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12자)

빵 줄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나는 마차에서 내려 가스파르 앞으로 갔다⁠. 대문 기둥의 등불이 가스파르의 둥근 얼굴 반쪽만 비췄다⁠.

“⁠조합장님 창고는 봉해졌어요⁠. 우리 공작저 곳간은 안 봉해졌고요⁠.⁠” 내가 말했다⁠. “⁠지하 곳간에 우리 집 겨울 밀이 있어요⁠. 하인 스물두 명이랑 우리 식구가 봄까지 먹을 밀이에요⁠. 그걸 반 풀게요⁠. 내일 새벽부터 코르넬이 주방에서 빵을 구워서 밀 이삭 빵집 다섯 군데로 보내요⁠. 빵집은 원가에 팔고요⁠. 밀이 아니라 빵이니까 조합 창고를 안 거쳐요⁠.⁠”

가스파르가 모자챙 아래로 나를 보았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나는 숨을 이어 갔다⁠.

“⁠그리고 조합이 왕실 허가를 잃으면⁠, 그 대신 벨랑제 소금을 드릴게요⁠. 앞으로 열 해 동안 벨랑제 바다 소금은 조합만 받아요⁠. 왕궁 곳간에 밀 넘기고 받던 수수료보다 많을 거예요⁠. 수도 사람들은 빵은 줄여도 소금은 못 줄이니까⁠.⁠”

“⁠공작부인 마음대로 소금을 열 해나 내줄 수 있습니까⁠? 안방 열쇠는 이제 젊은 공작부인한테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합장은 수도의 소문을 나보다 먼저 알았다⁠. 당연했다⁠. 가스파르는 소문을 사고파는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받으러 가요⁠.⁠”

가스파르가 대문 기둥에서 등을 뗐다⁠. 받아 오시면 기다리겠다고 했다⁠. 받아 오지 못하시면 그것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어떤 답이든 오늘 밤 안에 듣고 가겠다고⁠. 조합장은 답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더 아까워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허리를 짚었다⁠. 마흔넷의 나였으면 두 칸씩 뛰었을 계단이었다⁠. 쉰한 살의 무릎은 한 칸마다 의견을 냈다⁠.

*

안방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셀레스타는 찻상에 앉아 있었다⁠. 헌상서를 넣은 서랍을 손바닥으로 덮고 있었다⁠. 오딜 말로는 셀레스타가 밤마다 그렇게 앉아 있다고 했다⁠. 손바닥이 서랍 위에 얹혀 있으면 서랍이 열리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문간에서 말했다⁠. 공작저 곳간의 밀을 반 풀어야 한다고⁠. 곳간 열쇠가 필요하다고⁠. 벨랑제 소금 열 해를 조합에 주는 데 공작가 인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동안 셀레스타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내 손을 보았다⁠. 첫날 아침 찻잔을 던지려던 손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었다⁠.

“⁠우리 겨울은요⁠? 곳간을 반 비우면 봄이 오기 전에 우리 집 하인들이 먼저 배를 곯아요⁠.⁠”

“⁠반만 먹으면 돼요⁠. 나도 반만 먹고⁠.⁠”

“⁠어머님이요⁠?⁠” 셀레스타가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비웃음 끝에 조금 다른 게 섞였다⁠. “⁠어머님은 열두 해 동안 국을 물리신 분이에요⁠.⁠”

“⁠이제 안 물려요⁠. 혀는 아직 까다로운데⁠, 입이 참아요⁠.⁠”

셀레스타가 서랍에서 손을 뗐다⁠. 허리의 쇠고리에서 곳간 열쇠를 골라 빼냈다⁠. 놋쇠 열쇠였다⁠. 첫날 아침 내가 셀레스타에게 건넨 열쇠였다⁠. 셀레스타는 열쇠를 찻상 위에 놓고 손가락으로 내게 밀었다⁠. 그러고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금빛 반지가 찻상 위에서 한 바퀴 굴렀다⁠.

“⁠소금 계약서는 제가 찍을게요⁠. 반지는 제 손에서 안 나가요⁠. 곳간 열쇠는 드릴게요⁠.⁠” 셀레스타가 반지를 도로 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연회 날까지 어머님은 헌상서에 손대지 마세요⁠. 서랍 근처에도 오지 마시고요⁠. 저도 연회 전까지는 공작님한테 서명 받지 않을게요⁠.⁠”

“⁠휴전이네요⁠.⁠”

“⁠휴전이요⁠?⁠”

“⁠싸우다가 잠깐 멈추는 거요⁠. 우리 동네에서는 회사끼리 소송하다가도 연말에는 그래요⁠.⁠”

셀레스타가 대답하지 않고 소금 계약서를 받아 반지를 눌렀다⁠. 빨간 봉랍 위에 밀 이삭이 찍혔다⁠. 이번 봉랍에서는 백합 향유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공작가의 봉랍이었다⁠.

나가려는데 셀레스타가 등 뒤에서 말했다⁠.

“⁠동생이 지었던 밀 자루도 로슈몽 밀이었어요⁠. 어머님이 그 빵을 사람들한테 나눠 준다니⁠, 이상하네요⁠.⁠”

“⁠뭐가요⁠?⁠”

“⁠기쁘지가 않아서요⁠. 기뻐야 하는데⁠.⁠”

*

새벽 네 시부터 주방에 불이 켜졌다⁠. 코르넬이 반죽을 치대고⁠, 주방 보조 아이들이 화덕에 장작을 넣고⁠, 오딜이 하녀들을 깨워 빵을 바구니에 담게 했다⁠. 세탁부가 깨끗한 빵 보자기를 한 아름 내왔다⁠. 비누가 모자란다던 세탁부였는데⁠, 빵 보자기 빨 비누는 어디선가 구해 왔다⁠. 마부가 검은 말에 수레를 맸다⁠. 검은 말은 사흘 만에 일어나 귀리를 먹고 있었다⁠. 하인들은 반만 먹게 될 겨울을 위해 빵을 굽고 있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할 사람들은 아침 회의에서 이미 다 말했다⁠.

다섯 시쯤 주방 문이 벌컥 열렸다⁠. 오렐리앙이 잠옷 위에 사냥 망토를 걸치고 서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화덕 연기 냄새에 깼다고 했다⁠.

“⁠어머니⁠, 이게 다 뭐예요⁠? 곳간을 열었다면서요⁠. 우리 집 겨울 밀을요⁠?⁠” 오렐리앙이 반죽 통과 빵 바구니와 하인들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셀레스타가 열쇠를 줬다고요⁠? 왜요⁠? 둘이 언제부터 말을 해요⁠?⁠”

“⁠어젯밤부터⁠.⁠”

“⁠무슨 말을 했는데요⁠?⁠”

“⁠어른들 얘기⁠.⁠”

오렐리앙의 귀가 빨개졌다⁠. 서울의 아들이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이유를 묻자 「⁠그냥⁠」이라고 답한 일이 생각났다⁠. 지금은 내가 「⁠그냥⁠」을 하는 엄마였다⁠. 오렐리앙은 뭐라고 더 따지려다 코르넬이 반죽 통을 혼자 들다 허리를 짚는 것을 보았다⁠. 오렐리앙이 망토를 벗어 던지고 반죽 통을 들었다⁠. 공작이 잠옷 바람으로 반죽 통을 나르자 주방 보조 아이들이 입을 벌렸다⁠. 코르넬이 반죽 치대는 법을 일러 주었다⁠. 오렐리앙은 사슴 다리를 꺾던 팔로 반죽을 내리쳤다⁠. 반죽이 탁자에서 튀어 올랐다⁠. 코르넬이 너무 세다고 했다⁠. 오렐리앙이 덜 세게 쳤다⁠. 이번엔 너무 약하다고 했다⁠. 오딜이 웃다가 과자를 떨어뜨렸다⁠.

여섯 시가 넘어 오렐리앙이 밀가루투성이 손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이거 셀레스타 아버지 일이랑 관계있어요⁠?⁠”

나는 화덕 불을 보았다⁠. 셀레스타가 남편 모르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사흘 기다린 벚꽃길 이야기뿐이었다⁠. 아버지 이야기는 숨겨 달라고 하지 않았다⁠. 숨겨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을 내 입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며느리 친정 일을 시어머니가 아들한테 먼저 말하는 집은 서울에도 이 나라에도 오래 못 갔다⁠.

“⁠셀레스타한테 물어봐⁠. 엄마 말고⁠.⁠”

오렐리앙이 반죽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엄마라는 말에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 수레 다섯 대가 강변으로 갔다⁠. 나는 첫 수레를 따라갔다⁠. 밀 이삭 빵집 앞에는 벌써 줄이 강둑을 따라 휘어져 있었다⁠. 줄 선 사람들이 수레의 로슈몽 문장을 보고 웅성거렸다⁠. 지난번 묵은 빵이 날아왔던 자리였다⁠.

나는 빵집 계산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빵집 주인은 공작부인이 자기 가게 안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앞치마를 세 번 고쳐 맸다⁠. 줄의 맨 앞 사람이 동전 셋을 내밀었다⁠. 나는 빵 한 덩이를 건넸다⁠. 다음 사람이 동전 넷을 내밀었다⁠. 나는 빵 한 덩이와 동전 하나를 건넸다⁠. 다음 사람이 은화를 내밀었다⁠.

“⁠은화요⁠?⁠”

“⁠거스름 주세요⁠, 마님⁠.⁠”

나는 은화를 들고 굳었다⁠. 이 나라 은화 하나가 동전 몇 닢인지 몰랐다⁠. 서울에서도 나는 현금을 안 썼다⁠. 휴대전화로 결제했고⁠, 휴대전화가 거스름까지 계산했다⁠. 빵집 주인이 옆에서 손가락을 펴 보였다⁠. 열둘⁠. 나는 동전을 열둘 세어 건넸다⁠. 줄 선 사람이 동전을 다시 세더니 하나를 돌려주었다⁠. 열한 개면 된다고 했다⁠. 줄 뒤에서 누가 웃었다⁠. 이어서 여럿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공작부인이 거스름돈을 틀리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줄 중간쯤에서 회색 숄이 보였다⁠. 묵은 빵을 던졌던 여자였다⁠. 여자는 차례가 오자 동전 셋을 계산대에 놓고⁠,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빵을 받았다⁠. 받은 빵을 반으로 갈라 속을 보았다⁠. 하얀 속이었다⁠. 여자가 빵 냄새를 맡았다⁠. 오래 맡았다⁠.

“⁠로뱅⁠.⁠” 여자가 말했다⁠. “⁠우리 애 이름⁠. 로뱅이었어⁠.⁠”

“⁠로뱅⁠.⁠” 내가 따라 말했다⁠. 혀가 이 이름을 처음 굴렸다⁠.

여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빵을 숄에 싸서 갔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바라지 않았다⁠. 열한 이름 중 하나를 알았다⁠. 왕대비는 열한 이름을 다 안다고 했다⁠. 이제 나는 하나를 알았다⁠.

*

해가 높아질 무렵 가스파르가 왔다⁠. 숨을 헐떡이며 줄을 헤치고 빵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손바닥만 한 놋쇠 판을 들고 있었다⁠. 판 가운데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조합 문 위에 걸려 있던 왕실 납품 허가 판이었다⁠.

가스파르가 놋쇠 판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 왕궁에 허가를 돌려주고 왔습니다⁠. 돌려준 증표로 이걸 주더군요⁠. 떼어 낸 판이요⁠.⁠” 가스파르가 앞니 빠진 자리로 숨을 내쉬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조합 식구 이백 명이 아침에 조합 마당에 모였습니다⁠. 허가 없이 소금으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짐꾼 하나가 그러더군요⁠. 세 해 전 겨울에 허가 지키다 강변에서 애들 깔려 죽는 거 봤다고⁠. 그 짐꾼 조카가 열한 명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그것도 몰랐습니다⁠.⁠”

가스파르가 계산대에서 빵 한 덩이를 집어 동전 셋을 놓았다⁠. 그리고 빵을 반으로 잘라 한 입 먹었다⁠. 둥근 얼굴이 천천히 씹었다⁠.

“⁠공작부인⁠, 이제 조합은 공작부인 편입니다⁠. 허가가 없으니 다른 편이 없습니다⁠.⁠” 가스파르가 빵을 삼켰다⁠. “⁠빵은 동전 셋입니다⁠. 마차 안 타고 걸어오셨으면 공작부인도 셋 받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줄 끝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흰 옷을 입은 왕실 관리가 병사 넷을 데리고 왔다⁠. 어제 창고 문에 종이를 붙이던 관리였다⁠. 관리가 빵집 앞에 서서 종이를 펼쳤다⁠.

“⁠세 해 전 겨울 이후 수도에서 겨울에 곡식을 나누는 일은 왕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 없는 곡식 나눔을 멈추라⁠.⁠”

줄 선 사람들이 술렁였다⁠. 나는 계산대 뒤에서 나와 문간을 막았다⁠. 회사에서 이십 년 동안 법무팀과 싸운 경험이 혀끝에 올라왔다⁠.

“⁠곡식 안 나눠요⁠. 빵을 팔아요⁠. 빵집 주인이 자기 가게에서 빵을 팔아요⁠. 빵집 허가는 왕실이 아니고 수도 시청이 내주잖아요⁠.⁠” 나는 빵집 문에 붙은 낡은 종이를 가리켰다⁠. 시청 도장이 찍힌 빵집 허가증이었다⁠. “⁠이 빵집은 허가가 있어요⁠. 나는 이 집 손님이고요⁠. 손님이 빵 사러 와서 줄 서는 걸 왕실이 막아요⁠?⁠”

관리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줄 선 사람 하나가 소리쳤다⁠. 빵 사는 것도 왕명이 필요하냐고⁠. 다른 사람이 받았다⁠. 세 해 전엔 빵이 없어서 죽었는데 이번엔 빵이 있는데 못 사서 죽느냐고⁠. 웃음이 터졌다⁠. 화난 웃음이었다⁠. 병사 넷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관리가 종이를 접었다⁠. 접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관리 뒤에⁠, 병사들 틈에⁠, 왕실의 흰 옷을 입은 마른 사내가 서 있었다⁠. 발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마른 얼굴에 웃음이 얇게 붙어 있었는데⁠,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가는 그대로였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숙이는 각도가 공손했다⁠. 열네 해 동안 공작가 현관에서 숙이던 각도였다⁠.

“⁠마님⁠, 오랜만입니다⁠.⁠” 옛 집사가 말했다⁠. “⁠이제 왕대비전 곳간 일을 봅니다⁠. 왕대비 마마께서 마님 소식을 궁금해하셔서⁠, 제가 마님 곁에서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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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진명2026.11.01· 9화

    자기 집 겨울 밀을 반 풀겠다고 하는 장면에서 악녀 소리 듣던 사람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요?

    • 진새온작가2026.11.01

      하인 스물두 명이 봄까지 먹을 밀이라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대문 앞에서 말로 먼저 못 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