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50자)

거울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밤 열 시 오십 분⁠, 「⁠여벌⁠」 센터 뒷골목⁠. 병곤이 쪽문 앞에 서자 안에서 청소 카트 바퀴 소리가 다가왔다⁠. 청소 반장이 문을 열었다⁠. 토시를 낀 팔로 문을 받친 채 병곤을 위아래로 봤다⁠.

“⁠또 왔어⁠? 오늘은 조끼 안 입었네⁠.⁠”

“⁠오늘은 초대받았습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뒷문으로 와⁠?⁠” 반장은 혀를 찼다⁠. 병곤 뒤에 서 있는 반필구와 탁주란을 차례로 보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대표가 오늘은 앞문도 뒷문도 다 열어 두라더라⁠. 회사 다니면서 처음 들어 본 말이야⁠. 나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되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해⁠.⁠”

필구가 김밥 은박지를 반장에게 내밀었다⁠. 반장은 받아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경찰이 김밥 주는 것도 처음이네⁠.⁠”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주란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엄마와의 대화창이었다⁠. 「⁠가서 보고 와⁠. 엄마 대신⁠. 얼굴 말고 입을 봐⁠.⁠」 메시지 밑에 양례가 보낸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병실 탁자 위의 플라스틱 반찬통이었다⁠. 「⁠조리실 사람들이 또 두고 갔다⁠. 너 가져가서 먹어⁠. 밤에 굶지 말고⁠.⁠」

“⁠엄마는 꼭 이래⁠.⁠” 주란이 말했다⁠. “⁠다리 부러져 누워서도 반찬 걱정이야⁠.⁠”

“⁠어머님 미역국 이야기 하셨어요⁠. 병원 미역국은 미역을 아낀다고⁠.⁠”

“⁠그 말 매일 해⁠.⁠” 주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병곤이 주란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 퇴원하면 엄마 미역국 먹으러 와⁠. 당신 말고⁠, 그 학생이랑⁠. 엄마가 그 학생 보고 싶대⁠. 몸 빌려주고 일 년 동안 잤다는 학생⁠.⁠”

필구가 계단 위에서 돌아봤다⁠. “⁠저는요⁠?⁠”

“⁠경위님은 김밥 드시잖아요⁠.⁠”

필구는 대답하지 못하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

밤 열한 시⁠, 1층 접속실⁠. 천장 조명이 하나만 켜져 있었다⁠. 침대 두 개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저쪽 침대에 금세창이 앉아 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어 침대 끝에 개어 두었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다⁠. 병곤은 유리벽 이쪽 침대 앞으로 갔다⁠. 유리에 두 사람이 겹쳐 비쳤다⁠. 소매를 걷고 넥타이를 푼 두 남자였다⁠. 편의점 화면 속 차림이었다⁠.

“⁠오셨네요⁠.⁠” 세창의 목소리가 유리벽 아래 작은 통화 구멍으로 넘어왔다⁠. “⁠경위님도⁠, 주란 씨도요⁠.⁠”

주란이 병곤 옆으로 왔다⁠. 물류센터 조끼 차림이었다⁠. 야간 근무를 빼고 온 길이었다⁠. 주란은 유리벽 너머의 세창을 한참 봤다⁠.

“⁠꽃바구니⁠.⁠” 주란이 말했다⁠. “⁠엄마 병실에 놓고 간 사람⁠.⁠”

“⁠네⁠. 기억하시네요⁠.⁠”

“⁠엄마가 그러더라⁠. 당신도 내려다보는 눈이래⁠.⁠”

세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자리라 이번에는 주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창은 그것을 알아차린 듯 눈을 잠깐 내리깔았다⁠.

*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세창이 말했다⁠. “⁠빈방⁠, 서른한 번⁠, 지하 2층⁠, 금요일 밤 제가 부장님 몸에 들어가서 경찰서에 간 것까지요⁠. 내일 아침에 검찰에 가서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 부장님 자수서는 그걸로 무효가 됩니다⁠. 피해자분께는 회사 남은 돈을 다 드리겠습니다⁠. 오억은 안 되겠지만요⁠.⁠”

필구가 수첩을 꺼냈다⁠. 세창은 필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VIP-03은 빼 주세요⁠.⁠”

“⁠위도범⁠.⁠” 병곤이 말했다⁠.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세창이 손바닥을 유리에 댔다⁠. “⁠부장님⁠, 들어 보세요⁠. 의원님 법에는 신체 귀속 원칙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여인 최저 대여료⁠, 보관실 안전 기준⁠, 대여인 책임보험⁠. 몸 빌려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사람으로 적은 법입니다⁠. 의원님이 무너지면 그 법이 같이 무너져요⁠. 다음 법은 몇 년 뒤에나 나옵니다⁠. 그사이에 찬율 씨 같은 사람들은 또 유치장에서 깨요⁠. 저는 저를 버리는 사람을 지키자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손에 들린 종이를 지키자는 겁니다⁠.⁠”

“⁠그 종이에 특약 7조도 있습니까⁠?⁠” 병곤이 물었다⁠. “⁠빈방 사고는 자고 있던 사람이 물어낸다⁠.⁠”

세창의 손바닥이 유리에서 미끄러졌다⁠. 하얀 김 자국이 남았다⁠.

“⁠있습니다⁠. 제가 넣었습니다⁠.⁠”

“⁠대표님은 일 년 동안 사람들을 재워 놓고 그 몸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는 사람들한테 보험료까지 받으려고 했어요⁠. 그 종이를 지켜서 누가 삽니까⁠? 대여인입니까⁠, 손님입니까⁠?⁠”

“⁠둘 다요⁠. 손님이 있어야 대여인이 삽니다⁠.⁠”

“⁠손님이 사람을 치고 가도요⁠?⁠”

세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사이에 주란이 유리벽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

“⁠우리 엄마는 서른 해 동안 첫차 탔어⁠.⁠” 주란이 통화 구멍에 대고 말했다⁠. 낮고 끊어 치는 목소리였다⁠. “⁠새벽 다섯 시에⁠. 병원 조리실에서 높은 사람들 밥 지으려고⁠. 그 새벽에 횡단보도 건너다가 차에 치였어⁠. 차에서 내린 사람이 엄마를 내려다보고 어허⁠, 이거 큰일이네⁠, 하고 갔어⁠. 엄마는 그 입을 기억해⁠. 얼굴은 이 아저씨 얼굴인데⁠, 입은 아니래⁠. 엄마가 보고 싶은 건 돈이 아니라 그 입이야⁠.⁠”

“⁠주란 씨⁠, 오억은 아직 유효합니다⁠. 투자는 없어졌지만 제 개인 돈으로⁠…⁠…⁠”

“⁠당신 오억으로 엄마가 그 입을 볼 수 있어⁠?⁠”

세창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지키려는 종이⁠, 엄마는 못 읽어⁠. 눈이 나빠서⁠. 엄마는 듣는 사람이야⁠. 조리실에서 사십 년 동안 무슨 소리만 들어도 냄비가 몇 분 끓었는지 알아⁠.⁠” 주란은 유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소리가 접속실에 울렸다⁠. “⁠그 입 데려와⁠. 종이는 그다음에 다시 써⁠.⁠”

필구가 수첩에서 고개를 들었다⁠. 주란의 손바닥 자국이 유리에 하얗게 남아 있었다⁠. 세창의 손바닥 자국 바로 옆이었다⁠.

*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접속실 벽의 시계가 열한 시 이십 분을 지났다⁠. 세창의 휴대전화가 침대 위에서 떨었다⁠. 화면에 뉴스 알림이 떴다⁠. 세창은 화면을 유리에 대고 보여 주었다⁠. 「⁠싱가포르 투자사⁠, 여벌 투자 철회 공식 발표⁠」 알림 밑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위도범 의원실 “⁠여벌과 개인적 관계 없어⁠”⁠」

“⁠개인적 관계 없음⁠.⁠” 세창이 소리 내어 읽었다⁠. 웃었다⁠. 처음으로 깍듯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일 년에 마흔 번 오신 분입니다⁠. 빈방 단골이셨어요⁠. 가장 좋은 침대를 쓰셨고⁠, 담배는 제가 따로 사다 놓았습니다⁠. 금색 줄 두 개 있는 거요⁠. 그 담배 수입하는 가게가 서울에 두 군데밖에 없어요⁠.⁠”

세창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엎었다⁠.

“⁠부장님⁠, 제가 학교 다닐 때 제 몸 빌려 가던 형 이야기 했죠⁠. 월요일에 깨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다고⁠.⁠” 세창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나중에 알았어요⁠. 형이 제 몸으로 공사장에서 일했어요⁠. 형 몸은 허리를 다쳐서 못 쓰는 몸이었고요⁠. 형은 제 몸으로 번 돈의 반을 저한테 줬어요⁠. 반은 형이 가졌고요⁠. 저는 그게 나쁜 거래인 줄 알았어요⁠. 회사를 만들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 형이 저한테 제일 정직한 손님이었어요⁠. 형은 제 몸으로 일을 했고⁠, 제 몸을 다치게 하지 않았고⁠, 저한테 반을 줬어요⁠.⁠” 세창은 고개를 들었다⁠. “⁠의원님은 제 손님들 몸으로 술을 마셨고⁠, 사람을 쳤고⁠, 자기 이름은 기록 어디에도 없게 하라고 했고⁠, 오늘은 저더러 다 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자네가⁠.⁠”

세창의 왼손 검지가 밴드 위로 올라갔다⁠.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세 번째로 두드리려다 멈췄다⁠.

“⁠투자사가 나간 순간 의원님 법은 죽었습니다⁠. 본회의 못 갑니다⁠. 오늘 밤 뉴스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죽은 종이를 지키려고 의원님을 덮을 이유가 이제 없습니다⁠.⁠” 세창은 숫자를 맞추듯 천천히 말했다⁠. “⁠이천 명한테 남은 건 이제 진짜 기록뿐입니다⁠. 진짜 기록이 있어야 다음 법이 제대로 나와요⁠. 계산이 그렇게 나옵니다⁠.⁠”

“⁠계산 말고요⁠.⁠” 병곤이 말했다⁠.

세창이 병곤을 봤다⁠. 유리에 비친 제 얼굴과 병곤의 얼굴이 겹친 자리를 봤다⁠.

“⁠계산 말고는⁠, 금요일 밤에 부장님 몸으로 경찰서 계단 올라가면서 허리가 아팠습니다⁠.⁠” 세창이 말했다⁠. “⁠다섯 칸이요⁠. 그 허리로 부장님은 스무 해 동안 사고 현장을 다니셨더군요⁠. 계단 다섯 칸 올라가는 동안 처음으로 손님 몸이 아니라 사람 몸을 입은 기분이었습니다⁠. 별로였습니다⁠.⁠”

*

세창은 오른쪽 손목의 밴드 잠금쇠를 왼손 엄지로 눌렀다⁠. 딸깍 소리가 났다⁠. 밴드가 풀렸다⁠. 「⁠여벌⁠」에 하나뿐인 관리자 밴드였다⁠. 손님 밴드보다 조금 두꺼웠고⁠, 끝에 작은 금색 점이 있었다⁠.

“⁠A-001입니다⁠. 이 안에 빈방 원본이 다 있어요⁠. 회사 서버는 제가 고칠 수 있지만⁠, 이건 밴드가 직접 남긴 거라 저도 못 고칩니다⁠.⁠” 세창은 유리벽 아래 서류를 주고받는 작은 틈으로 밴드를 밀어 넣었다⁠. 밴드가 이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필구가 비닐 증거 봉투를 꺼내 받았다⁠.

“⁠VIP-03⁠.⁠” 세창이 말했다⁠. 목소리가 또렷했다⁠. “⁠위도범⁠. 7월 10일 새벽 한 시 오십 분⁠, 지하 2층 VIP 3번 침대에서 B1-14로 접속⁠. 제가 직접 밴드를 꽂았습니다⁠. 다섯 시 오십팔 분 귀환⁠. 블랙박스 카드는 제가 받아서 지하 2층 단말기 서랍에 넣었습니다⁠. 아직 거기 있어요⁠. 버리지 못했습니다⁠. 왜 못 버렸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필구가 수첩에 적었다⁠. 손이 빨랐다⁠. 다 적은 다음 한 박자 쉬었다⁠. 이번에는 쉬는 소리가 들렸다⁠. 길게 내쉬는 숨이었다⁠.

“⁠금세창 씨⁠.⁠” 필구가 말했다⁠. “⁠지금부터 하시는 말은 조서에 들어갑니다⁠. 변호사 부르실 수 있어요⁠.⁠”

“⁠부르겠습니다⁠. 저희 회사 변호사 말고요⁠.⁠” 세창이 처음으로 웃음기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란이 증거 봉투 속 밴드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유리벽 너머의 세창을 봤다⁠. 세창은 침대에 앉은 채 주란을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엄마한테 그 입 데려갈 거야⁠?⁠” 주란이 물었다⁠.

“⁠제가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제 아무도 못 데려가요⁠.⁠” 세창이 대답했다⁠. “⁠그 입이 오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검찰에 가겠습니다⁠.⁠”

*

자정이 가까웠다⁠. 필구가 검사 동기에게 전화를 걸러 복도로 나갔다⁠. 주란은 휴대전화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곤은 유리벽 앞에 남았다⁠. 세창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님⁠.⁠” 세창이 말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일 년 동안 양양에서 행복하셨습니까⁠?⁠”

병곤은 대답을 미루지 않았다⁠.

“⁠네⁠.⁠”

“⁠그럼 저도 한 가지는 한 거네요⁠.⁠” 세창이 말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봤다⁠. “⁠만족도 다섯 점⁠. 마흔 번 내리⁠.⁠”

병곤은 유리벽에 손바닥을 댔다⁠. 세창은 손을 들지 않았다⁠. 유리 위에 병곤의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가 천천히 지워졌다⁠. 주란의 자국과 세창의 자국은 이미 지워진 뒤였다⁠.

복도에서 필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야⁠. 지금 영장 하나 더 써 줘⁠. 국회의원⁠. 응⁠, 국회의원⁠.⁠” 필구는 한 박자 쉬었다⁠. “⁠김밥 사 갈게⁠.⁠”

병곤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서휴였다⁠. 「⁠몇 시에 와⁠. 냉장고 숫자 오늘 안 바뀌었어⁠. 바뀌기 전에 와⁠.⁠」

접속실을 나서기 전에 병곤은 한 번 돌아봤다⁠. 유리벽 너머 침대 위에 셔츠 소매를 걷은 남자가 혼자 누워 있었다⁠.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밴드 자리만 하얀 띠로 남아 있었다⁠.

1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거울 · 주말마다 빌리는 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