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98자)

첫차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금요일 아침 일곱 시⁠, 반필구의 전화가 병곤을 깨웠다⁠.

“⁠나양례 씨가 어젯밤에 깨어나셨어요⁠. 오후에 진술 받으러 가요⁠.⁠” 필구는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선생님은 오시면 안 됩니다⁠. 피의자가 피해자 병실에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사과하러 가는 겁니다⁠.⁠”

“⁠사과하러 간다는 피의자를 제가 몇 명 봤는지 아세요⁠?⁠” 필구는 한 박자 쉬었다⁠. “⁠그리고 위에서 서두르래요⁠. 다음 주에 송치하라고요⁠. 「⁠여벌⁠」 변호사님이 저희 과장님하고 점심을 드셨대요⁠.⁠”

병곤은 전화를 끊고 은행 앱을 열었다⁠. 마이너스 통장에 남은 한도는 오백만 원이었다⁠. 병곤은 오백만 원을 모두 찾아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생각보다 얇았다⁠.

*

성동구 병원 로비는 아침부터 붐볐다⁠. 안내 데스크 옆에 새로 붙은 종이가 있었다⁠. 「⁠대여 신체로 방문하신 보호자는 본인 확인을 위해 신분증과 접속 밴드를 함께 보여 주십시오⁠」 종이 앞에서 스무 살쯤 된 청년이 원무과 직원과 다투고 있었다⁠.

“⁠제가 아버지라니까요⁠. 몸만 아들 거예요⁠. 제 무릎이 안 좋아서 아들 몸 빌려서 계단 올라왔어요⁠.⁠”

“⁠그럼 환자분이 할아버지시고⁠, 보호자분은 아드님이신데⁠, 몸은 손자분이시라는 거죠⁠?⁠”

“⁠네⁠.⁠”

“⁠신분증은 아드님 거고⁠, 얼굴은 손자분 거고요⁠.⁠”

“⁠네⁠!⁠”

원무과 직원이 볼펜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병곤은 청년 옆을 지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청년의 손목에서 초록 불이 깜박였다⁠. 이 나라의 병원은 이미 얼굴을 믿지 않고 있었다⁠. 법만 아직 얼굴을 믿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간호사 하나가 병곤의 얼굴을 보고⁠, 휴대전화를 보고⁠, 다시 병곤의 손목을 봤다⁠. 불이 꺼진 밴드였다⁠.

“⁠몸 주인 맞으세요⁠?⁠”

“⁠제 몸 맞습니다⁠. 이번엔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층 먼저 내렸다⁠. 문이 닫히기 전에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찍었다⁠. 병곤은 거울 벽에 비친 제 정수리를 봤다⁠. 반백이 지난주보다 더 하얬다⁠.

7층 정형외과 병동 복도 끝 병실 앞에 탁주란이 서 있었다⁠. 물류센터 조끼 대신 회색 후드를 입었고⁠, 눈 밑이 검었다⁠. 주란은 병곤을 보자마자 다가와 길을 막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병곤은 봉투를 내밀었다⁠. “⁠간병비에 보태 주십시오⁠.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주란은 봉투를 받아 무게를 가늠하듯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고는 병곤의 가슴에 도로 밀어붙였다⁠. 봉투가 셔츠에 눌려 구겨졌다⁠.

“⁠우리 엄마 다리 하나에 오백이야⁠? 당신 주말 두 번 값이네⁠.⁠”

병곤은 할 말이 없었다⁠. 주란은 오백만 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면서 정확하게 맞혔다⁠.

“⁠주란아⁠.⁠” 병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쉬고 가는 목소리였다⁠.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엄마⁠.⁠”

“⁠아무도 아닌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해⁠. 들어오라고 해⁠.⁠”

*

나양례는 침대 등받이를 반쯤 세우고 누워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허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고정대에 묶여 있었고⁠, 이마에 붕대를 감았다⁠. 창가 탁자에 플라스틱 반찬통이 놓여 있었다⁠. 병원 조리실 동료들이 두고 간 것이라고 주란이 나중에 말했다⁠. 양례는 병곤의 얼굴을 오래 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반찬 간을 볼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 얼굴 맞아요⁠.⁠” 양례가 말했다⁠.

주란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병곤은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생각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다리가 먼저 꺾였다⁠.

“⁠근데 눈이 달라⁠.⁠”

“⁠엄마⁠.⁠”

“⁠가만있어 봐⁠.⁠” 양례는 딸을 손짓으로 막고 병곤을 계속 봤다⁠. “⁠그 새벽에 나 그 차 소리 듣고 돌아봤어요⁠. 그다음은 모르겠고⁠, 바닥에 누워 있는데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났어요⁠. 누가 내려서 내 앞에 와서 섰어요⁠. 가로등 밑이라 얼굴이 잘 보였지⁠. 이 얼굴이었어요⁠. 이 안경⁠. 근데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사람 내려다보는 데 아주 익숙한 눈이었어⁠. 우리 병원 높은 분들이 조리실 내려와서 우리 볼 때 그런 눈이 돼요⁠.⁠” 양례는 숨을 골랐다⁠. “⁠당신은 지금 나를 올려다보고 있잖아⁠.⁠”

병곤은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있었다⁠. 침대가 높아서 양례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어허⁠, 이거 큰일이네⁠.⁠” 양례가 또박또박 따라 했다⁠. “⁠딱 그렇게⁠. 어허⁠, 하고 혀를 차고⁠. 이거 큰일이네⁠. 그러고는 손목을 들여다봤어요⁠. 손목에서 초록 불이 깜박였어⁠. 신호등인 줄 알았는데 신호등은 빨간불이었거든⁠. 그러고는 그냥 갔어요⁠. 나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주란이 창가로 걸어가 등을 돌렸다⁠. 어깨가 떨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 다시 알아보시겠습니까⁠?⁠”

“⁠그 말투는 알지⁠. 사십 년 동안 조리실에서 별사람 다 봤어⁠. 말투는 안 바뀌어요⁠. 얼굴은 바뀌어도⁠.⁠” 양례는 병곤의 무릎을 내려다봤다⁠. “⁠일어나요⁠. 바닥 차요⁠. 우리 병원 바닥 걸레질 아침에 한 번밖에 안 해⁠.⁠”

병곤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례가 혀를 찼다⁠. 어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쯧⁠, 하는 짧은 소리였다⁠.

“⁠당신이 아니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뭐 해요⁠?⁠”

“⁠찾고 있습니다⁠.⁠”

“⁠찾으면 데려와요⁠. 나 그 얼굴 보고 싶어⁠. 진짜 얼굴⁠.⁠” 양례는 창가의 딸을 봤다⁠. “⁠그리고 우리 주란이 일하는 데 그만 오라 그래⁠. 얘 야간인데 낮에도 여기 있어⁠.⁠”

*

오후 두 시⁠, 반필구가 병실에서 진술을 받는 동안 병곤은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필구는 병곤을 보고 한숨을 쉬었지만 내쫓지는 않았다⁠. 진술이 끝나고 나온 필구가 수첩을 덮으며 병곤 옆에 앉았다⁠.

“⁠어허⁠, 이거 큰일이네⁠.⁠” 필구가 낮게 따라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니까 하나도 안 무섭네요⁠.⁠”

“⁠차 영상에서 쓰던 자네하고 같은 사람 말투입니다⁠.⁠”

“⁠같은 사람인지는 판사가 정해요⁠. 저는 적어 놓을 뿐이고⁠.⁠” 필구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선생님⁠. 피해자분은 선생님 얼굴이 맞다고 하셨어요⁠. 진술서 첫 줄이에요⁠. 눈이 다르다는 건 세 번째 줄이고요⁠. 검사는 첫 줄만 읽어요⁠.⁠”

세 시 조금 넘어 서휴가 보온 도시락 가방을 들고 복도에 나타났다⁠. 병곤을 보고 눈썹을 한 번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휴는 병실 문 앞의 주란에게 곧장 갔다⁠.

“⁠길병곤 씨 처입니다⁠. 녹두죽 쒀 왔어요⁠. 드시든 버리시든 하세요⁠.⁠”

주란은 도시락 가방을 받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서휴를 봤다⁠. 서휴는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고 주란의 어깨를 한 번 훑어봤다⁠.

“⁠왼쪽 어깨만 올라가 있네요⁠. 상자를 왼손으로 받으시죠⁠? 물류센터 야간이시라고 들었어요⁠.⁠”

“⁠…⁠…그건 왜요⁠?⁠”

“⁠그렇게 한 해만 더 하시면 목 디스크 와요⁠. 쉬는 시간에 왼팔을 이렇게 뒤로 돌리세요⁠. 열 번씩⁠.⁠” 서휴는 제 팔을 뒤로 천천히 돌려 보였다⁠. 주란이 저도 모르게 따라 돌렸다⁠. 서휴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곤에게 왔다⁠. 병곤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사과는 당신이 해⁠. 나는 죽만 쒀⁠. 그리고 오늘 집에 와⁠. 산악회 말고 집⁠.⁠”

서휴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란은 왼팔을 한 번 더 뒤로 돌렸다⁠. 병곤을 보고는 팔을 내렸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꽃바구니가 먼저 나왔다⁠. 하얀 백합과 노란 국화가 섞인 큰 바구니였다⁠. 바구니 뒤에서 금세창이 걸어 나왔고⁠, 「⁠여벌⁠」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들고 따라왔다⁠.

*

세창은 병곤을 보고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병실 앞에서 주란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탁주란 씨⁠, 「⁠여벌⁠」 대표 금세창입니다⁠. 저희 고객님이 저지른 일로 어머님이 다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회사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저희 고객님 일이라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서류 가방에서 봉투와 서류를 꺼냈다⁠. 「⁠합의서⁠」 맨 위에 「⁠가해자 길병곤⁠」이라고 적혀 있었고⁠, 바로 밑 금액 칸에 삼억 원이 찍혀 있었다⁠. 맨 아래 「⁠피해자 측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굵게 적혀 있었다⁠.

“⁠위로금 삼억⁠, 병원비와 재활비 전액⁠, 간병인 두 분 이 년⁠. 서명만 해 주시면 오늘 저녁에 입금됩니다⁠.⁠”

주란은 서류를 받지 않았다⁠. 대신 세창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 돈은 누가 주는 거예요⁠?⁠”

“⁠회사가 도의적으로⁠…⁠…⁠”

“⁠저 사람이 친 거라면서요⁠.⁠” 주란은 턱으로 병곤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아까 오백 들고 왔어요⁠. 근데 저 사람 회사도 아닌 회사가 왜 삼억을 들고 와요⁠? 손님이 사고 치면 회사가 삼억씩 줘요⁠? 그럼 그 회사 진작 망했겠네⁠.⁠”

세창의 입꼬리가 잠깐 굳었다⁠. 변호사가 끼어들려 하자 세창이 손을 들어 막았다⁠. 왼손 검지가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맞습니다⁠. 주란 씨 말씀이 맞아요⁠. 저희가 이 돈을 드리는 건 저희 회사 이름이 뉴스에 나오는 게 무서워서입니다⁠. 숨기지 않겠습니다⁠.⁠” 세창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주란 씨⁠, 숫자 하나만 들어 보세요⁠. 이 돈 받으시면 어머님은 다음 달부터 재활을 이 년 하십니다⁠. 안 받으시면 재판을 삼 년 하십니다⁠. 재판이 끝나도 저분한테 받을 돈은 없습니다⁠. 저분은 마이너스 통장이 팔천만 원이시거든요⁠. 주말에 놀러 다니시느라고요⁠.⁠”

복도가 조용해졌다⁠. 간호사실의 전화벨이 두 번 울리다 멎었다⁠. 주란이 병곤을 돌아봤다⁠. 병곤은 부인하지 않았다⁠.

“⁠팔천⁠.⁠” 주란이 말했다⁠. “⁠놀러 다니느라⁠.⁠”

“⁠오늘 서명 안 하셔도 됩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세창은 꽃바구니를 병실 문 옆에 내려놓았다⁠. “⁠어머님 쾌유 빕니다⁠. 진심입니다⁠.⁠”

세창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몸을 돌렸다⁠. 병곤과 눈이 마주쳤다⁠. 세창은 소리 없이 입 모양만 만들었다⁠. 수요일⁠.

*

해 질 무렵⁠, 비상계단에 주란이 앉아 있었다⁠. 병곤이 계단을 내려가다 멈췄다⁠. 주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엄마랑 싸웠어⁠.⁠” 주란이 말했다⁠. 병곤에게 하는 말인지 계단에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첫차 그만 타라고⁠. 예순셋에 무슨 새벽 조리실이냐고⁠. 내가 야간 더 하면 된다고⁠. 엄마가 그러더라⁠. 너 버는 걸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말 안 하고 나왔어⁠. 엄마는 첫차 탔고⁠.⁠”

병곤은 계단 두 칸 위에서 그대로 있었다⁠. 주란이 일어나 병곤을 올려다봤다⁠.

“⁠삼억이면 엄마 이 년 쉬어⁠. 당신 오백이면 두 달 쉬고⁠. 숫자는 저 사람 말이 맞아⁠.⁠” 주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저 사람은 엄마 얼굴을 한 번도 안 봤어⁠. 꽃만 두고 갔어⁠. 엄마가 아까 그러더라⁠. 저 사람도 눈이 내려다보는 눈이라고⁠.⁠”

“⁠수요일까지 데려오겠습니다⁠.⁠”

“⁠누구를⁠?⁠”

“⁠제 몸 안에 있던 사람이요⁠.⁠”

“⁠데려와⁠.⁠” 주란이 말했다⁠. “⁠엄마 앞에서 그 사람이 어허⁠, 소리 하는 거 내가 봐야겠어⁠. 그거 보고 나서 돈 얘기 해⁠. 당신 오백도⁠, 저 사람 삼억도⁠.⁠”

주란은 계단을 올라갔다⁠. 병곤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밤 열 시였다⁠. 찬율이었다⁠.

「⁠안 누웠어요⁠. 위약금 문자 왔어요⁠. 내일 토요일이에요⁠. 일 년 만에 저 깨어 있어요⁠.⁠」

곧바로 한 줄이 더 왔다⁠.

「⁠야간 근무자 카드로는 지하 2층 단추가 안 눌려요⁠. 근데 토요일 밤에는 지하 2층 청소하는 분이 엘리베이터를 잡아 두세요⁠. 청소 카트가 크거든요⁠.⁠」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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