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64자)

빌려준 사람들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화요일 오후 네 시⁠, 서울동부지방법원 앞 계단⁠. 병곤은 한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햇빛 속으로 나왔다⁠. 넥타이는 없었다⁠. 영장 담당 판사는 십 분 동안 출력물 한 장을 들여다보다가 기각 사유를 세 줄로 적었다⁠. 자수 경위에 다툼의 여지가 있음⁠. 도주 우려 없음⁠. 밴드 접속 기록의 증거 능력은 재판에서 판단할 것⁠.

“⁠판사님이 숫자로 보셨어요⁠.⁠” 계단 아래에서 반필구가 말했다⁠. “⁠낙서로 보진 않으셨어요⁠. 아직 숫자도 아니지만요⁠.⁠”

계단 맨 아래에 서휴와 이솜이 서 있었다⁠. 이솜이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화면에 마라탕 가게 지도가 떠 있었다⁠.

“⁠약속했지⁠. 마라탕⁠. 아빠가 사⁠. 아빠 돈 없는 거 아니까 내가 고를게⁠. 제일 매운 걸로⁠.⁠”

“⁠아빠 허리가⁠…⁠…⁠”

“⁠마라탕은 허리로 먹는 거 아니야⁠.⁠” 이솜이 아빠 팔짱을 꼈다⁠. 열일곱 살이 아빠 팔짱을 끼는 것은 일 년 만이었다⁠. 병곤은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마라탕 가게에서 이솜은 정말로 가장 매운 단계를 골랐다⁠. 병곤은 첫 숟가락에 안경이 김으로 하얘졌고⁠, 두 번째 숟가락에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서휴는 순한 맛을 시켜 놓고 남편의 앉은 자세만 봤다⁠.

“⁠허리 펴⁠. 매운 거 먹을 때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숙이면 더 매워⁠.⁠”

“⁠그런 게 어딨어⁠.⁠”

“⁠있어⁠. 내가 방금 만들었어⁠.⁠”

이솜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아빠⁠, 그 형 등록금 아빠가 내⁠?⁠”

“⁠응⁠.⁠”

“⁠그럼 내 학원비는⁠?⁠”

병곤이 서휴를 봤다⁠. 서휴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저으며 말했다⁠. “⁠냉장고⁠.⁠”

이솜은 잠깐 생각하더니 휴대전화 계산기를 열었다⁠. 숫자를 몇 개 누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빠⁠, 나 다음 학기부터 수학 학원 하나만 다닐게⁠. 영어는 숏폼으로 할게⁠.⁠” 이솜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대신 아빠가 양양 가면 나도 데려가⁠. 아빠 몸으로 서핑하는 거 찍을 거야⁠. 그게 진짜 숏폼감이야⁠.⁠”

병곤은 대답하지 못하고 물을 마셨다⁠. 물도 매웠다⁠.

*

수요일 저녁 일곱 시⁠, 신촌 스터디 카페 단체실⁠. 찬율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고⁠, 의자 열네 개에 열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들 손목에 흰 밴드를 찼다⁠. 다들 젊었고⁠, 다들 피곤해 보였다⁠. 병곤이 들어가자 열네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편의점 아재를 실물로 본 얼굴들이었다⁠.

“⁠「⁠여벌⁠」 대여인들이에요⁠.⁠” 찬율이 말했다⁠. “⁠대여인 앱 게시판에 글 올렸더니 오셨어요⁠. 이번 주말 대여 다 취소하고요⁠.⁠”

헬스 트레이너라는 여자가 팔짱을 끼고 병곤을 봤다⁠. “⁠근데 이 아저씨는 손님이었잖아요⁠. 찬율이 몸 빌려서 서핑했다는⁠. 손님이 왜 여기 있어요⁠?⁠”

“⁠손님이었으니까요⁠.⁠” 병곤이 대답했다⁠. 단체실이 조용해졌다⁠. 병곤은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사고 조사실에서 수천 번 본 사과하는 사람들의 각도보다 조금 더 깊이⁠. “⁠일 년 동안 매주 여러분 같은 분 몸을 빌렸습니다⁠. 몸 주인이 어디서 깨는지 한 번도 안 물어봤습니다⁠. 죄송합니다⁠.⁠”

트레이너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대신 턱으로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짧게 말했다⁠. 병곤은 맨 뒤에 앉아 들었다⁠.

대리기사라는 서른 살 남자는 주말에 몸을 빌려주고 평일 밤에는 남의 차를 몬다고 했다⁠. “⁠주말엔 제 몸이 손님을 태우고 놀러 다니고⁠, 평일엔 제가 손님을 태우고 집에 데려다줘요⁠. 일주일 내내 운전석이에요⁠.⁠” 트레이너는 스물여덟이었고⁠, 손님이 대부분 마흔 넘은 회사원이라고 했다⁠. “⁠제 복근 만져 보려고 빌린대요⁠. 자기 배로는 못 만져 본 거라서⁠. 월요일에 깨면 배에 손자국이 있어요⁠. 자기 배 만지듯이요⁠.⁠”

웃음이 터졌다⁠. 병곤은 웃지 못했다⁠. 마흔 넘은 회사원 가운데 한 사람이 저였다⁠.

맨 앞줄의 대학생이 조용히 반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 안쪽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엄마 사랑해⁠」

“⁠지난달에 손님이 했어요⁠. 제 몸에요⁠.⁠” 대학생이 말했다⁠. “⁠회사는 손님 번호도 안 알려 줘요⁠. 몸이 겪은 일은 몸에 남는다고 약관에 있대요⁠. 그러니까 이건 제 거래요⁠. 저희 엄마는 이거 보고 우셨어요⁠. 좋아서 우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단체실이 조용해졌다⁠. 찬율이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썼다⁠. 「⁠신체 귀속 원칙 · 몸이 한 일은 몸 주인이 책임진다⁠」 글씨 밑에 줄을 긋고 썼다⁠. 「⁠몸 주인 = 우리⁠」

“⁠법이 통과되면⁠, 손님이 우리 몸으로 사고 치면 우리가 물어내요⁠. 보험으로요⁠. 보험료는 우리 대여료에서 나가고요⁠. 손님은 아무것도 안 내요⁠.⁠” 찬율의 목소리는 끝까지 또박또박했다⁠. “⁠내일 투자 설명회가 있어요⁠. 그 돈 들어오면 이 법이 굳어요⁠. 내일 같이 가 주실 분⁠.⁠”

손이 여섯 개 올라왔다⁠. 열네 개 가운데 여섯이었다⁠. 나머지 여덟은 바닥을 보거나 휴대전화를 봤다⁠. 대리기사가 손을 들까 말까 하다 내렸다⁠.

“⁠보험 들어 준다면서요⁠.⁠” 대리기사가 말했다⁠. “⁠저는 그거 필요해요⁠. 지난달에 저도 깨어 보니 경찰서였어요⁠. 그때 보험 있었으면 변호사비 안 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리기사의 말도 맞았다⁠.

*

목요일 오후 두 시⁠, 성수동 「⁠여벌⁠」 센터 1층 로비⁠. 벽 화면에 「⁠주말을 빌려 드립니다⁠」가 떠 있었고⁠, 화면 앞에 무대와 의자 백 개가 놓였다⁠. 앞 세 줄에 싱가포르 투자사 사람들이 통역사와 함께 앉아 있었다⁠. 투자사 사람들 뒤로 기자들⁠, 업계 사람들⁠, 온새손해보험 상무⁠. 맨 뒷줄에 찬율과 대여인 여섯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병곤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회원 자격은 다시 정지되어 있었지만 설명회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다⁠.

금세창이 무대에 올랐다⁠. 남색 정장에 허리가 꼿꼿했다⁠. 세창은 이천 명의 대여인⁠, 해마다 두 배씩 느는 손님⁠, 곧 본회의를 통과할 신체대여법을 차례로 말했다⁠. 통역사가 영어로 따라갔다⁠. 화면에 막대그래프가 계단처럼 올라갔다⁠. 투자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시간이 되자 맨 뒷줄에서 찬율이 일어났다⁠. 진행 요원이 마이크를 주지 않으려 했다⁠. 찬율은 무대 앞까지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세창이 진행 요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가 찬율의 손으로 넘어갔다⁠.

“⁠저는 대여인 L-207입니다⁠. 옥찬율입니다⁠.⁠” 찬율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일 년 동안 주말마다 몸을 빌려줬습니다⁠. 저는 그동안 토요일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지난주 국회에서 이 법을 찬성한다고 읽었습니다⁠. 대표님이 써 주신 종이였습니다⁠.⁠”

로비가 술렁였다⁠. 통역사가 머뭇거리다 따라 옮겼다⁠.

“⁠이 건물 지하 2층에 빈방이 있습니다⁠. 손님이 남의 몸에 들어가 있는 동안 손님의 빈 몸을 밤마다 다시 빌려줍니다⁠. 지난 7월 10일 새벽⁠, 빈방 손님 VIP-03이 길병곤 씨 몸으로 사람을 쳤습니다⁠. VIP-03은 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입니다⁠. 그 손님이 이번 금요일에 제 몸을 예약했습니다⁠.⁠”

대여인 여섯이 일어났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뒷줄로 돌았다⁠.

세창은 무대 위에서 끝까지 들었다⁠. 찬율이 말을 마치자 세창은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웃지 않았다⁠.

“⁠찬율 씨⁠, 고맙습니다⁠. 용기 있는 말씀이었어요⁠.⁠” 세창은 객석을 둘러봤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여기 일어나신 분들⁠, 지난 학기 등록금은 누가 냈습니까⁠? 지난달 월세는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냈습니다⁠. 여러분 몸으로요⁠. 저희 회사가 그 몸을 손님과 이어 드렸고요⁠. 저는 여러분 몸을 판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회사가 문을 닫으면 다음 달 등록금은 누가 냅니까⁠? 이 법이 무너지면 여러분이 유치장에서 깨어났을 때 변호사는 누가 붙입니까⁠?⁠” 세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도 학교 다닐 때 몸 빌려줬습니다⁠. 그때는 회사도⁠, 계약서도⁠, 보험도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처럼 되지 않게 이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뒷줄에서 한 사람이 앉았다⁠. 헬스 트레이너였다⁠. 이어서 한 사람이 더 앉았다⁠. 찬율은 마이크를 쥔 채 서 있었고⁠, 찬율 옆에는 팔뚝에 글씨가 새겨진 대학생 하나만 남았다⁠.

병곤은 기둥 뒤에서 걸어 나왔다⁠. 카메라들이 다시 돌았다⁠. 편의점 아재가 무대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세창이 병곤을 보고 진행 요원에게 손짓하려다 멈췄다⁠. 기자들이 너무 많았다⁠.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병곤은 마이크 없이 말했다⁠. 스무 해 동안 사고 현장에서 마이크 없이 말해 온 목소리였다⁠. 병곤은 투자사 사람들 앞줄을 봤다⁠. 설명회 안내문의 투자사 명단에 영어 이름이 다섯 있었다⁠. 그중 셋은 지하 2층 단말기의 손님 목록에서 본 이름이었다⁠.

“⁠7월 16일 토요일 밤에 투자사 실사단 세 분이 이 건물 지하 2층에서 빈방 체험을 하셨습니다⁠. 남의 얼굴로 성수동 술집을 도셨고요⁠. 손님 목록에 실사단 체험 세 건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 얼굴들의 주인은 그 시간에 제주도와 부산에 있었습니다⁠. 주인들은 아직 모릅니다⁠.⁠”

통역사가 입을 닫았다⁠. 투자사 대표가 통역사를 봤다⁠. 통역사가 작은 목소리로 옮겼다⁠. 투자사 대표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표는 옆자리 사람과 짧게 말을 주고받더니 서류를 덮고 일어났다⁠. 앞 세 줄이 따라 일어났다⁠.

“⁠미스터 금⁠.⁠” 투자사 대표가 무대를 향해 영어로 짧게 말했다⁠. 통역사가 옮기지 않았는데도 로비의 모든 사람이 알아들었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이었다⁠. 연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온새손해보험 상무가 의자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사장에게 거는 전화였다⁠. 상무는 병곤 곁을 지나가며 걸음을 늦추지 않고 낮게 말했다⁠. “⁠징계위원회는 다음 주야⁠. 날짜 바뀌면 알려 줄게⁠.⁠” 날짜가 바뀔 일이 생겼다는 말투였다⁠. 상무의 휴대전화 화면에 토요일 골프 예약이 떠 있다가 꺼졌다⁠.

*

로비가 흩어지는 동안 세창은 무대 뒤 복도로 걸어갔다⁠. 병곤이 뒤를 따랐다⁠. 복도 끝 비상구 앞에서 세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창은 화면을 보고 잠깐 서 있다가 받았다⁠.

“⁠네⁠, 의원님⁠.⁠”

병곤은 열 걸음 뒤에서 멈췄다⁠. 세창은 병곤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창의 대답만 복도에 울렸다⁠.

“⁠네⁠. 설명회는 끝났습니다⁠. 투자사는 갔습니다⁠.⁠” 세창의 왼손 검지가 밴드 위로 올라갔다⁠. 두드리지 않았다⁠. “⁠제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 이름은 기록 어디에도⁠. 네⁠.⁠”

긴 침묵이 흘렀다⁠. 세창이 비상구 철문에 이마를 댔다⁠.

“⁠제가 다 안고 가라는 말씀이시죠⁠.⁠” 세창이 천천히 되풀이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들은 말을 제 입으로 확인하는 목소리였다⁠. “⁠네⁠, 의원님⁠. 자네가 다 안고 가⁠. 들었습니다⁠.⁠”

세창은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쥔 손이 아래로 늘어졌다⁠. 철문에서 이마를 떼고 돌아서서 병곤을 봤다⁠. 사흘 전 접견실 유리 너머에서 보았던 깍듯한 웃음이 없었다⁠. 대신 세창의 얼굴에 병곤이 아는 표정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허리를 짚을 때 병곤이 짓던 얼굴이었다⁠.

“⁠들으셨죠⁠.⁠” 세창이 말했다⁠.

“⁠들었습니다⁠.⁠”

“⁠고객님이 고객님을 버리는 소리입니다⁠.⁠” 세창은 웃으려다 그만두었다⁠. “⁠부장님⁠, 오늘 밤 열한 시에 접속실로 오세요⁠. 혼자 오시든 경위님이랑 오시든⁠.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침대 두 개 사이에서요⁠.⁠”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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