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660자)

꼭대기

영끌 전날로 회귀했다 · 문채겸

휘담 리버파크 2차 견본주택은 4월 첫 토요일에 문을 열었다⁠. 2027년에 형우가 쓰러질 자리였다⁠. 측량 말뚝이 박혀 있던 잡풀 자리에 단층 건물이 올라가 있었고⁠, 입구에는 빨강 노랑 풍선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개관 시간 한 시간 전부터 줄이 이어졌다⁠. 줄은 견본주택 담장을 따라 1차 단지 정문까지 닿았다⁠. 입구 현수막에는 경렬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1차 웃돈 2억 돌파 — 지금이 가장 싼 날입니다⁠」

1차는 이번 주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102동 앞에 사다리차 세 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형우는 1차 정문 건너편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사다리차 하나를 올려다보았다⁠. 15층 창문으로 냉장고가 들어가고 있었다⁠. 1503호였다⁠. 치윤이 베란다 난간에 몸을 내밀고 사다리차 기사에게 손짓을 했다⁠. 하솜이 아기띠를 메고 치윤 뒤에 서 있었다⁠. 아기띠 안에서 두 달 된 아기의 모자 끝이 보였다⁠. 두 사람은 형우를 보지 못했다⁠.

형우의 시계는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플러스 일억 구천만 원⁠. 대기 발령은 다음 주로 끝났다⁠. 덕규는 지난주 회의에서 형우가 돌아오면 통폐합 지점으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고⁠, 상칠이 메신저로 알려 주었다⁠. 「⁠형 근데 벼리셀 봤어⁠? 나 아직 안 팔았어⁠. 손 떨려서 못 팔겠어⁠. 형이 해린 씨한테 맡긴 거 이제 이해해⁠」

*

형우가 모은 것은 네 가지였다⁠. 치윤이 지난 3월 단비부동산 안쪽 탁자에서 녹음한 십사 분짜리 파일⁠. 실장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고객님⁠, 대표님이 직원들 명의로 1203호부터 쭉 웃돈 받쳐 놓은 거 아시잖아요⁠. 고객님 1503호도 그 위에 얹힌 거고⁠. 이번에 일억 구천으로 한 번 더 올려 두면⁠, 다음 분이 그 위에서 사요⁠. 다들 그렇게 해요⁠. 삼백 받으시고 서명만⁠.⁠” 두 번째는 상칠이 찍은 상품권 봉투 사진⁠. 세 번째는 병점 원룸 건물 주소와 단비하우징 계열 회사 이름들⁠. 이름과 번호는 다 지웠다⁠. 마지막은 1203호 매수인이 서흔에게 한 말이었다⁠. 저는 명의만 빌려드린 거라서요⁠. 서흔이 병점에서 돌아온 밤 휴대전화 메모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형우는 이것들을 세 곳에 보낼 생각이었다⁠. 경찰의 지능범죄수사대⁠, 금융감독원⁠, 그리고 작년 가을 휘담 리버파크 웃돈 기사를 쓴 경제지 기자⁠. 일요일 밤에 보내면⁠, 기자는 월요일 아침에 대행사에 확인 전화를 걸 것이었다⁠. 형우는 처음 살았던 날들에는 이런 메일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메일 주소를 세 번 확인했다⁠.

토요일 밤⁠, 형우는 해린에게 말했다⁠. 새결이 잠든 방문 앞 복도였다⁠. 복도는 사람 둘이 마주 서면 어깨가 벽에 닿았다⁠.

“⁠내일 밤에 보낼 거야⁠.⁠”

해린은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 위에 새결의 체육복이 있었다⁠. 「⁠2-3 반새결⁠」 3월에 해린이 매직으로 새로 쓴 글씨였다⁠.

“⁠두 주만 기다려⁠.⁠” 해린이 말했다⁠. “⁠월요일에 휘담디앤씨 팔게⁠. 다 팔리면 그때 내⁠. 두 주면 돼⁠. 언니한테도 팔라고 할게⁠. 운영진들한테도⁠.⁠”

“⁠해린아⁠, 우리가 낼 걸 알고 먼저 팔면⁠, 그건 남이 모르는 걸 우리만 알고 파는 거야⁠. 경렬이 직원들 명의로 사고판 거랑 똑같아⁠. 감옥 가는 일이야⁠.⁠”

“⁠그럼 언니는⁠? 언니도 알잖아⁠. 언니도 감옥 가⁠?⁠” 해린의 목소리가 높아지다가 새결의 방문을 보고 낮아졌다⁠. “⁠우리 돈이야⁠. 일억이 일억 구천이 됐어⁠. 새결이 대학 등록금이야⁠. 당신 벼리셀 반토막 났을 때 나는 버텼어⁠. 당신이 맡기고 간 만두 봉지도 지켰어⁠. 그거 당신 거야⁠. 이건 내 거야⁠.⁠”

“⁠알아⁠.⁠”

“⁠당신 2027년에 우리가 이억 빚이었다며⁠.⁠” 해린이 형우의 왼손목을 잡았다⁠. 시계 위를 손가락으로 덮었다⁠. 해린 눈에는 멈춘 낡은 시계만 보일 자리였다⁠. “⁠지금은 아니잖아⁠. 당신 표정 보면 알아⁠. 작년부터 당신이 시계 볼 때 얼굴이 펴졌어⁠. 우리 지금 플러스지⁠? 당신이 그걸 당신 손으로 다시 빨갛게 만들려고 해⁠?⁠”

형우는 해린의 손가락 밑에서 숫자가 어떻게 떠 있는지 알았다⁠. 플러스 일억 구천만 원⁠. 해린이 덮고 있는 숫자였다⁠.

“⁠해린아⁠. 내가 1503호를 치윤 씨한테 판 날⁠, 우리 숫자가 처음으로 검게 됐어⁠. 같은 날 치윤 씨네 숫자는 마이너스 사억 칠천이 됐어⁠. 내가 손잡고 봤어⁠.⁠” 형우가 말했다⁠. “⁠우리가 플러스인 건⁠, 그 사람들이 빨갛기 때문이야⁠. 휘담디앤씨가 오르는 건⁠, 병점 원룸이 웃돈을 받치고 있어서야⁠. 내가 이걸 안 내면⁠, 다음 달에 2차 상담실에서 또 다른 치윤 씨가 도장을 찍어⁠. 오늘 줄 선 사람들 봤어⁠? 담장 끝까지였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해⁠.⁠”

“⁠우리도 우리가 알아서 했잖아⁠. 2021년 8월에⁠.⁠”

해린이 형우의 손목을 놓았다⁠. 복도 형광등이 한 번 깜박였다⁠. 새결의 방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반형우 씨⁠.⁠” 해린이 존댓말로 말했다⁠. “⁠제가 상담실에서 당신 손가락 하나씩 떼어 낼 때⁠, 당신은 우리 집 지키겠다고 했어요⁠. 두 해 동안 버틸 돈을 벌어 오겠다고⁠. 지금 당신이 지키는 게 우리 집이에요⁠, 남의 집이에요⁠?⁠”

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린이 빨래 바구니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잠기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

일요일 밤 열한 시 사십 분⁠, 형우는 거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 세 통이 받는 사람 칸만 다르게 같은 내용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형우는 휴대전화를 들어 치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냅니다⁠」 답이 바로 왔다⁠. 「⁠네⁠. 하솜이도 알아요⁠. 보내 주세요⁠」 서흔에게도 보냈다⁠. 「⁠처형⁠, 오늘 밤 보냅니다⁠. 운영진분들 휘담디앤씨 얘기는 제가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서흔은 읽고 답하지 않았다⁠.

안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해린도 자지 않았다⁠. 해린이 증권 앱을 열어 둔 채 월요일 아침 동시호가를 기다리는지⁠, 그냥 깨어 있는지 형우는 알 수 없었다⁠. 형우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받는 사람 칸⁠, 제목 칸⁠, 첨부 파일 네 개⁠.

형우는 전송 버튼을 세 번 눌렀다⁠.

시계는 바뀌지 않았다⁠. 메일은 아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형우는 노트북을 닫고 소파에 누웠다⁠. 천장에 물 자국이 없었다⁠. 처음 살았던 날들에 형우가 2021년 8월 소파에서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은 세 번째 전셋집의 누런 물 자국이었다⁠. 여기는 네 번째 집이었다⁠.

*

월요일 오전 여덟 시 오십 분⁠, 경제지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우는 짧게 대답했다⁠. 아홉 시 칠 분⁠, 첫 기사가 떴다⁠. 「⁠[단독] 동탄 신축 분양권 ‘⁠웃돈⁠’⁠, 대행사 직원 명의로 서로 사고팔았다⁠… 경찰 수사⁠」 열 시 반⁠, 두 번째 기사가 떴다⁠. 「⁠경찰⁠, 분양대행사 단비하우징 압수수색⁠」 사진 속에서 수사관들이 1차 상담실 유리문 안으로 상자를 들고 들어갔다⁠. 흰 탁자가 사진 귀퉁이에 보였다⁠.

휘담디앤씨는 아홉 시 십이 분에 하한가로 떨어졌다⁠. 하루에 떨어질 수 있는 바닥까지⁠, 30퍼센트⁠. 팔려는 주문만 산처럼 쌓이고 사려는 주문은 들어오지 않았다⁠. 해린의 휴대전화에 하한가 화면이 떠 있었다⁠. 매도 잔량 칸의 숫자가 한 줄씩 늘어나는 것이 형우가 선 자리에서도 보였다⁠. 해린은 아홉 시 정각에 매도 주문을 넣었다⁠. 동시호가에 넣은 주문이었다⁠. 기사가 아홉 시 칠 분에 떴고⁠, 해린의 주문은 체결되지 않았다⁠.

단톡방은 한 시간 만에 천 개가 넘는 글로 덮였다⁠. 「⁠이거 그 공매도 형부지⁠?⁠」「⁠경찰 수사⁠? 우리 집은⁠?⁠」「⁠잔금 대출 감정가 나와요⁠?⁠」「⁠협의회장 뭐 함⁠?⁠」 누군가 형우의 웨딩홀 사진을 다시 올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는 이모티콘을 달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 형우는 1차 상담실까지 걸어갔다⁠. 상담실 앞 주차장에 승합차 두 대가 서 있었고⁠, 수사관들이 파란 상자를 날라 실었다⁠. 유리문 안의 흰 탁자들 위에 계약서 대신 빈 서류철이 펼쳐져 있었다⁠. 경렬은 주차장 가장자리 화단 턱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 손에 감고⁠, 홍삼 사탕 껍질을 손가락으로 접었다 폈다 했다⁠. 형우를 보고 경렬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장님⁠. 줄을 끊으셨네요⁠.⁠” 경렬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줄이 끊기면 다 같이 떨어진다고⁠. 오늘부터 이천 가구가 다 같이 떨어져요⁠. 1503호 신혼부부도요⁠. 이번 주에 냉장고 들였던데⁠.⁠”

“⁠한 사람씩 떨어지는 것보다⁠, 다 같이 떨어지는 게 덜 깊습니다⁠.⁠” 형우가 말했다⁠. “⁠한 사람씩 떨어지면⁠, 맨 마지막 사람이 다 받아요⁠.⁠”

“⁠그거 은행에서 배운 말이에요⁠?⁠”

“⁠2027년에서 배웠습니다⁠.⁠”

경렬이 형우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상담실에서 형우가 두 해라고 했을 때의 눈이 다시 왔다가 사라졌다⁠. 경렬은 사탕 껍질을 반으로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과장님⁠, 저 내일 변호사 만나요⁠. 녹음은 조작이라고 할 거고⁠, 과장님은 공매도꾼이라고 할 거예요⁠. 단톡방 사람들은 누구 말을 믿을까요⁠? 웃돈을 날린 사람 말을 믿을까요⁠, 웃돈을 붙여 준 사람 말을 믿을까요⁠?⁠” 경렬이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2차 견본주택은 그대로 열어 둘 거예요⁠. 문 닫으면 지는 거니까⁠.⁠”

수사관 하나가 경렬을 불렀다⁠. 경렬은 형우 옆을 지나가며 손을 내밀지 않았다⁠.

화요일에도 하한가였다⁠. 해린은 화요일 저녁까지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도 잔량 칸이 줄어들지 않았다⁠. 일억 구천은 화요일 밤 아홉 시 기준으로 구천삼백만 원이 되어 있었다⁠. 아직 팔리지도 않은 숫자였다⁠.

형우의 시계가 화요일 밤 아홉 시에 뜨거워졌다⁠. 형우는 손목을 들었다⁠.

「⁠−61⁠,000⁠,000⁠」

검은 일억 구천만 원이 빨간 마이너스 육천백만 원이 되어 있었다⁠. 형우는 숫자를 오래 보았다⁠. 2021년 8월 소파에서 본 마이너스 이억 천만 원보다는 얕았다⁠. 그래도 빨간색이었다⁠.

“⁠얼마야⁠?⁠” 해린이 물었다⁠. 해린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우를 보지 않고 휴대전화만 보았다⁠. “⁠당신 시계⁠. 지금 얼마야⁠?⁠”

형우는 처음으로 시계 위 숫자를 소리 내어 말했다⁠. “⁠마이너스 육천백⁠.⁠”

해린이 웃었다⁠. 소리가 없는 웃음이었다⁠. 해린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안방으로 들어가 여행 가방을 꺼냈다⁠. 새결의 방으로 가서 새결을 깨웠다⁠. 새결은 잠에서 덜 깬 채 공룡 인형을 안고 나왔다⁠.

“⁠엄마⁠, 어디 가⁠?⁠”

“⁠할머니 집⁠. 오산⁠.⁠” 해린이 새결에게 점퍼를 입혔다⁠. “⁠학교는 할머니 집에서 엄마가 데려다줄게⁠. 며칠만⁠.⁠”

“⁠아빠는⁠?⁠”

해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새결이 형우를 보았다⁠. 형우는 새결 앞에 쪼그려 앉아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 주었다⁠. 새결의 숨이 지퍼 끝에서 형우 손등에 닿았다⁠.

“⁠아빠는 비 오는 거 기다려⁠.⁠” 새결이 말했다⁠. 지난 1월 아침 식탁에서 형우가 한 말이었다⁠. 형우는 새결의 머리를 한 번 쓸었다⁠.

해린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다시 들어왔다⁠. 식탁으로 가서 가방 안주머니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냉동실 문을 열어 만두 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서 보안카드를 꺼내 자기 지갑에 넣었다⁠. 냉동실 문이 닫혔다⁠.

“⁠이건 내가 갖고 있을게⁠. 당신은 못 버티는 사람이니까⁠.⁠” 해린이 말했다⁠. 존댓말이 아니었다⁠. “⁠당신이 그랬잖아⁠. 당신이 팔자고 해도 주지 말라고⁠. 울면서 빌어도⁠.⁠”

현관문이 닫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두 사람 몫으로 났다⁠.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벼웠다⁠. 발소리가 1층에서 끊겼다⁠.

형우는 식탁으로 갔다⁠. 해린이 놓고 간 것은 도장이었다⁠. 2021년 8월 상담실 흰 탁자에서 해린이 형우의 손가락을 떼어 내고 계약서에 눌렀던 도장⁠. 뚜껑이 열린 채였고⁠, 인주가 마른 자리에 해린의 이름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맹해린⁠. 형우는 도장을 집지 않았다⁠. 식탁 등이 도장 위로 동그란 빛을 떨어뜨렸다⁠. 창밖 멀리 2차 견본주택 입구의 풍선 아치가 바람에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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