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064자) · 흰 카드 두 장

이름

붉은 방의 초대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공만석.

카드 위에 세 글자가 검게 떠 있었다. 붉은 빛 아래서 볼펜 자국은 검다.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카드를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서도경 쪽으로.

서도경은 카드를 집지 않았다. 내려다봤다. 한참. 그 사람 얼굴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붉은 빛은 표정을 가린다. 그래도 입꼬리가 한 번 떨리는 건 가리지 못했다. 웃음인지 다른 것인지 나는 몰랐다.

“이 카드는 서랍에 들어갑니다.”

서도경이 말했다.

“서랍에 들어간 카드는 대표님이 보십니다. 겨울마다. 그리고 봉투를 보내십니다.”

“압니다.”

“대표님께 봉투가 갑니다.”

“압니다.”

“대표님은 봉투를 태우실 겁니다. 거절은 한 번 되니까요. 그리고 다른 이름을 적어 보내실 거고요.”

“그 다른 이름을 누가 받는지 저는 볼 겁니다.”

내가 말했다.

“서랍에서 나가는 봉투는 전부 대표님 손을 거친다는 걸, 그 한 장으로 볼 겁니다. 대표님이 자기 앞으로 온 봉투를 어떻게 하는지. 누구 이름을 적는지.”

서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드를 집었다. 두 손가락으로. 서류철 사이에 끼우지 않고 탁자 위 자기 앞에 따로 놓았다. 다른 서류와 떨어지게.

소은 씨는 아직 카드를 앞에 둔 채였다. 흰 빈칸. 볼펜을 쥐었다. 뚜껑을 열었다. 딸깍. 닫았다. 딸깍. 열었다.

“엄마는 여기서 세 시간 이십 분 있었대요.”

소은 씨가 말했다. 서도경에게.

“저는 그렇게 오래 못 있어요. 오늘 야간 근무가 있어서.”

농담인지 아닌지 서도경은 몰랐을 것이다. 나도 몰랐다. 소은 씨 얼굴은 붉은 빛 아래서 웃지 않았다.

소은 씨가 카드에 적었다. 빨리. 획을 누르지 않고. 둥근 글씨로.

서도경.

그러고는 카드를 뒤집지 않고 그대로 밀었다.

서도경의 손이 멈췄다. 서류철 위에서. 그 사람은 자기 이름을 봤다. 자기가 이 방에서 수백 번 부른 다른 이름들과 같은 크기로 적힌 자기 이름을.

“엄마 공책에 있어요. 스물세 명 가운데 스물네 번째로 따로 적혀 있어요. 연필로. 탁자 건너편 여자 — 구 년 전 초대받은 사람. 엄마는 아줌마를 찾으려고 했어요. 이름을 몰라서 못 찾았어요. 오늘 알았어요. 청약서 모집인 칸에 있더라고요.”

소은 씨는 패딩 안주머니에서 몽당연필을 꺼냈다. 반찬 가게 앞치마 주머니에 있던 연필. 곽이 못 찾은 연필. 그걸 탁자 위에 놓았다. 서도경 카드 옆에.

“엄마가 쓰던 연필이에요. 아줌마 이름을 적고 싶었을 거예요. 대신 적었어요.”

방이 조용했다. 소은 씨의 숨소리가 들렸다. 짧고 고르게. 야간 근무 때 상자를 넘기며 쉬는 숨이었을 것이다. 난방기가 멈췄다. 안전등 넷이 윙 소리를 냈다. 싱크대에 고인 물이 천장의 붉은 등을 비췄다.

서도경이 연필을 봤다.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서류를 읽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구 년 전에 제가 이 의자에 앉았습니다. 저쪽에요. 소은 씨가 앉은 의자.”

소은 씨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아는 사람이요. 제 아들 친구 엄마. 그 사람이 다음 해에 와서 서명했고, 그다음 해에 계단에서 떨어졌습니다. 동그라미 세 번째.”

서도경은 그 말을 하는 동안 소은 씨를 봤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봤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 한 사람은 딸이고 한 사람은 누군가의 엄마였다. 둘 다 이름을 적은 사람이었다.

“그 뒤로 여기 앉아 있습니다. 대표님이 그러시더군요. 아들 대출이 있다고. 아들이 저 모르게 빌린 돈. 제가 여기 앉아 있으면 아들 이자는 안 붙는다고.”

“그래서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은 알아요?”

서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명은 안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두 서류철을 서도경 쪽으로 밀었다.

“대출도, 보험도. 이름은 적었습니다. 규칙은 둘이라고 들었습니다. 거절은 한 번, 적어야 나간다. 적었습니다. 나가겠습니다.”

서도경이 서류철을 봤다. 그리고 벽시계를 봤다. 여덟 시 삼십일 분. 우리가 들어온 지 한 시간 삼십일 분. 정 씨가 계단 위에서 시계를 보고 있을 시각이었다.

서도경이 일어섰다. 문 쪽으로 갔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밖에서 곽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철문 너머라서 멀게.

“서명 끝났어요?”

“이름 받았습니다. 열어요.”

“서명은요.”

“열어요, 곽 씨.”

“대표님이 서명 없으면 열지 말랬어요.”

서도경이 문에 이마를 댔다. 붉은 빛 아래서 그 등이 한 번 크게 오르내렸다. 그러고는 문에서 이마를 떼고 말했다. 이 방에서 들은 그 사람 목소리 가운데 가장 큰 목소리로.

“규칙은 둘이에요. 대표님이 정한 규칙도 둘이에요. 적어야 나간다. 적었어요. 이 방에서 규칙 어기는 사람 처음 만들 거예요? 곽 씨가?”

문 너머가 조용해졌다. 한참. 그리고 발소리가 났다. 곽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곽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중부서 채미령입니다. 이 골목에서 사람 갇혔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곽의 열쇠가 아니었다. 소리가 조금 달랐다. 새로 깎은 열쇠가 처음 돌 때 걸리는 소리. 정 씨의 열쇠였다.

문이 열렸다. 복도의 붉은 전구 아래 채 경위가 서 있었다. 회색 스웨터에 패딩. 한 손에 열쇠, 한 손에 손전등. 그 뒤 계단 위에 정 씨가 서 있었다. 곽은 복도 벽에 붙어 있었다. 내 카메라를 목에 건 채로.

채 경위는 손전등을 켰다. 흰 빛. 붉은 방 안으로 흰 빛이 한 줄기 들어왔다. 탁자 위를 스쳤다. 서류철, 흰 카드 두 장, 몽당연필. 서류함. 싱크대. 그 빛이 닿는 자리마다 붉은 빛에 가려 있던 색이 잠깐씩 돌아왔다. 탁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서류철은 남색이었다. 서도경의 카디건은 초록색이었다. 소은 씨 엄마의 앞치마와 같은 초록.

“여기 창고라고 들었는데.”

채 경위가 말했다. 곽을 보면서.

“사람이 있네.”

곽이 움직였다. 복도 반대쪽. 비상구 쪽으로. 채 경위가 손전등을 곽 쪽으로 돌렸다. 곽의 얼굴이 흰 빛에 하얗게 떴다. 눈이 부셔서 곽이 얼굴을 가렸다. 그 틈에 곽은 비상구 문을 밀고 사라졌다. 내 카메라를 목에 건 채로. 채 경위는 쫓지 않았다. 혼자였고 영장이 없었다.

“감금 신고 확인. 안에 계신 분들, 본인 의사로 들어오셨어요?”

“초대받아서요.”

소은 씨가 말했다.

“나가겠다고 했는데 문이 안 열렸어요.”

“몇 분 동안요.”

“일 분쯤요. 이 아줌마가 열어 달라고 했어요.”

소은 씨가 서도경을 가리켰다. 서도경은 문간에 서서 채 경위의 손전등 빛을 받고 있었다. 눈을 가리지 않았다.

서도경은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우리보다 한참 뒤에. 손에 흰 카드 두 장과 몽당연필을 쥐고 있었다. 서랍에 넣지 않고 들고 나온 것이다. 채 경위가 그 손을 봤다. 서도경은 그 손을 감추지 않았다. 골목 가로등 아래서 그 사람은 우리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반대쪽 골목으로 걸어갔다. 채 경위가 부르지 않았다. 나중에 채 경위가 말했다. 저 사람은 도망가는 걸음이 아니었다고. 어디로 갈지 정한 사람의 걸음이었다고.

우리는 계단을 올라왔다. 스물두 칸. 정 씨가 맨 위에서 소은 씨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골목은 추웠다. 가로등 아래 마른 눈이 옆으로 흘렀다. 선배의 문자가 소은 씨 휴대폰에 와 있었다. 채 경위가 곽 대신 되찾아 준 휴대폰. 여덟 시 일 분. 올렸다.

계단 맨 위에서 정 씨가 채 경위한테 손을 내밀었다. 열쇠를 돌려 달라는 손이었다. 채 경위가 열쇠를 증거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좀 갖고 있을게요, 어르신. 정 씨는 손을 거두고 한참 빈손을 봤다. 삼십 년 동안 깎은 열쇠 가운데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돌아오지 않는 열쇠였다.

기사는 이미 나가 있었다. 을지로 지하 「붉은 방」, 명의 모으는 초대장. 칠 년간 사고사 아홉 건, 보험금은 한 상조 회사로. 이름은 없었다. 늘봄이라는 글자도, 공만석이라는 글자도. 선배는 이름 없이 썼다. 이름은 아직 우리가 이 방에서 들고 나오는 중이었으니까. 기사 밑에 댓글이 벌써 백 개 넘게 달려 있었다. 괴담이냐는 댓글, 소설 쓰냐는 댓글.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 저희 아버지도 작년 겨울에 붉은 봉투 받으셨어요. 태우셨어요. 올해 또 왔어요. 소은 씨가 그 댓글을 오래 봤다. 엄마 공책에 없는 이름이었다.

채 경위가 내 옆에 섰다.

“기자님, 방 봤어요. 문 열린 상태로, 신고 받고. 이건 제가 본 거예요. 영장 없이도 쓸 수 있어요. 근데 기사 나갔으니 그 사람 오늘 밤에 움직여요. 조심하세요. 집에 가지 말고.”

그날 밤 열한 시 사십 분. 신문사 사진부 암실에서 불이 났다. 경비원이 연기 냄새를 맡고 신고했다. 소방차가 오기 전에 스프링클러가 돌았다. 사람은 없었다. 사진부 사무실은 그을음만 앉았다. 암실만 탔다. 필름 보관장이 녹았다. 십오 년 치 흑백 필름. 내가 매주 한 롤씩 현상하던 것. 붕괴 현장, 불탄 집, 물에서 건져 올린 것들. 프레임 안에 넣어 두었던 것들이 전부 녹아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경비원은 로비에서 내내 손을 떨었다. 나한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했다. 택배 목걸이를 보고 들여보냈다고. 경비원이 방명록을 보여 주었다. 저녁 열한 시 십 분. 방문자 칸에 곽. 방문 목적 칸에 배달.

나는 다 탄 암실 앞에 섰다. 물에 젖은 재 냄새. 정지액이 끓어 넘친 냄새. 천장의 붉은 안전등은 깨져 있었다. 소방관이 켜 놓은 작업등이 방을 하얗게 비췄다.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백색등 아래서 본 적 없는 방이었다. 벽이 노랬다. 약품이 스며 노래진 벽. 나는 그 색을 처음 봤다.

선배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숨이 찼다. 탄 암실을 보고 한참 말을 못 했다. 그러다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회부 제보 메일함. 붉은 봉투. 붉은 봉투. 초대장. 제목만 다른 메일이 열한 통. 두 시간 만에. 선배가 말했다. 스물셋이 아니야, 서결아. 옆에 앉아 줄 사람이 더 있어.

소은 씨가 옆에 서 있었다. 야간 근무를 또 빠졌다고 했다. 이틀 연속이라 잘릴 것 같다고. 소은 씨가 녹아 붙은 필름 덩어리를 봤다. 그러고는 내 소매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이제 그쪽도 뭘 잃었네요.”

소은 씨는 원망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계산을 맞추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그 계산으로는 아직 한참 모자랐지만.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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