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648자)

자네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아침 여덟 시⁠, 거실 소파에 서휴가 앉아 있었다⁠. 운동복 차림이었고⁠,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솜은 학교에 간 뒤였다⁠. 식탁 위에 등산화 한 켤레가 올라와 있었다⁠. 밑창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앉아⁠.⁠” 서휴가 말했다⁠.

병곤은 앉지 않고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보여 줄 게 있어⁠. 다 보고 나서 물어봐⁠.⁠”

“⁠당신 지금 나한테 순서 정해 주는 거야⁠?⁠”

“⁠부탁하는 거야⁠.⁠”

서휴는 대답 대신 팔짱을 꼈다⁠. 병곤은 휴대전화로 차 앱을 열었다⁠. 강변북로에서 빈 블랙박스 칸을 봤을 때부터 잊고 있던 것이 새벽 포장마차에서 생각났다⁠. 요즘 차는 블랙박스 말고도 실내 카메라를 따로 달고 나오고⁠, 운전석 영상은 차 회사 클라우드에 사흘 동안 저절로 올라간다⁠. 사고조사부 직원들은 사흘을 금쪽같이 여겼다⁠. 운전자들은 블랙박스 카드는 빼도 공장에서 달아 준 카메라는 잊었다⁠.

앱 첫 화면에 붉은 글씨가 떠 있었다⁠. 「⁠7월 10일 영상 삭제 요청 접수 · 요청자 차량 소유자 본인 지문 인증 · 7월 10일 05시 31분 · 삭제 예정 7월 13일 05시 31분⁠」

병곤은 엄지를 내려다봤다⁠. 차 화면의 지문 칸에 엄지를 대면 소유자 확인이 끝난다⁠.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삼십일 분⁠, 병곤의 엄지가 병곤의 영상을 지우라고 눌렀다⁠. 삭제 예정까지 스물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병곤은 내려받기 단추를 눌렀다⁠. 진행 막대가 차오르는 동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영상은 일요일 새벽 세 시 오십팔 분에 시작했다⁠. 「⁠여벌⁠」 센터 지하 3층 주차장⁠, 병곤의 회색 세단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남자가 탔다⁠. 병곤의 몸이었다⁠. 남색 정장 바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느슨한 넥타이⁠. 남자는 시동을 걸기 전에 의자를 두 칸 뒤로 밀었다⁠. 그러고는 룸미러를 제 얼굴 쪽으로 꺾어 한참 들여다봤다⁠. 손바닥으로 두 볼을 쓸고⁠, 이마를 두드리고⁠, 반백 머리를 뒤로 넘겼다⁠.

“⁠어허⁠, 얼굴 한번 순하게 생겼네⁠.⁠”

목소리는 병곤의 목소리였다⁠. 말을 꺼내는 박자가 달랐다⁠. 병곤은 말을 시작하기 전에 늘 숨을 한 번 삼키는데⁠, 화면 속 남자는 숨 없이 바로 말을 던졌다⁠. 남자는 컵 받침에 꽂힌 담배를 하나 뽑아 물었다⁠. 금색 줄 두 개가 그어진 가는 담배였다⁠. 라이터 불빛이 병곤의 얼굴을 아래에서 비췄다⁠.

남자가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스피커 너머 목소리는 잡히지 않았고⁠, 남자의 말만 들렸다⁠.

“⁠어⁠, 자네⁠. 나 지금 나가⁠. 오늘은 내가 운전하네⁠. 이 얼굴로 누가 날 알아보겠나⁠. 아니⁠, 걱정 말게⁠. 여섯 시 전에 들어가⁠.⁠”

서휴가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팔짱이 풀렸다⁠.

“⁠멈춰 봐⁠.⁠”

병곤이 화면을 멈췄다⁠. 서휴는 텔레비전 앞까지 걸어와 화면 속 남자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사람 앉은 거 봐⁠. 골반이 뒤로 빠졌어⁠. 꼬리뼈로 앉아 있잖아⁠. 당신은 골반이 앞으로 쏠려⁠. 스무 해 동안 책상에서 보고서 쓰느라 허리를 앞으로 꺾고 살았어⁠. 내가 그거 펴 주려고 십오 년을 눌렀는데⁠.⁠” 서휴는 손가락을 운전대로 옮겼다⁠. “⁠당신은 운전대를 열 시 이 분 방향으로 잡아⁠. 운전 학원 교재처럼⁠. 이 사람은 한 손으로 밑을 잡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거울 볼 때 얼굴 안 만져⁠. 머리만 만지지⁠. 당신 얼굴 싫어하잖아⁠.⁠”

“⁠싫어하진 않아⁠.⁠”

“⁠싫어해⁠. 그래서 머리만 만지는 거야⁠.⁠” 서휴는 화면을 다시 봤다⁠. “⁠그리고 당신은 자네 소리 안 해⁠. 담배도 안 피우고⁠.⁠”

“⁠재생할까⁠?⁠”

“⁠해⁠.⁠”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성수 골목을 달렸다⁠. 새벽 거리는 비어 있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운전하며 창문을 내리고 담배 연기를 내보냈다⁠. 신호를 두 번 무시했다⁠. 네 시 사십 분⁠, 뚝섬로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화면 바깥에서 무언가 둔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의자에 처박혔다⁠. 차가 멈췄다⁠.

서휴가 입을 막았다⁠. 병곤은 화면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 누를 자신이 없었다⁠.

남자는 오 초쯤 앞을 보고 있다가 문을 열고 내렸다⁠. 운전석이 비었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새벽 공기 소리와 멀리서 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어왔다⁠. 이십 초쯤 지나 남자가 다시 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담배를 새로 물려다 떨어뜨렸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다시 귀에 댔다⁠.

“⁠자네⁠, 차 좀 긁었네⁠. 아니⁠, 사람은 괜찮아 보여⁠. 일어나는 거 봤어⁠.⁠” 남자는 백미러를 힐끗 봤다⁠. “⁠얼굴⁠? 내 얼굴인가 어디⁠. 걱정 말게⁠.⁠”

차가 출발했다⁠. 백미러 끝에 횡단보도 위의 작은 형체가 잠깐 비쳤다⁠. 움직이지 않았다⁠.

병곤은 영상을 멈췄다⁠. 거실이 조용했다⁠. 베란다 밖에서 아이들 등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휴는 한참 뒤에 입을 막은 손을 내렸다⁠.

“⁠이 사람⁠, 사람이 안 일어나는 거 봤어⁠.⁠”

“⁠응⁠.⁠”

“⁠봤는데 일어났다고 했어⁠.⁠”

“⁠응⁠.⁠”

*

“⁠그럼 당신은⁠.⁠” 서휴가 텔레비전에서 등을 돌렸다⁠. “⁠그 시간에 어디 있었어⁠?⁠”

병곤은 일 년 동안 이 질문을 피하려고 산을 만들었다⁠. 북한산⁠, 관악산⁠, 계곡 모래⁠, 산악회 회장⁠. 거짓말은 매주 하나씩 높아졌고⁠, 이제 무너질 산도 남지 않았다⁠.

“⁠양양⁠.⁠”

“⁠양양에 산이 어딨어⁠?⁠”

“⁠바다⁠. 서핑했어⁠. 스물다섯 살 몸 빌려서⁠. 일 년 동안 주말마다⁠.⁠”

서휴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업 시간에 회원들에게 시키는 숨이었다⁠.

“⁠금요일 밤에 「⁠여벌⁠」이라는 데 가서 누우면 대학원생 몸에서 눈을 떠⁠. 그 몸으로 바다에 가⁠. 일요일 밤에 돌아와⁠. 내 몸은 그동안 센터 지하에 누워 있고⁠.⁠” 병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는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요일 새벽에 내 몸이 비어 있는 동안 누가 들어가서 차를 몰았어⁠. 저 사람이야⁠.⁠”

“⁠한 번에 얼마야⁠?⁠”

“⁠응⁠?⁠”

“⁠그 몸 빌리는 거⁠. 한 번에 얼마냐고⁠.⁠”

“⁠이백⁠.⁠”

서휴의 눈이 천장 쪽으로 올라갔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사십 주⁠. 팔천⁠.⁠”

“⁠마이너스 통장⁠.⁠”

“⁠팔천만 원을 마이너스 통장으로⁠.⁠” 서휴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당신이 산에 간다던 주말마다 나는 당신 등산화를 빨았어⁠. 새 거라서 빨 것도 없는 걸 빨았어⁠. 밑창에 흙이 하나도 없어서⁠, 당신이 산 입구에서 막걸리만 먹고 오는 줄 알았어⁠. 그게 차라리 나았네⁠.⁠”

“⁠미안해⁠.⁠”

“⁠숨 쉬어⁠.⁠” 서휴가 말했다⁠. 병곤은 숨을 쉬었다⁠. “⁠당신이 운전한 게 아니라는 건 믿어⁠. 저 사람 골반은 당신 골반 아니야⁠. 십오 년 동안 눌러 본 골반을 내가 모를까 봐⁠. 근데 팔천은 못 믿겠어⁠. 그건 경찰서 일 끝나고 따로 얘기해⁠. 반필구 경위님한테 내가 같이 가⁠. 내가 증인 할 거야⁠.⁠”

“⁠필라테스 강사가 증인이 돼⁠?⁠”

“⁠골반은 거짓말 안 해⁠.⁠” 서휴는 일어나 등산화를 신발장에 집어넣었다⁠. 문을 세게 닫았다⁠. “⁠당신은 하고⁠.⁠”

*

오후 네 시⁠, 이솜이 학원 가방을 멘 채 현관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기 전에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뺑소니 아재 표정 모음 2탄 · 조회수 82만⁠」 편의점 영상에서 병곤의 얼굴만 오려 붙인 숏폼이었다⁠. 숙취 음료를 계산하는 얼굴⁠, 지갑을 꺼내는 얼굴⁠, 밴드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웃기는 효과음이 붙어 있었다⁠. 댓글 맨 위에는 「⁠이 아재 표정 우리 아빠랑 똑같음⁠」이 하트 천 개를 받고 있었다⁠.

“⁠우리 반에서 이거 모르는 애 없어⁠.⁠” 이솜이 말했다⁠.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 다 알면서 말을 안 해⁠. 그게 더 짜증 나⁠.⁠”

“⁠미안하다⁠.⁠”

“⁠아빠⁠.⁠” 이솜이 휴대전화를 내렸다⁠. “⁠아빠 아니지⁠?⁠”

병곤은 한참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거짓말은 이제 질렸고⁠, 사실은 이상하게 들렸다⁠.

“⁠저 몸은 아빠 몸 맞아⁠. 근데 그 안에 아빠가 없었어⁠.⁠”

이솜은 아빠를 한참 봤다⁠. 열일곱 살이 마흔여섯 살을 볼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게 더 이상해⁠.⁠” 이솜이 말했다⁠. 그러고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다 돌아봤다⁠. “⁠근데 아빠⁠, 저 사람은 계산할 때 점원한테 반말해⁠. 아빠는 편의점 알바한테도 존댓말 하잖아⁠. 그것도 증거야⁠?⁠”

“⁠증거야⁠.⁠”

“⁠그럼 내가 찾은 거니까 나 학원 하루 빠진다⁠.⁠”

*

다섯 시 반⁠, 경찰서로 나서려는데 모르는 번호가 떴다⁠. 받자마자 깍듯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고객님⁠, 금세창입니다⁠. 아침에는 제가 좀 딱딱했죠⁠. 사과드리려고요⁠.⁠”

병곤은 현관에 선 채 신발 끈을 묶었다⁠. “⁠사과 받겠습니다⁠. 기록만 주시면요⁠.⁠”

“⁠기록 대신 더 좋은 걸 드리려고요⁠.⁠” 세창의 목소리 뒤에서 키보드 소리가 났다⁠. 통화하면서도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피해자 가족분 합의금은 저희가 전부 대겠습니다⁠. 병원비⁠, 간병비⁠, 위로금까지요⁠. 변호사도 붙여 드리고요⁠. 고객님은 경찰에 한 가지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접속을 끝내고 몸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잠깐 깨셨고⁠, 정신이 흐린 채 차를 몰았다⁠. 그러면 저희가 기기 오류를 인정합니다⁠. 기기 오류로 정신이 흐렸으면 판사님도 형량을 달리 보세요⁠. 집행유예 선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안 한 일을 했다고 하라는 거네요⁠.⁠”

“⁠고객님 몸이 한 일을 고객님이 하셨다고 하시는 거죠⁠. 지금 이 나라에서는 그게 같은 말입니다⁠.⁠” 세창은 잠깐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에서 톡톡⁠, 작은 소리가 두 번 났다⁠. “⁠다른 길로 가시면 고객님 혼자 가셔야 합니다⁠. 저희 회사는 이천 명이 다음 달 월세를 내야 하는 회사라서요⁠. 이천 명이 고객님 한 분보다 무겁습니다⁠. 나쁘게 들리셔도 산수는 산수예요⁠.⁠”

병곤은 차 영상 이야기를 꺼내려다 삼켰다⁠. 보험금 청구인이 가진 패를 먼저 보여 주는 조사관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요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금요일에 투자사 실사단이 들어오거든요⁠.⁠” 세창이 웃었다⁠. “⁠아⁠, 그리고 고객님⁠. 양양 서핑 숍 사장님이 좋은 분이시더군요⁠. 오늘 통화했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병곤은 신발 끈을 다시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매듭이 두 번 다 엉켰다⁠.

*

저녁 일곱 시⁠, 성동경찰서⁠. 반필구는 병곤의 노트북으로 영상을 두 번 봤다⁠. 서휴가 옆에서 골반 이야기를 했고⁠, 필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밥 대신 커피를 마셨다⁠.

“⁠사모님 말씀은 조서에 넣겠습니다⁠.⁠” 필구가 말했다⁠. “⁠근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영상 때문에 선생님 몸이 운전한 건 더 확실해졌어요⁠. 얼굴도 선생님⁠, 차도 선생님⁠, 영상 지우라고 누른 지문도 선생님⁠. 검사는 선생님이 술 먹고 말투를 바꿔 연기했다고 할 거예요⁠.⁠”

“⁠거울 보면서 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요⁠?⁠”

“⁠술 먹으면 별짓 다 하죠⁠.⁠” 필구는 한 박자 쉬었다⁠. “⁠근데 이건 좀 이상하네요⁠.⁠”

필구가 영상을 마지막 부분으로 넘겼다⁠. 새벽 다섯 시 오십이 분⁠, 차가 성수 골목을 돌아 「⁠여벌⁠」 센터 지하 주차장 경사로로 내려갔다⁠. 지하 3층에서 차가 멈췄다⁠. 차 앞에 「⁠여벌⁠」 유니폼을 입은 직원 하나가 서 있었다⁠. 직원 뒤로 「⁠B2 ·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쓴 철문이 열려 있었다⁠.

남자가 차에서 내리자 직원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실내 카메라의 마이크가 직원의 첫마디를 잡았다⁠.

“⁠의⁠…⁠… 고객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병곤은 영상을 뒤로 넘겼다⁠. 다시 들었다⁠. 「⁠의⁠」 한 번 더 넘겼다⁠. 「⁠의⁠」 스무 해 동안 사고 영상을 들으며 병곤은 사람이 하다 만 말이 가장 정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의사요⁠?⁠” 서휴가 물었다⁠.

“⁠의장일 수도 있고요⁠.⁠” 필구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한 박자가 아니라 두 박자를 쉬었다⁠. “⁠의원일 수도 있고⁠.⁠”

노트북 화면 속에서 병곤의 몸이 철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몸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봤다⁠. 넥타이는 여전히 느슨했고⁠, 손목에서 초록 불이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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