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548자)

벙커 일기

은퇴한 프로게이머 드론 조종사 · 여오령

명곤의 책상 위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화면에 내 와글TV 채널이 떠 있었다⁠. 마지막 방송은 삼 주 전 「⁠손목 치료로 당분간 쉽니다⁠」 공지였다⁠. 공지 아래 댓글이 이천 개 넘게 달려 있었다⁠.

“⁠봉탁진 씨 시청자 삼십만 가운데 스무 살 언저리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모 소령이 계산했습니다⁠.⁠”

혜운이 숫자를 말했다⁠. 반이 넘었다⁠. 나는 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처럼 마흔 줄인 줄 알았다⁠.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원격전투단 지원자가 모자랍니다⁠. 지난달 공고에 삼백 명이 왔습니다⁠. 조종석 스무 개를 세 교대로 돌리려면 육십 명이 늘 앉아 있어야 하고⁠, 쉬는 사람까지 치면 그 배가 필요합니다⁠.⁠” 명곤이 노트북을 내 앞으로 돌렸다⁠. “⁠봉탁진 씨 채널로 기지 생활을 보여 주십시오⁠. 제목은 이쪽에서 정했습니다⁠.⁠”

화면에 방송 제목 안이 떠 있었다⁠. 「⁠철벽의 벙커 일기⁠」

“⁠여기 벙커 아닌데요⁠. 이층 건물이잖아요⁠.⁠”

“⁠벙커가 더 잘 팔린다고 모 소령이 그랬습니다⁠.⁠”

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 시청자를 군대 보내라는 거잖아요⁠.⁠”

“⁠초소에 보내지 말자는 겁니다⁠. 화면 앞에 앉히자는 겁니다⁠.⁠” 명곤은 목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스무 살을 초소에 세우면 눈을 잃습니다⁠. 화면 앞에 세우면 손목이 아픕니다⁠. 저는 손목을 고르겠습니다⁠.⁠”

“⁠싫다고 하면요⁠?⁠”

명곤이 서류 한 장을 노트북 옆에 놓았다⁠. 인사 명령서 초안이었다⁠. 「⁠상병 나지솔 — 강화 해안 초소에서 후방 보급대로 전출⁠」 날짜 칸은 비어 있지 않았다⁠. 다음 달 1일이었다⁠.

“⁠나지솔 상병은 초소에서 두 사람 몫을 섭니다⁠. 보급대에 가면 한 사람 몫만 섭니다⁠. 밤에 여덟 시간 잡니다⁠.⁠”

“⁠그걸 왜 저한테 내미세요⁠?⁠”

“⁠봉탁진 씨가 지킬 것이 하나 더 있어서입니다⁠.⁠”

나는 명령서를 오래 보았다⁠. 「⁠나지솔⁠」 석 자가 활자로 박혀 있었다⁠. 엊그제 영상 통화에서 앞니 하나를 겹쳐 웃던 얼굴이 활자 위에 겹쳤다⁠.

“⁠조건이 있어요⁠. 타격 영상은 안 내보내요⁠. 그리고 저한테 거짓말 시키지 마세요⁠.⁠”

“⁠거짓말은 안 시킵니다⁠.⁠”

명곤은 이번에도 생각하는 데 일 초를 쓰지 않았다⁠.

사령관실을 나오자 복도 창가에 샛별이 기대 있었다⁠. 팔짱을 끼고⁠, 한쪽 발끝으로 바닥 타일 이음매를 문지르고 있었다⁠. 혜운이 문을 닫고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솔이 걸고 방송한다면서요⁠.⁠”

“⁠누가 그래⁠?⁠”

“⁠모 소령님 책상에 명령서 초안 있는 거 어제 봤어요⁠. 날짜까지 다 찍혀 있던데요⁠.⁠” 샛별이 팔짱을 풀었다⁠. “⁠스승님⁠, 지솔이는 제가 지켜요⁠. 그러려고 여기 왔어요⁠.⁠”

“⁠너는 트럭 때려서 지키고⁠, 나는 방송해서 지키면 되잖아⁠.⁠”

“⁠스승님 방송은 거짓말이 될 거잖아요⁠.⁠”

“⁠거짓말 안 시킨대⁠.⁠”

“⁠사령관님은 안 시키죠⁠. 스승님이 알아서 하게 두죠⁠.⁠” 샛별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스승님은 제가 사람 친 거 말 못 하시잖아요⁠. 그 서약 때문에⁠. 그럼 시청자가 물어보면 뭐라고 하실 건데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샛별이 복도 창 너머 들판을 보았다⁠. 겨울 논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저 때문에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솔이 때문에도요⁠. 그건 저한테 빚 지우는 거예요⁠.⁠”

샛별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발소리가 한 칸씩 멀어졌다⁠. 나는 명령서 초안에 찍힌 날짜를 다시 떠올렸다⁠. 다음 달 1일⁠. 샛별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날짜는 지워지지 않았다⁠.

*

방송은 저녁 여섯 시⁠, 식당에서 켰다⁠. 혜운이 카메라를 들었고⁠, 금발이 조명을 들었다⁠. 금발은 조명을 든 손목에 파란 보호대를 찼고⁠, 조명이 자꾸 내 정수리로 올라갔다⁠. 내 뒷머리는 여전히 뻗쳐 있었다⁠.

“⁠금발아⁠, 조명 내려⁠. 정수리 비친다⁠.⁠”

“⁠형 정수리가 원래 비치는 건데요⁠.⁠”

방송을 켜자마자 채팅창이 쏟아졌다⁠.

「⁠형 살아 있었네⁠」 「⁠손목 치료 파주에서 하심⁠? ㅋㅋ⁠」 「⁠벙커 일기 ㄷㄷ⁠」 「⁠탁진엄마⁠: 김치맛있다하더나⁠」

“⁠어머니⁠, 김치 맛있다고 했어요⁠. 주임원사님이 제일 많이 드셨어요⁠.⁠”

카메라가 배식대 옆 주임원사에게 돌았다⁠. 주임원사는 각진 얼굴을 렌즈 정면으로 고정했다⁠. 혜운이 작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주임원사가 종이를 읽었다⁠.

“⁠시청자 여러분⁠. 구독과 좋아요⁠, 바랍니다⁠.⁠”

「⁠다나까로 구독 요청 ㅋㅋㅋ⁠」 「⁠주임원사님 웃어 주세요⁠」 「⁠오천 원 후원 — 주임원사님 웃으면 오천 원 더⁠」

“⁠웃지 않는다⁠.⁠”

「⁠만 원 후원 — 그럼 만 원⁠」

주임원사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채팅창이 일 밀리미터를 잡아냈다⁠.

「⁠웃었다⁠」 「⁠웃음 확인⁠」 「⁠캡처함⁠」

나는 식판을 들고 오늘 저녁 메뉴를 소개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계란말이⁠, 어머니 김치⁠. 방송 중간에 숙소로 자리를 옮겨 침상 정리를 보여 주었다⁠. 주임원사가 시범을 보였다⁠. 모포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고⁠, 모서리를 손날로 쳐서 각을 세웠다⁠. 모포가 두부처럼 네모나게 각이 잡혔다⁠. 이어서 내가 했다⁠. 모포는 반으로 접히다가 가운데가 불룩해졌고⁠, 손날로 칠수록 더 둥글어졌다⁠.

「⁠형 모포 배 나옴⁠」 「⁠주인 닮음⁠」 「⁠탁진엄마⁠: 이불도못개는기⁠」

주임원사가 내 모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봉탁진 조종사는 조종만 해라⁠.⁠”

식당으로 돌아와 계란말이를 한 입 먹고 맛 평가를 했다⁠. 방송 십 년 동안 수없이 해 본 말투였다⁠. 말투가 입에 붙어 있어서 편했다⁠. 편해서 더 불편했다⁠.

샛별이 식판을 들고 화면에 들어왔다⁠. 채팅창이 한 번 더 뒤집혔다⁠.

「⁠샛별 언니다⁠」 「⁠초청전 우승자⁠」 「⁠사제 투샷 미쳤다⁠」

“⁠스승님 방송에 제가 나오면 출연료 주세요⁠.⁠”

“⁠계란말이 줄게⁠.⁠”

샛별이 내 식판에서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갔다⁠. 집어 가면서 채팅창을 슬쩍 보았다⁠. 채팅창 중간에 같은 질문이 몇 번째 올라오고 있었다⁠.

「⁠근데 형 진짜 사람 죽어요⁠?⁠」 「⁠사람 죽는 거면 무서운데⁠」 「⁠기체끼리 싸우는 거 맞죠⁠?⁠」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카메라 뒤에서 혜운이 다른 종이를 들어 올렸다⁠. 굵은 글씨로 네 글자였다⁠. 「⁠기체 대 기체⁠」

샛별이 계란말이를 씹다가 멈췄다⁠. 금발의 조명이 내 얼굴에서 떨렸다⁠. 식당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소리 없이 돌았다⁠. 외국 방송 화면이 잠깐 나왔다⁠. 영어 자막 밑에 우리말 자막이 붙어 있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는 전쟁⁠」

나는 시청자에게 대답했다⁠.

“⁠기체 대 기체예요⁠. 저는 기체만 떨어뜨려요⁠.⁠”

내 몫만 떼어서 말하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기체만 떨어뜨렸다⁠. 샛별은 트럭을 때렸고⁠, 트럭에서 한 사람이 갈대밭으로 굴렀다⁠. 나는 내 몫만 떼어서 말했다⁠. 귀가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왼쪽 귓불을 만지고 있었다⁠.

「⁠역시 철벽⁠」 「⁠안심⁠」 「⁠나도 지원해 볼까⁠」 「⁠삼천 원 후원 — 형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나도 감⁠」

샛별이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화면 밖으로 나가면서 한 번도 나를 보지 않았다⁠.

*

방송은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끄고 나니 손목보다 혀가 먼저 저렸다⁠. 혜운이 카메라를 내리고 다가와 종이 두 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소령님이 쓴 종이예요⁠. 고마워할 일 아니죠⁠.⁠”

혜운이 접은 종이를 주머니 안에서 한 번 더 접었다⁠. 종이가 두꺼워지는 소리가 났다⁠.

“⁠저는 기록만 합니다⁠. 오늘 방송에서 봉 조종사가 한 말도 기록합니다⁠.⁠”

혜운이 몸을 돌렸다⁠. 식당 문에서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

“⁠봉 조종사가 한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봉 조종사 몫까지는요⁠.⁠”

숙소 복도에서 샛별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샛별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전화로 방송 다시 보기를 틀어 놓고 있었다⁠. 내가 귓불을 만지는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스승님 몫만 떼서 말했죠⁠.⁠”

“⁠내 몫은 맞잖아⁠.⁠”

“⁠맞아요⁠. 그래서 더 싫어요⁠.⁠” 샛별이 휴대전화를 침대에 엎었다⁠. “⁠다음에 누가 물어보면 저한테 넘기세요⁠. 제 몫은 제가 말할게요⁠.⁠”

“⁠서약은⁠?⁠”

“⁠서약 어기면 감옥 간대요⁠. 감옥은 좀 생각해 볼게요⁠.⁠”

샛별이 웃었다⁠. 웃음 끝에서 입꼬리가 떨렸다⁠. 나는 문을 닫아 주고 내 방으로 갔다⁠.

*

밤 열한 시⁠, 숙소 침대에 누워 있는데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다⁠.

“⁠방송 봤다⁠.⁠”

“⁠주임원사님 웃는 거 보셨어요⁠?⁠”

“⁠니 귀 만지는 거 봤다⁠.⁠”

나는 천장을 보았다⁠. 이층 침대 위 칸 바닥에 누가 볼펜으로 「⁠전역까지 D-412⁠」라고 적어 두었다⁠. 412에 줄이 그어져 있고 아래로 411⁠, 410이 이어졌다⁠. 원격전투단이 생기기 전 이 방을 쓰던 병사가 남긴 글씨였다⁠.

“⁠니 어릴 때부터 거짓말하면 왼쪽 귀를 만진다⁠. 성적표 숨길 때도 만졌고⁠, 팀에서 잘렸다고 할 때도 만졌다⁠. 은퇴하던 날은 귀가 빨갰다⁠.⁠”

“⁠어머니⁠.⁠”

“⁠나는 니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근데 니가 했다는 건 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무언가를 씹었다⁠. 귤이었다⁠. “⁠파스는 붙이고 자라⁠.⁠”

어머니는 먼저 끊었다⁠. 나는 보호대를 풀고 파스를 꺼냈다⁠. 붙이려다가 손목이 아니라 왼쪽 귀를 만지고 있는 손을 보았다⁠. 손을 내리고 파스를 손목에 붙였다⁠.

*

방송 이튿날 혜운은 내 조종대 귀퉁이에 방송용 작은 카메라와 손바닥만 한 링 조명을 청테이프로 붙였다⁠. 조종하는 손만 찍어서 벙커 일기에 쓰겠다고 했다⁠. 화면은 찍지 않는다고 했다⁠. 카메라는 날마다 내 엄지를 내려다보았다⁠.

나흘 뒤 아침 뉴스가 원격전투단 지원자 소식을 전했다⁠. 이만 명이었다⁠. 지원자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이라고 했다⁠. 자막에 내 방송 화면이 한 장 들어가 있었다⁠. 식당에서 계란말이를 들고 웃는 얼굴이었다⁠. 「⁠“⁠기체 대 기체예요⁠” — 전 프로게이머 봉탁진⁠」 같은 날 외신 몇 곳이 내 말을 영어로 옮겨 실었다⁠. 우리말로 다시 옮긴 기사 제목은 「⁠게이머가 말하는 깨끗한 전쟁⁠」이었다⁠.

명곤이 조종실 복도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손에 인사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상병 나지솔⁠」 석 자 위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약속드린 겁니다⁠. 1일자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이만 명입니다⁠.⁠” 명곤이 명령서를 내게 건넸다⁠. “⁠조종석 스무 개로는 모자랍니다⁠. 다음 달에 조종동을 하나 더 짓습니다⁠.⁠”

명곤이 돌아가자 복도 끝 계단에서 낯선 얼굴들이 올라왔다⁠. 첫 신병 조종사 열 명이었다⁠. 다들 사복 위에 새 카키 조끼를 걸쳤고⁠, 조끼에서 비닐 냄새가 났다⁠. 맨 앞의 남자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볼이 둥글고 안경이 두꺼웠다⁠. 손에 과자 봉지를 쥐고 있었다⁠.

“⁠철벽 형님⁠. 저 감자칩이에요⁠. 방송에서 매일 채팅 치던 감자칩⁠.⁠”

감자칩을 기억했다⁠. 삼 년 동안 내 방송에 매일 들어와 첫 채팅으로 「⁠감튀 말고 감자칩⁠」을 치던 아이디였다⁠. 얼굴은 처음 보았다⁠. 스물한 살이라고 했다⁠. 지솔과 같은 나이였다⁠. 감자칩이 쥐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감자칩 봉지였다⁠.

“⁠형 드세요⁠. 제 이름이에요⁠.⁠”

나는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짰다⁠. 감자칩이 뒤에 선 신병들에게 형님한테 인사하라고 손짓했고⁠, 신병 아홉이 고개를 숙였다⁠. 다들 어디선가 내 방송을 본 얼굴들이었다⁠.

“⁠형 방송 보고 왔어요⁠. 기체 대 기체라면서요⁠. 저도 형처럼 막기만 할래요⁠. 저 막는 거 잘해요⁠. 형 판 다 봤거든요⁠.⁠”

감자칩이 조끼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자랑하듯 펼쳤다⁠. 첫 주 배정표였다⁠. 감자칩의 아이디 옆 칸에 두 글자가 찍혀 있었다⁠.

「⁠타격⁠」

감자칩은 아직 두 글자를 읽지 않았다⁠. 내 얼굴만 보고 웃고 있었다⁠. 내 손이 왼쪽 귀로 올라가려다 멈췄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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