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47자) · 민소은

팔백사 호

붉은 방의 초대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연서동은 재개발이 반쯤 되다 만 동네였다. 사 년 전 내가 찍은 골목은 없어졌다. 그 자리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고 가림막 너머로 크레인 팔 하나가 서 있었다. 길 건너에 임대아파트 다섯 동. 이주 대상자 대부분이 그리로 갔다고 했다.

저녁 여덟 시였고 눈이 왔다. 함박눈이 아니라 마른 눈이었다. 바닥에 닿기 전에 바람에 옆으로 밀려서,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만 잠깐 보이고 사라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노출을 계산했다. 셔터 속도 육십분의 일이면 눈이 선으로 찍힌다. 오백분의 일이면 점으로 멈춘다. 계산이 끝나기 전에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프레임 뒤로 숨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 집에 들러 빈 상자를 챙기고 현관 잠금장치를 하나 더 달아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탁구에서 졌다고 투덜거렸다. 박 여사 서브가 이상하게 휜다고. 빈 상자 얘기는 한 번도 안 했다.

삼 동 팔백사 호.

엘리베이터 안에 관리비 미납 세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호수만 적혀 있고 이름은 없었다. 팔백사 호는 없었다. 팔 층 복도는 추웠다. 창 하나가 깨져 테이프가 붙어 있고, 그 틈으로 마른 눈이 들어와 복도 바닥에 얇게 깔려 있었다. 팔백사 호 앞에 신발장 대신 종이 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 장화 한 켤레와 우산. 현관문 손잡이 위에 은색 보조 잠금장치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새것이었다. 나사가 반짝였다.

벨을 눌렀다. 벨 소리가 문 너머에서 작게 울렸다. 오래된 벨이라 끝음이 갈라졌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스무 번쯤 세고 다시 눌렀다.

발소리가 났다. 맨발이었다. 문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두 개 풀렸다.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문이 열렸다. 스물 몇 살쯤 된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를 대충 묶었고, 소매가 긴 회색 티셔츠를 입었다. 손에 볼펜을 쥐고 있었다. 볼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 손가락 마디 세 군데에 흰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종이에 베이는 일을 하는 손이었다.

그 사람 어깨 너머로 신발장 위가 보였다. 붉은 봉투가 세 개 세워져 있었다. 나란히. 셋 다 봉해진 채였다.

“밤에 죄송합니다. 임서결이라고 합니다. 민해원 씨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봤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할 준비를 이미 해 둔 얼굴이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의 얼굴은 놀라지 않는다. 나는 그런 얼굴을 재난 현장에서 여러 번 찍었다.

볼펜 뚜껑이 딸깍 닫혔다.

“임서결.”

“네.”

“열여섯 번째.”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사람이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집 안에서 따뜻한 공기가 나왔다. 된장 냄새가 났다.

“들어오세요. 그 이름, 우리 엄마예요. 엄마는 이 년 전에 죽었어요.”

집은 작았다. 방 둘, 거실 겸 부엌 하나.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가 있었다. 된장찌개가 식어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가스 밸브를 한 번 확인했다. 잠겨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손으로 돌려 봤다. 그러고는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민소은이에요. 엄마 딸.”

거실 벽에 달력 하나, 액자 하나. 액자 속 여자는 흰 머릿수건을 쓰고 반찬 통을 들고 웃고 있었다. 눈가 주름이 깊었다. 그 옆 옷걸이에 앞치마가 걸려 있었다. 반찬 가게 이름이 수놓인 초록 앞치마. 이 년 동안 빨지 않은 앞치마 같았다. 주머니가 불룩했다. 무엇이 들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물류센터 야간이에요. 열한 시 출근. 택배 분류해요. 하루에 만 개쯤 손으로 넘겨요. 붉은 봉투도 몇 번 지나갔어요. 우리 센터로 온 거. 주소 보고 알았어요. 그것도 엄마 공책에 적혀 있어요. 받는 사람들 주소.”

그 사람은 테이프 감은 손가락을 한 번 폈다 쥐었다. 만 개를 넘기는 손이 봉투 하나를 넘길 때 멈췄을 것이다.

소은 씨는 앉지 않았다.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섰다. 팔짱을 끼지 않고 볼펜을 쥔 채. 나는 그 사람이 뭘 쓰다가 나왔는지 봤다. 식탁 위에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줄 친 공책. 이름들.

“엄마 공책이에요. 원본. 복사본은 석 달 전에 신문사로 보냈어요. 한여름이라는 기자한테. 엄마가 옛날에 그 사람 기사를 오려 뒀더라고요.”

석 달 전 우편. 보낸 사람 없는. 선배가 모르는 척했는지 정말 몰랐는지 나는 모른다.

“엄마가 그 방에 간 게 사 년 전 겨울이에요. 이천이십삼 년 일월. 첫 번째 봉투는 그 전 십이월 말에 왔는데 거절하는 법을 몰랐대요. 거절하려면 남의 이름을 적어야 된다는데, 엄마는 그걸 못 했어요. 그래서 두 번째가 왔고, 갔대요.”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서명했대요. 대출 약정서하고 생명보험 청약서. 그리고 이름 하나를 적어야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엄마는 자기 이름을 적었어요. 처녀 적 이름. 윤해원. 결혼하면서 성을 바꿨거든요. 지금은 아무도 그 이름으로 안 불러요. 없는 사람 이름을 적은 거예요.”

소은 씨는 신발장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봉투 셋 중에 둘이 윤해원 앞으로 온 거예요. 엄마 죽고 나서도 와요. 작년에도, 올해도. 없는 사람한테.”

나는 신발장을 봤다. 붉은 봉투 셋.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거친 종이. 내 봉투와 같은.

“나머지 하나는 제 거예요. 두 번째 봉투. 이십일일 저녁 일곱 시.”

나와 같은 날, 같은 시각이었다.

“첫 번째는요.”

“태웠어요. 작년 겨울에. 엄마 공책 맨 뒤에 적혀 있었어요. 붉은 봉투 오면 태우라고. 태우면 거절이 된다고. 이름 안 적고도요. 그걸로 한 번은 넘어간다고. 두 번째는 못 넘어간다고.”

소은 씨가 볼펜 뚜껑을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딸깍. 그 사람의 버릇이었다. 할 말이 있을 때마다 딸깍.

“엄마는 그 방에서 나온 다음 해부터 이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초대받은 사람들. 반찬 가게 새벽 일 끝나고 오후에. 이 년 동안 스물셋. 찾아가서 말했대요. 봉투 오면 태우라고. 두 번째가 오면 혼자 가지 말라고. 그러다 이 년 전 십이월에 가게에서 가스가 터졌어요. 새벽 다섯 시에. 엄마 혼자 출근해 있을 때. 경찰은 사고라고 했어요. 호스가 낡았다고.”

소은 씨는 그 말을 할 때 싱크대 옆 가스 밸브를 봤다. 잠긴 밸브를.

“보험금은 삼억이었어요. 엄마 앞으로 된 생명보험. 근데 그 돈은 우리한테 안 왔어요. 대출 담보로 보험금에 질권이 걸려 있었대요. 늘봄상조라는 데로 다 갔어요. 저는 장례비도 못 받았어요. 장례는 늘봄상조가 해 줬어요. 공짜로. 웃기죠.”

소은 씨는 웃지 않았다.

나는 식탁 위 공책을 봤다. 스물세 줄. 내 이름이 열여섯 번째에 있었다. 메모는 없었다. 아홉 번째 민해원 줄은 원본에서는 볼펜 색이 달랐다. 다른 줄은 파란 볼펜, 그 줄만 검은 볼펜. 받음. 거절 안 함. 방에 감.

“이름 밑에 동그라미는요.”

“죽은 사람이요. 엄마가 확인한 거. 아홉.”

아홉. 아홉 사람이 그 방에서 서명하고 나와서 몇 해 안에 죽었다. 각자 다른 동네에서, 각자 다른 사고로.

“엄마 줄에는 동그라미가 없어요. 엄마가 자기 동그라미는 못 그렸으니까.”

소은 씨는 거기서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

“그쪽이 엄마 이름 적은 거예요. 사 년 전에.”

“네.”

“왜요?”

“모르는 이름이었습니다. 재개발 현장에서 찍은 이주 명단에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 이름을 적으면 못 견딘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견뎠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 년 동안 견뎠다. 한 번도 검색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걸 견뎠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몰랐다.

“엄마는 모르는 사람 이름을 못 적었어요. 그래서 자기 이름을 적었어요. 그쪽은 모르는 사람 이름을 적었고요. 그 모르는 사람이 우리 엄마예요.”

소은 씨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볼펜 뚜껑을 한 번도 딸깍거리지 않았다. 그 말을 할 때만. 나는 그게 이 사람이 제일 화났을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쪽을 원망하려고 이 년 동안 그 이름을 봤어요. 열여섯 번째 줄. 엄마가 왜 그 줄만 메모를 안 했는지 몰랐어요. 오늘 알았어요. 엄마는 그쪽을 찾아갔는데, 못 만났대요. 공책 뒤에 있어요. 신문사 앞까지 갔다가 그냥 왔대요. 사진기자라서, 자기 얼굴 찍힐까 봐.”

소은 씨가 공책 맨 뒤를 폈다. 연필로 한 줄. 임서결 — 신문사 앞. 못 들어감. 저 사람도 무서울 것.

나는 그 줄을 봤다. 연필 글씨가 흐렸다. 누가 여러 번 손가락으로 쓸어 본 것처럼.

부엌 창밖으로 마른 눈이 옆으로 흘렀다. 가로등 불빛 안에서만 보였다. 나는 그 창에 비친 우리 둘을 봤다. 싱크대에 기댄 사람과 식탁 의자에 앉은 사람. 유리 속에서 둘은 같은 크기였다.

“이십일일에 가실 거예요?”

소은 씨가 물었다.

“안 가면 어머니 집에 불이 납니다. 빈 상자가 이미 왔습니다.”

“저도 가요. 저는 불날 집도 없어요. 여기 엄마 짐밖에.”

소은 씨는 볼펜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손을 비웠다.

“동반 불가래요. 초대장에. 혼자 오래요. 엄마 공책에 그게 관행이라고 적혀 있어요. 진짜 규칙은 둘뿐이래요. 거절은 한 번, 적어야 나간다. 나머지는 관행이라고. 관행은 어겨도 된다고.”

“같이 가자는 말씀입니까?”

“엄마가 이 년 동안 사람들한테 한 말이 그거예요. 혼자 가지 말라고. 엄마는 혼자 갔어요. 그쪽이 적은 이름으로.”

소은 씨가 식은 된장찌개 냄비 뚜껑을 열었다. 김이 나지 않았다. 다시 불을 켜지도 않았다. 대신 그릇 두 개를 꺼냈다.

“식었는데 드실래요. 저 원망 끝나려면 좀 걸리니까, 그동안 밥은 먹어야죠.”

소은 씨는 숟가락을 내 앞에 놓고 자기 그릇에도 찌개를 펐다. 우리는 마주 앉지 않았다. 소은 씨는 싱크대 앞에 선 채로 먹었다. 야간 일 하는 사람이 앉으면 졸린다고 했다.

나는 먹었다. 식은 된장이었다. 짰다. 그 짠맛이 사 년 동안 내가 검색하지 않은 이름의 맛이었다.

열 시 반에 소은 씨는 출근 준비를 했다.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나갔다. 소은 씨가 현관 잠금장치 두 개를 잠그고 손잡이를 세 번 당겨 봤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은 씨는 층 버튼 위 거울을 보지 않았다. 일 층 현관 유리문 밖에서 마른 눈이 가로등 불빛을 가로질렀다. 일 층에서 내리면서 한마디만 했다.

“내일 을지로 가 볼 데가 있어요. 엄마 공책 일곱 번째 줄. 열쇠 가게.”

나는 그 가게를 알았다. 사 년 전에 모르는 사람 이름을 적으라고 한 사람의 가게였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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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5.04· 2화

    이 장면 묘사가 오래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이요.

팔백사 호 · 붉은 방의 초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