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09자)

사택 마당

라면 스프의 비밀 · 은해록

기숙사 2호실 문을 열자 기남이 윗칸에서 뛰어내렸다⁠. 정말로 뛰어내렸다⁠. 바닥이 쿵 울렸고 기남은 무릎을 붙잡고 한참 데굴데굴 굴렀다⁠. 굴러다니면서도 내 바짓단을 붙잡았다⁠.

“⁠형⁠, 나 안 떨어졌어⁠. 뛰어내린 겨⁠. 떨어진 거랑은 달러⁠.⁠”

“⁠무릎은⁠?⁠”

“⁠무릎은 떨어진 걸로 쳐⁠.⁠”

2호실 사내들이 웃었다⁠. 3호실 문이 열리고 튀김반 친구가 내 베개를 들고 왔다⁠. 베개를 내 아랫칸에 던지고 뒤통수를 긁었다⁠.

“⁠배 씨⁠, 지난번에 복도로 내놓은 거⁠. 그거⁠, 화투가 안 풀려서 그랬어⁠.⁠”

“⁠화투요⁠?⁠”

“⁠그날 내가 내리 졌거든⁠.⁠” 튀김반 친구가 시선을 피했다⁠. “⁠왕 반장님 할머니가 그러시더라⁠. 배합실 총각 아니었으면 내가 그 라면을 겨울 내내 먹었을 거라고⁠.⁠”

튀김반 친구는 더 말하지 않고 3호실로 돌아갔다⁠. 문을 닫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고깃국은 기남이한테 몰아준다며⁠. 나도 한 점만 줘⁠.⁠”

*

이튿날 아침⁠, 사택 공장장 집 마당에 채반이 깔렸다⁠. 드럼 열 개가 끌려 나간 연탄 창고 앞이었다⁠. 맨 먼저 채반을 깐 사람은 공장장 아내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부엌에서 쓰던 대나무 채반을 하나씩 들고 나와 마당에 줄지어 놓았다⁠. 그러고는 대문을 열어 두었다⁠.

순희와 기남이 연안부두에서 새우 머리를 두 다라이 사 왔다⁠. 돈은 사택 집집에서 천 원씩 걷었다⁠. 왕 반장 아내가 처음 천 원을 냈고⁠, 경자가 아기를 업은 채 천 원을 냈고⁠, 포장반 야간 반장 아주머니가 「⁠배탈 값⁠」이라며 이천 원을 냈다⁠. 부평시장 동문 할머니는 멸치 부스러기 한 자루를 버스에 실어 보냈다⁠. 자루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총각이 사 간 봉지 값⁠. 거스름돈 없음⁠.⁠」

새우 머리는 식당 가마솥에서 볶고⁠, 사택 마당 채반에서 김을 빼고 하룻밤 재웠다⁠. 사택 여자들이 채반 앞에 쪼그려 앉아 새우 머리를 손으로 뒤집었다⁠. 손이 빨랐다⁠. 봉투를 천 장씩 붙이던 손이었다⁠.

“⁠경자야⁠, 신랑 요새 코 고는 거 좀 나아졌어⁠?⁠”

“⁠나아지긴⁠. 공장 쉬니까 낮에도 골아요⁠. 애가 아빠 코 고는 소리에 잠들어요⁠.⁠”

“⁠그럼 좋은 거지⁠. 우리 집 양반은 코 안 골면 숨 멈춘 줄 알고 내가 깨워⁠.⁠”

왕 반장 아내가 새우 머리 하나를 집어 들고 웃었다⁠. 공장장 아내도 웃었다⁠. 공장장 아내는 웃으면서 새우 머리를 손바닥에 올려 코에 대 보았다⁠.

“⁠이거⁠, 볶은 거랑 재운 거랑 냄새가 다르네⁠.⁠”

“⁠재우면 단내가 속에서 올라온대요⁠.⁠” 순희가 채반을 옮기며 말했다⁠. “⁠배합실 아저씨 어머니가 그랬대요⁠. 강화 분이요⁠.⁠”

“⁠강화 사람은 새우를 알지⁠.⁠”

공장장은 마당에 나오지 않았다⁠. 안채 툇마루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문틈으로 양말 신은 발 하나가 보였다⁠. 발은 오전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기남은 마당 구석 연탄 화덕 앞에서 볶다 남은 새우 머리를 집어 먹었다⁠. 공장장 아내가 지나가며 기남의 손등을 탁 쳤다⁠.

“⁠그건 팔 거야⁠.⁠”

“⁠숙모⁠, 이건 맛보는 거여유⁠. 형도 맨날 맛보잖어유⁠.⁠”

“⁠철순이는 한 숟갈만 맛보더라⁠.⁠”

*

오후에 주 기자가 사택 골목으로 들어왔다⁠. 회색 바바리코트 자락에 굴포천 둑길의 흙이 묻어 있었다⁠. 주 기자는 채반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와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새우 머리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가 금방 폈다⁠.

“⁠서울 회사 계획을 알아 왔어요⁠. 서울에 있는 우리 신문 선배가 그 회사 출입을 해요⁠.⁠” 주 기자가 수첩을 펼쳤다⁠. “⁠태성의 상표랑 가게 자리만 사요⁠. 공장은 닫고⁠, 땅은 창고로 써요⁠. 사택은 헐고 트럭 세우는 자리로⁠.⁠”

나는 채반 앞의 여자들을 보았다⁠. 경자가 아기를 추스르며 새우 머리를 뒤집었다⁠. 공장장 아내가 채반을 햇볕 드는 자리로 옮겼다⁠.

“⁠여기 사람들은 알아요⁠?⁠”

“⁠아직요⁠. 지난주에 서울 회사 상무가 와서 줄자로 공장 땅을 쟀대요⁠. 경비 아저씨가 봤어요⁠.⁠” 주 기자가 볼펜 꽁무니를 깨물었다⁠. “⁠이 기사도 쓸 거예요⁠. 목요일 전에⁠.⁠”

“⁠목요일 아침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또요⁠?⁠”

“⁠이번에는 서울 회사 사람 앞에서 맛을 보일 겁니다⁠. 그거 보고 쓰세요⁠.⁠”

주 기자가 한참 나를 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그러고는 채반에서 새우 머리 하나를 집어 혀에 대 보았다⁠. 얼굴을 찡그렸다⁠.

“⁠비려요⁠.⁠”

“⁠아직 안 빻았어요⁠.⁠”

*

주 기자가 다녀간 날부터 이틀 밤⁠, 식당에서 시식이 열렸다⁠. 봉덕 아주머니가 맨 면을 삶고⁠, 나는 냄비마다 가루를 한 숟갈씩 풀었다⁠. 사택 여자들과 기숙사 사내들이 숟가락을 들고 배식대 앞에 줄을 지었다⁠. 시식 담당은 기남이 자청했다⁠. 기남은 첫날 밤 일곱 그릇을 비우고 배식대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형⁠, 나 배가 솥이 됐어⁠.⁠”

“⁠그러니까 한 숟갈씩만 먹으랬잖아⁠.⁠”

“⁠한 숟갈 먹으면 두 숟갈이 궁금하고⁠, 두 숟갈 먹으면 그릇 바닥이 궁금혀⁠.⁠”

첫날 밤 국물은 짰고 끝맛이 조금 비렸다⁠. 단맛이 짠맛 뒤에 숨어 늦게 왔다⁠. 내 첫 숟갈이 아직이라고 했다⁠. 순희가 냄비에 코를 대 보고 새우를 조금 더 볶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소금을 덜고⁠, 순희 말대로 새우를 더 볶았다⁠. 어머니 말이 떠올라 볶은 새우를 빻지 않고 채반에서 하룻밤 더 재웠다⁠. 이튿날 밤⁠, 봉덕 아주머니가 냄비를 내려놓자 김과 함께 단내가 올라왔다⁠. 나는 숟가락을 헹궈 한 숟갈 떴다⁠.

단맛이 혀 가운데로 천천히 퍼졌다⁠. 짠맛은 단맛을 받쳐 주는 자리에 있었다⁠. 혀끝이 깨끗했다⁠. 목 뒤가 조용했다⁠. 옛 육수 가루의 맛과는 달랐다⁠. 쇠고기 냄새 대신 바다 냄새가 혀끝에 남았고⁠, 강화 장터 국숫집 평상에서 손님들이 바닥까지 비우던 국물과 닮아 있었다⁠.

“⁠이거예요⁠.⁠”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식당이 조용해졌다⁠. 왕 반장 아내가 한 숟갈을 떠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튀김반 친구가 그릇째 들어 마셨다⁠. 봉덕 아주머니는 국자로 냄비 바닥을 긁어 마지막 국물을 제 입에 털어 넣고 한참 말이 없었다⁠.

“⁠내가 이 식당에서 이십 년 국을 끓였는데⁠.⁠” 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를 허리춤에 꽂았다⁠. “⁠라면 국물한테 지는 날이 오네⁠.⁠”

시식이 끝난 밤 늦게⁠, 나는 사택 마당에 채반을 덮으러 갔다⁠. 서리가 내릴 것 같은 밤이었다⁠. 마당에 먼저 나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공장장이었다⁠. 내복 위에 점퍼를 걸치고 채반마다 신문지를 한 장씩 덮고 있었다⁠. 신문지는 해안일보였다⁠. 공장장은 나를 보고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채반까지 신문지를 덮고 돌멩이로 귀퉁이를 눌러 놓은 다음 안채로 들어갔다⁠. 툇마루에서 공장장 아내가 무릎에 담요를 덮고 앉아 남편의 손을 보고 있었다⁠. 공장장 아내는 나를 보고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채반 귀퉁이의 돌멩이 하나를 고쳐 놓은 다음 골목을 빠져나왔다⁠.

*

12월 2일 금요일 낮⁠, 본관 2층 사장실 문 앞에서 나는 위생모를 벗었다⁠. 공장 정문에는 봉인 종이가 그대로였지만 본관 사무실은 열려 있었다⁠. 사장 곽만수는 서울 회사와의 계약서를 손보러 내려와 있었다⁠. 사장실 어항의 금붕어 두 마리는 여전히 느리게 돌았다⁠. 석유난로는 꺼져 있었다⁠. 기름값을 아낀다고 했다⁠. 「⁠근면 성실⁠」 액자 밑에는 골프채 가방이 벽에 기대어 있었고⁠, 가방 주머니 밖으로 하얀 골프공 세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기름값은 아껴도 골프는 안 아끼는 방이었다⁠.

사장은 금테 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귀찮은 얼굴이었다⁠.

“⁠고소당한 사람이 고소한 사람 방에 오면 안 되는 거 알지⁠?⁠”

“⁠압니다⁠.⁠”

공장장이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무릎에 서류철을 올려놓았다⁠. 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장 책상 위에 은박지 봉지 하나를 올려놓았다⁠. 손으로 접어 풀로 붙인 봉지였다⁠. 사택 마당에서 재우고 식당 가마솥에서 빻은 가루가 들어 있었다⁠.

“⁠한 봉지입니다⁠. 새우 머리⁠, 멸치 부스러기⁠, 소금⁠, 고춧가루⁠, 마늘⁠. 육수 가루는 안 들어갔습니다⁠. 드럼도 옛 가루도요⁠.⁠”

“⁠그래서⁠?⁠”

“⁠한 봉지에 들어가는 원가를 적어 왔습니다⁠.⁠” 나는 종이 한 장을 봉지 옆에 놓았다⁠. 연필로 적은 숫자들이었다⁠. “⁠새우 머리는 닭 모이 값이고⁠, 멸치 부스러기는 사료 값입니다⁠. 볶고 재우고 빻는 손은 사택에 있습니다⁠. 봉투 붙이는 부업 값만큼 드리면 됩니다⁠. 옛 가루보다 쌉니다⁠. 드럼보다는 조금 비쌉니다⁠.⁠”

사장은 종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닦았다⁠.

“⁠자네⁠, 내 사정을 아나⁠? 공장을 팔면 빚을 다 갚고 나는 산다⁠. 다시 열려면 봉인이 풀려야 하고⁠, 서울 도매상이 돌아와야 하고⁠, 은행이 기다려 줘야 해⁠. 셋 다 안 되는 일이야⁠.⁠” 사장이 안경을 다시 썼다⁠. “⁠그리고 자네 숫자를 내가 왜 믿나⁠? 자네는 숟가락 대는 사람이지⁠, 숫자 다루는 사람이 아니잖아⁠.⁠”

소파 끝에서 서류철 넘기는 소리가 났다⁠. 공장장이 일어나 사장 책상 앞으로 왔다⁠. 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서류철 사이에서 나무 주판 하나를 꺼냈다⁠. 공장장은 선 채로 주판알을 튕겼다⁠. 딸깍⁠, 딸깍⁠, 딸깍⁠. 숫자 한 줄마다 주판알이 위아래로 오갔다⁠. 사장실이 주판 소리로만 채워졌다⁠.

마지막 알을 튕기고 공장장이 주판을 내려놓았다⁠.

“⁠숫자는 맞습니다⁠, 사장님⁠. 사택 부업 값을 봉투 붙이는 품삯만큼 쳐도 옛 가루보다 한 봉지에 얼마씩 덜 듭니다⁠. 드럼보다는 더 들고요⁠.⁠” 공장장이 종이를 사장 앞에 내려놓았다⁠. “⁠맛은 저는 모릅니다⁠.⁠”

사장이 공장장을 보았다⁠. 공장장은 사장을 마주 보았다⁠.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대지 않았다⁠.

“⁠변 공장장⁠, 자네가 모른다는 말을 다 하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 할 때가 와서요⁠.⁠”

사장은 한참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은박지 봉지를 집어 들어 흔들어 보았다⁠. 가루가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목요일 열 시에 서울 회사 상무가 온다⁠. 도장 찍으러⁠. 그 전에 아홉 시⁠, 식당에서 한 번 맛을 보지⁠. 서울 도매상도 부르고⁠, 시청 감시원도 부르고⁠.⁠” 사장이 봉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도매상이 그 자리에서 다시 계약하겠다고 하면 안 판다⁠. 아니면 열 시에 도장 찍는다⁠. 그리고 자네 고소는 그대로 둔다⁠. 이건 장사야⁠.⁠”

“⁠네⁠.⁠”

사장실을 나와 복도 끝 소화기 앞을 지날 때 공장장이 뒤따라 나왔다⁠. 사장실 앞에서 내 멱살을 잡던 자리였다⁠. 공장장은 나를 붙잡지 않고 걸음만 나란히 했다⁠.

“⁠주판은 내 손이 아직 안다⁠.⁠”

공장장은 한마디만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

12월 6일 화요일 밤 열한 시⁠, 기숙사 2호실 문을 경비 아저씨가 두드렸다⁠. 숨이 차 있었다⁠.

“⁠배 씨⁠, 정문 전화⁠. 신문사 여자 기자⁠.⁠”

나는 슬리퍼 바람으로 뛰었다⁠. 경비실 전화기의 수화기가 책상 위에 누워 있었다⁠. 수화기를 들자 주 기자의 빠른 목소리가 쏟아졌다⁠.

“⁠추덕배요⁠. 굴포천 하류 창고에 돌아왔대요⁠. 둑길 포장마차 주인이 우리 편집국에 전화했어요⁠. 초록 트럭이 왔다고⁠.⁠” 주 기자가 숨을 들이쉬었다⁠. “⁠남은 드럼을 내일 밤에 주안 과자 공장으로 넘긴대요⁠. 포장마차에서 껌 씹으면서 큰 소리로 그랬대요⁠. 서른 개⁠, 내일 밤 열두 시⁠.⁠”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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