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52자)

백오 미터

접근금지 백 미터 · 하윤슬

2028년 5월 1일 월요일 새벽 한 시 십일 분⁠, 최소영은 청우빌라 201호 창 앞에 앉아 있었다⁠. 블라인드는 끝까지 올라가 있었고⁠, 흰 레이스 커튼은 옆으로 묶어 두었다⁠. 골목 아래 밝은마트 계산대에는 처음 보는 대학생이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보랏빛 남색 조끼가 대학생의 어깨에는 컸다⁠.

배성진은 4월 25일부터 밝은마트에 나오지 않았다⁠. 뉴스에 흐리게 지워진 편의점 유리문이 나간 다음 날 점주가 그만 나오라고 했다고⁠, 오수경 경사가 전화로 알려 주었다⁠. 소영은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오래 앉아 있었다⁠. 안도는 오지 않았다⁠. 앱을 열면 빨간 점은 안양 박달동에 있기도 했고⁠, 평촌역 앞에 있기도 했고⁠, 비산동 큰길을 지나가기도 했다⁠. 「⁠피해자와의 거리 약 2⁠.6km⁠」⁠, 「⁠약 900m⁠」⁠, 「⁠약 1⁠.4km⁠」⁠. 계산대에 붙어 있던 점은 백일 미터에 묶여 있었다⁠. 묶인 점이 풀리자 점은 어디에나 있었다⁠.

문턱 앞 노란 선은 다 흐려져 있었다⁠. 구청이 정한 4월 28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지우러 오지 않았다⁠. 받침이 번진 글씨 위로 지난주 벚꽃 잎이 쓸려 와 노랗게 말라붙었다⁠. 소영은 한 시 이십 분에 블라인드를 반만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부터 구 초도 경보가 된다는 동욱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구 초를 세던 사람은 이제 구 초를 쓰지 않았다⁠.

*

5월 2일 화요일 오후 네 시 이십 분⁠, 소영은 새봄약국 앞 계산대에 서 있었다⁠. 휴직하지 않겠다고 말한 지 나흘째였다⁠. 김혜숙 약국장은 소영을 조제실 안쪽 자리로 돌리려다 그만두었고⁠, 소영은 아홉 시 오십 분에 유리문이 열려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으려고 날마다 연습했다⁠. 연습은 절반쯤 되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하동욱이 들어왔다⁠. 남색 점퍼 안에 회색 후드티를 입었고⁠, 뿔테 안경을 썼다⁠. 목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동욱은 대기 의자에 앉지 않고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다가 소영의 차례가 되자 말했다⁠.

“⁠인공눈물 있습니까⁠? 일회용으로⁠.⁠”

“⁠눈 많이 쓰세요⁠?⁠”

“⁠열두 해 썼습니다⁠. 이제 좀 덜 씁니다⁠.⁠”

소영은 진열장에서 일회용 인공눈물 상자를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 하루 네다섯 번⁠, 한 번 쓰고 남은 건 버리세요⁠. 소영은 늘 하던 복약 안내를 했고⁠, 동욱은 늘 듣던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토론회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동욱은 5월 10일 오후 두 시라고⁠, 발언은 한 사람에 오 분이라고⁠, 시계가 화면에 뜬다고 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동욱의 어깨 너머 유리문 밖으로 학원가 큰길이 보였다⁠. 왕복 육 차선⁠, 건너편에 수학학원 간판이 세 층으로 쌓인 건물이 있었다⁠. 건물 입구 옆 버스 정류장 기둥에 남자 하나가 기대 있었다⁠. 회색 후드티⁠, 마른 어깨⁠, 앞으로 숙인 고개⁠. 고개는 약국 유리문에 맞춰져 있었다⁠. 하교한 중학생들이 남자 앞을 지나갔다⁠. 아무도 남자를 보지 않았다⁠.

소영의 손에서 인공눈물 상자가 떨어졌다⁠. 계산대 위에서 한 번 튀어 바닥으로 굴렀다⁠. 동욱이 몸을 숙여 상자를 줍다가 소영의 얼굴을 보고 몸을 돌렸다⁠. 동욱은 유리문 밖을 오래 보지 않았다⁠. 한 번 보고 알았다⁠.

소영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가해자 위치 · 평촌동 · 피해자와의 거리 약 105m⁠」⁠. 숫자는 깜박이지 않았다⁠. 백 미터에서 다섯 미터 바깥이었다⁠. 노란 창도 빨간 창도 뜨지 않을 숫자였다⁠. 오늘부터 바뀐 기준은 선 안으로 반복해 들어오는 사람을 세었다⁠. 선 밖에서 버티는 사람은 여전히 아무도 세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약포지를 세던 손가락이 계산대 유리에 닿아 하얗게 눌렸다⁠. 귀 뒤에서 맥이 뛰었다⁠. 소영의 몸이 먼저 조제실 문을 향했다⁠. 문을 닫고 잠그고 주저앉고 싶었다⁠. 두 해 반 동안 몸은 그렇게 했다⁠. 블라인드 뒤로⁠, 계단길로⁠, 조제실로⁠, 대전 엄마 방으로⁠. 몸이 아는 길은 전부 숨는 길이었다⁠.

조제실 문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소영은 놓았다⁠. 가운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단추 세 개를 다 풀고 가운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지은이 처방전을 든 채 소영을 보았다⁠.

“⁠지은 약사⁠, 계산대 좀 봐 줘⁠. 오 분이면 돼⁠.⁠”

“⁠언니⁠, 어디 가요⁠?⁠”

“⁠건너편⁠.⁠”

동욱이 인공눈물 상자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같이 가 주세요⁠. 대신 말은 제가 해요⁠.⁠”

*

학원가 횡단보도 신호는 사십 초였다⁠. 소영은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건넜다⁠. 동욱은 두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소영은 걸으며 손목의 스마트워치 버튼에 엄지를 얹었다⁠. 누르지 않았다⁠. 건너편 인도에 닿자 성진이 기둥에서 몸을 떼었다⁠. 성진은 다가오는 소영을 보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할 줄 몰랐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을 때의 얼굴이었다⁠.

소영은 성진 앞 두 걸음에서 멈췄다⁠. 법정에서는 가림막이 있었다⁠. 약국에서는 계산대가 있었다⁠. 정류장에서는 버스 창이 있었다⁠. 블라인드 틈으로는 구십구 미터가 있었다⁠. 지금은 두 걸음이었다⁠. 성진의 얼굴은 소영이 기억하는 얼굴보다 말라 있었다⁠. 턱에 면도를 하다 벤 자국이 있었고⁠, 눈 밑이 거뭇했다⁠. 회색 후드티 소매 끝이 실밥이 풀려 있었다⁠. 발목의 장치는 바지 밑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약사님⁠.⁠”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성진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말이 순서대로 나왔다⁠. 오래 고친 말이었다⁠.

“⁠저는 무서우시라고 한 게 아니에요⁠. 지켜 드리려고 한 거예요⁠. 혼자 사시잖아요⁠. 골목도 어둡고요⁠. 우리 엄마도 보셨잖아요⁠. 저 이런 사람이에요⁠. 엄마 약 챙기는 사람이에요⁠. 약사님이 창 열어 주셨을 때 저는 다 풀린 줄⁠—⁠”

“⁠창은 찍으려고 열었어요⁠.⁠”

소영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떨리지 않게 하려고 배에 힘을 주었다⁠. 배에 준 힘이 목소리를 낮게 만들었다⁠.

“⁠배성진 씨⁠. 당신 때문에 저는 퇴근길을 열네 번 바꿨어요⁠. 도어락 번호를 열두 번 바꿨어요⁠. 차를 팔았어요⁠. 칠 분 걸리던 길을 이십오 분 돌아서 다녀요⁠. 택배를 엄마 이름으로 받아요⁠. 현관에 배낭을 싸 놓고 살아요⁠. 오늘도 메고 왔어요⁠. 저는 밤 한 시 십일 분에 깨요⁠. 당신이 감옥에 있던 일 년 반 동안에도 깼어요⁠.⁠”

성진의 눈이 소영의 등 뒤 배낭끈으로 내려갔다⁠. 처음으로 무엇을 본 얼굴이었다⁠. 소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저를 기다린 게 아니에요⁠. 제 시간을 가져갔어요⁠. 제 퇴근길이랑 제 잠이랑 제 이름이요⁠. 당신이 지켰다는 밤마다 저는 아무것도 못 지켰어요⁠.⁠”

“⁠약사님⁠, 저는⁠—⁠”

“⁠지금 이것도 스토킹이에요⁠. 기다리고 지켜보는 거⁠. 법에 그렇게 써 있어요⁠.⁠”

소영은 스마트워치 버튼을 눌렀다⁠. 손목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휴대전화로 112를 눌러 귀에 댔다⁠. 성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정류장 기둥에 닿았다⁠.

“⁠스토킹 피해자예요⁠. 가해자가 지금 제 직장 건너편에 와서 저를 지켜보고 있어요⁠. 평촌 학원가 새봄약국 맞은편 정류장이에요⁠. 전자발찌 찼고⁠, 접근금지 준수사항 있어요⁠. 지금 제 앞에 있어요⁠. 저는 안 다쳤어요⁠.⁠”

전화를 끊자 무릎이 꺾이려 했다⁠. 소영은 무릎에 힘을 주고 서 있었다⁠. 동욱은 소영의 두 걸음 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잡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성진이 동욱을 보았다⁠. 성진의 눈에서 무엇이 확 일었다가 꺼졌다⁠. 동욱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학원 차에서 내린 초등학생들이 세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한 아이가 동욱을 올려다보다가 엄마 손에 끌려갔다⁠.

순찰차는 칠 분 뒤에 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3월 31일 새벽 청우빌라에 왔던 젊은 순경이었다⁠. 순경은 소영을 알아보았다⁠. 조수석의 경위가 수첩을 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직접적인⁠—⁠”

“⁠선배님⁠, 그 질문 말고요⁠.⁠”

순경이 경위의 말을 끊었다⁠. 순경은 성진 앞으로 가서 신분증을 요구하고⁠, 스토킹 행위로 신고가 들어왔으니 지구대로 같이 가 달라고 했다⁠. 성진은 거부하지 않았다⁠. 순찰차 뒷좌석에 타기 전에 성진은 한 번 고개를 돌려 약국 유리문을 보았다⁠. 유리문 안에서 지은이 계산대에 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소영은 성진의 고개가 돌아가는 방향을 끝까지 보았다⁠. 순찰차 문이 닫혔다⁠.

“⁠피해자분도 진술하러 오셔야 해요⁠. 오늘 저녁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국선변호사님이랑 같이 갈게요⁠.⁠”

저녁 일곱 시⁠, 안양동안경찰서 2층 여성청소년수사팀에서 소영은 장서희를 처음 얼굴로 만났다⁠. 서희는 서른 후반이었고⁠, 서류 가방 손잡이에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서희는 소영 옆 의자에 앉아 진술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다⁠. 오수경 경사가 진술서를 출력해 소영 앞에 놓았다⁠.

“⁠오늘 현장 진술이랑 3월 19일부터 사흘 밤 위치 기록⁠, 같이 붙여서 잠정조치 다시 신청했어요⁠. 이번에는 유치까지 넣었어요⁠.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가두는 거요⁠. 법원이 받아 줄지는 몰라요⁠. 지난번하고는 자료가 달라요⁠.⁠”

“⁠업무 중 행위라는 말은 이제 안 나오겠네요⁠.⁠”

서희가 말했다⁠. 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없어졌으니까요⁠.⁠”

소영은 진술서를 한 줄씩 읽고 마지막 장에 이름을 썼다⁠. 글씨가 앞장과 같은 크기였다⁠. 경찰서를 나서자 서희가 정문 앞에서 물었다⁠. 토론회에 이름을 밝힐 거냐고⁠. 소영은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서희는 모르는 것도 대답이라고⁠, 맨 위 줄은 마지막에 써도 된다고 했다⁠.

*

밤 열한 시⁠, 소영은 식탁에 노트북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화면에 토론회 발언문이 떠 있었다⁠. 오 분⁠. 소영은 휴대전화 타이머를 오 분에 맞추고 소리 내어 읽었다⁠. 삼 분 사십 초에 목이 막혔다⁠. 다시 읽었다⁠. 사 분 십 초에 막혔다⁠. 막히는 자리는 같았다⁠. 「⁠저는 밤 한 시 십일 분에 깹니다⁠.⁠」 세 번째 읽을 때는 막히지 않았다⁠.

발언문 맨 위 줄은 비어 있었다⁠. 진호가 보내 준 순서표에는 「⁠피해자 발언(⁠익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얼굴만 보여도 충분히 큰 결정이라고 했다⁠. 엄마는 저녁에 전화해서 울었다⁠. 이름까지 내면 배성진네 식구가⁠, 배성진의 친구가⁠,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혜숙 약국장은 진술하러 경찰서에 가는 소영에게 한 달 휴직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가⁠, 소영의 얼굴을 보고 말을 거두었다⁠.

소영은 커서를 맨 위 줄에 놓았다⁠. 두 해 반 동안 소영의 이름은 성진의 휴대전화 안에⁠, 판결문 안에⁠, 관제센터 화면의 피해자 칸 안에 있었다⁠. 소영이 쓴 적 없는 자리들이었다⁠. 소영의 이름을 소영이 쓰는 자리는 처방전 아래 약사 서명란뿐이었다⁠.

소영은 맨 위 줄에 썼다⁠. 「⁠최소영⁠. 서른세 살⁠. 약사⁠. 안양 비산동에 삽니다⁠.⁠」

비산동까지 쓰고 손을 멈췄다⁠. 동네 이름을 지울까 생각했다⁠. 지우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들어 진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순서표 고쳐 주세요⁠. 익명 빼고 이름 넣어 주세요⁠. 최소영⁠, 약사⁠.⁠」

전송 단추를 누르고 소영은 현관으로 갔다⁠. 신발장 위 검은 배낭은 그대로 있었다⁠. 소영은 배낭을 열지 않았다⁠. 도어락의 빨간 불을 확인하고 걸쇠를 걸었다⁠. 걸쇠를 거는 손이 오늘은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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