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6,272자)

밀려나는 시간

주말마다 빌리는 몸 · 여오령

수요일 밤 열한 시⁠, 목동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다⁠. 이솜이 현관 화면을 보더니 거실을 향해 외쳤다⁠.

“⁠아빠⁠, 아빠 몸 주인 왔어⁠. 아니⁠, 아빠가 빌린 몸 주인⁠.⁠”

문 앞에 찬율이 서 있었다⁠. 「⁠여벌⁠」 남색 재킷 대신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손에 쥔 것은 손톱만 한 저장 장치 하나였다⁠. 서휴가 앞치마를 맨 채 나와서 찬율을 위아래로 봤다⁠. 필라테스 강사의 눈이었다⁠.

“⁠어깨 좋네⁠. 우리 남편이 만든 어깨지⁠?⁠”

“⁠네⁠.⁠” 찬율이 대답했다⁠. “⁠제가 만든 건 하나도 없어요⁠.⁠”

서휴는 대답 대신 찬율을 식탁에 앉히고 남은 된장찌개를 데웠다⁠. 찬율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저장 장치를 식탁 가운데 내려놓았다⁠.

“⁠오늘이 마지막 야간 근무였어요⁠. 다음 달부터 연구소라서요⁠. 지하 1층 단말기에서 보관 기록 원본을 복사했어요⁠. 손님들 밴드 번호⁠, 침대 번호⁠, 외출 시각⁠, 돌아온 시각⁠. 지하 2층 화면처럼 예쁘게 정리된 건 아니에요⁠. 회사가 고칠 수 없는 원본이에요⁠. 밴드가 직접 남기는 숫자라서⁠.⁠”

병곤은 저장 장치를 집지 못했다⁠. 찬율이 무엇을 내놓았는지 알았다⁠.

“⁠진술서는요⁠?⁠”

“⁠거짓말이라고 할 거예요⁠. 검찰에서 뭐라고 하든⁠.⁠” 찬율은 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 뜨거워서 눈을 찡그렸다⁠. “⁠장학금은 없어지겠죠⁠. 연구소도요⁠. 대여 계약은 기록 넘긴 순간 해지고 위약금 사백⁠. 거짓 진술했으니 저도 조사받을 거예요⁠. 다 세어 봤어요⁠.⁠”

“⁠왜요⁠?⁠”

찬율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여벌⁠」 대여인 앱이었다⁠. 「⁠특별 대여 요청 · 7월 29일 금요일 · 손님 VIP-03 · 대여료 세 배 · 연구소 입사 전 마지막 대여로 협조 바랍니다 · 대표 금세창⁠」

“⁠대표님이 연구소 들어가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누워 달래요⁠. 세 배 준대요⁠. 손님이 VIP-03이에요⁠.⁠” 찬율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다⁠. “⁠그 아줌마 친 사람이 제 몸을 입고 싶대요⁠. 이번 주 금요일에⁠. 공청회에서 제가 찬성한다고 읽은 법을 만든 사람이요⁠.⁠”

식탁이 조용해졌다⁠. 이솜이 방문 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일 년 동안 제 몸을 쓰면서 한 번도 저를 안 깨웠잖아요⁠. 이번엔 제가 일어나서 할게요⁠.⁠” 찬율은 저장 장치를 병곤 앞으로 밀었다⁠. “⁠등록금은 아저씨가 내 주세요⁠. 위약금도요⁠.⁠”

“⁠그럴게요⁠.⁠”

서휴가 말없이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갔다⁠. 매직 뚜껑을 열었다⁠. 「⁠팔천사백⁠」에 줄을 긋고 밑에 새로 썼다⁠. 「⁠구천이백십⁠」 그러고는 돌아서서 찬율에게 말했다⁠.

“⁠찌개 더 줄까⁠?⁠”

*

목요일 오전⁠, 모르는 번호로 금세창의 전화가 왔다⁠. 병곤은 받기 전에 숨을 한 번 삼켰다⁠.

“⁠부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회원 자격 풀어 드리겠습니다⁠. 공청회 일은 제가 마음에 걸려서요⁠.⁠” 세창의 목소리 뒤에서 이번에는 키보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통화에만 집중하는 목소리였다⁠. “⁠내일 금요일 밤에 찬율 씨가 마지막 대여를 합니다⁠. 연구소 들어가기 전에요⁠. 손님으로 부장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양양까지는 못 가시겠지만 두 시간이라도 그 몸으로 한강을 뛰어 보시죠⁠. 작별 선물입니다⁠.⁠”

“⁠찬율 씨 손님은 VIP-03 아닙니까⁠?⁠”

수화기 너머가 잠깐 비었다⁠. 톡톡⁠, 작은 소리가 두 번 났다⁠.

“⁠찬율 씨가 부장님한테 말했군요⁠.⁠” 세창이 말했다⁠. “⁠의원님은 이번 주 일정이 바뀌셨습니다⁠. 그래서 부장님께 드리는 겁니다⁠. 열 시부터 자정까지⁠. 원하시면 오시고⁠, 아니면 마시고요⁠.⁠”

병곤은 전화를 끊고 한참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세창은 병곤의 몸을 비우고 싶어 했다⁠. 비운 몸으로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랐다⁠. 병곤도 제 몸을 비우고 싶었다⁠. 빈 몸이 초록 불을 켜고 걸어 나가는 순간⁠, 바로 옆에 경찰이 서 있으면 됐다⁠.

*

목요일 저녁⁠, 성수동 김밥집⁠. 반필구는 저장 장치를 노트북에 꽂아 놓고 김밥 한 줄을 다 먹는 동안 화면을 내렸다⁠.

“⁠밴드 번호별 외출 기록이네요⁠. B1-14⁠, 7월 10일 01시 50분 외출⁠, 05시 58분 귀환⁠. 지하 2층 화면이랑 숫자가 같아요⁠.⁠” 필구는 은박지를 접었다⁠. “⁠회사는 이걸 옥찬율 씨가 지어냈다고 할 거예요⁠. 공대생이잖아요⁠. 숫자 만드는 게 일인 사람⁠.⁠”

“⁠그래서 내일 현장을 보셔야 합니다⁠.⁠”

병곤은 계획을 말했다⁠. 금요일 밤 열 시⁠, 병곤은 찬율의 몸으로 들어간다⁠. 병곤의 몸은 보관실 B1-14에 비어 눕는다⁠. 세창이 빈 몸을 빈방으로 내보내면⁠, 몸은 지난번처럼 지하 주차장 쪽문으로 나온다⁠. 밴드에는 초록 불이 켜져 있을 것이다⁠. 몸이 쪽문을 나서는 순간 경찰관 한 사람이⁠, 바로 옆에 앉은 스물다섯 살 청년이 길병곤이라는 것을 보고 있으면 된다⁠.

“⁠제가 내일 비번이에요⁠.⁠” 필구가 말했다⁠. “⁠비번인 경찰이 친구랑 주차장 앞에서 김밥 먹는 건 불법이 아니에요⁠.⁠” 필구는 한 박자 쉬었다⁠. “⁠근데 선생님⁠. 그 대표가 선생님 몸을 왜 비우게 하는지는 생각해 보셨어요⁠?⁠”

“⁠생각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데 몸을 맡기시는 거네요⁠.⁠”

“⁠일 년 동안 매주 그렇게 했습니다⁠.⁠” 병곤이 말했다⁠. “⁠이번엔 아는 사람이 옆에 있잖아요⁠.⁠”

*

금요일 밤 아홉 시 오십 분⁠, 「⁠여벌⁠」 성수 센터 1층 접속실⁠. 침대 두 개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병곤은 이쪽 침대에 제 몸으로 누웠다⁠. 유리벽 너머 침대에 찬율이 누워 있었다⁠. 처음이었다⁠. 접속실에서 몸 주인과 손님이 둘 다 눈을 뜨고 서로를 보는 것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찬율이 유리벽 너머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유리에 막혀 작게 들렸다⁠. “⁠제 몸 잘 쓰세요⁠. 이번엔 물에 들어가지 마시고⁠. 라면도 드시지 마시고⁠.⁠”

“⁠두 시간이에요⁠. 김밥만 먹을게요⁠.⁠”

“⁠김밥에도 밀가루 들어가요⁠. 단무지 말고 햄이요⁠.⁠”

직원이 두 사람의 밴드를 머리맡 단자에 꽂았다⁠. 로비 쪽 유리문 너머에 금세창이 서 있었다⁠. 오늘은 정장 차림이었다⁠. 세창은 병곤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즐거운 두 시간 되십시오⁠. 입 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열 시⁠, 천장의 불이 한 번 깜박였다⁠.

눈을 뜨자 몸이 가벼웠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병곤은 일어나 앉아 유리벽 너머를 봤다⁠. 마흔여섯 살 남자가 누워 있었다⁠. 둥근 얼굴⁠, 넓은 이마⁠, 반백 머리⁠. 손목에서 파란 불이 느리게 깜박였다⁠. 비어 있는 몸이었다⁠. 직원이 침대를 밀어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 병곤은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고 제 몸이 멀어지는 것을 봤다⁠. 일 년 동안 매주 이렇게 보냈을 텐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

밤 열 시 삼십 분⁠, 센터 뒷골목⁠. 반필구의 낡은 승용차 안에서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 쪽문을 보고 있었다⁠. 필구가 김밥 은박지를 벗기며 조수석의 스물다섯 살을 흘끗 봤다⁠.

“⁠선생님 이 몸으로 보니까 좀 잘생기셨네요⁠.⁠”

“⁠제 몸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칭찬 아니에요⁠.⁠” 필구는 김밥을 내밀었다⁠. “⁠햄 빼 드릴까요⁠?⁠”

열 시 사십 분⁠, 쪽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 시 오십 분에도 열리지 않았다⁠. 병곤은 찬율의 무릎을 떨고 있었다⁠. 가벼운 무릎이라 떨림이 컸다⁠. 차 안 백미러에 찬율의 얼굴이 비쳤다⁠. 눈썹이 짙고 턱이 각졌다⁠. 병곤은 찬율의 얼굴이 초조해하는 표정을 처음 봤다⁠. 양양에서는 늘 웃던 얼굴이었다⁠.

열 시 오십이 분⁠, 필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필구가 받았다⁠. 듣는 동안 필구의 얼굴이 굳었다⁠. 김밥 한 알이 손에서 떨어졌다⁠.

“⁠다시 말해 봐⁠. 누가 왔다고⁠?⁠” 필구는 조수석의 청년을 봤다⁠. 오래 봤다⁠. “⁠길병곤이 자수하러 왔다고⁠? 지금 민원실에⁠?⁠”

*

성동경찰서까지는 차로 칠 분이었다⁠. 필구는 신호를 두 번 무시했다⁠. 병곤은 차 문을 열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다리가 가벼워서 계단 세 칸을 한 번에 올랐다⁠. 일 년 동안 양양 모래밭을 달리던 다리였다⁠.

민원실 유리문 너머에 병곤이 앉아 있었다⁠.

둥근 얼굴에 넓은 이마⁠, 옆을 짧게 친 반백 머리⁠, 금테 안경⁠. 남색 정장 바지에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고⁠, 넥타이는 느슨했다⁠. 마흔여섯 살 남자가 당직 경찰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볼펜을 쥐고 있었다⁠. 책상 위에 자수서가 펼쳐져 있었고⁠, 붉은 인주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병곤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흔여섯 살 남자가 고개를 들어 병곤을 봤다⁠. 스물다섯 살 청년을 봤다⁠.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남자는 엄지를 인주에 눌렀다가 자수서 서명 옆에 꾹 찍었다⁠.

“⁠그 사람 제가 아닙니다⁠!⁠” 병곤이 외쳤다⁠. 찬율의 목소리였다⁠. 젊고 높았다⁠. “⁠제가 길병곤입니다⁠! 저 몸이 제 몸이에요⁠!⁠”

당직 경찰관 둘이 일어났다⁠. 한 사람은 병곤을 막고⁠, 한 사람은 자수하는 남자 앞을 가렸다⁠.

“⁠학생⁠, 진정해요⁠. 술 마셨어요⁠?⁠”

“⁠이분 몸 빌린 손님이야⁠.⁠” 뒤따라 들어온 필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몸 주인은 저기 앉아 있는 길병곤 씨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길병곤 씨가 아니야⁠.⁠”

당직 팀장이 필구를 봤다⁠. “⁠경위님⁠, 그럼 이 학생은 누구고 저분은 누군데요⁠?⁠”

“⁠이 학생 안에 길병곤 씨가 있고⁠, 길병곤 씨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고⁠.⁠”

“⁠그럼 몸은 맞는 거네요⁠.⁠” 팀장은 자수서를 집어 들었다⁠. “⁠본인이 왔고⁠, 얼굴 맞고⁠, 지문 맞아요⁠. 자수하겠다는 사람을 막는 경찰이 어디 있어요⁠? 경위님 비번이시잖아요⁠. 들어가 쉬세요⁠.⁠”

자수서를 쓴 남자가 일어났다⁠. 병곤의 몸이 병곤 앞으로 다가왔다⁠. 거울을 볼 때와 같은 높이에서 제 얼굴이 저를 봤다⁠. 다른 점은 하나였다⁠. 눈이 병곤을 내려다봤다⁠. 키는 병곤의 몸이 더 작은데⁠, 눈은 내려다봤다⁠.

“⁠고객님⁠…⁠…⁠” 남자가 말하다가 멈추고⁠, 웃으며 고쳐 말했다⁠. “⁠학생⁠, 진정하세요⁠. 이건 제 일입니다⁠.⁠”

남자의 왼손 검지가 오른쪽 손목의 밴드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밴드 끝에서 초록 불이 깜박였다⁠.

*

남자는 조사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병곤은 민원실 벽시계를 봤다⁠. 열한 시 십 분이었다⁠. 자정까지 오십 분⁠.

필구는 팀장과 싸웠다⁠. 조사를 내일로 미루자고 했다⁠. 팀장은 자수 사건은 당일에 조서를 받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필구는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은 받지 않았다⁠. 필구는 과장에게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필구는 휴대전화를 책상에 내려놓고 병곤을 봤다⁠. 한 박자가 아니라 오래 쉬었다⁠.

“⁠선생님⁠, 센터로 가서 접속을 먼저 끊으면요⁠?⁠”

“⁠접속은 센터 침대에서만 끊어요⁠. 제 몸이 여기 있잖아요⁠. 제 몸이 센터 침대에 누워야 끊깁니다⁠.⁠” 병곤은 벽시계를 봤다⁠. “⁠자정이 되면 저는 어디에 있든 제 몸으로 돌아가요⁠. 그 사람은 밀려나고요⁠. 그 사람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열 시 반에 나와서 열한 시에 지장을 찍은 거예요⁠. 제가 돌아갈 때까지 일을 다 끝내 놓으려고⁠.⁠”

조사실 문 위의 작은 창으로 안이 보였다⁠. 마흔여섯 살 남자가 조사관 앞에서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였고⁠, 가끔 웃었다⁠. 한 번은 손을 들어 안경을 고쳐 썼다⁠. 얼굴을 쓸지 않았다⁠. 머리를 넘기지도 않았다⁠. 병곤의 버릇이 하나도 없는 병곤이었다⁠.

열한 시 오십 분⁠. 병곤은 민원실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 유리문에 앉아 있는 청년이 비쳤다⁠. 짙은 눈썹⁠, 각진 턱⁠, 그을린 목⁠. 찬율의 얼굴이 병곤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스물다섯 살 이마에 마흔여섯 살 주름이었다⁠.

“⁠찬율 씨가 곧 깨요⁠.⁠” 병곤이 필구에게 말했다⁠. “⁠여기서요⁠. 처음 와 본 경찰서에서⁠. 옆에 계셔 주세요⁠. 놀라지 않게⁠. 그리고 밀가루 안 먹었다고 전해 주세요⁠.⁠”

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한 시 오십구 분⁠. 병곤은 벽시계의 초침을 봤다⁠. 일 년 동안 일요일 밤 열 시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언제나 이 순간이 아쉬웠다⁠.

*

천장의 불이 깜박이지는 않았다⁠. 경찰서 형광등은 그대로였다⁠. 대신 몸이 무거워졌다⁠. 이불이 아니라 이불 속 솜이 된 것처럼⁠.

허리가 아팠다⁠. 오른손이 볼펜을 쥐고 있었다⁠. 엄지 끝이 끈적거렸다⁠. 붉은 인주였다⁠. 병곤은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봤다⁠. 넓은 손등⁠, 짧은 손가락⁠, 마흔여섯 살 손이었다⁠. 손목의 밴드는 불이 꺼져 있었다⁠. 주인이 들어 있는 몸이었다⁠.

책상 위에 자수서가 펼쳐져 있었다⁠. 「⁠본인 길병곤은 2039년 7월 10일 새벽 네 시 사십 분⁠, 성수동 뚝섬로 횡단보도에서 술을 마신 채 운전하다 보행자를 치고 달아났음을 자수합니다⁠. 여벌 보관 기록과 관련한 본인의 그간 주장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서명 옆에 지장이 두 개 찍혀 있었다⁠. 병곤의 엄지였다⁠.

맞은편에서 조사관이 노트북을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자⁠, 길병곤 씨⁠. 거의 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한 번만 더 서명해 주세요⁠.⁠”

병곤은 볼펜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사실 문 위의 작은 창 너머⁠, 민원실 의자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이 막 눈을 뜨고 있었다⁠. 청년은 두리번거리다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낯선 중년 경찰관을 보고 겁먹은 얼굴로 무언가를 물었다⁠. 필구가 김밥 은박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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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나는 시간 · 주말마다 빌리는 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