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33자)

한 봉지

라면 스프의 비밀 · 은해록

아침 여섯 시 반⁠, 공장 식당 문을 열자 볶은 새우의 단내가 얼굴을 감쌌다⁠. 밤새 꺼지지 않은 가마솥 셋이 낮게 김을 뿜었다⁠. 순희는 쌀 포대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어깨에 기남의 점퍼가 덮여 있었다⁠. 기남은 아궁이 앞 바닥에서 장작을 베고 잤다⁠. 얼굴 반쪽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봉덕 아주머니만 깨어 있었다⁠. 식당 구석 탁자 앞에 앉아 약절구로 무엇을 빻고 있었다⁠. 쿵⁠, 쿵⁠. 절굿공이가 내려갈 때마다 단내가 한 겹씩 올라왔다⁠.

“⁠왔냐⁠. 반은 빻았다⁠. 나머지는 네 손으로 빻아⁠.⁠”

“⁠아주머니⁠, 주무셨어요⁠?⁠”

“⁠솥 지키는 사람이 자면 솥이 운다⁠.⁠” 봉덕 아주머니가 절굿공이를 내게 건넸다⁠. “⁠순희가 열두 시 사십 분에 불을 뺐어⁠. 코를 이렇게 대더니 지금이요⁠, 하더라⁠. 저 아가씨 코는 개 코다⁠.⁠”

나는 남은 새우 머리를 빻았다⁠. 멸치 부스러기를 섞고 소금과 고춧가루와 마늘 가루를 넣었다⁠. 동문 할머니가 보낸 멸치 부스러기였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맨 면 하나를 넣고 가루를 한 숟갈 풀었다⁠.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헹궜다⁠. 한 숟갈 떴다⁠.

혀 가운데로 단맛이 퍼졌다⁠. 짠맛이 단맛 밑을 받쳤고⁠, 고춧가루는 맵기 전에 달았다⁠. 삼키고 나서도 목 뒤가 조용했다⁠. 재우는 시간이 반나절뿐이라 끝맛이 조금 얇았다⁠. 얇은 끝맛 위로 바다 냄새가 한 번 지나갔다⁠.

두 번째 숟갈은 뜨지 않았다⁠. 혀는 맨 처음 한 숟갈만 믿으라고 배웠다⁠.

“⁠됐습니다⁠.⁠”

봉덕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쌀 포대에 기대어 있던 순희가 눈을 떴다⁠. 점퍼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순희는 점퍼를 내려다보고⁠, 아궁이 앞의 기남을 보고⁠, 점퍼를 도로 어깨에 걸쳤다⁠.

*

아홉 시⁠, 식당은 사람으로 꽉 찼다⁠. 식탁들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가운데에 긴 탁자 하나만 남겼다⁠. 탁자에 그릇 다섯 개와 숟가락 다섯 개가 놓였다⁠. 식당 창문마다 바깥에서 얼굴들이 들여다보았다⁠. 이백 명이 다 들어오지 못해 반은 마당에 서서 창문에 이마를 댔다⁠. 경자는 아기를 업고 맨 앞 창문에 붙어 있었다⁠. 왕 반장은 노모를 모시고 와서 식당 문간 의자에 앉혔다⁠.

사장 곽만수가 금테 안경을 쓰고 탁자 머리에 앉았다⁠. 오른편에 서울 도매상 대표가 앉았다⁠. 조끼 단추가 여전히 팽팽했다⁠. 왼편에 시청 감시원 김정호가 앉았고⁠, 사진기를 멘 직원이 감시원 뒤에 자리를 잡았다⁠. 맨 끝에 서울 회사 상무가 앉았다⁠. 깔끔한 감색 양복에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렸고⁠, 가방 옆주머니에 노란 줄자가 꽂혀 있었다⁠. 주 기자는 식당 문 옆 벽에 기대 수첩을 펼쳤다⁠.

공장장은 탁자에 앉지 않았다⁠. 배식대 옆에 서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나는 가마솥 앞을 지켰다⁠. 위생모를 쓰고⁠, 하늘색 작업복에 단추 하나가 빠진 자리를 옷핀으로 여몄다⁠.

봉덕 아주머니가 냄비 다섯 개를 차례로 들고 나왔다⁠. 그릇마다 국물을 부었다⁠. 김이 올라와 탁자 위 사람들의 얼굴을 흐리게 했다⁠.

“⁠한 그릇뿐이오⁠? 비교할 거 없이⁠?⁠”

상무가 물었다⁠. 사장실의 갑⁠, 을⁠, 병 같은 그릇은 없었다⁠. 같은 솥에서 나온 같은 국물이었다⁠.

“⁠한 그릇입니다⁠. 다른 그릇은 다 신문에 났습니다⁠.⁠”

식당 문간에서 누가 웃었다⁠. 상무는 웃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도매상 대표가 먼저 국물을 떠먹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숟갈 더⁠.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그릇을 내려놓지 않고 면을 젓가락으로 건졌다⁠. 사장실에서 을 그릇을 비우던 얼굴이었다⁠. 감시원은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머금었다가 삼키고⁠, 수첩에 무엇을 적었다⁠. 사장은 두 숟갈을 먹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상무는 한 숟갈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은 있네요⁠.⁠” 상무가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근데 원가가 안 맞을 겁니다⁠. 손으로 볶고 말리고 빻는 걸 하루에 몇만 봉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하는 일은 기계보다 비싸요⁠. 이 맛을 지키려다 공장이 다시 망합니다⁠. 저희가 상표를 사서 저희 공장에서 저희 가루로 만드는 게 모두한테 낫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창문을 보았다⁠. “⁠사택 스무 집이 봉투 붙이던 손으로 채반을 뒤집습니다⁠. 기숙사 사람들이 볶습니다⁠. 포장반이 봉지를 접습니다⁠. 1층 튀김 솥 옆에 볶는 솥 하나만 놓으면 손이 반으로 줍니다⁠. 원가는 공장장님이 주판으로 맞췄습니다⁠.⁠”

상무가 공장장을 돌아보았다⁠. 사장도 공장장을 보았다⁠. 이백 명의 눈이 배식대 옆으로 모였다⁠.

공장장이 탁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숟가락 하나를 집어 내 그릇의 국물을 떴다⁠. 입에 넣고 오래 머금었다⁠. 입술이 오물거렸다⁠. 삼켰다⁠.

“⁠짭니다⁠.⁠”

식당이 조용해졌다⁠. 공장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저는 이 국물에서 짠맛밖에 모릅니다⁠. 삼 년 전 겨울부터 혀가 죽었습니다⁠. 소금물을 줘도 맛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시험실에서 저한테 소금물을 줬고⁠, 저는 다 마셨습니다⁠.⁠” 공장장이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댔다⁠. 누르지 않았다⁠. 매듭을 풀었다⁠. “⁠붉은 띠 드럼은 제가 들였습니다⁠. 새 배합표는 제가 썼고⁠, 제 도장을 찍었습니다⁠. 반반도 제가 시켰습니다⁠. 드럼 바닥 글자를 긁으라고 한 것도⁠, 드럼을 제 집 연탄 창고에 숨긴 것도 저입니다⁠.⁠”

공장장은 넥타이를 목에서 빼냈다⁠. 밤색 넥타이가 손에서 늘어졌다⁠. 공장장은 넥타이를 반으로 접어 시식 탁자 위⁠, 국물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배철순은 첫 통을 제 앞에서 섞었습니다⁠. 다음 통부터는 제 몰래 되돌렸습니다⁠. 시장 할머니들이 상자 옆구리를 보고 찾던 「⁠야간 2조⁠」 맛은 이 사람 거였습니다⁠. 저는 그걸 제 새 배합 덕인 줄 알았습니다⁠.⁠” 공장장이 사장을 보았다⁠. “⁠사장님⁠, 저는 오늘로 공장장을 그만둡니다⁠.⁠”

사장이 금테 안경을 벗었다⁠. 닦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다⁠.

“⁠변 공장장⁠…⁠.⁠”

“⁠그래도 이백 명은 살려 주십시오⁠.⁠” 공장장이 창문을 보았다⁠. 창문마다 얼굴이 붙어 있었다⁠. “⁠제가 드럼을 들인 까닭이 그거였습니다⁠. 까닭이 틀렸어도 이백 명은 맞습니다⁠. 숫자는 제가 압니다⁠.⁠”

문간 의자에서 왕 반장의 노모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왕 반장이 부축하려 하자 손을 저었다⁠. 노모는 천천히 탁자까지 걸어와 남은 그릇 하나를 두 손으로 들었다⁠.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릇을 내려놓고 공장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안 아프네⁠.⁠”

노모는 다시 문간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식당 안에서 누가 코를 훌쩍였다⁠.

*

감시원이 수첩을 덮었다⁠.

“⁠남은 드럼과 그 드럼으로 섞은 재고는 전량 폐기합니다⁠. 새 배합표는 시청에 내고⁠, 시료를 보겠습니다⁠. 이 국물이 시료와 같으면 봉인은 풀 수 있습니다⁠.⁠” 감시원이 봉덕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깍두기는 오늘 안 주십니까⁠?⁠”

“⁠봉인 풀리면 줄게⁠.⁠”

식당 안에 웃음이 퍼졌다⁠. 도매상 대표가 빈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 배를 두드렸다⁠.

“⁠다시 계약하지⁠. 오천 상자⁠, 이 맛 그대로⁠.⁠” 도매상 대표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조건이 있어⁠. 나쁜 통에 도장 찍은 사람은 배합실에 두지 마⁠. 서울 시장 사람들도 신문을 봤어⁠. 배합 반원 실명⁠. 그 이름이 섞은 라면을 내가 어떻게 팔아⁠? 맛은 이 사람 혀로 내더라도⁠, 도장은 다른 사람이 찍어야 해⁠.⁠”

사장이 나를 보았다⁠. 공장장도 나를 보았다⁠. 기남이 배식대 뒤에서 그을음 묻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가마솥 앞에서 위생모를 벗었다⁠. 위생모 안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여섯 해 동안 쓴 모자였다⁠.

“⁠기남이가 섞습니다⁠.⁠”

기남이 배식대 뒤에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첫 숟갈 믿는 법을요⁠. 저는 1층 볶는 솥을 맡겠습니다⁠. 배합실에는 안 들어갑니다⁠.⁠”

도매상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안경을 다시 썼다⁠. 사장은 서울 회사 상무를 돌아보았다⁠.

“⁠상무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늘 도장은 못 찍겠네요⁠.⁠”

상무는 서류 가방을 닫았다⁠. 옆주머니의 노란 줄자를 꺼내 식당 벽에 대 보려다가⁠, 이백 명의 눈을 보고 도로 꽂았다⁠.

“⁠원가 안 맞으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저희는 기다립니다⁠.⁠”

상무가 식당을 나갔다⁠. 사장이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잡았다⁠. 사장의 손은 부드러웠다⁠.

“⁠고소는 거두겠네⁠. 자네 도장은 재판 끝나면 찾게⁠. 찾아도 배합실에서는 못 쓰지만⁠.⁠”

“⁠알고 있습니다⁠.⁠”

주 기자가 문 옆 벽에서 수첩을 덮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볼펜 꽁무니를 입에서 뺐다⁠. 이빨 자국이 수십 개 나 있는 볼펜이었다⁠.

사람들이 흩어진 뒤 식당 구석에서 기남이 순희에게 접은 편지지를 내밀었다⁠. 그을음 묻은 얼굴 그대로였다⁠. 순희는 편지를 펼쳐 읽고⁠, 작업복 주머니에서 빨간 볼펜을 꺼냈다⁠. 볼펜 뚜껑을 열었다가 한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틀린 데 없어요⁠?⁠”

“⁠있어요⁠. 세 군데⁠.⁠” 순희가 볼펜 뚜껑을 도로 닫았다⁠. “⁠근데 오늘은 안 고칠래요⁠. 숙제 검사는 공장 다시 열면 해요⁠.⁠”

기남이 편지를 돌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순희는 편지를 접어 제 카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기남은 빈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아궁이 앞으로 가서 볶다 남은 새우 머리를 한 줌 집어 먹었다⁠. 봉덕 아주머니가 국자로 기남의 뒤통수를 톡 쳤다⁠. 기남은 맞으면서도 웃었다⁠.

*

열이틀 뒤 저녁⁠, 사택 공장장 집 마당에 채반이 스무 개 깔렸다⁠. 변도순이 채반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넥타이 없이 누빔 조끼를 입었고⁠, 무릎에 주판을 올려놓았다⁠. 사택 집집에서 볶아 온 새우 머리 자루를 손저울에 달고⁠, 무게마다 주판알을 튕겼다⁠. 왕 반장 아내가 자루를 내려놓으면 변도순이 품삯을 불러 주었다⁠. 변도순의 아내가 옆에서 공책에 받아 적었다⁠. 변도순은 새우 머리를 집어 코에 대 보지 않았다⁠. 무게만 달았다⁠. 무게는 틀리지 않았다⁠.

공장은 12월 20일 밤 다시 돌았다⁠.

밤 열한 시⁠, 나는 1층 볶는 솥 앞에서 첫 솥을 뺐다⁠. 손등에 새우 기름이 튀어 작은 물집이 생겼다⁠. 볶은 새우를 채반에 펼쳐 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복도 형광등 하나가 여전히 가늘게 떨었다⁠.

배합실 유리창 너머에 기남이 있었다⁠. 흰 위생모를 썼고⁠, 하늘색 작업복 단추를 목까지 채웠다⁠. 목에 흰 수건을 둘렀다⁠. 내가 준 수건이었다⁠. 기남은 주걱으로 통 바닥에서부터 위로⁠, 열두 번 뒤집었다⁠.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헹궜다⁠. 한 숟갈 떠서 혀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숟갈은 뜨지 않았다⁠.

기남이 서랍에서 새 나무 도장을 꺼냈다⁠. 도장 바닥에 「⁠하⁠」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인주를 묻혀 꼬리표 아래에 눌렀다⁠.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도장 자리가 조금 비뚤게 번졌다⁠.

나는 복도에 서서 팔짱을 꼈다⁠.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짙은 눈썹⁠, 단단한 어깨⁠, 목에 두른 흰 수건⁠. 팔짱 낀 손가락 끝이 아직 붉었다⁠. 비누로 씻어도 빠지지 않는 붉은색이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기남이 꼬리표를 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12월 20일 · 야간 2조 · 1통⁠」⁠. 기남은 꼬리표를 통에 매달고⁠, 숟가락 하나를 헹궈 문을 열었다⁠. 숟가락 끝에 국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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