁠. 아무것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소영은 회색 자리를 오래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처음으로 비어 보이지 않았다⁠.

*

오후 다섯 시⁠, 새봄약국 유리문이 열리고 하동욱이 들어왔다⁠. 남색 점퍼 대신 회색 후드티만 입었고⁠,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뿔테 안경은 새것이었다⁠. 테가 전보다 조금 두꺼웠다⁠. 금 간 안경은 버리지 않고 원룸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증거물로 사진을 찍어 간 뒤 돌려받은 안경이었다⁠. 동욱은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다가 소영의 차례가 되자 말했다⁠.

“⁠인공눈물 있습니까⁠? 일회용으로⁠.⁠”

“⁠눈 많이 쓰세요⁠?⁠”

“⁠요즘은 낮에 씁니다⁠. 낮에 쓰는 눈이 더 마릅니다⁠.⁠”

소영은 상자를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 하루 네다섯 번⁠. 동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욱은 징계 이야기를 짧게 했다⁠. 정직 두 달⁠. 정직이 끝나면 관제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 했다⁠. 반복 단시간 진입 기준은 시범을 마치고 이달부터 전국에 정식으로 적용된다고 했다⁠. 선 밖에서 같은 사람을 반복해 지켜보는 일을 관제실과 경찰이 함께 보는 방안은 토론회를 연 의원실이 법안에 넣었다고 했다⁠. 법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동욱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다⁠. 소영은 동욱이 숫자를 말할 때마다 모른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들었다⁠.

“⁠윤미숙 계장님은 견책 받으셨답니다⁠. 그리고 한경자 씨를 구청 복지과에 연결해서 투석 가는 날 차량 동행을 신청해 주셨답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그분은 아직 박하사탕 들고 다니세요⁠?⁠”

“⁠두 봉지 들고 다니신답니다⁠. 하나는 대상자용⁠, 하나는 본인용⁠.⁠”

소영은 처음으로 동욱 앞에서 웃었다⁠. 웃음이 짧게 나왔다⁠. 동욱은 안경을 고쳐 쓰며 시선을 피했다⁠. 관제실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박영수 조장은 새 포트를 두 시 정각에만 켠다고 했다⁠. 강민지는 경기 남부 자리에 앉아 점에 별명을 붙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김정우는 여전히 중계를 한다고 했다⁠. 정선 북평의 점은 오늘 새벽에도 네 시에 우사에 갔다고⁠.

동욱이 인공눈물 상자를 점퍼 주머니에 넣으려다 점퍼를 입지 않은 것을 깨닫고 후드티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하동욱 씨⁠.⁠”

동욱이 유리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소영은 계산대 너머에서 말했다⁠.

“⁠고쳐 줘서 고마워요⁠. 만든 사람이⁠.⁠”

동욱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유리문이 닫혔다⁠. 큰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 기둥 옆에 아무도 기대 있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소영은 현관 신발장 앞에 쪼그려 앉아 검은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두 해 반 동안 몇 번 열었다 닫았는지 셀 수 없는 지퍼였다⁠. 오늘은 닫지 않았다⁠. 여권을 꺼내 책상 서랍에 넣었다⁠. 통장을 꺼내 여권 옆에 넣었다⁠. 속옷 세 벌을 꺼내 옷장 서랍에 넣었다⁠. 서랍 안의 다른 속옷들과 섞이자 어느 것이 배낭에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 충전기는 침대 머리맡 콘센트에 꽂았다⁠. 대전 엄마 집 열쇠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소영은 열쇠를 집 열쇠 꾸러미에 끼웠다⁠. 엄마 집 열쇠는 도망칠 때 쓰는 열쇠가 아니게 되었다⁠. 명절에 쓰는 열쇠가 되었다⁠.

배낭 바닥에 영수증 한 장이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2028년 3월 26일⁠, 서울 남부터미널 매점에서 산 생수 한 병⁠. 소영은 대전행 표를 끊지 않았다⁠. 배성진이 집 앞 편의점에 나타나고 열이틀째 되던 일요일⁠, 터미널 매표소 앞까지 갔다가 생수 한 병만 사서 돌아왔던 날이었다⁠. 소영은 영수증을 보고서야 기억했다⁠. 영수증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빈 배낭을 접어 신발장 맨 아래 칸에 넣었다⁠. 신발장 위가 비었다⁠. 소영은 비어 있는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먼지가 배낭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창 앞으로 갔다⁠. 흰 블라인드를 반쯤 내리고⁠, 흰 레이스 커튼을 풀어 내렸다⁠. 날개 틈을 벌리지 않았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도 다른 칸들과 똑같이 닫혀 있었다⁠. 골목 아래 밝은마트의 하얀 불빛이 블라인드 날개 끝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소영은 불빛을 보지 않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시계 앱을 열어 알람을 맞췄다⁠.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두 해 반 동안 맞출 필요가 없던 알람이었다⁠. 몸이 먼저 깼으니까⁠.

소영은 스마트워치를 풀어 충전기 위에 올려놓았다⁠. 반납하러 갈 날은 서희와 의논하기로 했다⁠. 불을 껐다⁠. 눕자 목덜미가 베개에 닿았다⁠. 서늘하지 않았다⁠.

*

알람이 울렸다⁠.

소영은 눈을 떴다⁠. 블라인드 날개 틈으로 아침 햇빛이 가는 줄을 그으며 들어와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오전 여섯 시 사십 분이었다⁠. 소영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화면 위에 새벽 한 시 십일 분은 없었다⁠. 깨지 않은 밤은 숫자를 남기지 않았다⁠.

소영은 일어나 블라인드 끈을 당겼다⁠. 날개가 한꺼번에 올라갔다⁠. 골목 아래 셋째 전봇대 옆 벚나무가 초록 잎을 흔들었다⁠. 밝은마트 문턱 앞 회색 자리 위로 아침 첫 손님이 지나갔다⁠.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영은 세수를 하고⁠, 셔츠를 입고⁠, 가방 하나만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정문을 지나 골목을 아래로 걸었다⁠. 경차 두 대⁠, 전봇대 세 개⁠, 대문 여섯 개⁠. 벚나무 그늘을 지나 문턱 앞 회색 자리를 밟고 큰길로 꺾었다⁠. 정류장까지 칠 분이었다⁠. 소영은 걸음을 세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