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15자) · 맨 아래

열세 번째 문

아래층에는 비가 내린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열세 번째 문은 벽이 아니었다. 벽처럼 칠한 철판이었다.

점검실 북측 벽, 이름 사백여섯 개가 새겨진 면의 오른쪽 끝.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옆에 폭 칠십 센티쯤 되는 면이 있다. 이름이 하나도 없는 면. 삼 년 동안 나는 그걸 기둥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무진이 그 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쇠 소리가 났다. 텅, 하고 속이 빈 소리.

모서리에 볼트가 여섯 개 박혀 있었다. 벽과 같은 회색으로 칠해져서 안 보였다. 여섯 개 중 네 개는 이미 풀려 있었다. 나머지 둘을 무진이 스패너로 풀었다. 스패너는 기계실 공구함에서 최 씨가 가져왔다. 볼트가 빠지자 철판이 안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틈으로 찬 공기가 올라왔다. 아니, 찬 공기가 아니었다. 미지근한 공기. 젖은 공기. 바다 냄새.

철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 뒤에 계단이 있었다. 천구백칠십구년 원도면에 연필로 그려져 있던 그 계단. 아래로. 콘크리트 계단이 열 칸쯤 내려가다가 철제 사다리로 바뀌었다. 사다리는 수직갱 벽을 따라 어둠 속으로 곧게 떨어졌다. 사다리 가로대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누가 최근에 오르내린 흔적. 가로대 몇 개가 반들반들했다.

이월 십오일 밤 열 시 사십 분. 비는 열한 시부터 온다고 했다. 겨울비. 오십 밀리. 해빙기 도로 소금을 씻어 내릴 첫 큰비.

무진이 철판 뒤 계단 첫 칸에 발을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다니야르가 이 계단을 내려갔다. 한 시에. 혼자. 무진은 그걸 발로 먼저 알았다. 최 씨가 무전기를 내 가슴 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관리동 무전기. 채널 삼. 관제실과 관리사무소가 같이 듣는 채널.

“나는 여기 있을게. 문 지키고. 누가 이 철판 도로 닫으면 안 되니까.”

“최 선생님.”

“가. 나는 칠십구 년에 못 내려갔어. 열다섯 살이라. 이번에도 무릎 때문에 못 가. 무릎이 칠십구 년생이라니까.”

최 씨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무진이 먼저 내려갔다. 나는 그 뒤. 장비 가방을 등에 멨다. 안에 손전등 둘, 카메라, 시료 봉투, 방수 수첩, 그리고 수건 한 장. 왜 수건을 넣었는지는 안다. 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전부 젖어 있었으니까.

사다리는 서른두 칸이었다. 나는 셌다. 세지 않으면 손이 멈출 것 같아서. 열 칸쯤 내려가자 위의 형광등 빛이 끊겼다. 손전등을 입에 물었다. 가로대가 미끄러웠다. 장갑을 벗었다. 맨손이 쇠에 닿았다. 쇠가 미지근했다. 지하 오십 미터 쪽으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따뜻해졌다. 겨울에는 땅속이 바깥보다 따뜻하다. 방역 일 할 때 하수도 맨홀에서 김이 오르는 걸 수백 번 봤다. 그게 이 아래였다.

스물다섯 칸째에서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흐르는 소리. 그리고 기계 소리. 윙, 하고 높게 울리다 멈추고, 다시 울리는 소리.

사다리 중간에 한 번 멈췄다. 무진이 아래에서 불렀다. 괜찮냐고. 나는 손전등을 입에 문 채로 대답을 못 해서 발로 가로대를 두 번 쳤다. 텅, 텅. 무진이 아래에서 웃었다. 그 웃음이 수직갱을 타고 올라와 내 발바닥에 닿았다. 서른두 칸. 발이 바닥에 닿았다.

사다리 끝은 좁은 점검 통로였다. 폭 일 미터. 난간 너머로 대심도 터널이 열려 있었다. 지름 십 미터가 넘는 둥근 콘크리트 굴. 청록 조명이 이십 미터 간격으로 이어지다 어둠에 삼켜졌다. 바닥에 준설 궤도가 두 줄. 관제실 모니터에서 보던 그 궤도. 바닥에 물이 발목 높이로 흐르고 있었다. 이미 비가 시작된 것이다. 지상의 빗물이 수백 개의 빗물받이를 거쳐 여기로 모이는 데 몇 분이면 된다.

기계 소리는 오른쪽에서 났다. 무진이 손전등을 그쪽으로 돌렸다. 삼십 미터쯤 떨어진 터널 벽에 작은 철문이 있었다. 점검구.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드는 크기. 그 문이 열려 있었고, 문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형광 조끼. 손에 그라인더. 윙. 불꽃이 튀었다. 문 안쪽 철판에서.

주강철이었다. 이 사람은 이틀 전 새벽에도 여기 내려와 이 문을 갈았을 것이다. 바지가 무릎까지 젖을 만큼. 그날 다 못 갈았다. 그라인더 배터리가 다 됐거나, 손이 떨렸거나. 나는 두 번째 이유이기를 바랐다. 이 사람 손도 한 번은 떨렸기를.

무진이 먼저 뛰었다. 물을 차며. 물이 튀어 내 얼굴에 닿았다. 입술에 닿은 물이 짰다. 도로의 소금. 서울 전체의 겨울이 이 물에 녹아 있었다. 나는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

“관제, 관리동 하지원. 제3수문 근처 점검구. 사람 셋 있어요. 수문 열지 마세요.”

잡음. 그리고 언니 목소리.

“지원아?”

언니 목소리가 높았다. 처음 듣는 높이.

“언니, 거기 있어? 주 소장이 점검구 문 갈아 내고 있어. 다니야르 글자. 우리 여기 있어. 열지 마.”

“지원아, 강우 레이더 붉어. 시간당 삼십 밀리 넘었어. 수위 경보 이 단계야. 과장님이 삼 단계 되면 무조건 열래. 삼 단계까지 이십 분.”

“이십 분.”

“나 안 열게.”

언니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원래 목소리. 규정을 외운 목소리가 아니라, 봉천동 반지하에서 나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열여섯 살의 목소리.

“과장님이 열라고 해도 안 열게. 네가 올라올 때까지. 그 대신 빨리.”

무진이 주강철에게 닿았다. 그라인더가 멈췄다. 주강철이 일어섰다. 젖은 형광 조끼. 얼굴에 쇳가루가 묻어 있었다. 무진을 보고, 그 뒤에 물을 헤치며 오는 나를 봤다. 웃지 않았다.

“무진아. 올라가.”

“문 보여 주세요.”

“청소하는 거야. 원청 일.”

나는 점검구 문 앞에 섰다. 손전등을 문 안쪽 철판에 비스듬히 댔다. 벽의 이름을 읽을 때처럼. 빛을 눕히면 긁힌 홈이 일어선다. 철판 한가운데가 그라인더로 갈려 은색으로 번들거렸다. 반쯤. 갈린 자리 가장자리에 아직 홈이 남아 있었다. 세로로 한 줄. 가로로 한 줄. 비스듬히 반 줄. Д의 절반.

나는 카메라를 꺼냈다. 찍었다. 플래시가 젖은 철판에 하얗게 터졌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그리고 문고리를 찍었다. 바깥쪽 고리. 쇠막대를 끼우는 고리가 휘어 있었다. 안쪽에서 누가 온 힘으로 밀었던 것처럼. 고리 구멍 가장자리에 긁힌 자국이 새로 반짝였다.

주강철이 카메라를 잡았다. 내 손목째. 손아귀가 셌다. 쇳가루가 내 손목에 묻었다.

“하지원 씨. 이거 지우시면 언니 삽니다. 언니가 불빛 보고도 수문 연 거, 그거 하나 남아요. 이 글자 없어지면. 그게 싫으시면 이거 남기세요. 그럼 언니랑 제가 같이 가는 거고.”

그 사람은 조용히 말했다. 물소리 사이로 또렷하게. 사실로 협박하는 사람이었다. 끝까지.

무전기에서 언니 목소리가 났다. 채널 삼. 주강철도 들었을 것이다.

“지원아, 찍어. 전부.”

주강철의 손아귀가 풀렸다. 한 번. 그 틈에 무진이 주강철 팔을 잡아 비틀었다. 스무 살의 힘이었다. 주강철이 물속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라인더가 물에 빠졌다. 전선이 끊겨 있어서 불꽃은 안 튀었다. 배터리형이었다. 물속에서 빨간 불이 깜빡이다가 꺼졌다.

주강철은 무릎을 꿇은 채로 점검구 문짝을 잡았다. 그러고는 무진을 봤다. 문짝을 봤다. 안쪽. 가슴 높이까지 물이 차 있는 칸. 주강철이 무엇을 계산하는지 나는 알았다. 문을 닫고 쇠막대를 끼우면. 이월 구일처럼.

쇠막대는 문 옆 궤도 위에 놓여 있었다. 주강철이 손을 뻗었다.

내가 먼저 잡았다. 차가웠다. 이 아래에서 처음 만진 차가운 것. 쇠막대 한쪽 끝이 구부러져 있었다. 고리 구멍에 오래 끼워져 안쪽에서 밀린 쇠. 나는 그 쇠막대를 가슴에 안았다. 증거 봉투 같은 건 없었다. 수건으로 감쌌다. 가방에서 꺼낸 그 한 장으로.

주강철이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위에서 빛이 쏟아졌다. 수직구 쪽. 관리동 뒷마당 수직구의 나선 철계단을 따라 손전등 여러 개가 흔들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무전기가 울렸다.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

“중부서 한수정입니다. 음성 사서함 들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지금 내려가요. 서른 명이요.”

서른 명. 한 경위는 서른 명을 데리고 왔다. 경찰 스물과 소방 열. 나선 계단이 손전등 불빛으로 한 줄 가득 찼다. 무진이 웃었다. 주강철 팔을 잡은 채로.

주강철은 일어서지 않았다. 물속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물이 그 사람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비가 불어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언니 목소리가 났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

“수위 삼 단계 오 분 전. 지원아, 올라와. 지금.”

물은 이제 내 허벅지까지 왔다. 차갑지 않았다. 미지근했다. 이월 구일 새벽 다니야르를 둘러쌌던 온도. 사람 체온보다 조금 낮은, 오래 있으면 몸이 모르게 식는 온도. 나는 그 온도를 허벅지로 셌다. 일 분, 이 분.

나는 무진을 봤다. 무진이 주강철을 일으켰다.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부축했다. 스무 살이 쉰 살을. 주강철이 무진을 봤다. 그 눈에 무엇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우리는 수직구 쪽으로 걸었다. 물을 헤치고. 경찰들이 나선 계단 맨 아래에서 우리를 받았다. 한 경위가 주강철에게 수갑을 채웠다. 물속에서. 나는 수건에 감싼 쇠막대를 한 경위에게 내밀었다. 한 경위가 받았다. 수건째.

“영수증 써 드릴까요?”

“쓰세요.”

나선 계단은 백이십 칸이었다. 나는 셌다. 젖은 작업복이 한 칸마다 무거워졌다. 무진이 내 뒤에서 올라왔다. 앞에서는 한 경위가 주강철 팔을 잡고 올라갔다. 주강철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반쯤 올라왔을 때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수문이 열리는 소리. 저 멀리 터널 끝에서 물이 밀려오는 소리. 옆에서. 벽을 따라. 무진이 말하던 비. 위에서가 아니라 옆에서 오는 비. 그 소리가 우리 발밑을 지나 터널을 가득 채웠다. 방금 우리가 서 있던 점검 통로가 물에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무전기에서 언니가 말했다.

“열었어. 삼 단계. 십이 분 늦게. 을지로 지하상가 입구 물 오 센티. 인명 피해 없음.”

언니는 그 말을 기록하듯이 말했다. 인명 피해 없음. 이번에는 그 말이 맞았다. 이 건물에서 그 네 글자가 처음으로 맞는 말이었다.

수직구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비가 얼굴을 때렸다. 겨울비. 차가웠다. 위에서 왔다. 제대로 된 비였다. 고층 빌딩들이 수직구 가장자리에 둘러서서 불을 켜 놓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려 그 비를 받았다. 짜지 않았다. 아무 맛도 안 났다. 그게 그렇게 달 줄 몰랐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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