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43자) · 크리스마스이브
백색등
붉은 방의 초대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십이월 이십사일 오후 세 시에 나는 을지로 삼 가 중고 카메라 골목에서 카메라를 샀다. 필름 카메라. 수동 초점 바디 하나에 오십 밀리 렌즈 하나. 그리고 스트로보. 손바닥만 한 외장 플래시. 가게 주인은 일흔이 넘었다. 스트로보 건전지를 네 개 갈아 끼우면서 요즘 누가 이런 걸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암실에서 쓰려고 한다고 했다. 주인이 웃었다. 암실에서 플래시를 왜 터뜨리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은 흑백 필름 한 롤을 공짜로 넣어 주었다. 크리스마스라서.
목이 다시 무거워졌다. 그 무게가 반가웠다. 가게를 나서며 필름을 감았다. 레버가 손가락에 걸리는 감촉. 십오 년 전 처음 산 카메라와 같은 감촉이었다.
영장은 오후 네 시에 나왔다. 채 경위가 문자로 판사 도장 찍힌 사진을 보냈다. 광명현상소 자리와 늘봄상조 사무실. 해장국집 결제 기록과 서도경의 휴대폰 사진이 판사를 웃지 않게 했다. 채 경위는 여섯 명을 데려왔다. 을지로 골목 입구에 승합차 한 대. 골목 끝 열쇠 가게에 두 명. 정 씨는 가게 불을 끄고 그 사람들한테 보리차를 끓여 주었다.
여섯 시 반. 골목 입구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경찰이 아니었다. 선배가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제보 메일을 보낸 사람들 가운데 오겠다는 사람들. 열두 명. 붉은 봉투를 받고 태운 사람, 받고 서명한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선배가 그 사람들한테 말했다고 했다. 오늘 거기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냥 서 있으라고. 초대받은 사람 옆에 누가 서 있는지 보여 주라고. 사람들은 말없이 골목 입구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입김이 가로등 불빛 속에서 하얗게 올라갔다. 누군가는 흰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늘봄상조 조화에 꽂혀 있던 것과 같은 꽃.
소은 씨는 그 열두 명을 한 사람씩 봤다. 엄마 공책에 있는 이름을 찾는 눈이었다. 둘을 찾았다. 소은 씨가 그 두 사람에게 가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소은 씨 손을 잡았다. 엄마가 그 사람들 집에 찾아갔었다고 했다. 붉은 봉투 오면 태우라고. 두 사람 다 태웠다고.
일곱 시 삼 분. 눈이 그쳐 있었다. 골목 반대편 끝에 검은 세단이 섰다. 공만석이 내렸다. 코트에 목도리. 손에 서류 가방. 곽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곽의 목에 내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골목 입구의 열두 명을 보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 밖은 그만큼 어두웠다. 반대편에서 왔으니까.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일곱 시 이십일 분. 소은 씨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서도경. 두 글자.
지금.
채 경위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들어간다. 승합차 문이 열렸다. 열쇠 가게에서 두 명이 나왔다. 나는 계단 쪽으로 걸었다. 소은 씨가 옆에서 걸었다. 채 경위가 우리를 막지 않았다. 한 번 봤다. 그리고 앞장섰다.
계단 스물두 칸. 소은 씨가 난간을 잡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 칸도. 내려갈수록 냄새가 달랐다. 정지액 냄새가 아니었다. 종이 타는 냄새. 매캐하고 달큼한 냄새.
복도의 붉은 전구 아래 곽이 서 있었다. 철문 앞. 우리를 보자 곽이 패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은 칼이었다. 접이식. 붉은 빛 아래서 칼날은 검게 보였다. 곽은 그걸 몸 앞으로 들지 않았다. 옆구리에 붙이고 있었다. 쓸 줄 아는 사람의 자세였다.
“영장 있습니다. 칼 내려놓으세요.”
채 경위가 말했다. 곽이 웃었다. 로비에서처럼.
“경위님, 여기 어둡죠.”
곽이 복도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붉은 전구가 꺼졌다. 복도가 완전히 까매졌다. 계단 위 가로등 빛은 스물두 칸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까만 데서 발소리가 났다. 곽이 움직이는 소리. 채 경위 손전등이 켜졌다가 누군가에게 쳐서 바닥에 떨어졌다. 빛이 바닥을 굴렀다. 벽을 한 번 비췄다가 꺼졌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보지 않고. 까만 데서. 스트로보 충전 램프가 붉게 켜져 있었다. 그 작은 붉은 점 하나가 복도의 유일한 빛이었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하얗게 터졌다.
천분의 일 초. 복도가 대낮보다 밝아졌다가 다시 까매졌다. 그 천분의 일 초 동안 나는 모든 것을 봤다. 소은 씨 앞 한 걸음에 선 곽. 칼을 든 팔을 올리던 곽. 곽의 눈이 흰 빛을 정면으로 맞고 감기는 것. 채 경위가 곽 옆에서 몸을 낮추는 것. 벽의 회색 페인트. 바닥의 먼지. 철문의 자물쇠 구멍.
다시 까매졌다. 곽이 소리를 질렀다. 눈을 못 뜨는 사람의 소리. 나는 스트로보가 다시 충전되는 소리를 들었다. 삐이. 이 초. 셔터. 두 번째 흰 빛. 곽이 얼굴을 가린 팔. 칼이 어디로 휘둘렸는지 나는 알았다. 내 쪽이었다. 왼팔이 뜨거웠다. 코트 소매가 갈라졌다. 그 흰 빛 속에서 채 경위가 곽의 팔목을 잡아 벽에 꺾었다. 칼이 떨어지는 소리. 쇠가 시멘트에 닿는 소리. 정 씨 가게의 쇳소리와 같았다.
세 번째 흰 빛에서 곽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채 경위 무릎이 그 등에 있었다. 계단 위에서 형사 두 명이 내려오며 손전등을 비췄다. 흰 빛 둘. 곽의 목에서 내 카메라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렌즈가 깨졌다.
왼팔에서 피가 흘렀다. 소은 씨가 목도리를 풀어 내 팔을 감았다. 세게. 손가락 테이프 위로 내 피가 묻었다. 소은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듭을 두 번 묶었다. 반찬 가게 보조키를 두 번 잠그듯이.
철문 틈으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채 경위가 곽의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없었다. 곽은 나중에 진술했다. 대표님을 들여보내고 밖에서 잠근 뒤 열쇠를 문 아래 틈으로 밀어 넣었다고. 대표님이 그러라고 했다고. 안에서는 쓸 수 없는 열쇠를. 다 탈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게. 공만석은 자기를 그 방에 가뒀다. 안에 서도경이 있었다. 서도경은 지금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연기와 함께.
채 경위가 증거 봉투를 꺼냈다. 정 씨의 열쇠. 봉투를 찢었다. 열쇠를 꽂았다. 돌렸다. 새로 깎은 열쇠가 걸리며 돌아가는 소리. 정 씨가 고집한 기계식 자물쇠가 전기 없이 열렸다.
문이 열렸다. 연기가 쏟아졌다. 붉은 방은 연기로 가득했다. 안전등 넷이 연기 속에서 붉게 번졌다. 싱크대 위에서 불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종이 뭉치. 흰 카드들이 싱크대 안에서 오그라들며 탔다. 공만석이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고 있었다. 물을 틀어 재를 흘려보내려고. 그 옆 바닥에 서도경이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 기침을 하며. 코트 앞섶을 두 손으로 꽉 쥐고.
공만석이 돌아봤다. 우리를. 흰 손전등 빛 셋이 그 얼굴에 모였다. 붉은 빛과 흰 빛이 한 얼굴에서 섞였다. 늘봄상조 사무실에서 그림자 없던 얼굴에 처음으로 그림자가 생겼다. 눈 밑, 코 옆, 입가. 웃고 있지 않았다.
“기자님.”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사무실에서와 같았다. 부드러웠다.
“인화지 상해요. 불 좀 꺼 주세요.”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스트로보 충전 램프가 붉게 켜졌다. 그는 이번에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역광을 만들 창이 이 방에는 없었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흰 빛이 붉은 방을 한 번 가득 채웠다.
그 천분의 일 초 동안 방의 색이 전부 돌아왔다. 싱크대의 녹슨 초록, 서류함의 회색, 타는 카드의 흰색과 검은색, 공만석 코트의 남색, 그리고 서도경의 초록 카디건. 붉은색은 하나도 없었다.
형사들이 공만석의 팔을 잡았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수도꼭지는 계속 물을 틀어 놓은 채였다. 채 경위가 소화기로 싱크대 불을 껐다. 하얀 분말이 붉은 빛 속에서 분홍색으로 흩날렸다. 재가 젖었다. 절반은 이미 재였다.
소은 씨가 서도경 옆에 쪼그려 앉았다. 서도경이 코트 앞섶을 풀었다. 안에서 흰 카드 뭉치가 쏟아졌다. 고무줄로 묶은. 수십 장. 서도경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첫째 칸. 대표님 오시기 전에 빼 놨어요. 둘째 칸 셋째 칸은 못 뺐어요. 반만.”
소은 씨가 그 카드 뭉치를 주웠다. 맨 위 카드에 이름이 있었다. 모르는 이름. 누군가 이 방에서 적은 이름. 그 밑에 또 이름. 또 이름. 소은 씨는 카드를 세지 않았다. 그냥 두 손으로 안았다. 엄마 파일을 안던 것처럼.
계단을 올라왔다. 스물두 칸. 골목 입구 가로등 아래 열두 명이 아직 서 있었다. 형사들이 공만석과 곽을 끌고 나오자 그 사람들이 조용히 길을 비켰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다. 흰 국화를 든 사람이 공만석이 지나갈 때 꽃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서도경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계단 위에서 소은 씨가 들것 옆을 따라 걸었다. 서도경이 마스크를 조금 내리고 소은 씨한테 무어라 말했다. 나는 못 들었다. 나중에 소은 씨가 알려 주었다. 준호한테는 내가 말할게요, 그랬다고. 기사 보기 전에.
채 경위가 공만석 옆에 서서 권리를 읽어 주었다. 현주건조물방화, 살인미수, 감금. 살인은 아직 붙이지 않았다. 아홉 건과 해원 씨 건은 재판에서. 공만석은 그 목록을 끝까지 들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서류에 서명하는 사람처럼.
구급대원이 내 팔을 봤다. 일곱 바늘쯤 꿰매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구급차에 앉아서 카메라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필름 카운터가 네 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복도 셋, 방 하나. 네 장. 현상하려면 암실이 있어야 했다. 내 암실은 타 버렸다.
소은 씨가 구급차 뒷문 발판에 걸터앉았다. 내 옆에. 카드 뭉치를 무릎에 안고.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다 내 팔에 감긴 자기 목도리를 봤다. 피가 배어 있었다.
“그 목도리 엄마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엄마도 이렇게 썼을 거예요. 모르는 사람한테.”
소은 씨는 모르는 사람, 이라고 말하고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고쳐 말하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서 선배가 열두 명 사이에 서 있었다. 노트북도 수첩도 없이. 선배는 그 사람들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선배한테 이제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선배가 대답했다. 가셔도 되는데, 조금만 더 서 계셔 주세요. 저 사람 차 떠날 때까지. 그 사람들은 공만석을 태운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경찰차 뒷유리에 가로등 불빛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
정 씨가 골목에서 걸어왔다. 보리차가 든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열쇠 돌아왔어?”
“채 경위님이 갖고 계세요. 증거라서.”
“또?”
정 씨는 빈손을 한 번 봤다. 이번에는 웃었다. 웃는 법을 떠올리지 않고,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