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13자)

잠든 사람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찬율은 데스크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병곤도 데스크 앞에 선 채 앉으라는 말을 기다렸다⁠. 일 년 동안 같은 몸을 쓴 두 사람이 처음 나누는 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약관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뉴스 봤어요⁠.⁠” 찬율이 먼저 말했다⁠. 또박또박한 존댓말이었다⁠. “⁠손님 성함이 길병곤이신 것도 오늘 알았어요⁠. 계약서에는 손님 번호만 나오거든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니⁠, 처음은 아니고⁠.⁠”

“⁠처음 맞아요⁠. 저는 손님을 처음 봬요⁠. 손님은 저를 일 년 동안 보셨겠지만요⁠.⁠”

찬율은 긴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은 서퍼처럼 그을려 있었고⁠, 손목의 밴드 자리만 하얀 띠가 남아 있었다⁠. 어깨 근육이 셔츠를 밀어 올렸다⁠. 찬율은 제 팔을 남의 팔처럼 내려다봤다⁠.

“⁠저 수영 못 해요⁠. 물에 얼굴 담그면 숨이 안 쉬어져요⁠. 근데 월요일 아침마다 귀에서 모래가 나와요⁠. 실험실 선배들은 저를 양양 남자라고 불러요⁠. 지난달에는 교수님이 서핑 강사 부업 하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금요일 밤에 여기 침대에 누우면 일요일 밤에 눈을 떠요⁠. 그사이에 제 몸이 바다에 들어가요⁠. 저는 몰라요⁠. 일 년 동안 토요일을 본 적이 없어요⁠.⁠”

병곤은 할 말을 찾았다⁠. 사고 조사를 하며 수천 번 사과하는 사람을 봤는데⁠, 정작 제 입에서 나갈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는 좋아졌잖아요⁠.⁠” 병곤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찬율이 병곤을 한참 봤다⁠. 화가 날수록 더 공손해지는 얼굴이었다⁠. “⁠네⁠. 덕분에 셔츠가 안 맞아요⁠. 감사합니다⁠.⁠”

데스크 위 모니터에서 보관실 침대 번호들이 초록과 파랑으로 줄지어 있었다⁠. 병곤은 모니터의 14번을 봤다⁠. 지금은 회색이었다⁠. 비어 있는 침대⁠, 주인이 제 몸으로 돌아간 침대⁠.

“⁠14번 침대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 주말 마흔여덟 시간 전부요⁠.⁠”

“⁠그거 넘기면 저 잘려요⁠.⁠” 찬율은 바로 대답했다⁠. “⁠야간 근무만 잘리는 것도 아니에요⁠. 대여 계약도 같이 끊겨요⁠. 계약서에 있어요⁠. 회사 기록을 밖으로 내보내면 근무 계약하고 대여 계약 둘 다 해지⁠. 위약금 별도⁠. 다음 학기 등록금이 사백십만 원이에요⁠. 손님이 주말마다 내시는 돈의 칠 할이 회사로 가고 삼 할이 저한테 와요⁠. 그 삼 할이 제 등록금이에요⁠.⁠”

“⁠제가 주말마다 이백만 원을 냈는데⁠, 육십만 원만 받으셨다고요⁠?⁠”

“⁠모르셨어요⁠?⁠”

병곤은 몰랐다⁠. 서핑 숍 사장에게는 보드 대여비 오만 원을 깎아 달라고 졸랐었다⁠.

*

기록은 안 된다고 했지만⁠, 찬율은 침대는 보여 주었다⁠. 손님이 제 침대를 확인하는 것은 회사가 파는 서비스였다⁠. 찬율이 카드를 대자 유리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고⁠, 소독약 냄새 밑에서 희미하게 사람 냄새가 났다⁠.

침대가 두 줄로 끝없이 이어졌다⁠. 손님들이 누워 있었다⁠. 정장 차림으로 누운 중년 여자⁠, 배가 산처럼 솟은 노인⁠, 젊은 얼굴인데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 다들 눈을 감았고⁠, 가슴이 같은 속도로 오르내렸다⁠. 손목마다 파란 불이 숨 쉬듯 깜박였다⁠. 주인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남의 몸으로 웃고⁠, 걷고⁠, 물에 뛰어들고 있었다⁠.

유리문을 지나면서 병곤은 문에 비친 두 사람을 봤다⁠. 스물다섯 살 얼굴과 마흔여섯 살 얼굴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병곤은 주말마다 저 얼굴로 웃었고⁠, 저 얼굴로 서핑 숍 사장에게 라면을 얻어먹었고⁠, 저 얼굴로 모래밭에서 넘어졌다⁠. 같은 얼굴인데 유리 속 찬율은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찬율도 유리 속 병곤을 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제 몸에 들어와 살던 사람이 배 나온 반백의 아저씨라는 것을⁠, 찬율은 그제야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생각하신 거랑 다르죠⁠.⁠” 병곤이 말했다⁠.

“⁠더 젊으신 줄 알았어요⁠. 월요일마다 몸이 너무 신나 있어서⁠.⁠”

“⁠제 몸도 주말마다 여기 이렇게 있었던 거죠⁠.⁠”

“⁠14번이요⁠. 저는 주말에는 자니까 못 봤지만요⁠.⁠”

14번 침대에는 새 매트가 깔려 있었다⁠. 어젯밤 신청한 허리 받침 매트였다⁠. 병곤은 매트 대신 침대 다리를 봤다⁠. 사고 차량을 보면 바퀴부터 보는 버릇이었다⁠. 다른 침대들의 바퀴 잠금장치는 하얀색이었는데 14번만 회색이었다⁠. 바닥 타일에는 고무바퀴 자국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자국은 복도 끝 업무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끊겼다⁠.

“⁠저 엘리베이터 어디로 갑니까⁠?⁠”

“⁠지하 2층이요⁠. 창고래요⁠. 대표님 카드로만 단추가 눌려요⁠. 저도 한 번도 못 가 봤어요⁠.⁠”

병곤은 바퀴 자국 앞에 쪼그려 앉았다⁠. 허리가 소리를 냈다⁠. 찬율이 반사적으로 제 허리를 짚었다⁠. 월요일마다 아팠던 자리였다⁠.

“⁠옥찬율 씨⁠. 제 대여는 일요일 밤 열 시에 끝났습니다⁠. 끝나는 순간 저는 어디에 있든 제 몸으로 돌아오죠⁠. 그때 제 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찬율은 대답하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밀려나요⁠. 주인이 이겨요⁠. 교육받을 때 들었어요⁠. 그래서 회사가 손님 귀환 시간을 그렇게 따져요⁠. 십 분만 늦어도 위약금이고⁠.⁠”

“⁠그러면 누구든 제 귀환 시간 전에만 돌려놓으면 되는 거네요⁠.⁠”

찬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서퍼처럼 그을린 얼굴이라 하얘지지는 않았고⁠, 누렇게 떴다⁠.

*

새벽 네 시 이십 분⁠, 병곤은 센터 뒷골목에 차를 대고 지하 주차장 출구를 보고 있었다⁠. 찬율에게 받은 것은 기록이 아니라 메시지 한 줄이었다⁠. 「⁠지금 지하 2층에서 엘리베이터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어요⁠. 아무도 안 탔는데요⁠.⁠」

네 시 삼십일 분⁠, 주차장 출구 차단기 옆 쪽문이 열렸다⁠. 리넨 양복을 입은 예순 남짓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배가 산처럼 솟아 있었다⁠. 병곤은 숨을 멈췄다⁠. 몇 시간 전 보관실 침대에 누워 있던 노인이었다⁠. 남자는 골목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손목을 들어 시계 대신 밴드를 봤다⁠. 밴드 끝에서 초록 불이 깜박였다⁠.

병곤은 차에서 내렸다⁠. 허리를 짚고 남자를 따라 걸었다⁠. 남자는 성수 뒷골목을 익숙하게 빠져나가 뚝섬 쪽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비닐 천막 안에서 노란 백열등이 흔들렸다⁠. 남자는 소주 한 병과 닭똥집을 시키고⁠, 금색 줄이 그어진 가는 담배를 꺼냈다⁠. 병곤의 컵 받침에서 나온 꽁초와 같은 담배였다⁠.

병곤은 옆 탁자에 앉았다⁠. 남자가 병곤을 흘끗 보더니 소주잔을 들었다⁠.

“⁠젊은 양반⁠, 아니⁠, 나이 든 양반이네⁠. 당신도 빈방이오⁠?⁠”

“⁠빈방이요⁠?⁠”

“⁠아⁠, 처음이구먼⁠.⁠” 남자는 껄껄 웃었다⁠. “⁠내 몸 가지고는 여기 못 와요⁠. 마누라가 위치 추적을 하거든⁠. 이 몸 주인은 지금 제주도 골프장에 가 있다는데⁠, 몸은 여기서 나랑 소주를 먹고 있고⁠. 웃기지 않소⁠? 주인은 남의 몸으로 골프 치고⁠, 나는 주인 몸으로 술 마시고⁠. 아무도 손해를 안 봐요⁠.⁠”

“⁠그 몸이 내일 아침에 숙취로 깨면요⁠?⁠”

“⁠주인이 깨겠지⁠. 제주도 공기 좋은데 왜 머리가 아픈가 하겠지⁠.⁠” 남자는 소주를 털어 넣었다⁠. “⁠여섯 시 전에 들어가야 돼⁠. 주인 돌아오기 한참 전이지만 회사가 깐깐해서⁠.⁠” 남자는 천막 기둥에 매달린 작은 텔레비전을 턱으로 가리켰다⁠. 새벽 재방송 토론에서 위도범 의원이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저 양반들이 법 만든다고 떠드는데⁠, 만들어 봐야 몸 주인 책임이라더군⁠. 그럼 더 좋지⁠. 이 얼굴이 무슨 짓을 해도 내 일이 아니란 소리니까⁠.⁠”

병곤은 휴대전화를 꺼내 탁자 아래에서 남자의 손목을 찍었다⁠. 초록 불이 화면 안에서 깜박였다⁠. 남자가 렌즈를 봤다⁠. 병곤의 손이 굳었다⁠.

“⁠얼굴 찍지 마쇼⁠.⁠” 남자가 말하더니 다시 웃었다⁠. “⁠아⁠, 찍어도 되겠구나⁠. 내 얼굴도 아닌데⁠.⁠”

“⁠어떻게 예약합니까⁠? 빈방⁠.⁠”

“⁠카드가 있어야 돼⁠. 소개로만 받아⁠. 당신은 안 될 거요⁠. 얼굴이 너무 알려졌어⁠.⁠” 남자는 휴대전화 화면을 흔들어 보였다⁠. 편의점 아재 숏폼이었다⁠. 조회수 오십만⁠. “⁠그 양반이 당신이오⁠? 당신 몸을 누가 썼구먼⁠. 운 나빴네⁠.⁠”

병곤은 일어났다⁠. 무릎이 떨렸다⁠. 포장마차를 나오는 등 뒤에서 남자의 웃음이 따라왔다⁠.

*

새벽 여섯 시⁠, 「⁠여벌⁠」 로비⁠. 금세창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셔츠는 어제와 다른 색이었고 머리는 젖어 있었다⁠. 기다린 사람의 자세였다⁠.

“⁠고객님⁠, 이른 아침에 산책 다녀오셨군요⁠.⁠”

병곤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포장마차의 노란 불빛⁠, 리넨 양복의 손목⁠, 초록 불⁠.

“⁠대표님 회사 보관실 지하 1층 침대에 누워 있던 몸입니다⁠. 주인은 제주도에 있다고 하더군요⁠. 이 사람이 빈방이라고 했습니다⁠.⁠”

세창은 화면을 오래 봤다⁠. 왼손 검지가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저희 VIP 고객님이시네요⁠. 대여를 일찍 마치고 본인 몸으로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기록 있습니다⁠.⁠” 세창은 태블릿을 돌리지도 않았다⁠. “⁠밴드 불빛은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으면 색이 틀어집니다⁠. 보험 일 하시니까 아시잖아요⁠. 화면은 증거가 아니라 주장이라는 거⁠.⁠”

“⁠빈방이 뭡니까⁠?⁠”

“⁠모르겠습니다⁠. 술 드신 분 말씀이라⁠.⁠” 세창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태블릿을 이번에는 돌렸다⁠. 보관실 천장 카메라 화면이었다⁠. 유리문 안에서 병곤이 14번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침대 곁에 찬율이 서 있었다⁠. “⁠손님은 데스크까지입니다⁠, 고객님⁠. 유리문 안은 직원만 들어갑니다⁠. 고객님은 다른 고객님들 몸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어요⁠. 그 문을 연 직원은 오늘 아침 경위서를 씁니다⁠.⁠”

“⁠옥찬율 씨는 제가 졸라서 문을 연 겁니다⁠.⁠”

“⁠그 말씀은 경위서에 넣어 드리죠⁠.⁠” 세창은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길병곤 고객님⁠, 오늘부로 회원 자격을 정지합니다⁠. 밴드는 반납해 주시고요⁠.⁠”

병곤은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 마흔여섯 살 남자가 할 동작이 아니었고⁠, 병곤도 그것을 알았다⁠.

“⁠밴드는 제 손목에 있습니다⁠.⁠”

“⁠그럼 차고 계세요⁠.⁠” 세창은 웃었다⁠. “⁠이제 아무 데도 안 이어지는 팔찌입니다⁠. 양양은 고객님 몸으로 가셔야겠네요⁠.⁠”

로비 화면에서 투자 설명회 영상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주말을 빌려 드립니다⁠」 세창은 화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눌렀다⁠.

*

아침 일곱 시⁠, 병곤의 휴대전화에 기사 알림이 연달아 떴다⁠. 「⁠여벌 “⁠뺑소니 용의자⁠, 보관실 무단 침입해 증거 조작 시도⁠”⁠」 기사에는 회사 입장문이 붙어 있었다⁠. 「⁠길병곤 고객은 본인 신체로 사고를 낸 뒤 당사 기술 탓을 하며 보관실에 무단으로 들어가 다른 고객의 신체 곁에서 증거를 꾸미려 했습니다⁠. 당사는 피해자 가족께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하겠습니다⁠.⁠」 사진은 보관실 천장 카메라의 한 장면이었다⁠. 침대 사이에 쪼그려 앉은 반백의 남자가 다른 손님의 침대 바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수상한 남자였다⁠.

이솜의 메시지가 왔다⁠. 「⁠아빠 이번엔 신고 사유가 없음⁠. 아빠가 맞으니까⁠.⁠」

서휴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젯밤 경찰서 안 갔지⁠. 반필구 경위님이 전화하셨어⁠. 아빠 집에 들어오셨냐고⁠.⁠」

마지막으로 찬율의 메시지가 왔다⁠. 「⁠경위서 쓰래요⁠. 손님이 강제로 시켰다고 쓰면 이번만 봐준대요⁠.⁠」

병곤은 차 안에서 룸미러를 봤다⁠. 밤을 새운 마흔여섯 살 얼굴이 기사 사진 속 남자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병곤은 찬율에게 답장을 썼다⁠. 「⁠그렇게 쓰세요⁠. 맞는 말이니까⁠.⁠」 보내기를 누르는 손가락 옆에서 끊긴 밴드가 아무 불도 없이 손목을 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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