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28자)

고객님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토요일 새벽 한 시⁠, 병곤은 조사실 책상 위의 자수서를 밀어냈다⁠.

“⁠이건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조사관이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서른 남짓⁠, 눈이 빨갰다⁠. 금요일 밤 당직이 자정을 넘긴 얼굴이었다⁠.

“⁠길병곤 씨⁠, 방금 쓰셨잖아요⁠. 제 앞에서⁠. 지장도 찍으셨고요⁠.⁠”

“⁠제 손이 쓴 건 맞습니다⁠. 제가 쓴 게 아니에요⁠.⁠”

조사관은 한참 병곤을 봤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자수하고 한 시간 만에 번복하시면⁠, 저희는 도주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긴급체포하겠습니다⁠.⁠”

병곤은 저항하지 않았다⁠. 수갑이 손목에 닿았다⁠. 금속이 밴드 위에 겹쳐 채워졌다⁠. 흰 밴드는 불이 꺼져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불이었다⁠.

*

성동경찰서 유치장은 에어컨이 약했다⁠. 맞은편 방에 스물두어 살 청년 하나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병곤이 들어가자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도 자고 일어났더니 여기예요⁠?⁠”

“⁠반대예요⁠. 깨어 있었는데 여기예요⁠.⁠”

청년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병곤을 봤다⁠. 병곤도 청년을 알아봤다⁠. 이 주 전 경찰서 복도에서 수갑을 찬 채 울던 대학생이었다⁠. 눈두덩의 멍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또 왔어요⁠?⁠”

“⁠같은 일로요⁠. 재판 날짜 기다려요⁠. 손님이 누군지 회사가 안 알려 줘요⁠. 개인 정보래요⁠.⁠” 청년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엄마가 그러는데⁠, 법이 생기면 저 같은 사람은 보험으로 처리된대요⁠. 보험 들면 되는 거래요⁠.⁠”

병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새손해보험 특약 7조가 떠올랐다⁠. 청년이 들 보험은 청년을 위한 보험이 아니라 청년의 몸을 빌린 손님을 위한 보험이었다⁠.

밤이 깊자 청년은 벽에 기대 잠들었다⁠. 잠든 얼굴 위로 복도 불빛이 철창 모양의 줄무늬를 그렸다⁠. 병곤은 잠든 청년을 오래 봤다⁠. 자는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다⁠. 일 년 동안 병곤은 자는 사람의 몸을 빌려 바다에 갔고⁠, 자는 사람의 얼굴을 거울로만 봤다⁠.

*

토요일 오후 세 시⁠, 반필구가 노트북을 들고 유치장 면담실에 왔다⁠. 오늘은 근무복 차림이었다⁠. 김밥 대신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민원실 카메라 영상이에요⁠. 과장님은 아직 몰라요⁠. 제가 먼저 받았어요⁠.⁠”

화면 속에서 병곤의 몸이 민원실 의자에 앉아 자수서를 쓰고 있었다⁠. 경찰서 천장 카메라는 편의점 카메라보다 선명했다⁠. 넥타이 무늬까지 보였다⁠. 볼펜을 쥔 오른손의 손목에서 밴드 끝이 초록으로 깜박였다⁠.

“⁠초록이에요⁠.⁠” 필구가 말했다⁠. “⁠제 눈에는요⁠.⁠”

필구가 영상을 넘겼다⁠. 유리문이 열리고 스물다섯 살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찬율의 몸 안의 병곤이었다⁠. 병곤은 화면 속 제 몸이 청년을 보고 일어나는 장면에서 손을 들었다⁠.

“⁠여기서 멈춰 주세요⁠. 소리 키워 주시고요⁠.⁠”

「⁠고객님⁠…⁠… 학생⁠, 진정하세요⁠. 이건 제 일입니다⁠.⁠」

“⁠고객님⁠.⁠” 필구가 따라 했다⁠. “⁠길병곤 씨가 스물다섯 살 대학생을 고객님이라고 부를 일이 있어요⁠?⁠”

“⁠없습니다⁠. 보험사에서는 고객님이라고 안 해요⁠. 청구인이라고 하죠⁠.⁠” 병곤은 화면에 바짝 다가갔다⁠. “⁠조금만 더 넘겨 주세요⁠. 이 손⁠.⁠”

화면 속 병곤의 왼손 검지가 오른쪽 손목의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필구가 같은 장면을 세 번 돌렸다⁠. 세 번 다 두 번이었다⁠.

“⁠금세창 대표 버릇입니다⁠.⁠” 병곤이 말했다⁠.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합니다⁠. 로비에서도⁠, 지하 2층에서도⁠, 병원에서도⁠, 옥상에서도⁠.⁠”

필구는 영상을 멈추고 커피를 마셨다⁠. 오래 마셨다⁠.

“⁠선생님⁠, 이거 들고 판사 앞에 가면 판사가 뭐라고 할지 알아요⁠? 초록 불은 카메라 색이고⁠, 고객님은 말버릇이고⁠, 손가락은 습관이래요⁠. 법에 밴드 불빛이 무슨 뜻인지 한 줄도 없어요⁠. 버릇은 증거가 아니고요⁠.⁠” 필구는 노트북을 덮었다⁠. “⁠찬율 씨는요⁠?⁠”

“⁠어젯밤에 민원실에서 깨서 제일 먼저 물었어요⁠. 제 몸으로 밀가루 먹었냐고⁠.⁠” 필구가 커피잔을 돌렸다⁠. “⁠안 먹었다고 했더니 울더라고요⁠. 처음 와 본 경찰서에서⁠, 처음 보는 아저씨 앞에서⁠. 그러고는 아침에 검찰청 민원실 가서 진술 번복서 냈어요⁠. 지하 2층 화면은 진짜였다고⁠. 「⁠여벌⁠」 연구소 합격 문자는 오늘 오후에 취소됐대요⁠. 문자 한 줄로요⁠.⁠”

병곤은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구천이백십 위에 무언가 더 얹어야 했다⁠. 숫자로는 적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했어요⁠. 「⁠여벌⁠」 금요일 밤 밴드 접속 기록에 압수 영장 신청했어요⁠. 과장님 몰래 검사님한테 직접요⁠. 검사님이 저랑 동기라⁠. 동기가 받아 주면 월요일에 나와요⁠.⁠”

“⁠경위님 정년은요⁠?⁠”

“⁠일 년이요⁠. 아까 일 년에서 하루 줄었어요⁠.⁠” 필구가 일어났다⁠.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메달은 몸 주인이 가져가도⁠, 뛴 건 자기라고⁠. 저도 이번엔 제가 뛰어 보려고요⁠.⁠”

*

일요일 오후⁠, 서휴가 면회를 왔다⁠. 접견실 유리 너머에서 서휴는 앉자마자 수화기를 들었다⁠.

“⁠당신 몸을 또 비웠어⁠?⁠”

“⁠이번엔 경찰이 옆에 있었어⁠.⁠”

“⁠경찰이 옆에 있었는데 당신 몸이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어⁠.⁠” 서휴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수업 때 쓰는 구령의 속도였다⁠. “⁠일 년 동안 산에 간다고 하고 몸을 비웠지⁠. 이번엔 증거 잡겠다고 몸을 비웠지⁠. 당신은 몸을 너무 쉽게 내놔⁠. 남의 몸은 비싸게 빌리면서 자기 몸은 공짜로 내놔⁠.⁠”

병곤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 너머에서 서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뉴스에 나왔어⁠. 자수하는 영상 일부⁠. 누가 흘렸는지 몰라⁠.⁠” 서휴가 휴대전화를 유리에 대고 화면을 보여 주었다⁠. 민원실 의자에 앉은 병곤의 몸이었다⁠. “⁠나 이거 스무 번 봤어⁠. 당신 아니야⁠.⁠”

“⁠알아⁠.⁠”

“⁠들어 봐⁠. 위도범도 아니야⁠.⁠” 서휴가 화면 속 허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청회 때 위도범은 꼬리뼈로 앉았어⁠. 내가 텔레비전으로 봤잖아⁠. 이 사람은 꼿꼿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엉덩이 뼈 두 개로 정확하게⁠. 운동을 오래 한 사람이야⁠. 남한테 보이는 걸 신경 쓰는 사람⁠. 매일 아침 거울 보고 자세 고치는 사람⁠.⁠”

병곤은 접견실 유리에 비친 제 얼굴 너머로 서휴를 봤다⁠. 금세창이 로비에서⁠, 옥상에서⁠, 국회 계단에서 늘 허리를 펴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솜이가 전해 달래⁠.⁠” 서휴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거기 밥 맛없지⁠. 나오면 마라탕⁠. 그리고 아빠 이번 숏폼은 신고 사유 있대⁠. 이번엔 진짜 아빠가 아니니까⁠.⁠”

서휴가 일어나며 손바닥을 유리에 댔다⁠. 병곤은 맞은편에 손바닥을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서휴의 손바닥 자국이 유리에 하얗게 남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

월요일 오전 열 시⁠, 접견실에 금세창이 왔다⁠. 변호인 접견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병곤은 묻지 않았다⁠. 세창은 리넨 셔츠를 입고⁠,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엉덩이 뼈 두 개로 정확하게⁠.

“⁠부장님⁠, 주말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세창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잠깐 말이 없었다⁠. 유리 너머로 병곤을 위아래로 봤다⁠. 사흘 전 제가 입고 있던 몸을 다시 보는 눈이었다⁠.

“⁠고객님 몸⁠,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세창이 말했다⁠. 웃지 않았다⁠. “⁠계단이 힘들었습니다⁠. 경찰서 계단이 다섯 칸밖에 안 되는데요⁠. 허리가 금요일 밤에도 아프시던데⁠, 그런 몸으로 일 년을 출근하셨어요⁠.⁠”

“⁠제 엄지로 지장을 찍으셨죠⁠.⁠”

“⁠제가 찍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세창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왼손 검지가 밴드 위로 올라갔다가⁠, 두드리지 않고 멈췄다⁠. 세창도 영상을 본 것이었다⁠. “⁠부장님⁠, 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곤은 기다렸다⁠.

“⁠목요일이 투자 설명회입니다⁠. 싱가포르 돈이 들어오면 「⁠여벌⁠」은 이천 명이 아니라 이만 명을 먹여 살립니다⁠. 의원님 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그 이만 명이 보험을 받습니다⁠. 몸 빌려준 학생이 유치장에서 깨는 일이 생기면 보험이 변호사를 붙이고⁠, 피해자한테 돈이 나가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부장님 같은 분이 몸으로 막아야 하죠⁠. 그게 공정합니까⁠?⁠”

“⁠빈방은요⁠?⁠”

“⁠빈방이 없으면 회사는 적자입니다⁠. 적자 회사에는 투자가 안 들어옵니다⁠. 투자가 안 들어오면 이천 명이 다음 달 월세를 못 냅니다⁠.⁠” 세창은 숨을 골랐다⁠. “⁠의원님은 제 고객님입니다⁠. 의원님이 무너지면 법이 무너지고⁠, 법이 무너지면 이천 명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부장님 한 분이 집행유예를 받으시는 게⁠, 이천 명이 무너지는 것보다 덜 아프다고 계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양례 씨는요⁠?⁠”

세창이 처음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분께는 오억 드리겠습니다⁠. 목요일에 투자금 들어오는 날⁠. 부장님이 자수를 유지해 주시면 부장님 가족 생활비도 이 년 동안 드리겠습니다⁠. 마이너스 구천이백십⁠, 그것도요⁠.⁠” 세창이 고개를 들었다⁠. “⁠냉장고에 붙어 있다면서요⁠. 찬율 씨가 연구소 동기들한테 말했더군요⁠. 요즘 학생들 빨라요⁠.⁠”

병곤은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냉장고 문의 매직 글씨가 떠올랐다⁠. 서휴의 글씨였다⁠.

“⁠대표님⁠.⁠” 병곤이 말했다⁠. “⁠금요일 밤 열 시 반부터 자정까지⁠, 대표님 몸은 어디 누워 있었습니까⁠?⁠”

“⁠기록에는 집에 있었습니다⁠.⁠”

“⁠대표님 회사 기록은 늘 누가 어디 누워 있었다고 하죠⁠. 일어나서 걸어 다닌 사람은 기록에 하나도 없고요⁠.⁠” 병곤은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제 입으로 고객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학생한테⁠. 제 손가락으로 밴드를 두 번 두드리셨고요⁠. 일 년 동안 제 몸에 서른한 명이 들어왔다 나갔는데⁠, 버릇을 남기고 간 사람은 대표님 하나입니다⁠.⁠”

세창의 얼굴이 굳었다⁠. 이번에는 오래 굳었다⁠. 수화기를 쥔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웃음이 돌아왔다⁠. 깍듯한 웃음이었다⁠.

“⁠버릇은 증거가 아닙니다⁠, 부장님⁠. 부장님이 저보다 잘 아시죠⁠.⁠”

세창이 일어났다⁠. 일어날 때도 허리가 꼿꼿했다⁠.

*

월요일 오후 다섯 시⁠, 반필구가 면담실로 뛰어 들어왔다⁠. 근무복 단추 하나가 풀려 있었다⁠. 손에 출력물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영장 나왔어요⁠. 동기가 받아 줬어요⁠. 「⁠여벌⁠」 금요일 밤 밴드 접속 기록이요⁠.⁠” 필구는 출력물을 책상에 펼쳤다⁠. 숫자와 기호가 줄지어 있었다⁠. 필구가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요⁠. 22시 21분⁠, B1-14 접속⁠. 상대 밴드 번호 A-001⁠. 24시 00분⁠, 주인 귀환으로 밀려남⁠. A-001이 누구 밴드인지 아세요⁠?⁠”

“⁠관리자 밴드요⁠.⁠”

“⁠대표 밴드예요⁠. 회사에 딱 하나⁠.⁠” 필구가 출력물을 병곤 앞으로 밀었다⁠. “⁠금세창 대표는 금요일 밤 열 시 이십일 분부터 자정까지 선생님 몸 안에 있었어요⁠. 밴드가 그렇게 말해요⁠.⁠”

병곤은 출력물을 내려다봤다⁠. 숫자는 차가웠다⁠. 숫자 하나가 일 년 동안 쌓인 거짓말 하나를 덮을 수 있었다⁠.

필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필구는 의자에 앉아 한 박자 쉬었다⁠. 그리고 한 박자를 더 쉬었다⁠.

“⁠근데 검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밴드 기록을 증거로 받아 준 판사가 이 나라에 아직 한 명도 없대요⁠. 법에 밴드가 없으니까요⁠. 내일 오전 열 시가 선생님 구속영장 심사예요⁠. 판사가 이 종이를 숫자로 볼지⁠, 낙서로 볼지는 아무도 몰라요⁠.⁠”

면담실 창문에 저녁 해가 비쳤다⁠. 유리에 출력물을 내려다보는 반백의 남자가 비쳤다⁠. 손목의 밴드는 불이 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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