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35자)

반반

라면 스프의 비밀 · 은해록

월요일 밤 열한 시⁠, 배합실 문을 열자 불이 이미 켜져 있었다⁠. 형광등 아래 공장장이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를 고쳐 맸고⁠, 무릎 위에 클립보드를 올려 두었다⁠. 발밑에 옛 육수 가루 포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밀가루 포대 더미가 반쯤 무너져 창고 바닥에 흰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공장장이 혼자 포대를 하나씩 들어내고 찾은 것이었다⁠.

기남은 내 뒤에서 문틀을 붙잡고 들어오지 않았다⁠.

“⁠기남이는 나가 있어⁠.⁠”

“⁠삼촌⁠, 나도 같은 조인디⁠…⁠.⁠”

“⁠나가⁠.⁠”

기남이 문을 닫았다⁠. 유리창 너머 복도에서 기남의 위생모가 한참 서성이다가 계단으로 내려갔다⁠. 공장장이 발끝으로 포대를 툭 찼다⁠.

“⁠몇 통이나 이랬어⁠?⁠”

“⁠첫날 두 번째 통부터 전부입니다⁠.⁠”

“⁠전부⁠.⁠”

공장장은 내 말을 한 번 더 입에 굴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배합 통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바닥에 묻은 고춧가루를 내려다보다가 작업복 바지에 닦았다⁠.

“⁠시장에서 야간 2조만 찾는다는 거⁠, 다 네 거였구나⁠. 사장님 앞에서 끓인 시간 차이라고 한 것도⁠.⁠” 공장장이 웃었다⁠. 웃음에 소리가 없었다⁠. “⁠나는 주간 반장한테 고춧가루를 더 넣으라고 했다⁠. 주간 반장은 더 넣었고⁠. 시장 사람들은 더 칼칼하다고 했겠지⁠.⁠”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공장장이 클립보드를 배합 통 뚜껑에 내려놓았다⁠. 판자 부딪히는 소리가 배합실을 울렸다⁠. “⁠너 자르면 끝이야⁠. 지금 당장⁠. 경비 불러서 기숙사 짐 싸게 하면 돼⁠. 근데 너 자르면 을 맛은 누가 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장장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오천 상자⁠. 11월 19일⁠. 을 맛 그대로⁠. 한 상자라도 갑 맛이 나면 계약 끝⁠. 옛 가루는 이 포대가 마지막이다⁠. 수원 원료상은 내가 끊었어⁠. 다시 들이려면 드럼의 세 배 값을 줘야 해⁠. 세 배를 주면 어음 못 막는다⁠.⁠” 공장장이 마지막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까 반반이다⁠. 드럼 반⁠, 네 거 반⁠.⁠”

“⁠제 거는 아직 없습니다⁠.⁠”

“⁠토요일에 어시장 갔다며⁠. 기숙사에서 밤새 새우 볶았다며⁠. 관리인이 나한테 다 말했다⁠.⁠”

나는 가슴 주머니에서 은박지 시험 봉지를 꺼냈다⁠. 공장장이 봉지를 받아 풀고 손가락으로 가루를 찍어 혀에 댔다⁠. 입술이 한 번 오물거렸다⁠.

“⁠짜다⁠.⁠”

공장장은 한마디만 하고 봉지를 도로 접었다⁠. 나는 공장장의 혀를 보았다⁠. 시험 봉지의 가루는 짠맛보다 단맛이 먼저 오는 가루였다⁠. 기숙사 관리인 아저씨도 국물을 마시고 단맛부터 말했다⁠.

“⁠새우든 멸치든 반반이다⁠. 네 혀로 쩐내를 덮어⁠. 너는 덮을 수 있잖아⁠. 오늘부터다⁠.⁠”

“⁠목 뒤가 따끔한 건 덮어지지 않습니다⁠.⁠”

공장장이 시험 봉지를 내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고는 위생모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따라와⁠.⁠”

*

새벽 두 시⁠, 공장 뒷문을 나서자 굴포천 둑길에 포장마차 세 집이 불을 켜고 있었다⁠. 통금이 풀린 뒤로 둑길 포장마차는 새벽 네 시까지 장사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에서 택시 기사 둘이 오뎅 국물을 불어 마셨고⁠, 한 사람은 떠들썩하게 프로야구 이야기를 했다⁠. 공장장은 포장마차를 지나쳐 사택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택 스무 채는 두 줄로 마주 보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연탄 굴뚝이 하나씩 솟았고⁠, 굴뚝마다 가는 연기가 바람에 누웠다⁠. 골목에 연탄 냄새가 고여 있었다⁠. 공장장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집집의 창문 앞을 지나갔다⁠.

“⁠여기는 튀김반 왕 반장 집⁠. 노모를 모신다⁠.⁠”

왕 반장네 창문 안에 백열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왕 반장 아내가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누런 봉투를 붙이고 있었다⁠. 풀솔로 봉투 귀퉁이에 풀을 바르고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다 붙인 봉투를 옆에 쌓았다⁠. 방구석의 흑백 텔레비전은 소리 없이 지지직거렸다⁠. 이불 속에서 노모가 돌아누웠다⁠.

“⁠봉투 천 장 붙이면 쌀 한 되 값이야⁠. 왕 반장 월급으로는 노모 약값이 안 돼서⁠.⁠”

공장장은 다음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났다가 엄마의 자장가 소리에 묻혔다⁠.

“⁠포장반 경자네⁠. 신랑은 제면반⁠. 지난달에 애 낳았다⁠.⁠”

공장장은 다음 집에서도⁠, 또 다음 집 앞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한 줄씩 말했다⁠. 누가 어디서 왔고⁠, 누가 무엇을 갚고 있고⁠, 누가 누구를 모시는지⁠. 공장장은 스무 집을 다 알았다⁠. 문패 없는 집이 없었다⁠. 골목 끝 마지막 집 앞에서 공장장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내 집이다⁠.⁠”

공장장 집 창문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부엌 뒷문이 열리고 공장장 아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손에 보리차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굴 데려왔어요⁠? 들어와서 보리차라도 해요⁠.⁠”

“⁠됐어⁠. 금방 들어갈 거야⁠.⁠”

공장장 아내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들어갔다⁠. 마당 구석에 함석으로 지은 연탄 창고가 있었고⁠, 창고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공장장은 연탄 창고 함석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 스물에 이 공장에 들어왔다⁠. 지금 사장님 아버지가 창업할 때⁠. 사택도 그 양반이랑 같이 지었어⁠. 벽돌을 내 손으로 날랐다⁠.⁠” 공장장이 불 안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이 골목 불이 꺼지면 다시 안 켜져⁠. 서울 회사가 공장을 사면 사택부터 허문다⁠. 그 사람들은 왕 반장 노모가 누군지 몰라⁠.⁠”

“⁠압니다⁠.⁠”

“⁠아니까 하는 말이야⁠. 철순아⁠, 내년 봄에 사택 한 칸이 빈다⁠. 너 줄게⁠. 장가가⁠.⁠”

나는 골목을 돌아보았다⁠. 왕 반장 집 백열등이 아직 켜져 있었다⁠. 봉투 붙이는 손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나는 연탄 냄새를 들이마셨다⁠. 목 안이 매캐했다⁠.

“⁠반반만입니다⁠. 반 넘게는 안 섞습니다⁠.⁠”

공장장이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

“⁠반반이면 됐다⁠.⁠”

나는 반반을 받아들였다⁠. 첫날 밤의 첫 통에 이어 두 번째로⁠, 나는 공장장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나는 통 셋을 섞었다⁠. 창고 구석에 토요일에 사 온 새우 머리 한 다라이와 멸치 부스러기 한 자루가 있었다⁠. 새우 머리는 월요일 저녁 식당 가마솥을 빌려 볶아 둔 것이었다⁠.

저녁 배식이 끝난 식당에서 봉덕 아주머니는 행주로 가마솥 뚜껑을 닦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새우 머리 다라이를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여⁠? 냄새가 벌써 고양이를 부르네⁠.⁠”

“⁠솥 좀 빌려주세요⁠. 한 시간만요⁠.⁠”

“⁠내 솥에 몰래 뭘 끓이는 놈치고 장가간 놈이 없어⁠. 작년에 튀김반 총각이 내 솥에 개소주를 고았다가 아직 혼자 살잖어⁠.⁠”

“⁠몰래가 아니라 지금 말씀드리잖아요⁠.⁠”

봉덕 아주머니는 국자로 내 이마를 톡 치고 솥 아궁이에 불을 넣어 주었다⁠. 마른 솥에 새우 머리를 쏟자 비린내가 식당을 채웠고⁠, 설거지하던 아주머니들이 코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주걱으로 쉬지 않고 뒤집었다⁠. 비린내가 고소한 냄새로 바뀌는 자리에서 불을 뺐다⁠. 봉덕 아주머니가 솥 앞으로 와 코를 들이밀었다⁠.

“⁠어이구⁠, 이건 우리 친정 엄마가 하던 냄새다⁠. 너 이걸로 뭐 하게⁠?⁠”

“⁠라면 국물이요⁠.⁠”

“⁠공장장이 시켰어⁠?⁠”

나는 대답 대신 볶은 새우 머리를 자루에 퍼 담았다⁠. 봉덕 아주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자루 주둥이를 묶어 주며 한마디만 보탰다⁠.

“⁠솥 닦는 건 네가 해⁠. 장가는 내가 못 보내 줘도⁠.⁠”

드럼 가루를 저울에 반만 올렸다⁠. 나머지 반은 내 가루로 채웠다⁠. 주걱으로 열두 번 뒤집고 숟가락을 헹궈 맛을 보았다⁠. 쩐내는 새우 볶은 고소함 밑으로 거의 묻혔다⁠. 혀끝의 쇠맛도 흐려졌다⁠. 목 뒤는 여전히 따끔했다⁠. 처음보다 약했지만 바늘은 바늘이었다⁠.

꼬리표를 달고 도장을 눌렀다⁠. 「⁠10월 31일 · 야간 2조 · 1통⁠」⁠. 도장은 반듯했다⁠. 반듯한 도장이 비뚤어진 도장보다 더 보기 싫었다⁠.

다섯 시⁠, 창고 뒷문이 열리고 남순희가 들어왔다⁠. 포장반 조출이라 은박지 두루마리를 가지러 온 것이었다⁠. 순희는 위생모를 쓰다 말고 코를 킁킁거렸다⁠.

“⁠새우 볶은 냄새랑 튀김 솥 냄새가 같이 나네요⁠.⁠”

순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드럼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비운 드럼 하나가 옆으로 눕혀져 있었다⁠. 순희가 쪼그려 앉아 드럼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바닥 쇠판에 검은 페인트로 영어 글자가 찍혀 있었다⁠. 상표를 긁어낸 허리와 달리 바닥은 아무도 긁지 않았다⁠.

「⁠CONDEMNED · 1979⁠」

순희가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읽었다⁠.

“⁠컨⁠, 뎀드⁠. 야학에서 배웠어요⁠. 야학 선생님이 미군 부대에서 일했거든요⁠. 이거 미군 부대에서 못 쓰게 된 물건에 찍는 말이래요⁠. 폐기 처분⁠. 버리라는 거⁠.⁠” 순희의 손가락이 숫자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구백칠십구⁠. 네 해 묵었어요⁠.⁠”

나는 순희 옆에 쪼그려 앉았다⁠. 드럼 바닥에서 쩐내가 올라왔다⁠. 순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저씨⁠, 이거 반반 섞는 거죠⁠? 포장반에서는 냄새로 다 알아요⁠. 오늘 아침 통 냄새가 어제 통 냄새랑 달라요⁠.⁠”

“⁠오천 상자 주문이 들어왔어요⁠. 내 가루만으로는 못 채워요⁠.⁠”

“⁠그래서 반은 버리라는 걸 넣어요⁠?⁠” 순희가 벌떡 일어났다⁠. 목포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신문사 안 가요⁠. 동생 등록금 때문에 나는 못 가요⁠. 근디 아저씨는 가야지라⁠. 아저씨 도장이잖아요⁠. 꼬리표에 아저씨 도장이 찍혀 있잖아요⁠.⁠”

순희는 은박지 두루마리를 안고 창고를 나갔다⁠. 뒷문이 닫히자 드럼 바닥의 영어 글자만 형광등 아래 남았다⁠.

*

화요일 저녁 여덟 시⁠, 부평역 앞 공중전화 부스 다섯 개 앞에 줄이 길었다⁠. 퇴근길 사람들이 동전을 쥐고 기다렸다⁠. 나는 맨 끝 부스 앞에서 신문 한 장을 펴 들고 있었다⁠. 역 앞 가판대에서 산 해안일보였다⁠. 인천 바닥의 작은 신문이었고⁠, 맨 끝 면 아래에 「⁠제보를 기다립니다⁠」라는 한 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내 차례가 왔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돌렸다⁠. 다이얼이 돌아갔다가 되돌아오는 소리가 귀에 크게 울렸다⁠. 신호가 세 번 갔다⁠.

“⁠해안일보 사회부입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빠르고 낮았다⁠. 수화기 너머로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태성식품 부평 공장⁠. 붉은 띠 드럼 바닥을 보세요⁠.⁠”

“⁠잠깐만요⁠, 누구세요⁠? 태성 어느 부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수화기에 자국이 남았다⁠. 뒷사람이 부스 문을 두드렸다⁠.

*

수요일 아침 여섯 시⁠, 근무를 마치고 정문으로 나갔을 때 경비실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었고⁠, 짧은 커트 머리에 볼펜을 귀에 꽂고 있었다⁠. 한 손에 수첩⁠, 다른 손에 구겨진 주황 봉지 하나를 들었다⁠. 봉지에 검은 솥 그림이 보였다⁠. 경비 아저씨가 여자 앞을 팔로 막고 있었다⁠.

“⁠기자 양반⁠, 회사 허락 없이는 못 들어가요⁠.⁠”

여자는 경비 아저씨 어깨 너머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훑었다⁠. 눈이 내 위생모에서 멈췄다⁠. 내 작업복 가슴의 배합실 명찰에서⁠, 붉게 물든 손가락 끝에서 다시 멈췄다⁠. 여자가 구겨진 봉지를 들어 올렸다⁠.

“⁠배합실 분이세요⁠? 이 냄새나는 라면⁠, 누가 만들었어요⁠?⁠”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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