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77자)

왕대비의 찻잔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왕궁 복도는 길고 하얬다⁠. 바닥은 흰 대리석이었고⁠, 벽에는 흰 백합을 수놓은 휘장이 걸려 있었으며⁠, 오가는 시녀들은 모두 흰 앞치마를 둘렀다⁠. 하얀 것이 너무 많아서 내 짙은 자주색 벨벳 드레스가 복도 한가운데 떨어진 포도주 얼룩 같았다⁠.

왕대비전에 들어가는 길은 비올렌이 열어 주었다⁠. 비올렌의 시어머니인 후작가 대부인이 왕대비와 어린 시절 같은 수녀원 학교를 다녔다⁠. 대부인이 쓴 소개 편지 한 장으로 문이 열렸다⁠. 비올렌은 편지를 받아 오느라 시어머니 방에서 두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바닥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마차에서 내리며 비올렌이 말했다⁠. 우리 공작부인⁠, 이 빚은 포도주로 갚으세요⁠. 배 두 척 분량으로요⁠.

시녀장이 문을 열었다⁠. 왕대비전의 찻상은 내 안방 찻상보다 작았다⁠. 의자가 셋이었다⁠. 가운데 의자에 왕대비 아델하이드가 앉아 있었다⁠. 예순여덟⁠, 흰머리를 검은 레이스 아래 감추었고⁠, 몸이 가늘어서 의자가 커 보였다⁠. 손이 무릎 위에 포개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손이었다⁠.

왕대비 곁에서 젊은 여자가 찻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 금발을 소박하게 땋았다⁠. 젊은 왕비였다⁠. 왕비가 차를 따랐다⁠. 찻물이 잔에 찰랑 차오르자 왕대비가 잔을 내려다보았다⁠. 들지도 않았다⁠.

“⁠다시⁠.⁠”

왕비의 손이 떨렸다⁠. 찻주전자 뚜껑이 달그락 울었다⁠. 나는 이 소리를 알았다⁠. 이 나라에서 내가 처음 낸 소리였다⁠. 침대 곁에 무릎 꿇은 앳된 하녀의 은쟁반 위에서 떨던 뚜껑⁠.

왕비가 잔을 들고 나가려 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왕비의 잔을 받았다⁠. 왕비가 놀라 굳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남쪽 산 찻잎이었고⁠, 물은 조금 덜 식혔으나 찻잎은 좋았다⁠. 다시 할 차가 아니었다⁠.

“⁠맛있는데요⁠.⁠” 내가 말했다⁠.

방이 조용해졌다⁠. 시녀장이 숨을 들이켰다⁠. 왕비가 나를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우산을 받은 얼굴이었다⁠. 왕대비만 움직이지 않았다⁠. 왕대비가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려 나를 보았다⁠.

“⁠로슈몽 공작부인이 남의 며느리 편을 드는군요⁠.⁠” 목소리가 낮고 느렸다⁠. “⁠제 며느리한테는 찻잔을 던지던 분이⁠.⁠”

“⁠던지려다 말았어요⁠.⁠”

“⁠들었습니다⁠.⁠” 왕대비가 왕비에게 손짓했다⁠. 왕비가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한 번 나를 돌아보았다⁠. “⁠앉으시지요⁠, 공작부인⁠. 오래 기다렸습니다⁠. 셀레스타가 공작부인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요즘 공작부인이 하인들을 모아 아침마다 회의를 한다고요⁠. 수고했다는 말을 진짜 수고했다는 뜻으로 쓴다고요⁠.⁠”

나는 앉았다⁠. 셀레스타는 닷새마다 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 방석이 살짝 눌려 있었다⁠. 셀레스타가 이 방석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이 갔다⁠. 시어머니가 하인들한테 웃는다고⁠, 주방장 이름을 부른다고⁠, 며느리한테 씨를 붙인다고⁠. 내 아침 회의가 왕대비의 귀까지 올라와 있었다⁠. 회사에서 팀 회의 내용이 사장실까지 올라가는 데는 보통 하루가 걸렸다⁠.

*

왕대비의 잔에는 차가 없었다⁠. 김이 오르는 맹물이었다⁠. 내가 잔을 보는 것을 왕대비가 보았다⁠.

“⁠저는 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왕대비가 맹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맛을 알면 사람이 약해집니다⁠. 좋은 차를 알면 좋은 차가 없을 때 괴롭고⁠, 괴로우면 사람을 다그치게 됩니다⁠. 공작부인 혀가 이 나라에서 제일 까다롭다는 건 다 압니다⁠. 그 혀 때문에 하인 열한 명이 나갔지요⁠.⁠”

“⁠그 혀 때문에 집사 하나도 나갔어요⁠.⁠”

“⁠들었습니다⁠.⁠” 왕대비가 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셀레스타를 잘 막으시더군요⁠. 집사를 내보내고⁠, 살롱을 되찾고⁠, 조합장을 앉히고⁠. 이레에 한 척씩 밀을 수도로 올려 빵집 문에 밀 이삭을 붙이게 하고요⁠. 영리했습니다⁠. 세 해 전의 공작부인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았습니다⁠. 곳간 문을 잠그는 것밖에 몰랐지요⁠.⁠”

왕대비가 창밖을 보았다⁠. 창 너머로 강이 보였다⁠. 강변 시장 어귀⁠, 빵집 다섯 군데 앞의 줄이 여기서도 실처럼 가늘게 보였다⁠.

“⁠세 해 전 겨울⁠, 저는 이 창가에서 강변을 봤습니다⁠. 빵집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고⁠, 아이들이 넘어지는 것을요⁠. 소리는 안 들렸습니다⁠. 여기는 너무 멀어서요⁠.⁠” 왕대비가 나를 다시 보았다⁠. “⁠열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름을 다 압니다⁠. 공작부인은 아십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두 살 아이 하나를 알았다⁠. 이름은 몰랐다⁠.

“⁠올겨울에는 북쪽 제국이 굶습니다⁠.⁠” 왕대비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내내 같은 높이였다⁠. “⁠제국 배들이 벌써 벨랑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웃돈을 두 배씩 얹어 줍니다⁠. 공작부인이 지금 이레에 한 척씩 밀을 수도로 올리는 건 압니다⁠. 그런데 언제까지요⁠? 제국이 세 배를 부르면요⁠? 네 배를 부르면요⁠? 공작부인 마음이 바뀌면요⁠? 세 해 전처럼⁠.⁠”

“⁠안 바뀌어요⁠.⁠”

“⁠공작부인 마음은 공작부인만 압니다⁠. 수도 사람들은 모르지요⁠. 수도 사람들은 공작부인 마음에 빵을 걸 수 없습니다⁠.⁠” 왕대비가 손을 무릎 위에 다시 포갰다⁠. “⁠그래서 남쪽 항구는 왕실이 쥐어야 합니다⁠. 한 사람 마음에 수도의 겨울을 걸지 않으려고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들어 본 말이었다⁠. 핵심 거래처를 한 사람이 쥐고 있으면 담당자가 퇴사하는 날 회사가 흔들린다⁠. 그래서 회사는 담당자를 둘로 나눈다⁠. 왕대비는 담당자를 둘로 나누는 대신 거래처를 통째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럼 하르덴 백작은요⁠?⁠” 내가 물었다⁠. “⁠하르덴 백작은 죄가 없잖아요⁠. 곳간 문을 잠근 건 이 손이었어요⁠.⁠”

“⁠압니다⁠.⁠”

왕대비가 바로 대답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탑에 있어야 죄 있는 사람이 공작부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겨울 로슈몽을 벌했다면 이듬해 봄 남쪽 항구가 멈췄을 겁니다⁠. 공작가 하인들과 부두 일꾼들이 먼저 굶고⁠, 다음 겨울에 수도가 또 굶었겠지요⁠. 하르덴은 작은 집이었습니다⁠. 작은 집 하나로 큰 집과 수도를 함께 살렸습니다⁠. 저는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대비가 맹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잘못이라고 생각했다면 셀레스타한테 아버지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겠지요⁠. 저는 빚진 게 없습니다⁠. 빚을 갚을 기회를 주었을 뿐입니다⁠.⁠”

나는 부채를 쥐었다⁠.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제안을 하나 하지요⁠.⁠” 왕대비가 말했다⁠. “⁠북쪽 수녀원은 겨울에도 따뜻합니다⁠. 수녀들이 꿀을 칩니다⁠. 공작부인이 연회 전에 스스로 물러나시면⁠, 며느님은 아버지를 얻고⁠, 아드님은 항구를 바쳐 왕실의 신임을 얻고⁠, 수도는 빵을 얻습니다⁠. 하르덴은 이름을 얻고요⁠. 모두가 얻지요⁠.⁠” 왕대비가 한 박자 쉬었다⁠. “⁠공작부인만 빼고요⁠.⁠”

원작의 마지막 장이었다⁠. 「⁠모두가 행복해졌다⁠.⁠」 시어머니만 빼고⁠. 독자들은 박수를 쳤다⁠. 나도 하트를 눌렀다⁠.

“⁠싫어요⁠.⁠” 내가 말했다⁠.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모두가 얻는 게 아니니까요⁠. 항구를 쥐는 손만 바뀌어요⁠. 마마 손이 영원하지 않잖아요⁠. 마마 다음에 누가 쥘지 수도 사람들은 모르죠⁠. 수도 사람들은 그 사람 마음에도 빵을 걸 수 없어요⁠.⁠”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하르덴 백작은 지금 꺼내 주세요⁠. 연회 날 말고 지금⁠. 죄 없는 걸 아시잖아요⁠.⁠”

왕대비가 나를 오래 보았다⁠. 처음으로 무릎 위의 손가락 하나가 움직였다⁠. 검지가 엄지를 한 번 쓸었다⁠.

“⁠공작부인⁠, 정말 변하셨군요⁠.⁠” 왕대비가 일어났다⁠. 일어나는 동작이 소리가 없었다⁠. “⁠셀레스타가 공작부인한테 누구냐고 물었다더군요⁠. 저도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묻지 않겠습니다⁠. 누구시든 연회 날 뵙지요⁠.⁠”

*

긴 흰 복도를 되짚어 나가는데 기둥 뒤에서 누가 내 소매를 잡았다⁠. 젊은 왕비였다⁠. 땋은 금발 끝이 떨렸다⁠. 시녀 하나가 복도 모퉁이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아까⁠, 고마웠어요⁠.⁠” 왕비가 속삭였다⁠. “⁠시집온 지 두 해인데⁠, 어마마마 앞에서 제 차를 맛있다고 해 준 분은 처음이에요⁠. 전하도 안 해 주셨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물만 숨 한 번 더 식히면 돼요⁠.⁠”

왕비가 웃었다⁠. 웃다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소리가 이 복도에서는 큰 소리였다⁠. 왕비는 손을 내리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공작부인⁠, 젊은 공작부인이 닷새마다 와서 차를 마시고 가면⁠, 어마마마는 꼭 북탑 쪽 창을 여세요⁠. 그리고 한참 서 계세요⁠.⁠” 왕비가 복도 끝 창을 눈짓했다⁠. 창밖으로 회색 돌탑이 보였다⁠. “⁠북탑은 왕비전 뒤뜰에서 제일 잘 보여요⁠. 탑 꼭대기 방에 계신 노인은 아침마다 창살에 빵 부스러기를 놓고 새를 불러요⁠. 손가락이 모자란 손으로요⁠.⁠”

망보던 시녀가 헛기침을 했다⁠. 왕비가 내 소매를 놓고 반대편 복도로 사라졌다⁠. 땋은 금발이 흰 휘장 사이로 한 번 반짝이고 없어졌다⁠. 나는 창가로 가서 북탑을 보았다⁠. 꼭대기 창살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여기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새만 보였다⁠.

*

왕궁을 나와 강을 건너는데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강변 창고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창고 문마다 병사가 둘씩 서 있었고⁠, 흰 옷을 입은 왕실 관리가 문에 종이를 붙이고 다녔다⁠. 종이 아래쪽에 하얀 백합 봉랍이 찍혀 있었다⁠. 「⁠왕명으로 이 창고를 봉한다⁠.⁠」

조합 창고들이었다⁠. 오늘 아침 벨랑제에서 올라온 두 번째 배의 밀이 저 안에 들어 있었다⁠. 짐꾼들이 밀 자루를 어깨에 진 채 창고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서 있었다⁠. 밀 이삭 그림을 붙인 빵집 주인 하나가 관리에게 따졌다⁠. 내일 아침 반죽할 밀이 저 안에 있다고⁠. 관리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창고로 갔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리면 병사들 앞에서 공작부인이 왕명을 막는 그림이 된다⁠. 왕대비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마차 안에서 손톱으로 부채 살을 하나씩 세었다⁠. 열여섯 개였다⁠. 왕대비는 내가 찻상에 앉아 있는 동안 이미 사람을 보내 놓았다⁠. 대화는 거절당할 줄 알고 연 회의였다⁠. 회의 결과는 회의 전에 정해져 있었다⁠.

공작저 문 앞에 가스파르가 서 있었다⁠. 둥근 몸이 대문 기둥에 기대 있었고⁠, 모자를 손에 쥐었다⁠. 마차가 서자 가스파르가 다가왔다⁠. 오늘은 앞니를 혀로 훑지 않았다⁠. 숫자도 붙이지 않았다⁠.

“⁠창고 보셨지요⁠, 공작부인⁠.⁠”

“⁠봤어요⁠.⁠”

“⁠왕실 관리가 아까 조합에 와서 말했습니다⁠. 로슈몽 밀을 이레에 한 척씩 받아서 빵집에 바로 푸는 일을 그만두라고요⁠. 그만두지 않으면 조합의 왕실 납품 허가를 거둔다고요⁠.⁠” 가스파르가 모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자가 구겨졌다⁠. “⁠허가가 없으면 조합은 왕궁 곳간과 거래를 못 합니다⁠. 조합 식구가 짐꾼까지 이백 명입니다⁠. 이백 명이 다 저를 봅니다⁠.⁠”

“⁠알아요⁠.⁠”

“⁠모르십니다⁠.⁠” 가스파르가 내 말을 잘랐다⁠. “⁠세 해 전 겨울에도 저는 골라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허가를 골랐습니다⁠. 이번에는 공작부인이 먼저 고르셔야 합니다⁠. 공작부인이 무엇을 내놓으실지 듣고 나서 제가 고르겠습니다⁠. 오늘 밤 안에요⁠.⁠”

가스파르가 모자를 다시 썼다⁠. 대문 기둥 옆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몸이었다⁠. 강에서 찬 바람이 불어왔고⁠, 창고 거리에서 짐꾼들이 밀 자루를 내려놓는 소리가 둔하게 들려왔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왕대비의 찻잔 ·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