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25자)

북쪽 방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오렐리앙은 아침 회의가 한창일 때 들어왔다⁠. 노크도 하지 않았다⁠.

찻상에는 다섯이 앉아 있었고⁠, 카펫에는 하인 스물두 명이 앉아 있었다⁠. 마부가 검은 말이 일어나 귀리를 먹기 시작했다고 보고하던 참이었다⁠. 오렐리앙의 장화 소리에 마부의 말이 끊겼다⁠. 셀레스타가 남편의 팔을 잡고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오늘은 연분홍 위에 흰 숄을 둘렀다⁠. 반지가 숄 자락 사이로 반짝였다⁠.

오렐리앙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인들이 카펫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찻상에 오딜과 코르넬과 비올렌과 가스파르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오렐리앙의 눈썹이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다들 나가 줘⁠.⁠”

하인들이 일어났다⁠.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스물두 명이 일어선 채 나를 보았다⁠. 오렐리앙의 귀가 빨개졌다⁠. 공작이 나가라고 했는데 하인들이 공작부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회사였으면 인사팀이 난리 날 장면이었다⁠.

“⁠나가세요⁠. 회의는 내일 마저 해요⁠.⁠” 내가 말했다⁠.

하인들이 나갔다⁠. 찻상의 넷도 일어났다⁠. 오딜은 나가면서 문을 반 뼘 열어 두었다⁠. 반 뼘이면 복도에서 다 들렸다⁠.

“⁠어머니⁠.⁠” 오렐리앙이 방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문틀에 닿을 만큼 큰 키가 오늘따라 더 컸다⁠. “⁠로슈몽 공작으로 말씀드릴게요⁠. 안방 열쇠꾸러미를 셀레스타에게 넘겨 주세요⁠. 셀레스타가 이제 이 집 공작부인이에요⁠. 어머니는 이제 대공작부인으로 계시면 돼요⁠.⁠”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른손이 움찔하지 않았다⁠. 찻잔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서울에서 아들이 방문을 쾅 닫을 때마다 올라오던 것이었다⁠.

“⁠오렐리앙⁠, 이리 앉아⁠. 서서 말하지 말고⁠.⁠”

“⁠앉으면 어머니가 또 길게 말씀하시잖아요⁠.⁠”

“⁠길게 말 안 해⁠.⁠”

“⁠하실 거잖아요⁠.⁠”

“⁠엄마가 언제⁠…⁠…⁠.⁠”

엄마⁠.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오렐리앙이 눈을 깜박였다⁠. 이 나라에서 공작부인은 아들에게 엄마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어머니가 언제 길게 말했어⁠.⁠”

“⁠지난 열두 해 내내요⁠.⁠” 오렐리앙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오래 묵힌 말이었다⁠. “⁠아버지 장례 날⁠, 어머니는 손님들 앞에서 웃으셨어요⁠. 제가 열다섯 살이었어요⁠. 장례 끝나고 제가 울었더니 어머니가 그러셨죠⁠. 로슈몽은 울지 않는다⁠. 제가 처음 사냥한 사슴을 들고 왔을 때⁠, 어머니는 고기가 질기다고 접시를 물리셨어요⁠. 셀레스타를 처음 데려온 날⁠, 어머니는 셀레스타한테 머리가 불붙은 장작 같다고 하셨어요⁠. 하인 열한 명을 수고했다는 한마디로 내보내셨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부 이 입이 한 일이었다⁠. 사과할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들의 열다섯 살이 거짓말이 되었다⁠.

“⁠요즘 어머니가 변하신 거 알아요⁠.⁠” 오렐리앙이 숨을 골랐다⁠. “⁠하인들한테 웃으시고⁠, 주방장 이름을 부르시고⁠, 셀레스타한테 씨를 붙이시고⁠. 근데 어머니⁠, 저는 그게 더 무서워요⁠. 셀레스타도 무섭대요⁠. 어머니가 웃을 때마다 다음엔 뭘 하실지 몰라서요⁠.⁠”

셀레스타가 남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그만하라는 손짓처럼 보였다⁠. 오렐리앙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내게는 잘하고 있다는 손짓으로 보였다⁠.

나는 마지막 패를 꺼냈다⁠.

“⁠오렐리앙⁠, 조합장이 가져온 계약서 봤니⁠? 우리 겨울 밀이 왕실 곳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셀레스타가 닷새마다 왕대비전에 가는 것도⁠…⁠…⁠.⁠”

“⁠알아요⁠.⁠” 오렐리앙이 잘랐다⁠. “⁠셀레스타가 다 말해 줬어요⁠. 금고가 비어서 계약을 서둘렀고⁠, 왕대비 마마께서 셀레스타를 예뻐하셔서 차를 마시러 부르신다고요⁠. 그게 뭐가 잘못이에요⁠? 우리 집이 왕실이랑 가까우면 좋은 거잖아요⁠. 어머니는 셀레스타가 하는 건 다 나쁘게 보세요⁠.⁠”

셀레스타가 먼저 패를 깔아 두었다⁠. 내 패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회사에서 보고를 늦게 올리면 이렇게 된다⁠. 같은 내용이라도 먼저 올린 사람의 해석이 사실이 된다⁠.

나는 허리의 열쇠꾸러미를 만졌다⁠. 쇠고리에 열쇠가 열하나⁠. 곳간 열쇠 하나는 이미 셀레스타에게 있었고⁠, 금고 열쇠는 사흘 전 아들이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원작의 이 장면에서 마르셀린은 열쇠꾸러미를 움켜쥐고 버티다가 하인들에게 손목을 잡혀 빼앗겼다⁠. 댓글이 이천 개 달렸다⁠. 「⁠시엄마 손목 잡히는 거 십 번 돌려 봄⁠」

손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쇠고리를 허리에서 풀었다⁠. 열쇠들이 짤랑 울었다⁠.

“⁠셀레스타⁠.⁠” 내가 불렀다⁠. 셀레스타가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는 열쇠꾸러미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셀레스타가 곳간 열쇠를 받던 첫날 아침처럼⁠, 두 손으로⁠. “⁠금고 열쇠는 제일 큰 거예요⁠. 지하는 습하니까 겨울에는 문을 오래 열어 두지 말고요⁠.⁠”

셀레스타가 열쇠꾸러미를 받았다⁠. 손끝이 첫날처럼 차가웠다⁠. 받아 들고 나서 셀레스타는 한 박자 동안 나를 보았다⁠. 이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 이긴 사람이 기대했던 만큼 기쁘지 않을 때 짓는 얼굴이었다⁠.

“⁠찻상은 가져가도 되죠⁠?⁠” 내가 물었다⁠.

“⁠찻상은 두고 가세요⁠, 어머님⁠.⁠” 셀레스타가 열쇠꾸러미를 허리에 찼다⁠. 쇠고리가 연분홍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았다⁠. “⁠안방 물건이잖아요⁠.⁠”

*

북쪽 방은 이 층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창이 북쪽으로 하나 나 있었고⁠, 창밖에 저택 뒷담이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다⁠. 볕은 하루에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원작에서 마르셀린은 신혼 첫 달의 셀레스타를 이 방에 넣었다⁠. 셀레스타는 이 방에서 손을 호호 불며 남편의 사냥복 단추를 달았고⁠, 독자들은 「⁠북쪽 방 장면에서 울었다⁠」고 썼다⁠.

이번에는 내가 들어왔다⁠. 짐은 많지 않았다⁠. 드레스 몇 벌⁠, 진주 목걸이⁠, 부채⁠, 오렌지 껍질 과자 은 상자⁠. 오딜이 침대보를 갈며 혀를 찼고⁠, 코르넬이 화로를 들고 와 방구석에 놓았다⁠. 하녀들이 하나씩 문간에 와서 고개만 들이밀고 갔다⁠. 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무엇을 하러 오는지는 알았다⁠. 이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오는 것이었다⁠. 소문을 나르려면 직접 봐야 했다⁠.

셀레스타의 첫 명령은 짐을 다 옮기기도 전에 내려왔다⁠. 안방에서 아침 회의를 열지 않는다⁠. 하인은 각자 맡은 일만 하고⁠, 일이 생기면 시녀장을 거쳐 젊은 공작부인에게 올린다⁠. 오딜이 명령을 전하며 내 침대에 돌을 데워 싼 천 주머니를 넣었다⁠. 북쪽 방은 밤이면 입김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하인들이 뭐래요⁠?⁠”

“⁠아침 회의를 안방에서 안 하면 북쪽 방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오딜이 주머니를 이불 속 깊이 밀어 넣었다⁠. “⁠세탁부가 제일 먼저 그랬어요⁠. 비누가 모자란다는 말을 이제 겨우 하게 됐는데 도로 못 하게 되면 억울하다고요⁠. 마부는 검은 말 보고를 마님한테 마저 해야 한다고 하고요⁠.⁠”

“⁠셀레스타 명령을 어기면 안 돼요⁠.⁠”

“⁠안 어겨요⁠. 안방에서는 안 하잖아요⁠.⁠” 오딜이 이불을 툭툭 두드렸다⁠. “⁠북쪽 방은 안방이 아니니까요⁠.⁠”

나는 웃음을 참았다⁠. 이 집 하인들은 석 달 만에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규정을 지키면서 규정을 빠져나가는 법을 나보다 먼저 알았다⁠.

점심 무렵 가스파르가 왔다⁠. 북쪽 방 문은 좁았다⁠. 가스파르가 옆으로 몸을 돌려 배를 넣고⁠, 숨을 참고⁠, 다시 숨을 쉬며 들어왔다⁠. 오딜이 뒤에서 밀었다⁠. 비올렌이 맨 뒤에서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의자는 둘뿐이었다⁠. 오딜이 주방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를 셋 빌려 왔다⁠. 다섯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찻상 대신 화로 위에 주전자를 얹었다⁠.

“⁠회의 시작할게요⁠.⁠” 내가 말했다⁠.

“⁠마님⁠, 여기서요⁠?⁠” 오딜이 물었다⁠.

“⁠회의는 방이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하는 거지⁠.⁠”

가스파르가 보고했다⁠. 첫 배가 벨랑제를 떠났다고⁠. 이레에 한 척씩⁠. 수도 빵집 다섯 군데가 문에 밀 이삭 그림을 붙였고⁠, 아침부터 다섯 군데 앞에만 줄이 길다고⁠. 분필 섞은 빵을 팔던 빵집 주인들이 벌써 조합에 와서 줄을 지어 기다린다고⁠. 가스파르는 줄 선 빵집 주인들 이야기를 하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빠진 자리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다만 공작부인⁠.⁠” 가스파르가 웃음을 거두었다⁠. “⁠어제 왕실 곳간 관리가 조합에 왔습니다⁠. 로슈몽 밀이 왜 한꺼번에 안 올라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계약서대로라고 대답했더니⁠, 계약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돌아갔습니다⁠. 들여다보는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비올렌이 이어서 보고했다⁠. 어제 백작 부인 음악회에서 왕대비전 시종장이 공작부인 안부를 물었다고⁠. 대공작부인은 요즘 건강이 어떠시냐고⁠. 대공작부인이라는 말을 시종장이 먼저 썼다고 했다⁠. 셀레스타가 열쇠꾸러미를 받기 하루 전이었다⁠.

화로에서 주전자가 끓었다⁠. 코르넬이 차를 따랐다⁠. 남쪽 산 찻잎이었다⁠. 북쪽 방에서 마셔도 맛은 같았다⁠. 혀는 방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찻잔을 쥐고 생각했다⁠. 서울에서도 나는 안방을 쥐고 있었다⁠. 아들 학원 시간표⁠, 남편 건강검진 날짜⁠, 시어머니 제삿날⁠, 우리 집 적금 만기일⁠. 남편이 해 보겠다고 하면 내가 다시 확인했고⁠, 아들이 해 보겠다고 하면 내가 먼저 해 두었다⁠. 아들이 「⁠ㅇㅇ⁠」 두 글자만 보내기 시작한 것도 중학교 이 학년 무렵부터였다⁠. 해 보겠다고 말해 봐야 엄마가 할 테니까⁠.

*

밤이 깊어 나는 촛대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습관이었다⁠. 퇴근 전에 사무실 한 바퀴⁠. 이제 내 사무실이 아닌 사무실이었다⁠. 북쪽 방에서 안방까지는 복도를 꺾어 마흔 걸음이었다⁠. 아침마다 이 마흔 걸음을 걸어 회의를 하러 오던 하인들의 발이 떠올랐다⁠. 계단 아래 하인 방에서 누가 코를 골았고⁠, 주방에서는 코르넬이 내일 빵 반죽을 덮는 소리가 났다⁠. 집은 내가 쥐고 있지 않아도 돌아갔다⁠. 그게 서운한지 다행인지 몰라 나는 걸음을 늦췄다⁠.

안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밀었다⁠. 셀레스타가 찻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의자 다섯 개가 비어 있었다⁠. 찻상 위에 양피지 한 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테두리에 금박 백합이 둘러져 있었다⁠. 계약서가 아니었다⁠. 계약서에는 테두리가 없었다⁠. 셀레스타의 허리에서 열쇠꾸러미가 쇠 소리를 냈다⁠.

셀레스타가 고개를 들었다⁠. 양피지를 덮지 않았다⁠. 덮을 생각조차 없는 손이었다⁠.

“⁠그 문서 이리 줘요⁠.⁠” 내가 말했다⁠. “⁠금박 백합 두른 문서는 왕실에 바치는 문서잖아요⁠. 우리 집 무엇을 바치는 거예요⁠?⁠”

셀레스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가 다 식어 있었다⁠. 셀레스타는 뚜껑을 닫고⁠, 열쇠꾸러미에서 곳간 열쇠를 골라 손가락에 걸었다가 놓았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오렐리앙 소매를 잡던 얼굴도⁠, 살롱에서 귀부인들 손에 토닥임을 받던 얼굴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을 못 잔 스물넷의 얼굴이었다⁠.

“⁠내일 밤에 안방으로 오세요⁠, 어머님⁠.⁠” 셀레스타가 말했다⁠. “⁠제가 차를 내릴게요⁠. 그리고 다 말씀드릴게요⁠. 어머님이 정말 누구시든⁠, 들으셔야 하는 이야기예요⁠.⁠”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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