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712자)

천구백팔십칠 명

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 문채겸

맹서흔은 동생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었다⁠. 금요일 밤 아홉 시⁠, 서흔네 거실 소파에서였다⁠.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고⁠, 식탁에는 해린이 사 온 족발이 식어 가고 있었다⁠. 서흔은 족발 대신 형우의 얼굴을 보았다⁠. 동생 남편은 하늘색 와이셔츠 소매를 걷은 채 손목의 낡은 시계만 자꾸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형부가⁠.⁠” 서흔이 천천히 말했다⁠. “⁠은행에서 무슨 데이터를 봤는데⁠, 우리 단지가 2023년 여름부터 떨어진다고⁠.⁠”

“⁠응⁠. 지점에 그런 자료가 있대⁠.⁠” 해린이 족발 접시를 서흔 앞으로 밀었다⁠. 해린은 오는 차 안에서 형우에게 다짐을 받았다⁠. 미래에서 왔다는 말은 언니한테 하지 말 것⁠. 언니는 그런 말을 들으면 보험 약관부터 꺼내는 사람이라고⁠.

“⁠해린아⁠, 너 윤슬바이오 거래정지 맞힌 것도 그 데이터야⁠?⁠”

해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흔이 형우를 보았다⁠. 형우는 시계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었다⁠.

“⁠처형⁠, 협의회 단톡방 다음 주 월요일에 몇 명 돼요⁠?⁠”

“⁠그걸 형부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 천구백팔십두 명인데⁠.⁠”

“⁠천구백팔십칠 명이요⁠. 다섯 명이 더 들어오고⁠, 그중 한 사람이 첫 인사로 다단계 화장품 링크를 올려요⁠. 처형이 강퇴하고 공지를 하나 더 달아요⁠. 「⁠홍보 글 금지⁠」⁠”

서흔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끝에 휴대전화를 집어 단톡방 인원을 확인했다⁠. 천구백팔십두 명⁠. 서흔은 화면을 형우에게 흔들어 보이고 족발을 한 점 집었다⁠.

“⁠형부⁠, 월요일에 봐요⁠. 맞으면 내가 운영진 모임에 형부 자리 하나 만들게⁠. 은행원 특강으로⁠.⁠”

월요일 오전 열한 시⁠, 서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화면 캡처 한 장이었다⁠. 「⁠협의회장님이 ○○화장품매니저님을 내보냈습니다⁠」 화면 아래에 서흔이 쓴 공지가 보였다⁠. 「⁠홍보 글 금지⁠」 인원 칸에는 천구백팔십칠 명이 찍혀 있었다⁠. 캡처 밑에 서흔의 말이 한 줄 붙어 있었다⁠. 「⁠형부 무서워요⁠」

*

10월 둘째 주 토요일⁠, 협의회 운영진 모임은 동탄역 근처 스터디카페의 유리 회의실에서 열렸다⁠. 화이트보드에 서흔의 글씨로 안건이 적혀 있었다⁠. 「⁠1⁠. 줄눈 공동구매 업체 선정 2⁠. 협의회 굿즈 에코백 색상 3⁠. 은행원 형부 특강(⁠10분⁠)⁠」

운영진은 열두 명이었다⁠. 신혼집으로 들어간다는 부부⁠, 아이 둘을 학교 앞으로 보내려는 엄마⁠, 수원의 구축 아파트를 팔고 갈아탄다는 오십 대 부회장⁠, 회의 내내 노트북으로 차트를 보는 총무⁠. 1번 안건에서 줄눈 색을 두고 이십 분이 지나갔다⁠. 흰색은 때가 탄다⁠, 회색은 촌스럽다⁠, 금색 펄은 호텔 같다⁠. 2번 안건에서 에코백 색이 연두로 정해졌을 때 부회장이 박수를 쳤다⁠.

“⁠3번⁠, 우리 동생 남편이에요⁠. 새마루은행 과장님⁠. 우리 중도금 대출 해 주는 지점⁠.⁠” 서흔이 형우에게 손짓했다⁠. “⁠십 분이에요⁠, 형부⁠. 넘으면 에코백 하나 사셔야 돼요⁠.⁠”

형우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갔다⁠. 유리벽 너머 열람실에서 수험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형우는 노트북을 연결하지 않았다⁠. 숫자를 많이 보여 주면 사람들은 숫자만 볼 것이었다⁠.

“⁠지난 8월에 기준금리가 한 번 올랐습니다⁠. 다음 달에 한 번 더 오릅니다⁠. 내년에는 미국이 크게 올립니다⁠. 우리 단지 잔금은 2023년 봄이고⁠, 그때 잔금 대출 금리는 지금의 두 배가 넘습니다⁠.⁠” 형우는 화이트보드에 숫자 하나만 적었다⁠. 분양가 8억 9천만 원⁠. “⁠입주하고 몇 달 지나면⁠, 시세가 이 숫자 밑으로 내려갑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했다⁠. 부회장이 먼저 웃었다⁠.

“⁠과장님⁠, 지금 우리 단지 분양권에 웃돈이 얼마 붙었는지 아세요⁠? 오천이에요⁠. 다음 달이면 칠천⁠. 다들 이걸 못 사서 난리인데⁠.⁠”

“⁠입주하면 빠집니다⁠.⁠”

“⁠빠지는 단지도 있겠죠⁠. 우리 단지는 학교가 바로 앞이에요⁠.⁠” 학교 앞 엄마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과장님⁠, 과장님 와이프도 102동 계약하셨다면서요⁠. 자기 집 떨어진다는 말을 왜 남의 집 사람들 앞에서 해요⁠?⁠”

총무가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부린이 형부시네⁠.⁠”

“⁠부린이가 뭐예요⁠?⁠” 신혼부부의 남편이 물었다⁠.

“⁠부동산 어린이요⁠. 초보⁠.⁠” 총무가 키보드를 탁 쳤다⁠. “⁠방금 별명 지었어요⁠.⁠”

회의실에 웃음이 퍼졌다⁠. 서흔도 웃었다⁠. 웃다가 형우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고 화이트보드 지우개를 만지작거렸다⁠. 형우는 마커 뚜껑을 닫았다⁠. 처음 살았던 2023년 가을⁠, 이 단톡방에는 「⁠입주 포기합니다⁠, 잔금 대출이 안 나와요⁠」라는 글이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왔다⁠. 올라온 글 가운데 하나는 지금 팔짱을 낀 학교 앞 엄마의 것이었다⁠.

“⁠그리고요⁠, 과장님⁠.⁠” 총무가 드디어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 주었다⁠. 빨간 막대가 오른쪽 위로 이어진 차트였다⁠. “⁠이거 휘담디앤씨예요⁠. 우리 시행사⁠. 완판하고 나서 40퍼센트 올랐어요⁠. 웃돈 뉴스 날 때마다 같이 뛰어요⁠. 우리 운영진은 이거 우리 단지 주식이라고 불러요⁠. 집 한 채 사고 주식으로 이자 내는 거죠⁠.⁠”

“⁠누가 사라고 했습니까⁠?⁠”

“⁠구 대표님이 운영진 모임 때마다 귀띔해 주세요⁠. 오늘도 오시기로 했는데⁠.⁠”

회의실 문이 열렸다⁠. 구경렬이 연두색 에코백 시안 한 묶음과 홍삼 사탕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운영진이 일어나 인사했다⁠. 경렬은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사탕을 나눠 주다가 화이트보드 앞의 형우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아이고⁠, 반 과장님⁠. 특강 중이셨어요⁠? 제가 끊었네⁠.⁠”

“⁠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 하셨어요⁠?⁠” 경렬이 화이트보드의 8억 9천만 원을 보았다⁠. 숫자 아래 형우가 그어 둔 아래 화살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떨어진다고⁠. 과장님은 꾸준하시네⁠.⁠”

운영진 몇이 웃었다⁠. 경렬은 화이트보드 옆으로 가서 형우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이 한 화면 안에 들어가자⁠, 열두 명의 눈이 둘 사이를 오갔다⁠.

“⁠여러분⁠, 제가 오늘 좋은 소식 하나 들고 왔어요⁠.⁠” 경렬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난주 102동 1403호 분양권 거래됐습니다⁠. 웃돈 칠천⁠.⁠”

박수가 터졌다⁠. 학교 앞 엄마가 휴대전화를 꺼내 단톡방에 바로 올렸다⁠. 서흔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형우의 휴대전화도 울렸다⁠. 폭죽이 화면을 밀어 올렸다⁠. 1403호는 해린의 1503호 바로 아래층이었다⁠.

“⁠누가 샀는데요⁠?⁠” 형우가 물었다⁠.

“⁠네⁠?⁠”

“⁠칠천 얹어서 누가 샀냐고요⁠. 실거주입니까⁠?⁠”

경렬이 웃음을 거두지 않고 형우를 보았다⁠. “⁠과장님⁠, 그건 개인정보죠⁠. 은행원이 저보다 더 잘 아시면서⁠.⁠” 경렬이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낮춘 목소리도 회의실 끝까지 갔다⁠. “⁠그리고 그 매수인 분⁠, 중도금 대출 승계는 과장님 지점에서 받으셨을 텐데요⁠. 과장님 책상에 서류 있을 거예요⁠.⁠”

회의실이 웃음으로 다시 찼다⁠. 총무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부린이 형부⁠, 자기 지점 서류도 안 봄⁠.⁠” 부회장이 총무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구 대표님⁠.⁠” 형우가 말했다⁠. “⁠이 단지⁠, 두 해만 오릅니다⁠.⁠”

경렬의 눈이 형우의 얼굴에서 잠깐 멈췄다⁠. 처음 상담실에서 형우가 두 해라고 말했을 때와 같은 눈이었다⁠. 경렬은 곧 웃었다⁠.

“⁠두 해면 충분하죠⁠. 두 해 동안 칠천이 일억이 되고⁠, 일억이 일억 오천이 되는데⁠.⁠” 경렬이 운영진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두 해 뒤에 저 찾아오세요⁠. 제가 그때 다들 밥 한 번씩 살게요⁠.⁠”

운영진이 다시 박수를 쳤다⁠. 서흔은 박수를 치지 않고 형우를 보았다⁠. 경렬이 서흔에게 사탕 봉지를 통째로 건네며 말했다⁠. “⁠회장님⁠, 휘담디앤씨는 아직이에요⁠. 다음 웃돈 뉴스 때 한 번 더 갑니다⁠.⁠”

*

모임이 끝나고⁠, 서흔이 스터디카페 계단에서 형우를 붙잡았다⁠. 계단참 창문으로 동탄역 광장의 저녁이 보였다⁠. 역 앞 전광판에 뉴스가 흘렀다⁠. 「⁠중국 대형 부동산 개발사 채무 불이행 우려 확산⁠」 서흔은 전광판을 등지고 있었다⁠.

“⁠형부⁠. 나 솔직하게 물을게요⁠.⁠” 서흔이 이름표를 목에서 벗어 손에 쥐었다⁠. “⁠형부 진짜 그 데이터 봤어요⁠? 아니면 해린이 주식 맹한 거 수습하려고 둘이 말 맞춘 거예요⁠?⁠”

“⁠처형⁠, 처형네 휘담디앤씨 얼마 샀어요⁠?⁠”

“⁠이천⁠. 남편 몰래⁠.⁠” 서흔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집안 여자들 왜 이래⁠.⁠”

“⁠팔아요⁠. 지금은 올라 있잖아요⁠.⁠”

“⁠지금 팔면 운영진들이 뭐라 그래요⁠. 회장이 제일 먼저 판다고⁠.⁠” 서흔이 이름표를 다시 목에 걸었다⁠. “⁠형부⁠, 나 마흔 가구 데려왔어요⁠. 형부 말이 맞으면⁠, 그 마흔 집이 나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부 말이 틀려야 돼요⁠. 알아요⁠?⁠”

형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흔이 형우의 왼손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시계 위로 숫자가 바뀌었다⁠.

「⁠−318⁠,000⁠,000⁠」

서흔네 집은 2027년 10월 16일에 삼억 천팔백만 원을 빚지고 있었다⁠. 형우네보다 깊었다⁠. 서흔이 손을 놓자 숫자가 형우의 것으로 돌아왔다⁠.

“⁠증명해 봐요⁠.⁠” 서흔이 말했다⁠. “⁠데이터든 뭐든⁠. 증명하면 나도 이천 가구 앞에 설게요⁠. 대신 틀리면⁠, 형부 에코백 백 개 사요⁠.⁠”

*

집에 돌아오니 해린이 거실 바닥에 앉아 새결의 받아쓰기 공책에 줄을 긋고 있었다⁠. 입학 전에 미리 연습시킨다는 공책이었다⁠. 해린은 형우를 보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화면에 단톡방이 떠 있었다⁠. 누군가 올린 글에 웃는 이모티콘이 수십 개 달려 있었다⁠. 「⁠오늘 운영진 특강 후기⁠: 부린이 형부께서 우리 단지 반토막 난다고 하심ㅋㅋ 근데 본인 와이프도 계약자라는 게 함정⁠」

“⁠당신 지금 우리 단지에서 유명해⁠.⁠” 해린이 말했다⁠. “⁠축하해⁠.⁠”

“⁠처형이 증명해 보라더라⁠.⁠”

“⁠증명하지 마⁠.⁠” 해린이 공책을 덮었다⁠. “⁠당신이 떠들수록 웃돈이 안 붙어⁠. 우리는 꼭대기에서 팔아야 돼⁠. 꼭대기가 낮아지면 우리 손해야⁠. 언니한테는 내가 따로 말할 거야⁠. 언니는 언니 집만 팔면 되잖아⁠.⁠”

“⁠처형이 데려온 집이 마흔 가구야⁠.⁠”

“⁠그 사람들도 꼭대기에서 팔면 돼⁠.⁠” 해린이 말하고 나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천 가구가 다 꼭대기에서 팔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사야 했다⁠. 해린은 뒷말을 하지 않고 새결의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연필 깎는 소리가 거실에 오래 났다⁠.

방문이 열리고 새결이 받아쓰기 공책을 가지러 나왔다⁠. “⁠엄마⁠, ‘⁠집⁠’은 받침이 뭐야⁠?⁠”

“⁠비읍⁠.⁠” 해린과 형우가 동시에 대답했다⁠. 새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공책에 비읍을 크게 썼다⁠.

*

월요일 아침⁠, 형우는 지점에 가장 먼저 출근했다⁠. 경비 아저씨가 셔터를 반쯤 올리다가 형우를 보고 놀랐다⁠. 형우는 책상 밑의 서류 상자를 열었다⁠. 집단대출 서류 사이에⁠, 분양권을 산 사람이 중도금 대출을 넘겨받으려고 낸 승계 서류가 따로 묶여 있었다⁠. 열한 건이었다⁠. 형우는 102동 1403호를 찾았다⁠. 매수인은 서른두 살 남자였고⁠, 직장은 「⁠단비디자인⁠」이라는 인테리어 회사였다⁠.

형우는 다른 승계 서류를 차례로 넘겼다⁠. 웃돈이 오천을 넘긴 거래가 넷이었다⁠. 그중 105동 803호 매수인은 마흔 살 여자였고⁠, 직장은 화성의 물류 회사였다⁠. 형우는 두 서류의 연락처 칸을 나란히 놓았다⁠. 휴대전화 번호 끝 네 자리가 같았다⁠. 앞자리도 같았다⁠. 한 사람의 번호를 다른 사람이 연락처로 적어 놓았다⁠.

상칠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형우 책상에 한 잔을 놓았다⁠. “⁠형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주식 장도 안 열었는데⁠.⁠”

“⁠상칠아⁠. 이 승계 서류 결재⁠, 누가 올렸어⁠?⁠”

상칠이 서류 귀퉁이의 결재 도장을 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하기 전에 지점장실 문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지점장실 문은 닫혀 있었다⁠. 퍼팅 매트 위로 공이 굴러가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지점장님이 직접 했지⁠. 형 휴가 갔던 주에⁠. 예외 승인으로⁠.⁠” 상칠이 목소리를 낮췄다⁠. “⁠형⁠, 이거 왜 봐⁠?⁠”

형우는 두 장의 연락처 칸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상담실의 흰 탁자에서 도장 자리를 덮던 손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손가락을 떼어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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