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71자) · 을지로

열쇠

붉은 방의 초대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을지로 인쇄 골목은 낮에도 어둡다. 건물이 낮은데 골목이 좁아서 해가 바닥까지 안 내려온다. 대신 가게마다 형광등을 켜 둔다. 인쇄소 형광등은 희고, 지류 가게 형광등은 누렇고, 금박 찍는 가게 안쪽은 작업등 하나만 주황색으로 켜져 있다. 골목을 걸으면 빛의 색이 가게마다 바뀐다. 나는 사진기자라서 그걸 색온도로 읽는다. 사천, 삼천, 이천칠백. 소은 씨는 그냥 걸었다. 두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곧장 온 사람의 걸음이었다. 발이 땅에서 덜 떨어졌다.

십이월 십팔일 금요일 오후 두 시. 골목 바닥에 파지 조각이 눈처럼 깔려 있었다. 재단기에서 떨어진 종이 가장자리들.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열쇠 가게는 골목 끝,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옆 한 평짜리였다. 간판은 없고 유리문에 흰 시트지로 열쇠, 도장, 자물쇠 수리. 사 년 전과 같았다. 유리문 안에서 열쇠 깎는 기계가 돌아갔다. 쇠 가는 소리. 쇳가루 냄새가 문틈으로 나왔다. 기름과 쇠가 섞인 냄새.

정 씨는 사 년 전보다 늙어 있었다. 예순셋. 왼쪽 눈꺼풀이 더 처졌다. 작업대 위에 돋보기안경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그걸 쓰지 않고 열쇠를 깎았다. 눈이 아니라 손이 기억하는 일이었다. 그는 기계를 끄지 않고 우리를 봤다. 나를 알아봤다. 그리고 소은 씨를 봤다. 소은 씨를 봤을 때 그의 손이 멈췄다. 기계는 계속 돌았다. 열쇠 날이 쇠 대신 허공을 갈았다.

“해원 씨 딸이구먼.”

소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씨가 기계를 껐다. 가게가 조용해졌다. 골목 어디선가 인쇄기가 규칙적으로 철컥거렸다.

“엄마 알아요?”

“이 년 전에 왔었어. 여기. 그 공책 들고.”

정 씨가 소은 씨 가방을 봤다. 공책이 든 가방.

“엄마가 저 사람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났다고 적어 놨어요. 아저씨는 만났다고 적어 놨고요. 아저씨 줄에 뭐라고 적혀 있는 줄 알아요?”

정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은 씨가 공책을 꺼내 일곱 번째 줄을 폈다. 정기수. 칠 년 전. 메모: 거절함. 모르는 이름 적음. 적은 이름 확인 — 동그라미.

정 씨가 그 동그라미를 봤다. 오래.

“알아.”

그가 말했다.

“내가 적은 사람, 이 년 뒤에 죽었어. 공사장에서. 비계에서 떨어졌대. 나는 그 사람 얼굴도 몰라. 전화번호부에서 골랐으니께. 해원 씨가 그걸 알려 주더라고. 이 년 전에. 알려 주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했어.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다음 사람한테 그 말 안 한다고.”

그 말. 모르는 사람 이름을 적으세요. 사 년 전에 그가 나한테 한 말.

“그 말을 저한테 하셨습니다.”

내가 말했다.

“알아.”

“해원 씨 오기 전이었습니다.”

“알아. 해원 씨 오고 나서는 아무한테도 안 했어. 다들 알아서 오는 거 아니니께. 자네가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내가 그 말을 들은 마지막 사람이었고, 내가 적은 이름이 그 말을 끊으러 이 가게에 왔다. 순서가 그랬다.

“아저씨, 그 방 어디 있어요.”

소은 씨가 물었다. 정 씨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

“알잖아요. 엄마 공책에 있어요. 정기수 — 방 문 자물쇠. 뭔 소리예요, 이게.”

정 씨가 기계 위에 손을 얹었다. 손등에 쇳가루가 반짝였다. 형광등 아래서 은색 점들이 떴다.

“나 끼면 안 돼. 가게에 불 나. 여기 지하에 인쇄소가 여섯이여. 종이 창고가 셋이고. 불 한 번 나면 이 골목 다 타.”

“그럼 사람이 계속 죽어요.”

“나도 알아.”

“알면요.”

“알아서 여태 이러고 있는 거여!”

정 씨가 소리를 질렀다. 한 평짜리 가게가 그 소리로 꽉 찼다. 유리문이 조금 떨렸다. 골목의 인쇄기 소리가 한 박자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소은 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볼펜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테이프 감은 손가락이 패딩 주머니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천 너머로 보였다. 나는 그 둘 사이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남의 이름을 적었고 한 사람은 그 이름이 된 사람의 딸이었다. 나는 그 둘과 같은 쪽이었다. 남의 이름을 적은 쪽.

“기수 씨.”

내가 이름을 불렀다. 공책에서 본 이름. 정 씨가 나를 봤다. 아무도 자기를 이름으로 안 부른 지 오래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저 이십일일에 갑니다. 이 사람도요. 둘이 같이 갑니다. 해원 씨가 말한 대로요. 그 방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만.”

정 씨가 한참 나를 봤다. 그러다 기계 옆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열쇠 원판이 수백 개 들어 있었다. 쇠끼리 부딪는 소리. 그는 그중에서 하나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서랍 안쪽 벽에 붙은 종이를 떼어 냈다. 누렇게 바랜 작업 전표. 날짜는 구 년 전. 주소는 을지로 이 가, 이 골목. 지하 일 층. 품명: 방화문 도어록 교체 — 외부 전용.

“구 년 전에 내가 달았어. 그 문.”

정 씨가 말했다.

“옛날에 사진 현상소 하던 자리여. 광명현상소. 망한 지 오래됐지. 거기 문을 바꿔 달라고 어떤 양반이 왔어. 점잖은 양반. 상조 회사 한다고. 안에서는 못 여는 문으로 해 달래. 손잡이 없이. 밖에서만 열리게. 창고로 쓴다고. 비싼 거 보관한다고. 나는 달아 줬어. 돈 많이 주더라고.”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년 뒤에 그 봉투가 나한테 왔어. 붉은 거. 그때 알았지. 내가 단 문이구나.”

안에서는 못 여는 문. 적어야 나간다. 규칙이 아니라 자물쇠였다. 이 사람 손으로 단.

소은 씨가 전표를 봤다. 손을 뻗지 않았다.

“그 문, 밖에서 열려면요.”

“열쇠. 전자키가 아니라 기계식이여. 내가 그렇게 달았어. 전기 나가면 전자식은 안에 사람 갇히니께. 그건 내가 고집했어. 그 양반은 싫어했는데.”

“열쇠는 누가 갖고 있어요.”

“그 양반이 둘. 그리고.”

정 씨가 말을 멈췄다. 서랍을 닫았다. 닫힌 서랍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손등의 쇳가루가 떨렸다.

“원판은 여기 있어. 나는 내가 깎은 열쇠 원판을 안 버려. 삼십 년 동안 하나도.”

소은 씨가 나를 봤다. 나는 정 씨를 봤다. 정 씨는 서랍을 봤다. 셋이 각자 다른 데를 보면서 같은 것을 생각했다. 가게 안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정 씨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형광등도 곧 갈아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안 깎아 줄 거여.”

정 씨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곽이라는 놈이 이 골목을 돌아. 매주 금요일. 오늘이 금요일이여. 그놈이 내가 뭘 깎는지 봐. 창밖으로.”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유리문 밖이 어두워졌다. 누가 유리문 앞에 섰다. 검은 패딩. 검은 모자. 택배 목걸이. 곽이었다. 곽은 문을 열지 않았다. 유리에 이마를 댈 듯 가까이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 나를 봤다. 소은 씨를 봤다. 웃었다. 로비에서처럼, 아는 사람한테 웃듯이.

곽이 유리문을 손가락 마디로 두 번 두드렸다. 똑, 똑. 그러고는 정 씨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소리 없이. 안녕하세요.

정 씨가 기계를 다시 켰다. 쇠 가는 소리가 가게를 채웠다. 정 씨는 아무 원판이나 하나 집어 기계에 물렸다. 날이 쇠를 갈았다. 불똥이 작게 튀었다. 형광등 아래서 주황색 점이 떴다가 꺼졌다. 정 씨는 곽을 보지 않았다. 열쇠만 봤다. 사 년 전에 나를 보지 않고 열쇠만 보던 것처럼.

곽은 한참 서 있다가 떠났다. 골목 끝으로. 걸음이 느렸다. 서두를 일이 없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모퉁이에서 한 번 돌아보고, 인쇄소 주황 작업등 앞을 지나 사라졌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이 선 자리를 봤다. 유리문에 입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둥글게. 금방 사라졌다.

정 씨가 기계를 끄고 방금 깎은 열쇠를 헝겊에 문질렀다. 그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는 아무 열쇠여. 곽이 봤으니께, 자네가 열쇠 하나 깎아 간 걸로 해. 집 열쇠.”

나는 받았다. 아직 뜨거웠다.

“도장도 하나 파 줘? 그것도 핑계가 되는디.”

“괜찮습니다.”

“기자 양반 도장은 이름이 세 자라 싸.”

정 씨는 그 말을 하고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라기보다 웃는 법을 떠올려 보는 얼굴이었다.

“이십일일.”

정 씨가 말했다.

“일곱 시라고 했지. 그 방은 그날 저녁에 주소를 알려 줘. 문자로. 알려 주면 여기 들러. 여섯 시 반까지. 그때는 곽이 그 방 앞에 있을 테니께 이 골목에 없어.”

소은 씨가 가게를 나가다가 문턱에서 돌아섰다.

“아저씨.”

“왜?”

“엄마가 여기 왔을 때 뭐라고 했어요. 그 말 말고 다른 거.”

정 씨는 한참 기계를 봤다. 그러다 말했다.

“열쇠 하나 깎아 달라고 했어. 자기 집 현관. 보조키. 딸이 야간 일 해서 새벽에 들어온다고. 딸 오기 전에 문이 두 번 잠겨 있어야 된다고.”

소은 씨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팔백사 호 문의 은색 잠금장치 두 개. 새것처럼 반짝이던 나사. 이 년 동안 소은 씨는 새벽마다 그 두 개를 열고 들어갔을 것이다. 누가 달아 줬는지 모르고.

골목으로 나오자 바로 옆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계단참에 형광등이 나가 있었다. 아래는 어두웠다. 어둠 끝 어딘가에 광명현상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계단 맨 위에 섰다. 아래에서 공기가 올라왔다. 차갑고, 오래 닫혀 있던 공기. 그 공기 속에 식초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정지액 냄새. 내 암실과 같은 냄새. 십 년 넘게 문 닫은 현상소에서 날 리 없는 냄새였다. 누가 아직 거기서 무언가를 현상하고 있었다.

소은 씨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곽이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다.

골목으로 나왔다. 해는 여전히 바닥까지 안 내려왔다. 소은 씨가 앞서 걸었다.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눈가를 한 번 훔쳤다. 나는 뒤에서 그걸 봤다. 찍지 않았다.

골목 어귀 기사식당에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제육볶음 두 개. 소은 씨는 앉자마자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야간 근무 끝나고 잠을 안 잔 사람이었다. 제육볶음이 나오자 눈을 떴다.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한 공기를 더 시켰다. 아주머니가 공깃밥을 내려놓으며 나를 봤다. 아가씨 밥 잘 먹네, 오빠는 안 먹어, 하고. 소은 씨가 오빠 아니에요, 했다. 아주머니가 그럼 뭐냐고 물었다. 소은 씨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원수요. 아주머니가 웃었다. 소은 씨는 안 웃었다. 나도 안 웃었다. 그런데 소은 씨는 그 말을 하고 내 쪽으로 반찬 접시를 밀어 주었다. 멸치볶음이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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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05.05· 3화

    여기서 끊는 건 반칙 아닌가요… 잘 읽었습니다.

    • 겨울차2026.05.06

      이 댓글 보고 다시 읽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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