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29자)

아들의 서명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북쪽 방 아침 회의는 하인들이 문밖 복도까지 늘어앉아서 했다⁠. 방이 좁아 안에는 다섯만 들어갔다⁠. 나머지는 문턱에 귀를 대고 들었다⁠. 마부가 복도에서 소리 높여 보고했다⁠. 어제 빵이 해 지기 전에 다 팔렸고⁠, 빵집 주인들이 수레를 두 대 더 보내 달라고 했다고⁠. 복도 끝의 세탁부가 받았다⁠. 빵 보자기가 모자라니 비누를 더 사야 한다고⁠. 이번에는 아무도 비누 이야기를 웃지 않았다⁠.

코르넬이 화로에 주전자를 올리며 말했다⁠. 곳간 밀을 반 풀었으니 오늘부터 하인 밥은 반 덩이씩이라고⁠. 복도에서 한숨이 한 번 지나갔다⁠. 한숨 뒤에 누가 말했다⁠. 마님도 반 덩이라면서요⁠. 오딜이 대답했다⁠. 마님은 반에 반 덩이 드셨다고⁠. 혀가 까다로워서 맛없는 반쪽은 안 드신다고⁠. 복도에서 웃음이 났다⁠. 나는 웃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회의 중간에 비올렌이 왔다⁠. 오늘은 에메랄드를 하지 않았다⁠. 목이 허전해 보였다⁠. 비올렌은 의자에 앉지 않고 문간에 서서 부채를 쥐었다 폈다 했다⁠. 나는 하인들을 내보냈다⁠. 문이 닫히자 비올렌이 먼저 말했다⁠.

“⁠우리 공작부인⁠, 어제 저녁에 후작 빚쟁이들이 한꺼번에 왔어요⁠. 다섯 집에서요⁠. 다섯 집 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요⁠.⁠” 비올렌이 웃으려다 말았다⁠. “⁠지난 두 해 동안 그 빚을 누가 막아 주고 있었는지 어젯밤에 알았어요⁠. 왕대비전이에요⁠. 남편이 노름판에서 잃을 때마다 왕대비전 시종장이 몰래 빚을 사 들였대요⁠. 그리고 어제⁠, 공작부인이 왕대비전에 다녀오신 이튿날⁠, 빚 문서를 빚쟁이들한테 도로 팔았고요⁠.⁠”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 받으면 더 비참해요⁠.⁠” 비올렌이 부채를 접었다⁠. “⁠왕대비전에서 오늘 아침 사람이 왔어요⁠. 연회 전날 우리 살롱을 왕대비 마마를 위해 열라고요⁠. 그날 제가 할 말까지 일러 주고 갔어요⁠. 로슈몽 대공작부인이 며느리 몰래 공작가 곳간을 털어 수도 사람들한테 인심을 샀다⁠. 세 해 전 죄를 빵으로 덮으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네⁠. 그래서 하기 쉬워요⁠.⁠” 비올렌이 문고리를 잡았다⁠. “⁠저는 그 말을 할 거예요⁠. 우리 집 대부인이 아직 삼 층에 계시고⁠, 바닥 두드리는 지팡이가 아직 성해요⁠. 후작가가 무너지면 대부인을 모실 데가 없어요⁠. 공작부인 시어머니가 일요일마다 아범 밥 물으셨다는 이야기⁠, 저 웃었어요⁠. 그래도 저는 제 시어머니가 먼저예요⁠.⁠”

비올렌은 나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부채 사이에서 초대장 다섯 장을 꺼내 찻상 대신 놓인 화로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자기가 지난주에 가져온 초대장들이었다⁠.

“⁠이건 돌려받을게요⁠. 어차피 이번 주에 다 취소될 거라서요⁠. 시 낭송회만 남겨 둘게요⁠. 조카가 세 시간 읽는 거요⁠. 그건 아무도 취소 안 해요⁠. 아무도 안 가니까⁠.⁠”

비올렌이 웃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웃었다⁠. 그리고 갔다⁠. 북쪽 방의 의자는 둘이었고 빌려 온 등받이 없는 의자가 셋이었다⁠. 비올렌이 앉던 의자가 하나 비었다⁠. 오딜이 과자 상자를 닫으며 혼잣말을 했다⁠. 후작부인은 과자를 늘 두 개씩 집었다고⁠. 하나는 먹고 하나는 손수건에 싸 갔다고⁠. 삼 층 시어머니 갖다 드리려고⁠.

*

점심 무렵 복도에서 셀레스타와 마주쳤다⁠. 셀레스타는 연분홍 드레스로 돌아와 있었다⁠. 허리의 열쇠꾸러미에서 곳간 열쇠 자리만 비어 있었다⁠. 셀레스타가 먼저 멈춰 섰다⁠.

“⁠공작님이 어젯밤에 물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고요⁠. 어머님이 저한테 물어보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랬어요⁠.⁠”

“⁠대답했어요⁠.⁠” 셀레스타가 열쇠꾸러미를 손으로 눌러 소리를 죽였다⁠. “⁠석 달 동안 수도원이라고 했던 걸 북탑이라고 고쳤어요⁠. 공작님이 한참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그러고는 밖에 나가서 검은 말을 밤새 빗기셨어요⁠.⁠”

“⁠셀레스타는 괜찮아요⁠?⁠”

셀레스타가 나를 보았다⁠. 대답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회사에서 퇴사 면담을 하다 보면 이런 얼굴을 가끔 보았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왔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 얼굴⁠.

“⁠어머님은 그런 거 물어보시는 분이 아니었어요⁠.⁠” 셀레스타가 지나쳐 갔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공작님이 오늘 저녁 어머님 방에 가실 거예요⁠. 저는 말리지 않았어요⁠.⁠”

*

오렐리앙은 저녁에 왔다⁠. 노크를 했다⁠. 이 집에 와서 처음 듣는 아들의 노크였다⁠.

문을 열자 오렐리앙이 복도에 서 있었다⁠. 북쪽 방 문틀이 낮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숙인 고개가 들어와서도 다 펴지지 않았다⁠. 의자 하나에 앉았다⁠.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덩치 큰 공작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턱까지 올라왔다⁠.

“⁠셀레스타한테 물어봤어요⁠. 어머니가 셀레스타한테 물어보라고 하셔서⁠.⁠” 오렐리앙이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 꼈다⁠. “⁠장인어른이 북탑에 계신 거⁠, 처음 들었어요⁠. 셀레스타는 장인어른이 남쪽 수도원에 계신다고 했었어요⁠. 병이 나서 요양하신다고요⁠. 결혼식에 못 오신 것도 그래서라고⁠.⁠”

나는 화로에 장작을 하나 넣었다⁠. 장작이 타닥 소리를 냈다⁠.

“⁠어머니⁠.⁠” 오렐리앙이 고개를 들었다⁠. 회청색 눈이었다⁠. 마르셀린의 눈⁠, 그리고 지금 거울에 비치는 내 눈과 같은 색이었다⁠. “⁠세 해 전 겨울에 벨랑제 곳간 문을 잠근 게 어머니예요⁠?⁠”

대답을 고를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셀레스타가 거짓말쟁이가 되고⁠, 강변의 열한 명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다시 흐려진다⁠. 모른다고 하면 더 나빴다⁠. 자기가 한 일을 모르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마르셀린이 왜 그랬는지 몰랐다⁠. 남편이 죽고 열두 해 동안 혼자 이 집을 쥐고 있던 여자가 세 해 전 겨울에 무엇이 무서웠는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이 몸은 혀만 남기고 이유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 내가 말했다⁠. “⁠이 손이 잠갔어⁠.⁠”

오렐리앙이 눈을 감았다⁠. 오래 감고 있었다⁠.

“⁠왜요⁠?⁠”

“⁠모르겠다⁠.⁠”

오렐리앙이 눈을 떴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화난 얼굴도 아니고 우는 얼굴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된 얼굴이었다⁠. 서울의 아들이 나를 그런 얼굴로 본 적이 한 번 있었다⁠. 내가 아들 일기장을 몰래 읽었다는 걸 들킨 날이었다⁠. 아들은 화내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ㅇㅇ⁠」이 시작됐다⁠.

“⁠모르세요⁠?⁠” 오렐리앙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열한 명이 죽었는데⁠, 그래서 장인어른이 탑에서 세 해를 사셨는데⁠, 어머니는 모르세요⁠?⁠”

“⁠알아야 하는데 몰라⁠. 그게 제일 나쁜 줄 나도 알아⁠.⁠”

오렐리앙이 깍지 낀 손을 풀었다가 다시 꼈다⁠. 무언가를 꺼낼지 말지 재는 손이었다⁠.

“⁠그 겨울에 저 벨랑제에 있었어요⁠. 말 사러 갔다가 눈 때문에 발이 묶였어요⁠. 돌아오는 밤에 강둑 길에서 수레를 봤어요⁠. 스무 대쯤⁠. 밀 자루를 실었고⁠, 수레마다 흰 백합 깃발을 꽂았어요⁠. 왕실 깃발이요⁠. 앞 수레에 우리 집사가 타고 있었어요⁠.⁠” 오렐리앙이 화로를 보았다⁠. “⁠저는 어머니가 왕실에 밀을 바치는 줄 알았어요⁠. 굶는 수도를 위해서요⁠. 그래서 그 겨울 어머니를 처음으로 좀 자랑스러워했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만요⁠.⁠”

나는 화로 앞에서 손을 멈췄다⁠. 왕실 깃발을 단 수레⁠. 곳간 문을 잠근 밀이 왕실 깃발을 달고 밤길을 갔다⁠. 왕대비는 찻상에서 세 해 전 이야기를 다 했다⁠. 수레 이야기만 빼고⁠.

“⁠어머니가 요즘 변하신 건⁠, 그것 때문이에요⁠? 셀레스타 볼 면목이 없어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 대답은 할 수 없었고⁠, 가짜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렐리앙은 내 침묵을 자기 식으로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여러 번⁠.

“⁠셀레스타가 왕대비전에 다닌 것도 들었어요⁠. 헌상서도요⁠.⁠” 오렐리앙이 일어났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뻔해서 다시 숙였다⁠. “⁠어머니는 헌상서를 막으시겠죠⁠. 벨랑제 사람들 때문에⁠, 항구 일꾼들 때문에⁠. 맞는 말이에요⁠. 저도 알아요⁠. 근데요⁠, 어머니⁠.⁠” 오렐리앙이 문고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잠근 곳간 때문에 죽은 열한 명은요⁠? 어머니 대신 탑에 계신 장인어른은요⁠? 그분들은 누가 막아 줘요⁠?⁠”

*

안방 문이 열려 있었다⁠.

오렐리앙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마흔 걸음⁠. 오렐리앙의 걸음이 커서 나는 반쯤 뛰었다⁠. 쉰한 살 무릎이 한 칸마다 의견을 냈다⁠. 안방에 들어서자 셀레스타가 찻상에서 일어났다⁠. 남편 얼굴을 보고⁠, 뒤따라온 내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아는 얼굴이었다⁠.

“⁠서랍 열어 줘⁠.⁠” 오렐리앙이 말했다⁠.

“⁠공작님⁠, 연회 전까지는⁠…⁠…⁠.⁠” 셀레스타가 나를 보았다⁠. 우리가 맺은 휴전을 보는 눈이었다⁠. “⁠어머님하고 약속했어요⁠. 연회 전까지 서명 안 받기로요⁠.⁠”

“⁠당신이 받는 거 아니야⁠. 내가 하는 거야⁠.⁠” 오렐리앙이 찻상 앞으로 다가갔다⁠. “⁠셀레스타⁠, 서랍 열어 줘⁠. 부탁이야⁠.⁠”

셀레스타가 허리의 쇠고리에서 작은 열쇠를 골랐다⁠. 손이 느렸다⁠. 나는 찻상 맞은편으로 갔다⁠.

“⁠오렐리앙⁠, 벨랑제에 부두 일꾼이 몇인지 아니⁠? 곳간 지기⁠, 뱃사람⁠, 짐꾼⁠, 그 식구들까지⁠. 그 사람들이 다 왕실 곳간 관리 밑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 관리가 오늘 아침에 빵집 앞에서 빵 사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어⁠. 그런 사람 밑으로⁠.⁠”

“⁠알아요⁠.⁠”

“⁠알면⁠…⁠…⁠.⁠”

“⁠알아요⁠, 어머니⁠. 다 알아요⁠.⁠” 오렐리앙이 내 말을 잘랐다⁠. 목소리가 높지 않았다⁠. 처음으로 높이지 않고 내 말을 잘랐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 다 맞아요⁠. 근데 어머니는 늘 맞으셨어요⁠. 국이 짠 것도 맞으셨고⁠, 사슴 고기가 질긴 것도 맞으셨고⁠, 셀레스타 머리가 장작 같다는 것도 어머니 눈엔 맞았겠죠⁠. 맞는 말로 열두 해를 사셨어요⁠. 저는 이번엔 틀린 쪽을 고를게요⁠. 틀려도 제가 고를게요⁠.⁠”

셀레스타가 서랍을 열었다⁠. 금박 백합 테두리 헌상서가 나왔다⁠. 셀레스타는 헌상서를 찻상에 펼치고 반지 낀 손을 뗐다⁠. 손을 떼면서 남편을 보았다⁠.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사흘 동안 벚꽃길에 서 있던 여자가 드디어 손수건을 줍는 남자를 본 얼굴도 아니었다⁠. 겁먹은 얼굴이었다⁠.

오렐리앙이 펜을 들었다⁠. 잉크병에 펜 끝을 담갔다⁠. 나는 펜을 쥔 손목을 잡을 수 있었다⁠. 원작에서 하인들이 마르셀린의 손목을 잡았듯이⁠. 잡으면 멈출 것이다⁠. 멈추고⁠, 아들은 다시는 노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잡지 않았다⁠.

오렐리앙이 서명했다⁠. 오렐리앙 로슈몽⁠. 글씨가 컸다⁠. 마지막 획에서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셀레스타가 반지를 빼서 남편에게 건넸다⁠. 오렐리앙은 반지를 받지 않았다⁠. 셀레스타의 손을 잡아 반지 낀 채로 봉랍 위에 눌렀다⁠. 밀 이삭이 찍혔다⁠.

방 안이 조용했다⁠. 촛불 하나가 지지직 탔다⁠.

아래층 현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딜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오딜이 안방 문간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과자를 입에 넣지 않은 얼굴이었다⁠.

“⁠왕대비전에서 사람이 왔어요⁠. 왕대비 마마께서 젊은 공작부인께 보내시는 선물이래요⁠. 찻잔 한 벌이요⁠. 겨울 연회 사흘 전에 왕대비전 시종장이 공작저에 저녁을 들러 오는데⁠, 그때 이 찻잔으로 차를 내 달라고 하셨대요⁠.⁠” 오딜이 침을 삼켰다⁠. “⁠찻잔을 들고 온 사람이요⁠, 마님⁠. 집사 나리예요⁠.⁠”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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