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01자)

굴포천

라면 스프의 비밀 · 은해록

수요일 저녁 여덟 시⁠, 공장 식당에는 사람이 서른 명 넘게 모여 있었다⁠. 가마솥 셋에 불이 들어갔고⁠, 배식대 위에는 포장반 여자들이 손으로 접은 은박 봉지가 수북했다⁠. 봉지 기계는 봉인 종이 너머에 멈춰 있어서⁠, 내일 아침 시식에 낼 봉지 이백 개를 포장반 여자들이 하나하나 접고 인두로 입을 붙였다⁠. 인두가 은박지에 닿을 때마다 치익 소리와 함께 탄내가 조금씩 올라왔다⁠.

“⁠배 씨⁠, 봉지 귀퉁이 접는 거 봐⁠. 기계보다 내 손이 반듯하지⁠?⁠”

포장반 야간 반장 아주머니가 봉지 하나를 내 눈앞에 흔들었다⁠. 반듯했다⁠.

“⁠기계보다 낫네요⁠.⁠”

“⁠기계는 월급 안 받잖아⁠. 나는 받아야 돼⁠. 이 공장 다시 열면 첫 달 월급에 이 봉지 값 붙여⁠.⁠”

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로 가마솥 뚜껑을 두드려 사람들을 불렀다⁠. 마지막 새우 머리 두 다라이가 솥에 들어갈 차례였다⁠. 오늘 밤 볶고⁠, 새벽까지 채반에서 김을 빼고⁠, 해 뜨기 전에 빻아야 아홉 시 시식에 댈 수 있었다⁠. 재우는 시간이 하룻밤에서 반나절로 줄었다⁠. 줄어든 만큼 불을 다루는 손과 코가 더 바빠야 했다⁠.

열 시⁠, 정문 경비실에서 경비 아저씨가 식당 문을 두드렸다⁠.

“⁠배 씨⁠, 시청에 전화 넣어 봤어⁠. 감시원 양반은 송림동 국숫집 공장에 가 있대⁠. 내일 아침 아홉 시 시식에는 오는데 오늘 밤은 못 온대⁠. 경찰은 포장마차 주인 말만 갖고는 못 나간대⁠.⁠”

나는 가마솥 앞에서 주걱을 쥔 채 서 있었다⁠. 굴포천 하류 창고의 드럼 서른 개가 열두 시에 주안으로 간다⁠. 주안 과자 공장의 통으로⁠, 봉지로⁠, 공단 아가씨들이 퇴근길에 사 가는 과자로⁠. 가마솥에서 비린내가 고소한 냄새로 바뀌는 자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순희가 내 손에서 주걱을 가져갔다⁠.

“⁠가요⁠.⁠”

“⁠불 봐야 해요⁠. 오늘 밤 불이 내일 맛이에요⁠.⁠”

“⁠코는 내가 봐요⁠. 냄새 바뀌는 자리는 내가 아저씨보다 빨라요⁠. 혀는 아침에 와서 보세요⁠. 첫 숟갈은 아저씨 거니까⁠.⁠” 순희가 주걱으로 새우 머리를 뒤집었다⁠. “⁠목포에서는 국 끓이다 말고 뛰어나가는 사람도 국 맛은 알아요⁠.⁠”

기남이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형 없으면 시식 담당은 나여⁠. 일곱 그릇은 문제없어⁠.⁠”

“⁠한 숟갈씩만 먹어⁠.⁠”

“⁠한 숟갈씩 일곱 그릇⁠.⁠”

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로 내 등을 밀었다⁠.

“⁠가⁠. 내 솥은 내가 지켜⁠.⁠”

*

밤 열한 시 반⁠, 굴포천 둑길은 포장마차 불빛이 끝나는 자리부터 캄캄했다⁠. 하류로 걸을수록 물 냄새가 짙어졌다⁠. 공단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썩는 냄새와 겨울 갈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둑 아래 창고 하나에 전구 하나가 켜져 있었다⁠. 초록 트럭이 창고 문에 꽁무니를 대고 있었다⁠.

사내 둘이 드럼을 굴려 트럭 짐칸 발판 위로 올리고 있었다⁠. 드럼이 발판을 오를 때마다 쇠 긁히는 소리가 둑을 울렸다⁠. 짐칸에 붉은 띠 드럼이 이미 스무 개쯤 실려 있었다⁠. 창고 문간에서 추덕배가 껌을 씹으며 금시계를 들여다보았고⁠, 옆에 낯선 사내 하나가 돈 봉투를 쥐고 서 있었다⁠. 주안 과자 공장 사람이었다⁠.

내가 둑에서 내려가자 추덕배가 먼저 알아보았다⁠.

“⁠배합실 배철순이네⁠. 경찰서에서 나왔다며⁠? 축하해⁠.⁠” 추덕배가 껌을 반대편 어금니로 옮겼다⁠. “⁠여기까지 걸어왔어⁠? 혀 말고 다리도 좋네⁠.⁠”

“⁠드럼 내려놓으세요⁠.⁠”

“⁠내 물건이야⁠.⁠”

“⁠미군 부대에서 버리라고 한 물건입니다⁠.⁠”

주안 공장 사람이 돈 봉투를 쥔 손을 멈췄다⁠. 추덕배가 주안 공장 사람을 돌아보며 웃었다⁠.

“⁠신경 쓰지 마⁠. 미군 부대 물건은 원래 좋은 거야⁠. 버리라는 건 저 사람들 기준이고⁠.⁠” 추덕배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박하 껌 냄새가 훅 끼쳤다⁠. “⁠배철순⁠, 하나 물어보자⁠. 미군 부대에서 버린 걸 내가 안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땅에 묻어⁠. 그럼 밤에 굶는 놈들이 파 가⁠. 파서 그냥 먹어⁠. 내가 팔면 적어도 공장에서 끓여는 먹지⁠. 나도 이 장사로 식구 넷을 먹여⁠. 너만 식구 있냐⁠?⁠”

“⁠끓여도 안 됩니다⁠. 저는 맛을 봤어요⁠.⁠”

“⁠너 혀 좋은 거 알아⁠. 근데 세상은 혀로 안 굴러가⁠.⁠” 추덕배가 손을 들어 내 턱을 잡았다⁠. 손가락이 광대뼈를 눌렀다⁠. 추덕배의 금시계가 내 턱밑에서 차갑게 닿았다⁠. “⁠혀 좋은 놈 혀 뽑는 건 쉬워⁠. 하하⁠. 이번엔 농담 아니야⁠.⁠”

드럼 굴리던 사내 둘이 일을 멈추고 내 양옆으로 왔다⁠. 하나가 내 팔을 뒤로 꺾었다⁠. 어깨가 뜨겁게 아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혀를 깨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둑 위에서 손전등 불빛이 내려왔다⁠.

불빛은 내 얼굴을 지나 추덕배의 얼굴에서 멈췄다⁠. 손전등을 든 사람이 둑을 천천히 내려왔다⁠. 회색 점퍼 깃 사이로 밤색 넥타이가 보였다⁠. 공장장이었다⁠. 공장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둑을 다 내려와서는 트럭 짐칸 앞으로 걸어가 드럼들 앞을 막았다⁠.

“⁠추 사장⁠, 그 손 놔⁠.⁠”

추덕배가 내 턱을 놓았다⁠. 내 팔을 꺾던 사내도 손을 풀었다⁠. 추덕배가 공장장을 보며 웃었다⁠.

“⁠공장장님까지 오셨네⁠. 기남이가 일렀나⁠?⁠”

“⁠집사람이 일렀다⁠. 포장마차 주인이 사택에 와서 떠들더란다⁠.⁠” 공장장이 손전등을 드럼에 비췄다⁠. 붉은 띠가 불빛에 번들거렸다⁠. “⁠이거⁠, 내가 산 드럼이다⁠. 열 개는 시청이 가져갔고 서른 개는 아직 값도 다 안 줬지⁠. 내가 산 거니까 내가 끝낸다⁠.⁠”

“⁠끝내다니요⁠? 공장장님⁠, 혀도 없는 양반이 뭘 끝내요⁠?⁠”

공장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말이었다⁠. 공장장의 손전등이 흔들리지 않았다⁠.

“⁠사장님한테 들었구나⁠.⁠” 공장장이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혀는 없다⁠. 근데 눈은 있어⁠. 드럼 바닥 글자 긁으라고 시킨 것도 나다⁠. 그건 내 손이 한 일이야⁠. 이제 내 손으로 끝낸다⁠.⁠”

주안 공장 사람이 돈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만요⁠. 미군 폐기품이에요⁠? 신문 난 그거예요⁠? 부평 라면 공장⁠?⁠”

“⁠신경 쓰지 말라니까⁠.⁠”

“⁠신경 써야죠⁠. 우리 공장도 과자 만드는 공장이에요⁠. 해안일보 우리 사장님도 봤어요⁠.⁠” 주안 공장 사람이 뒷걸음질 쳤다⁠. “⁠저 안 살게요⁠. 저 여기 안 왔어요⁠.⁠”

주안 공장 사람이 둑길로 뛰어 올라갔다⁠. 추덕배가 껌을 바닥에 퉤 뱉었다⁠. 드럼 굴리던 사내 둘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가 슬그머니 갈대밭으로 사라졌고⁠, 나머지 하나도 따라갔다⁠.

추덕배는 혼자 남았다⁠. 트럭 운전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손을 운전대 밑으로 뻗었다가 멈췄다⁠. 열쇠 꽂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공장장이 점퍼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손전등 불빛 아래 흔들었다⁠. 열쇠가 짤랑거렸다⁠.

“⁠둑에서 내려오다가 뽑았다⁠. 추 사장이 배합실 총각 턱 잡고 있는 동안⁠.⁠”

*

둑 위 포장마차 옆에 공중전화가 하나 있었다⁠. 공장장은 손전등을 내 손에 쥐여 주고 수화기를 들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동전이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공장장은 동전을 주워 넣고 번호를 돌렸다⁠. 경찰서였다⁠.

“⁠태성식품 부평 공장 공장장 변도순입니다⁠. 굴포천 하류 창고에 붉은 띠 드럼 서른 개가 있습니다⁠. 미군 부대 폐기품입니다⁠.⁠” 공장장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제가 산 겁니다⁠. 원료상 추덕배가 여기 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둑 아래에서 무엇이 첨벙 빠지는 소리가 났다⁠. 손전등을 비췄다⁠. 추덕배가 둑길을 따라 달아나다가 얼어붙은 진흙에 미끄러져 굴포천 가장자리에 무릎까지 빠져 있었다⁠. 금시계 찬 손을 허우적거렸다⁠. 껌은 이미 뱉은 뒤였다⁠.

“⁠사람 살려⁠! 여기 물이 차⁠!⁠”

포장마차 주인이 국자를 든 채 둑으로 나와 내려다보았다⁠.

“⁠추 사장⁠, 거기 무릎밖에 안 와⁠. 일어나면 돼⁠.⁠”

추덕배는 일어났다⁠. 일어나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진흙 속에 서 있었다⁠. 구두 한 짝이 진흙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순찰차 불빛이 둑길 저편에서 다가올 때까지 추덕배는 구두 한 짝을 붙잡고 씨름했다⁠.

*

새벽 다섯 시⁠, 경찰이 드럼 서른 개를 창고에 다시 넣고 문에 종이를 붙였다⁠. 짐칸에서 드럼을 내릴 때마다 쇠 부딪는 소리가 둑에 울렸고⁠, 붉은 띠가 순찰차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공장장은 드럼이 하나씩 창고로 굴러 들어가는 것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서른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추덕배는 순찰차 뒷자리에서 진흙 묻은 양말 한 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장장은 형사에게 제 이름과 주소를 불러 주었다⁠. 사택 주소였다⁠.

월급날 나를 경찰서로 데려간 형사가 순찰차에서 내렸다⁠. 담배 냄새 나는 손바닥⁠, 기름때 낀 손톱⁠. 형사는 나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또 당신이오⁠? 나온 지 여드레 만에⁠.⁠”

“⁠이번에는 제가 부른 게 아닙니다⁠.⁠”

“⁠알아요⁠. 공장장이 불렀다며⁠.⁠” 형사가 공장장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한 사람은 시켰다고 하고 한 사람은 섞었다고 하고⁠. 둘이 같이 오니까 내가 할 일이 줄어서 좋네⁠.⁠”

“⁠도장은요⁠?⁠”

“⁠아직 못 돌려주오⁠. 재판 끝나야 하오⁠.⁠” 형사가 수첩을 덮었다⁠. “⁠근데 당신⁠, 내일 아침에 라면 맛 보인다며⁠? 경찰서 당직이 그 얘기를 하더군⁠. 유치장에서 냄새로 날짜 맞힌 사람이라고⁠. 나도 한 그릇 줄 거요⁠?⁠”

“⁠아홉 시⁠, 공장 식당입니다⁠.⁠”

“⁠바빠서 못 가오⁠.⁠” 형사가 순찰차 문을 열다가 돌아보았다⁠. “⁠남으면 한 봉지 경찰서로 보내요⁠. 당직 몫으로⁠.⁠”

나와 공장장은 굴포천 둑길을 따라 공장으로 걸었다⁠. 내 어깨는 아직 욱신거렸고⁠, 턱에는 추덕배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얼얼했다⁠. 하늘이 동쪽부터 회색으로 밝아 왔다⁠. 포장마차들은 불을 끄고 비닐 휘장을 내렸다⁠. 공장장의 걸음이 내 걸음보다 느렸다⁠. 나는 걸음을 늦췄다⁠.

“⁠기남이가 그러더라⁠. 너 대신 내가 시식 담당 하면 공장 망한다고⁠.⁠” 공장장이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짧고 낮은 소리였다⁠. “⁠맞는 말이지⁠. 소금물도 맛있다고 하는 놈이니까⁠.⁠”

공장장은 한참 말없이 걸었다⁠. 둑 아래 굴포천 물 위로 물안개가 낮게 깔렸다⁠. 공장장이 손으로 물안개를 가리켰다⁠.

“⁠사택 벽돌을 나를 때도 이 둑길로 날랐다⁠. 리어카로⁠. 창업주 양반이 앞에서 끌고 내가 뒤에서 밀고⁠.⁠” 공장장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젯밤 집사람이 그러더라⁠. 김치에 소금 치지 말라고⁠. 맛 모르면 모르는 대로 먹으라고⁠. 모르는 걸 소금으로 덮으면 김치만 버린다고⁠.⁠”

“⁠사모님 김치⁠, 맛있었습니다⁠. 소금 칠 데가 없었어요⁠.⁠”

“⁠그 말 집사람한테 해 줘라⁠. 나는 못 하니까⁠.⁠”

“⁠공장장님⁠.⁠”

“⁠이제 공장장 아니다⁠. 내일⁠, 아니 오늘 아침이면⁠.⁠” 공장장이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사장님 앞에서 말할 거다⁠. 혀도⁠, 드럼도⁠, 배합표도⁠. 네가 단상 앞에서 했던 말⁠, 이번엔 내가 한다⁠.⁠”

공장 뒷문이 보였다⁠. 식당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가마솥이 밤새 꺼지지 않은 연기였다⁠. 공장장이 굴뚝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췄다⁠.

“⁠아홉 시다⁠. 숟가락이 몇 개 필요하냐⁠?⁠”

“⁠도매상⁠, 감시원⁠, 사장님⁠, 서울 회사 상무⁠. 그리고 이백 명요⁠.⁠”

“⁠하나 더⁠.⁠” 공장장이 점퍼 깃을 여몄다⁠. “⁠나도 숟가락 든다⁠. 혀가 없어도⁠.⁠”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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