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680자)

매각기일

회귀한 떡볶이집 사장 · 남이랑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오후 네 시⁠, 나는 은행 창구에서 받은 잔액 확인서를 계산대 위에 펼쳐 놓았다⁠. 「⁠4억 3⁠,200만 원⁠」⁠. 2017년 겨울에 비트코인을 팔고 받은 이억 오천⁠, 다섯 해 동안 떡볶이를 볶아 모은 돈⁠, 작년 한 해 배달로 번 돈이 한 줄에 다 들어 있었다⁠. 개업한 지 꼭 다섯 해였다⁠.

내일 아침 열 시⁠, 법원 경매 법정에서 이 건물이 매각된다⁠. 감정가는 십육억 원이었다⁠. 경매를 잘 아는 변호사는 내 계약이 근저당보다 먼저라서 첫 매각기일인데도 사려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 손에 있는 돈에 낙찰 금액의 일부를 빌려주는 대출을 얹으면⁠, 나는 이 건물을 살 수 있었다⁠.

“⁠사장님⁠.⁠” 규성이 행주를 든 채 계산대 앞으로 왔다⁠. 스물여덟 살이 된 규성은 실장 명함을 세 통째 쓰고 있었다⁠. “⁠사장님 이번 생엔 건물 산다면서요⁠.⁠”

“⁠이번 생이라고 했어⁠?⁠”

“⁠사장님이 맨날 그러시잖아요⁠. 이번엔⁠, 이번엔⁠. 그게 이번 생이라는 뜻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야⁠.⁠”

“⁠사장님이 그냥 하시는 말은 다 진짜가 돼요⁠.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규성이 확인서를 내려다보았다⁠. “⁠사세요⁠. 내일 법원 가서 쓰세요⁠. 사장님이 건물주 되시면 저 월세 안 내고 2층에 살아도 돼요⁠?⁠”

“⁠2층은 학원 자리야⁠.⁠”

“⁠학원 나갔잖아요⁠.⁠”

다섯 시⁠, 유리문이 열리고 마정철이 들어왔다⁠. 코트 깃을 세웠고⁠,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마스크 위로 눈이 웃었다⁠.

“⁠내일 법원에서 뵙게 되겠네요⁠.⁠”

“⁠어떻게 아세요⁠?⁠”

“⁠사장님 같은 분이 이 건물을 남에게 넘기실 리가 없으니까요⁠.⁠” 마정철은 의자에 앉지 않고 계산대 앞에 선 채로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이 얼마를 쓰시든 저희는 그보다 한 장 더 씁니다⁠. 사장님 계약 남은 다섯 해를 떠안고도 저희에게는 남는 장사입니다⁠. 그 다섯 해가 끝나면 1층이 저희 것이니까요⁠.⁠”

“⁠알아요⁠. 다섯 해 뒤 3월 9일이요⁠.⁠”

“⁠날짜까지 아시네요⁠.⁠”

“⁠계약서에 쓰여 있잖아요⁠.⁠”

“⁠예⁠, 그렇죠⁠.⁠” 마정철이 서류 봉투를 툭 두드렸다⁠. “⁠소창훈 사장님께 드릴 것이 있어서 위층에 갑니다⁠. 사장님은 내일 아침 수표 챙기시고요⁠. 매수신청보증금은 최저매각가격의 10퍼센트입니다⁠.⁠”

“⁠친절하시네요⁠.⁠”

“⁠늘 그렇습니다⁠.⁠”

마정철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창훈 씨의 목소리가 마정철을 맞았다⁠. 반가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

밤 아홉 시⁠, 창훈 씨가 내 가게 유리문을 두드렸다⁠. 손에 마정철이 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사장님⁠, 보여 달라고 하셨잖아요⁠. 올라와 주세요⁠. 엄마 앞에서 같이 봐요⁠.⁠”

3층 부엌 식탁에 명옥 여사가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식탁에 요양병원 영수증이 여전히 한 귀퉁이를 덮고 있었다⁠. 창훈 씨가 종이를 식탁 한가운데 펼쳤다⁠.

「⁠연대보증 채무 면제 확약서 — 소창훈의 연대보증 채무를 면제한다⁠. 단⁠, 2021년 3월 9일 자정까지 1층 임차인의 명도 합의서와 건물 매매계약서가 갖추어질 것을 조건으로 한다⁠」

명옥 여사가 돋보기를 쓰고 종이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돋보기를 벗지 않고 아들을 보았다⁠.

“⁠연대보증이 뭐냐⁠?⁠”

“⁠엄마⁠.⁠”

“⁠네 회사 빚에 네가 또 보증을 섰다는 거냐⁠?⁠”

“⁠엄마 건물 담보로 빌린 돈 말고⁠, 홍떡에서 공사 대금 미리 받은 거⁠. 그것도 내가 갚아야 돼⁠. 일억 이천⁠.⁠” 창훈 씨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엄마한테 안 말했어⁠. 넉 달 이자 밀린 것도 안 말했고⁠, 상암점 공사 잘린 것도 안 말했고⁠, 직원들 월급 석 달 못 준 것도⁠. 엄마한테 이번엔 진짜라고 했잖아⁠. 열 번 했어⁠. 열 번 다 거짓말이었어⁠.⁠”

부엌이 조용해졌다⁠. 냉장고가 웅 하고 돌았다⁠. 명옥 여사의 손이 식탁 위 영수증 더미 위에 얹혀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받으면⁠.⁠” 창훈 씨가 확약서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내 보증 빚은 없어지고⁠, 엄마는 건물 시세대로 팔고⁠, 아버지 병원비도 남아⁠. 사장님만 나가면 돼⁠. 오늘 자정까지⁠.⁠”

창훈 씨가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훈 씨가 고개를 숙였다가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 나 이거 안 할래⁠.⁠”

명옥 여사가 처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왜⁠?⁠”

“⁠이거 받으면 나는 살아⁠. 근데 엄마는 마흔 해 산 집을 내 빚 때문에 판 사람이 돼⁠. 사장님은 내 빚 때문에 쫓겨난 사람이 되고⁠. 홍떡은 다 가져가고⁠.⁠” 창훈 씨가 확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다시 반으로 찢었다⁠. 손이 떨려서 세 번째는 잘 안 찢겼다⁠. “⁠나는 신용불량자 되면 돼⁠. 회사 접고 직원들한테 가서 무릎 꿇으면 돼⁠.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명옥 여사가 일어났다⁠. 지팡이 없이 일어났다⁠. 식탁을 짚은 손이 하얗게 떴다⁠. 아들 앞까지 걸어갔다⁠. 손을 들었다⁠. 때리지 않았다⁠. 아들 정수리에 손을 얹고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다⁠. 쉰한 살 아들의 머리가 어머니 손바닥 아래에서 숙여졌다⁠.

“⁠이 머리로 사업을 했으니⁠.⁠”

“⁠미안해⁠, 엄마⁠.⁠”

“⁠미안한 줄은 아네⁠.⁠”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잔액 확인서를 꺼내 식탁 위⁠, 찢어진 확약서 조각 옆에 놓았다⁠.

“⁠창훈 씨⁠, 이 돈 빌려 드릴게요⁠. 홍떡 대출 원금하고 밀린 이자 다 해서 사억 삼천이죠⁠. 내일 아침 은행 문 열면 바로 갚으세요⁠. 빚을 다 갚으면 홍떡은 경매를 거둘 수밖에 없어요⁠. 매각기일 전에만 갚으면 돼요⁠.⁠”

명옥 여사가 아들 머리에서 손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안 받는다⁠.⁠”

“⁠여사님 드리는 거 아니에요⁠. 창훈 씨한테 빌려 드리는 거예요⁠.⁠”

“⁠세입자 돈으로 내 집을 지키라고⁠? 세입자한테 빚진 건물주가 어딨어⁠.⁠”

“⁠여기요⁠. 내일부터요⁠.⁠”

“⁠너 이 돈이면 내일 이 건물 살 수 있잖아⁠.⁠”

명옥 여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따져 보았다⁠. 내일 내가 건물을 사면⁠, 나는 건물주가 된다⁠. 명옥 여사는 마흔 해 산 집에서 세입자가 된다⁠. 홍떡이 나보다 한 장 더 쓰면⁠, 나는 아무것도 못 사고 명옥 여사는 집을 잃는다⁠. 어느 길이든 명옥 여사는 3층에서 내 눈치를 보거나 3층을 떠났다⁠. 이 돈으로 명옥 여사를 3층에 둘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안 사려고요⁠.⁠”

“⁠바보냐⁠?⁠”

“⁠그리고 건물엔 근저당 안 잡을게요⁠. 잡으면 저도 홍떡이에요⁠.⁠”

창훈 씨가 확인서를 두 손으로 들었다⁠. “⁠사장님⁠, 나 이거 언제 갚을지 몰라요⁠.⁠”

“⁠천천히 갚으세요⁠. 이자는 떡볶이로 받을게요⁠. 한 달에 한 그릇씩 드시러 오세요⁠.⁠”

“⁠사장님 떡볶이 맛있잖아요⁠. 나 그럼 매일 와요⁠.⁠”

“⁠한 달에 한 그릇이요⁠.⁠”

명옥 여사가 지팡이를 집었다⁠. 식탁 위 찢어진 종이 조각을 손바닥으로 쓸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 뚜껑이 탁 닫혔다⁠.

*

3월 10일 수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은행 셔터 앞에 우리 셋이 서 있었다⁠. 나⁠, 창훈 씨⁠, 규성⁠. 규성은 왜 따라왔는지 묻자 무서워서 혼자 가게에 못 있겠다고 했다⁠. 아홉 시 정각에 셔터가 올라갔다⁠. 창구 직원이 금액을 보고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고객님⁠, 이 금액은 인터넷으로는 한도가 안 돼서요⁠. 확인 절차가 좀 걸립니다⁠.⁠”

“⁠얼마나요⁠?⁠”

“⁠삼십 분쯤이요⁠.⁠”

경매 법정은 열 시에 문을 열었다⁠. 은행에서 법원까지 택시로 이십 분⁠. 규성이 휴대전화 시계를 보며 발을 굴렀다⁠.

“⁠사장님⁠, 이거 영화면 지금 노래 나와요⁠.⁠”

“⁠노래 틀지 마⁠.⁠”

창훈 씨는 창구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로 직원 넷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직원은 받지 않았고⁠, 두 번째 직원은 받자마자 월급 얘기를 했다⁠. 창훈 씨는 “⁠다음 주에 다 줄게⁠. 이번엔 진⁠…⁠…⁠.⁠” 하다가 말을 끊었다⁠. “⁠다음 주에 회사 접는다⁠. 밀린 월급은 내가 일해서 갚는다⁠. 미안하다⁠.⁠” 전화를 끊고 창훈 씨는 휴대전화를 무릎에 엎어 놓았다⁠.

규성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사장님⁠, 이 장면도 아세요⁠? 이렇게 되는 거 미리 아셨어요⁠?⁠”

“⁠아니⁠. 이건 처음 봐⁠.⁠”

“⁠진짜요⁠?⁠”

“⁠첫 생에서 나는 오늘 철판 앞에 있었어⁠. 법원 근처에도 안 왔어⁠.⁠”

규성이 한참 나를 보았다⁠. 첫 생이라는 말을 처음 소리 내어 한 것이었다⁠. 규성은 무섭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은행 번호표를 한 장 더 뽑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대기 인원 0명⁠」⁠.

“⁠사장님 모르는 거⁠, 저도 처음이라 다행이에요⁠.⁠”

아홉 시 이십팔 분⁠, 화면에 「⁠상환 완료⁠」가 떴다⁠. 창훈 씨는 홍떡 법무팀에 전화를 걸어 상환 사실을 알리고 확인서를 사진으로 보냈다⁠. 홍떡이 법원에 경매 취하서를 내야 경매가 멈춘다고 변호사가 말했다⁠. 우리는 택시를 탔다⁠.

아홉 시 오십삼 분⁠, 법원 경매 법정 앞 복도에 사람들이 입찰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복도 끝 창가에 마정철이 있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흰 봉투가 보였다⁠. 마정철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법무팀 문자를 막 받은 얼굴이었다⁠.

“⁠문 사장님⁠.⁠”

“⁠팀장님⁠, 아니 본부장님⁠.⁠”

“⁠어느 직함이든 괜찮습니다⁠.⁠” 마정철이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얼굴은 화나 있지 않았다⁠. “⁠방금 법무팀이 취하서를 냈다고 합니다⁠. 빚을 다 받았으니 저희가 경매를 계속할 근거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지셨습니다⁠. 아니⁠, 이기셨네요⁠.⁠”

“⁠지지도 이기지도 않았어요⁠.⁠”

“⁠사장님⁠.⁠” 마정철이 입찰 봉투를 꺼내 반으로 접었다⁠. “⁠그 돈이면 오늘 이 건물을 사셨을 겁니다⁠. 저보다 한 장 더 쓰셨으면 저는 더 쓰지 않았을 거고요⁠. 사장님은 건물주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왜 남의 빚을 갚으셨습니까⁠?⁠”

“⁠제가 건물주 되면 여사님이 제 세입자가 되잖아요⁠.⁠”

“⁠그게 무엇이 나쁩니까⁠?⁠”

“⁠여사님이 떡볶이를 안 드세요⁠.⁠”

마정철이 한참 나를 보다가 웃었다⁠. 처음으로 공손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다섯 해 뒤에 뵙겠습니다⁠. 그때는 근저당도 경매도 없이⁠, 그냥 좋은 값을 들고 오겠습니다⁠.⁠”

열 시 정각⁠, 법정 안에서 집행관이 사건 번호를 불렀다⁠. 우리 건물 번지수가 나왔다⁠. 이 사건은 취하되었습니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 몇이 입찰 봉투를 접었다⁠. 창훈 씨가 복도 벽에 이마를 대고 한참 서 있었다⁠. 규성은 창훈 씨 등을 두드리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사장님⁠, 노래 틀어도 돼요⁠?⁠”

“⁠이제 틀어⁠.⁠”

*

오후 세 시⁠, 명옥 여사가 지팡이를 짚고 가게로 내려왔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었다⁠. 명옥 여사는 개업한 지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홀 의자에 앉았다⁠. 창가 자리였다⁠.

“⁠창훈이한테 들었다⁠. 거뒀다며⁠.⁠”

“⁠네⁠.⁠”

“⁠네 통장에 얼마 남았니⁠?⁠”

“⁠이백이요⁠.⁠”

명옥 여사가 지팡이 손잡이를 두 손으로 감쌌다⁠.

“⁠월세 올린다⁠.⁠”

규성이 튀김 집게를 떨어뜨렸다⁠. 나는 철판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여사님⁠?⁠”

“⁠다음 달부터 5퍼센트 올린다⁠. 네 빚 갚으려고⁠.⁠”

“⁠그 돈이 제 돈이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네 빚을 갚는 거다⁠. 나는 남한테 빚지고는 못 산다⁠. 창훈이가 갚을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내가 먼저 죽는다⁠.⁠” 명옥 여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쳤다⁠. “⁠네 돈을 네 월세로 받아서 네 빚으로 갚는 거다⁠. 이자는 안 쳐준다⁠.⁠”

“⁠여사님⁠, 그거 그냥 제 돈이 한 바퀴 도는 거예요⁠.⁠”

“⁠한 바퀴 돌면 깨끗하다⁠.⁠”

명옥 여사가 일어났다⁠. 창가 의자가 드르륵 밀렸다⁠. 계단 쪽으로 가다가 계산대 앞에서 멈추고 벽의 시계 두 개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는 월세 날 보고 하나는 월급날 보라고 했지⁠.⁠”

“⁠네⁠.⁠”

“⁠이제 하나는 빚 갚는 날 봐라⁠.⁠”

명옥 여사가 계단을 올라갔다⁠. 지팡이 소리가 계단 하나에 한 번씩 났다⁠. 나는 잔액 이백만 원이 찍힌 통장을 계산대 서랍 맨 밑에 넣었다⁠. 다섯 해 전 비트코인 비밀번호 쪽지가 있던 자리였다⁠. 철판에 불을 켰다⁠. 고추기름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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