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21자)

견본주택

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 문채겸

2차 견본주택의 거실 모형은 2027년에 형우가 본 것과 똑같았다⁠. 실물 크기로 지은 84제곱미터 집의 거실에 회색 소파가 놓여 있었고⁠, 소파 앞 유리 탁자 위에는 플라스틱 사과 세 개가 나무 그릇에 담겨 있었다⁠. 벽에 붙은 텔레비전은 진짜였다⁠. 화면에 2차 단지 조감도가 천천히 돌았다⁠. 베란다 창에는 진짜 하늘 대신 강변 사진을 인쇄한 커다란 필름이 붙어 있었다⁠.

형우는 두 시 반에 견본주택 입구에 닿았다⁠. 입구 가격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84제곱미터 9억 4천만 원⁠. 2027년 10월 16일에 형우가 읽은 숫자와 한 자리도 다르지 않았다⁠. 경렬은 네 해 반 뒤에 붙일 가격을 오늘 이미 붙여 두었다⁠. 안쪽 상담 구역에는 흰 탁자가 줄지어 있었고⁠, 압수수색 뉴스가 나간 지 한 달이 됐는데도 탁자 두 개에 젊은 부부가 앉아 있었다⁠. 상담 직원이 홍삼 사탕을 밀어 놓는 손이 보였다⁠. 형우는 흰 탁자들을 지나가면서 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썼다⁠. 왼쪽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서른일곱 살의 가슴이었다⁠.

입구 밖 화단 옆에서 치윤이 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솜은 화장실에 갔다고 했다⁠. 치윤은 조끼 주머니의 볼펜을 하나씩 뺐다가 다시 꽂았다⁠.

“⁠과장님⁠. 저 오늘 말하는 거⁠, 과장님 위해서 하는 거 아니에요⁠.⁠” 치윤이 말했다⁠. “⁠저희 집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2차 상담 받으러 온 사람들⁠. 저희 같은 사람들⁠.⁠”

“⁠압니다⁠.⁠”

“⁠아시면 됐어요⁠.⁠” 치윤이 볼펜을 다 꽂고 조끼 단추를 잠갔다⁠. “⁠맞죠⁠?⁠”

5월 둘째 토요일 오후 세 시⁠, 견본주택 대회의실에 의자를 다 깔지 못해서 총회는 거실 모형 앞으로 옮겨졌다⁠. 협의회 사람들은 모형 거실과 모형 주방⁠, 모형 아이 방 문턱까지 빽빽하게 섰고⁠, 몇은 모형 소파에 앉았다가 직원에게 일어나 달라는 말을 들었다⁠. 이백 명 남짓이었다⁠. 연두색 에코백이 여기저기 보였다⁠. 부회장은 쪼갠 우드락을 테이프로 다시 붙여 들고 왔다⁠.

서흔은 모형 거실 한가운데 접이식 탁자 앞에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탁자 왼편에 경렬과 변호사가⁠, 오른편에 형우와 치윤⁠, 하솜이 앉았다⁠. 하솜은 석 달 된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 왔다고 했다⁠. 셔츠 어깨에 아기 침 자국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서흔의 목소리가 모형 거실의 낮은 천장에 부딪혔다⁠. “⁠규칙은 하나예요⁠. 말하는 사람 말 끊지 말기⁠. 끊으면 마이크 꺼요⁠. 진짜로 꺼요⁠.⁠”

“⁠회장님 그 말 작년에도 했어요⁠.⁠” 총무가 말했다⁠. 몇 사람이 웃었다⁠. 오래간만에 나는 웃음이었다⁠.

*

경렬이 먼저 일어났다⁠. 오늘은 재킷 대신 하늘색 셔츠를 입었다⁠. 형우의 와이셔츠와 거의 같은 색이었다⁠. 경렬이 리모컨을 들자 벽의 텔레비전에서 조감도가 사라지고 표 하나가 떴다⁠.

“⁠여러분⁠, 저 오늘 사과부터 드립니다⁠. 압수수색 때문에 불안하셨을 거예요⁠. 저희 직원들이 회사 단지 분양권을 산 것⁠, 맞아요⁠. 회사 숙소 주소 쓴 것도 맞아요⁠. 그게 불법인지는 법원이 정할 거예요⁠. 저희 변호사님은 아니라고 하시고⁠.⁠” 경렬이 변호사를 보았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하나만 보여 드릴게요⁠. 여러분이 누구 말을 믿고 계신지⁠.⁠”

경렬이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부동산 거래 신고서 사본이 떴다⁠. 이름 칸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102동 1503호 분양권 · 매도인 맹해린 · 신고 웃돈 1억 5천 · 2022⁠. 3⁠. 5⁠.⁠」

회의장이 술렁였다⁠. 경렬이 리모컨을 한 번 더 눌렀다⁠. 다음 장은 손글씨 서명이 들어간 짧은 확인서였다⁠. 「⁠컨설팅 수고비 5⁠,000⁠,000원 수령 확인 — 맹해린⁠」

“⁠맹해린 씨는 제보자 반형우 씨의 아내분입니다⁠. 협의회장님의 동생분이고요⁠.⁠” 경렬이 부드럽게 말했다⁠. “⁠1차 계약자 가운데 웃돈 받고 제일 먼저 빠져나간 집이에요⁠. 실제로 받은 웃돈보다 높게 신고하셨고⁠, 수고비도 받으셨어요⁠. 그러고 나서 반형우 씨는 웃돈이 가짜라고 메일을 보냈어요⁠. 이미 받을 거 다 받고 나서요⁠.⁠” 경렬이 형우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이분 말을 믿고 웃돈 일억 칠천이 사라진 걸 견디고 계세요⁠.⁠”

부회장이 우드락을 내렸다⁠. 학교 앞 엄마가 형우를 돌아보았다⁠. 서흔은 마이크를 든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동생의 서명이었다⁠. 서흔이 모를 리 없는 서명이었다⁠.

“⁠그리고 이분이 휘담디앤씨 주가가 빠지는 데 걸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매도⁠.⁠” 경렬이 말했다⁠. “⁠이건 제가 확인한 건 아니에요⁠. 단톡방에서 다들 하는 말이죠⁠.⁠”

“⁠확인 안 된 말은 하지 마세요⁠.⁠” 서흔이 말했다⁠. 마이크가 서흔의 손에서 조금 떨렸다⁠. “⁠대표님 규칙 들으셨잖아요⁠.⁠”

“⁠네⁠, 회장님⁠.⁠” 경렬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제 말은 끝났어요⁠. 하나만 덧붙이면⁠, 이분이 메일 보내기 전날까지 여러분 웃돈은 이억이었어요⁠.⁠”

박수가 나왔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왔다⁠. 부회장이 우드락을 다시 들어 올렸다가⁠, 테이프로 붙인 자리가 꺾이는 바람에 도로 내렸다⁠. 옆 사람이 우드락 끝을 같이 잡아 주었다⁠. 두 사람이 반쪽씩 들고 있는 글씨는 「⁠물어내라⁠」만 읽혔다⁠.

*

변호사가 일어나 종이를 읽으려 할 때⁠, 치윤이 먼저 일어났다⁠. 서흔이 마이크를 건넸다⁠. 치윤은 마이크를 받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택배 회사 조끼를 입고 있었다⁠. 오늘 오후 배송을 동료에게 넘기고 왔다고 했다⁠.

“⁠1503호 봉치윤입니다⁠. 저희가 반형우 과장님네 분양권 산 사람이에요⁠.⁠”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다들 화면 속 1503호와 치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저 그날 과장님한테 물었어요⁠. 이 집 괜찮냐고⁠. 과장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치윤이 형우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산 거예요⁠. 저 과장님 원망했어요⁠. 지금도 좀 해요⁠.⁠” 치윤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근데 이건 과장님이 만든 거 아니에요⁠. 제가 단비부동산 실장님 앞에서 녹음한 거예요⁠.⁠”

변호사가 손을 들었다⁠. “⁠그 녹음은 편집된⁠…⁠…⁠”

“⁠저 편집할 줄 몰라요⁠.⁠” 치윤이 말했다⁠. “⁠저 택배 해요⁠. 하루에 상자 삼백 개 들어요⁠. 휴대전화로 할 줄 아는 건 송장 찍는 거랑 녹음 버튼 누르는 거예요⁠.⁠”

회의장 뒤에서 누가 웃었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치윤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마이크를 휴대전화 스피커에 댔다⁠. 실장의 목소리가 모형 거실에 울렸다⁠. “⁠고객님⁠, 대표님이 직원들 명의로 1203호부터 쭉 웃돈 받쳐 놓은 거 아시잖아요⁠. 고객님 1503호도 그 위에 얹힌 거고⁠. 이번에 일억 구천으로 한 번 더 올려 두면⁠, 다음 분이 그 위에서 사요⁠.⁠”

녹음이 끝났다⁠. 하솜이 일어났다⁠. 하솜은 마이크 없이 말했다⁠.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병동 끝까지 들리게 말하는 데 익숙한 목소리⁠.

“⁠그 삼백 안 받았어요⁠. 우리 애 기저귀 값이었는데 안 받았어요⁠. 받으면 우리도 다음 사람한테 넘기는 거라서요⁠.⁠” 하솜이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수고비 받은 분⁠, 손 들어 보시라고는 안 할게요⁠.⁠”

회의장의 몇 사람이 눈을 내리깔았다⁠. 부회장이 우드락을 등 뒤로 돌렸다⁠.

*

서흔이 형우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형우는 일어났다⁠. 거실 모형의 유리 탁자 위 플라스틱 사과가 형우의 무릎 높이에 있었다⁠. 형우는 경렬이 띄운 화면을 보았다⁠. 해린의 이름이 아직 떠 있었다⁠.

“⁠구 대표님 말씀 맞습니다⁠.⁠” 형우가 말했다⁠. “⁠저희 집은 1503호를 웃돈 받고 팔았습니다⁠. 2022년 3월⁠, 이분한테요⁠. 이분이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제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저는 은행원이라 그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았고⁠, 알고 했습니다⁠.⁠”

회의장이 다시 술렁였다⁠. 경렬이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웃음이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저는 그날 저희 집이 살아난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날 이분 집이 어디로 떨어질지도 알았습니다⁠.⁠” 형우가 치윤을 보았다⁠. 치윤이 이번에는 형우를 보았다⁠. “⁠제가 메일을 보낸 건⁠, 다음 사람이 또 이분 자리에 앉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오늘 이 견본주택 입구에서 2차 상담 받으려고 줄 선 분들 보셨습니까⁠? 지난달에는 담장 끝까지 섰습니다⁠.⁠”

“⁠그럼 그 오백은요⁠?⁠” 총무가 말했다⁠. 이번에는 놀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린이 형부⁠, 그 오백은 누가 쓴 건데요⁠?⁠”

형우가 대답하려 할 때⁠, 회의장 맨 뒤 모형 아이 방 문턱에서 누가 손을 들었다⁠.

해린이었다⁠. 오산에서 버스를 타고 왔는지 운동화에 흙이 묻어 있었다⁠. 해린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 방 문턱에 선 채 손을 들고 있었다⁠. 서흔이 동생을 보았다⁠. 서흔의 얼굴에서 무언가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서흔은 마이크를 형우에게서 받아 들고⁠, 사람들 머리 위로 길게 팔을 뻗어 해린에게 건넸다⁠. 마이크가 사람 손을 몇 번 거쳐 해린에게 갔다⁠.

해린은 마이크를 받아 들고 화면 속 자기 이름을 보았다⁠. 끝을 위로 짧게 튕긴 자기 서명이었다⁠.

“⁠그 오백⁠, 제가 받았습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모형 주방 냉장고의 전시용 조명이 웅 하고 울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단비부동산 실장님이 신고서를 일억 오천으로 쓰면 다음 사람한테도 좋다고 했어요⁠. 대출 감정가가 오른다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대표님이 다 이렇게 해 주신다고⁠.⁠” 해린이 경렬을 보았다⁠. 존댓말이었다⁠. “⁠그 말 듣고 서명했어요⁠. 오백은 아들 영어 학원비로 반 쓰고⁠, 반은 휘담디앤씨 샀어요⁠. 그것도 하한가 맞았어요⁠.⁠”

몇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해린은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남편이 메일 보내던 날⁠, 저는 두 주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제 주식 먼저 팔고 나서 내라고요⁠. 남편이 안 기다렸어요⁠. 그래서 저 지금 아들 데리고 친정에 가 있어요⁠.⁠” 해린이 형우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만 보았다⁠. “⁠저 남편 편 들러 온 거 아니에요⁠. 저 그 오백 받은 사람이라서 왔어요⁠. 대표님이 화면에 제 이름 띄우실 거면⁠, 제 목소리도 같이 들으셔야죠⁠.⁠”

경렬이 일어났다⁠. 리모컨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리모컨이 바닥에 닿는 소리에 화면이 꺼졌다⁠. 해린의 이름이 사라진 검은 화면에 모형 거실의 회색 소파와 플라스틱 사과와 이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사모님⁠.⁠” 경렬이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부드럽지 않았다⁠. “⁠지금 그 말씀⁠, 사모님한테도 불리하신 거 아세요⁠?⁠”

“⁠알아요⁠.⁠” 해린이 마이크를 내렸다⁠. 마이크를 내린 채로 말했는데⁠, 회의장 끝까지 들렸다⁠. “⁠저도 다음 사람한테 판 사람이에요⁠. 대표님이랑 똑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팔려고요⁠.⁠”

형우는 해린을 보았다⁠. 아이 방 문턱의 해린은 마이크를 옆 사람에게 넘기고 팔짱을 끼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는 팔짱이었다⁠. 형우는 같은 팔짱을 2021년 8월 상담실 주차장에서도 보았다⁠.

서흔이 형우 옆에서 마이크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다시 켰다⁠.

“⁠오늘 총회는 여기까지 할게요⁠.⁠” 서흔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다음 안건은 소송이에요⁠. 대행사 상대로⁠. 협의회 이름으로⁠. 반대하실 분은 다음 주까지 말씀 주세요⁠. 저는 찬성이에요⁠.⁠”

경렬은 모형 거실의 바닥에서 리모컨을 줍지 않았다⁠. 변호사가 대신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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