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73자)

느릅골

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 마효곤

반원배의 군화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구덩이 바닥에 고인 논물이 발목 높이까지 찼고⁠, 양말이 발가락 사이에서 미끈거렸다⁠. 원배는 구덩이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군화를 벗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젖은 군화는 벗으면 다시 못 신는다⁠. 교육대에서 배운 것 가운데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이 한 줄뿐이었다⁠.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떨었다⁠. 학사장교 동기 단톡방이었다⁠. 동원령이 떨어지고 나서 동기들이 저마다 제 부대 소식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대대 예비군 지금 천 명 넘게 들어옴⁠. 군복 사이즈 없음⁠」 「⁠서울 지하철 1호선 의정부 구간 운행 중단⁠」 「⁠강남 마트 생수 줄 백 미터⁠, 사진 첨부⁠」 사진 속에서 사람들이 생수 묶음을 안고 줄을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운동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같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우리 중대 예비군 중에 아이돌 연습생 출신 있음⁠. 총 받자마자 셀카⁠」라는 글에는 웃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원배도 피식 웃었다가⁠, 웃은 자신이 낯설어 화면을 껐다⁠. 다시 켰을 때 동기 하나가 원배에게 따로 물었다⁠. 「⁠원배 너 연천이지⁠? 거기 괜찮아⁠?⁠」 원배는 「⁠다리 앞⁠」이라고만 쳤다⁠. 동기가 「⁠다리 앞이 어딘데⁠」라고 물었고⁠, 원배는 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파트 방송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래⁠. 엄마 지금 주차장에 있어⁠. 옆집 할머니가 김밥 나눠 줬다⁠. 너는 밥 먹었니⁠」 원배는 「⁠먹었어요⁠」라고 쳤다⁠. 건빵 반 봉지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커피믹스 봉지가 없었다⁠. 하사에게 준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

“⁠소대장님⁠.⁠”

준묵과 홍구가 원배의 구덩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준묵이 마을길 끝을 턱으로 가리켰다⁠. 능선 밑으로 굽어 들어가는 아스팔트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 마른 논과 비닐하우스가 이어졌다⁠.

“⁠느릅골 요양원에 노인 열아홉이 있습니다⁠. 거동 못 하는 분이 여덟입니다⁠. 원장님 한 분하고 홍구 씨 어머님만 남았습니다⁠. 트럭 하나로 두 번이면 실어 옵니다⁠.⁠”

“⁠안 됩니다⁠.⁠”

원배는 바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예⁠, 알겠습니다⁠」가 먼저 나오지 않았다⁠. 원배 자신도 조금 놀랐다⁠.

“⁠작전참모님 명령은 진입로를 지키는 것입니다⁠. 트럭이 빠지면 여기서 걸을 수 없는 분이 오셨을 때 태울 차가 없습니다⁠. 사람이 빠지면 진지가 빕니다⁠. 느릅골은 이 킬로미터 북쪽입니다⁠. 북쪽으로 이 킬로미터입니다⁠.⁠”

“⁠압니다⁠.⁠”

“⁠아시면⁠…⁠”

“⁠여기 앉아서 걸을 수 없는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거잖아요⁠. 거동 못 하는 분 여덟이 이 킬로미터를 어떻게 걸어옵니까⁠?⁠”

원배는 대답이 막혔다⁠. 홍구가 끼어들었다⁠.

“⁠소대장님⁠, 제가 이 길을 다섯 해 몰았어요⁠. 군내버스요⁠. 느릅골 종점에서 전곡까지⁠, 하루 여섯 번⁠. 눈 감고도 가요⁠. 커브가 몇 개인지도 알아요⁠. 열하나예요⁠.⁠”

“⁠사장님⁠, 그건⁠…⁠”

“⁠열하나요⁠. 하나 더 있었는데 군청에서 펴 줬어요⁠.⁠”

원배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손가락이 이번에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남단⁠, 북단입니다⁠. 느릅골 요양원에 노인 열아홉 명 잔류⁠, 차량 없습니다⁠. 북단 트럭으로 이송하겠습니다⁠.⁠”

“⁠느릅골은 사단 피란 계획서에 있어⁠. 요양원 승합차 배정돼 있다⁠.⁠”

“⁠승합차는 아침에 직원들이 타고 나갔습니다⁠.⁠”

무전기 너머가 짧게 비었다⁠.

“⁠북단 인원은 진입로를 떠나지 마⁠. 느릅골은 군청에 다시 요청한다⁠.⁠”

“⁠군청에서 언제⁠…⁠”

“⁠반 소위⁠. 진입로⁠.⁠”

원배는 송수화기를 내렸다⁠. 준묵이 원배를 보았다⁠. 원배는 준묵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들으셨습니다⁠. 진입로를 떠나지 말랍니다⁠.⁠”

준묵은 화를 내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구덩이로 돌아갔다⁠. 홍구는 돌아가지 않았다⁠. 마을길 끝을 보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스피커에서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새어 나왔다⁠.

“⁠홍구야⁠, 엄마 바빠⁠. 할머니들 점심 설거지 하고 있어⁠.⁠”

“⁠엄마⁠, 지금 설거지가 문제가 아니야⁠!⁠”

“⁠설거지가 문제야⁠. 그릇 담가 두면 저녁에 냄새나⁠.⁠”

“⁠저녁에 거기 없을 거라고⁠!⁠”

“⁠그럼 더 해 놓고 가야지⁠. 다음 사람 쓰게⁠.⁠”

통화가 끊겼다⁠. 홍구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원배는 출석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세 시 오십 분⁠, 다리 위로 사람들이 건너오고 있었다⁠. 원배가 먼저 보았다⁠. 남단에서 북단으로⁠, 얼룩무늬 전투복 열몇이 두 줄로 걸어왔다⁠. 삽을 멘 사람⁠, 생수 묶음을 안은 사람⁠, 건빵 상자를 이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맨 앞에서 곽시훈이 운동화 한 짝을 끈으로 묶어 목에 건 덩치 큰 사람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예비군들이 구덩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누가 “⁠야⁠, 시훈이다⁠!⁠” 하고 외쳤다⁠. 북단 진지에서 휘파람이 터졌다⁠.

시훈 일행이 정지선 앞에 멈췄다⁠. 열세 명이었다⁠. 원배는 정지선 이쪽에서 열세 명을 마주 보았다⁠. 정오에 이 선을 넘어간 얼굴들이었다⁠.

“⁠여기 왜 오셨습니까⁠?⁠”

“⁠작전참모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단에 있으면 여섯 시에 건너올 사람 하나 줄어든다고⁠.⁠”

시훈이 생수 묶음을 정지선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요⁠, 같이 건너오면 되잖아요⁠. 여섯 시에 같이⁠.⁠”

원배는 시훈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바로 알 수 없었다⁠. 틀린 것 같은데 틀린 데를 짚을 수가 없었다⁠. 덩치 큰 예비군이 운동화를 목에서 벗기며 끼어들었다⁠.

“⁠소대장님⁠, 저는 그냥 남단 둑 파는 게 싫어서 왔어요⁠. 거기 흙이 돌이에요⁠.⁠”

“⁠여기 흙은 물입니다⁠.⁠”

“⁠그럼 물이 낫죠⁠.⁠”

“⁠작전참모님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열세 명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시훈이 머리를 긁었다⁠.

“⁠…안 물어봤어요⁠.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하실 거라서⁠.⁠”

준묵이 구덩이에서 올라와 시훈 앞으로 갔다⁠. 시훈이 움찔했다⁠. 준묵은 시훈의 손바닥을 보았다⁠. 물집이 터진 자리가 빨갰다⁠.

“⁠걸어갔다 왔어⁠?⁠”

“⁠전곡까지요⁠. 검문소에서 잡혔어요⁠. 동원령이래요⁠.⁠”

“⁠집엔 연락했어⁠?⁠”

“⁠엄마한테 했어요⁠. 엄마가 왜 다시 가냐고⁠, 미쳤냐고 했어요⁠.⁠”

“⁠뭐라고 했어⁠?⁠”

“⁠드라마에서는 꼭 돌아온 놈이 산다고 했어요⁠.⁠”

“⁠그런 드라마 있어⁠?⁠”

“⁠없어요⁠. 제가 처음 하려고요⁠.⁠”

준묵이 웃었다⁠. 정오에 정지선 앞에서 자기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웃음이었다⁠. 원배는 둘을 보다가 출석부를 폈다⁠. 맨 아래 칸에 열세 줄을 그었다⁠. 이름을 받아 적는 동안 손이 떨리지 않았다⁠. 다 적고 나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남단⁠, 북단입니다⁠. 남단 예비군 열세 명이 북단으로 건너왔습니다⁠. 북단 잔류 쉰여섯입니다⁠.⁠”

이번에는 무전기 너머가 길게 비었다⁠. 원배는 기다렸다⁠. 바람 소리⁠, 지직거리는 소리⁠, 멀리서 포 소리⁠. 작전참모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알았다⁠.⁠”

그것뿐이었다⁠. 원배는 송수화기를 내리고 숨을 내쉬었다⁠. 쉰여섯이었다⁠. 쉰여섯이면⁠, 진지를 비우지 않고도 트럭에 사람을 태울 수 있었다⁠.

*

원배는 준묵의 구덩이로 걸어갔다⁠. 준묵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네⁠?⁠”

“⁠느릅골이요⁠. 지휘관이 직접 가면 진지 이탈이 아니라 수색입니다⁠. 하사가 진지를 맡습니다⁠. 저하고 인 분대장님하고 탁 사장님⁠, 운전은 사장님이 하시고⁠, 시훈 씨하고 일병⁠, 그리고 넷 더⁠. 아홉입니다⁠. 사십 분 안에 돌아옵니다⁠.⁠”

원배는 말을 빠르게 쏟았다⁠. 빠르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가 다시 입에서 튀어나올 터였다⁠. 준묵이 원배를 한참 보았다⁠.

“⁠소대장님⁠, 그거 지금 지어낸 말이죠⁠? 수색⁠.⁠”

“⁠…예⁠. 방금 지어냈습니다⁠.⁠”

“⁠좋네요⁠.⁠”

준묵이 구덩이에서 올라왔다⁠. 하사가 어깨 화기를 멘 채 다가와 원배에게 경례했다⁠. 원배는 하사에게 진지를 맡긴다고 말했다⁠. 하사는 “⁠사십 분이요⁠”라고만 했다⁠.

홍구가 벌써 트럭 운전석에 올라 있었다⁠. 시동은 두 번 만에 붙었다⁠. 배기관이 검은 연기를 토했다⁠. 홍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객님들⁠, 느릅골행 직행 출발합니다⁠. 안전띠 없습니다⁠. 꽉 잡으세요⁠.⁠”

*

느릅골 가는 길은 홍구의 말대로 커브가 열하나였다⁠. 원배는 짐칸 난간을 붙잡고 하나씩 세었다⁠. 일곱 번째 커브에서 버려진 승용차 한 대가 길을 반쯤 막고 있었다⁠. 홍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길가 논두렁으로 바퀴 하나를 걸쳐 돌아 나갔다⁠. 짐칸의 예비군들이 한쪽으로 쏠렸다가 돌아왔다⁠. 시훈이 비명을 질렀다⁠.

“⁠사장님⁠, 이거 군내버스 아니잖아요⁠!⁠”

“⁠군내버스는 더 크게 돌아⁠. 이건 작아서 쉬워⁠.⁠”

마을은 비어 있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려 있었고⁠, 마당에서 개 몇 마리가 줄에 묶인 채 짖었다⁠. 장독대 뚜껑이 열린 집이 보였다⁠. 준묵이 장독 뚜껑 열린 집을 오래 돌아보았다⁠. 다리 앞에서 사탕을 쥐여 준 할머니의 집인지 원배는 알 수 없었다⁠.

요양원은 마을 끝 비탈 위의 이 층 건물이었다⁠. 앞마당에 흰 국화 화분이 줄지어 있었다⁠. 트럭이 마당에 멈추자 현관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나왔다⁠. 짧은 파마머리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홍구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엄마⁠!⁠”

“⁠너 왜 왔어⁠? 가게는⁠?⁠”

“⁠가게가 문제야⁠?⁠”

“⁠가게가 문제지⁠. 육수는 불 껐니⁠?⁠”

모자의 목소리가 마당에서 부딪쳤다⁠. 원배는 둘 사이를 지나 현관으로 들어갔다⁠. 식당에 노인들이 긴 탁자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넷⁠, 보행기 셋⁠, 나머지는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식판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원장이라는 예순 넘은 남자가 원배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손이 축축했다⁠.

휠체어에 앉은 할아버지 하나가 원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귀가 어두운지 목소리가 컸다⁠.

“⁠소위님⁠, 몇 살이오⁠?⁠”

“⁠스물다섯입니다⁠.⁠”

“⁠내가 처음 피란 갈 때 일곱 살이었소⁠. 이 길로 내려갔지⁠. 저 다리 없을 때⁠. 나룻배 탔어⁠.⁠”

할아버지는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이번엔 다리로 가네⁠. 출세했어⁠.⁠”

옆자리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식판을 톡톡 두드렸다⁠.

“⁠영감⁠, 소위님 바쁘셔⁠. 소위님⁠, 우리 틀니 컵 챙겨야 돼요⁠. 그거 없으면 내일 아침 못 먹어⁠.⁠”

“⁠챙기겠습니다⁠.⁠”

원배는 대답부터 하고 나서⁠, 이번 대답은 정말 지킬 수 있는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장이 웃으며 틀니 컵을 모은 바구니를 가리켰다⁠. 원배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능선을 보아야 했다⁠.

옥상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다⁠. 흰 수건과 환자복이 바람에 펄럭였다⁠. 원배는 빨래 사이를 지나 난간을 잡았다⁠. 느릅골 뒤 능선이 가까웠다⁠. 능선 너머로 길 하나가 구불구불 넘어가 있었다⁠.

길 위에 먼지가 일고 있었다⁠. 흙먼지 기둥이 하나가 아니었다⁠. 셋⁠, 넷⁠, 줄을 지어 능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먼지 기둥 맨 앞에서 무언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차량의 유리였다⁠.

등 뒤에서 빨랫줄의 환자복 하나가 바람에 집게를 놓치고 난간 밖으로 날아갔다⁠. 흰 천이 비탈 아래 국화 화분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원배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손이 다시 떨렸다⁠. 이번에는 떨리는 채로 단추를 눌렀다⁠.

“⁠남단⁠, 북단입니다⁠. 느릅골 북쪽 능선⁠, 차량 행렬 확인⁠. 거리 사 킬로미터⁠. 북쪽 선두로 보입니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느릅골 · 마지막 동원훈련날 포탄이 떨어졌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