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0자)

밀가루에 분필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비올렌은 아침 회의에 초대장 다섯 장을 부채처럼 펼쳐 들고 왔다⁠.

“⁠우리 공작부인⁠, 이번 주 것만 추렸어요⁠. 백작 부인 음악회⁠, 자작 부인 카드 놀이⁠, 대주교 조카 시 낭송회⁠. 시 낭송회는 가지 마세요⁠. 조카가 자기 시를 세 시간 읽어요⁠.⁠”

비올렌은 찻상 네 번째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오딜과 눈이 마주쳤다⁠. 수도의 소문이 모이는 두 사람이 한 찻상에 앉은 것이었다⁠. 둘은 서로를 아래위로 훑었다⁠. 오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작부인 댁 마부가 노름하다 말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아느냐고⁠. 비올렌이 받았다⁠. 공작저 세탁부가 정원사와 눈이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느냐고⁠. 오딜의 눈이 커졌다⁠. 그건 몰랐다고 했다⁠. 비올렌이 웃었다⁠. 그건 지금 지어낸 말이라고 했다⁠. 오딜이 과자를 집어 들고 비올렌을 다시 보았다⁠. 존경하는 눈이었다⁠.

코르넬은 둘 사이에서 찻잔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 여섯 개 중 네 개에 사람이 앉았다⁠. 아침 햇빛이 찻상 위에 길게 누웠다⁠. 회사 다닐 때 나는 회의를 싫어했다⁠. 이 찻상의 회의는 좋았다⁠. 여기 앉은 사람들은 내가 부르지 않아도 할 말을 들고 왔다⁠.

회의가 끝날 무렵 하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상인 조합장이 응접실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젊은 마님이 먼저 내려가 계신다고⁠.

*

가스파르는 둥글었다⁠. 얼굴도 배도 둥글었고⁠, 응접실 의자에 앉은 모양새까지 둥글었다⁠. 예순쯤 되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앞니 하나가 이가 빠진 채로 드러났다⁠. 오딜이 계단에서 귀띔해 주었다⁠. 금화를 받을 때마다 깨물어 보느라 이가 나갔다고⁠. 수도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고⁠, 남쪽 항구에서 올라오는 밀과 소금은 거의 다 이 사람 손을 거쳐 수도 빵집에 간다고⁠.

셀레스타는 가스파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연분홍 드레스⁠, 반지 낀 손⁠. 내가 들어가자 일어나 인사했다⁠. 어머님⁠, 조합장님이 계약 때문에 오셨어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 어머님까지 내려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가스파르가 가죽 통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탁자에 펼쳤다⁠. 맨 아래에 빨간 봉랍이 찍혀 있었다⁠. 밀 이삭⁠. 로슈몽 공작가의 인장이었다⁠. 봉랍 가장자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백합 향유 냄새가 올라왔다⁠.

“⁠공작부인⁠.⁠” 가스파르가 느릿하게 말했다⁠. 말끝마다 숫자를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열흘 전에 찍힌 계약입니다⁠. 벨랑제 항구 겨울 밀 전부를 지난봄 값으로 조합에 넘긴다⁠. 첫 배는 첫눈 오기 전⁠. 지난봄 값이면 지금 시세의 절반이 조금 넘습니다⁠.⁠”

나는 계약서를 읽었다⁠. 읽을 줄 알았다⁠. 이 몸은 글자도 기억하고 있었다⁠. 셀레스타가 반지를 손에 넣은 첫날 밤⁠, 금고 책상에 펼쳐져 있던 양피지가 이것이었다⁠. 백합 향유가 섞인 봉랍⁠. 집사가 들고 왔던 봉랍 막대⁠.

“⁠지금 시세의 절반에 우리 겨울 밀을 다 넘기면⁠, 우리 집은 뭘 먹고 겨울을 나요⁠?⁠”

셀레스타가 대답했다⁠. 공손했다⁠. “⁠어머님⁠, 공작가 금고가 생각보다 비어 있어요⁠. 지난 세 해 동안 벨랑제 수입이 계속 줄었고요⁠. 겨울 전에 금화를 한꺼번에 받아 두려고 제가 판단했어요⁠. 공작님께도 말씀드렸고요⁠.⁠”

“⁠말씀드렸어요⁠, 아니면 찍고 나서 말씀드렸어요⁠?⁠”

셀레스타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스파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이 빠진 앞니를 혀로 훑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계약서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응접실에서⁠, 조합장은 이 싸움이 자기에게 얼마짜리인지 재고 있었다⁠.

“⁠오딜⁠.⁠” 나는 문간에 서 있는 오딜을 불렀다⁠. “⁠아침에 사 오라고 한 빵⁠.⁠”

오딜이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수도 강변 빵집 세 군데에서 사 온 둥근 빵 세 덩이였다⁠. 나는 빵을 하나씩 뜯어 맛을 보았다⁠. 첫 번째 빵은 겉이 단단했고 속이 퍽퍽했다⁠. 두 번째 빵은 씹을수록 혀에 모래처럼 서걱거리는 게 남았다⁠. 세 번째 빵은 아무 맛도 나지 않다가 끝에 쇳가루 같은 떫은맛이 왔다⁠.

“⁠분필이네요⁠.⁠” 내가 말했다⁠. “⁠두 번째는 분필을 갈아 넣었고⁠, 세 번째는 톱밥이에요⁠. 첫 번째는 그나마 밀인데 지난해 묵은 밀이고⁠.⁠”

가스파르의 둥근 얼굴이 굳었다⁠. 처음으로 숫자 없이 말했다⁠.

“⁠빵집들이 밀가루가 모자라서 섞는 겁니다⁠. 북쪽 제국에 흉년이 들어서 제국 배들이 남쪽 항구 밀을 웃돈 주고 바다로 실어 가요⁠. 수도까지 올라오는 밀이 줄었습니다⁠. 빵값이 지난달에만 두 번 올랐고⁠, 빵집 주인들은 값을 또 올리느니 분필을 넣어요⁠. 값을 올리면 줄 선 사람들이 돌을 던지거든요⁠. 세 해 전 겨울처럼요⁠.⁠”

세 해 전 겨울⁠. 집사가 떠나며 남긴 말이 또 나왔다⁠. 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지금 물으면 내가 모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

“⁠그럼 조합장님은 이 밀을 지난봄 값에 사서 수도 빵집에 넘기시는 거죠⁠? 분필 안 섞게⁠?⁠”

가스파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니를 다시 혀로 훑었다⁠. 나는 계약서를 다시 보았다⁠. 사는 사람 자리에 조합의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넘길 곳 자리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이 더 있었다⁠. 「⁠조합은 받은 밀을 왕실 곳간에 먼저 들인다⁠.⁠」

“⁠왕실 곳간이네요⁠.⁠”

“⁠조합은 왕실 납품 허가로 먹고삽니다⁠, 공작부인⁠.⁠” 가스파르가 손을 깍지 꼈다⁠. “⁠허가는 왕대비전에서 내줍니다⁠. 왕대비전에서 이 계약을 이렇게 하라고 하면 조합은 이렇게 합니다⁠. 조합은 수수료로 백에 셋을 받습니다⁠. 셋입니다⁠.⁠”

셀레스타가 반지 낀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손이 대답이었다⁠.

*

계약은 깰 수 없었다⁠. 인장이 찍힌 계약을 공작가가 깨면 수도의 모든 상인이 다음부터 로슈몽의 인장을 믿지 않는다⁠. 회사로 치면 대표 직인 찍힌 계약서를 부장이 파기하는 일이었다⁠. 할 수는 있다⁠. 그다음 날부터 회사가 없다⁠.

깰 수 없으면 바꿔야 했다⁠. 나는 찻주전자를 가져오라 해서 가스파르의 잔을 직접 채웠다⁠. 공작부인이 상인의 잔을 채우는 것을 보고 셀레스타의 눈썹이 움직였다⁠.

“⁠조합장님⁠, 하나만 물어볼게요⁠. 백에 셋 받고 왕실 곳간에 넘긴 밀은 그다음에 어디로 가요⁠?⁠”

“⁠그건 조합이 알 바가⁠…⁠…⁠.⁠”

“⁠아시잖아요⁠.⁠”

가스파르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남쪽 산 찻잎이었다⁠. 오늘 아침 코르넬이 새로 들인 앞줄 맛⁠. 가스파르의 눈이 반쯤 감겼다⁠. 좋은 차를 아는 사람이었다⁠.

“⁠왕실 곳간에 들어간 밀은 겨울 끝에 나옵니다⁠. 빵값이 제일 높을 때요⁠.⁠” 가스파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 해 전 겨울에도 그랬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요⁠.⁠” 나는 부채를 펴서 계약서 위에 올려놓았다⁠. “⁠계약은 지켜요⁠. 밀은 지난봄 값으로 조합에 넘겨요⁠. 대신 넘기는 날을 바꿔요⁠. 첫눈 전에 한꺼번에가 아니고⁠, 이레마다 배 한 척씩⁠. 계약서에 넘기는 날은 첫눈 전이라고만 쓰여 있고⁠, 한꺼번에라는 말은 없어요⁠. 조합은 밀을 받는 대로 수도 빵집에 바로 풀어요⁠. 곳간에 들일 틈이 없게요⁠.⁠”

“⁠왕대비전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만있지 않겠죠⁠. 그래서 조합장님한테 수수료를 백에 다섯 드릴게요⁠. 둘은 우리 집에서 따로 얹어요⁠.⁠”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이제부터가 회사에서 내가 제일 잘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밀로 구운 빵에는 빵집 문에 로슈몽 밀 이삭을 그려 붙이게 해요⁠. 분필 없는 빵⁠. 줄 선 사람들이 어느 빵집이 진짜 밀을 쓰는지 알게요⁠. 그 빵집들이 손님을 다 가져가면⁠, 다른 빵집들이 조합장님한테 줄을 서겠죠⁠.⁠”

가스파르가 나를 보았다⁠. 둥근 얼굴의 작은 눈이 한참 동안 계산하고 있었다⁠. 이윽고 가스파르가 조끼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냈다⁠. 앞니 빠진 자리에 금화를 대고 깨물었다⁠. 깨문 자국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에 다섯⁠. 밀 이삭 그림⁠. 이레에 한 척⁠.⁠” 가스파르가 금화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공작부인⁠, 세 해 전 겨울에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해 전엔 어떻게 말했는데요⁠?⁠”

가스파르가 대답 대신 웃었다⁠. 이 빠진 웃음이 처음으로 쓴맛을 띠었다⁠.

나는 일어나 응접실 문을 열었다⁠. “⁠찻상에 올라가서 마저 얘기해요⁠. 위층에 좋은 의자가 있어요⁠.⁠”

가스파르가 계단을 오르며 숨을 헐떡였고⁠, 오딜이 뒤에서 조합장님 계단은 열여덟 칸이라고 일러 주었다⁠. 찻상의 다섯 번째 의자가 가스파르의 무게에 삐걱 울었다⁠. 비올렌이 가스파르를 보고 반색했다⁠. 둘은 아는 사이였다⁠. 후작가 포도주 외상이 아직 남아 있다고 가스파르가 말했고⁠, 비올렌은 못 들은 척 크림 과자를 권했다⁠. 다섯 사람이 한 찻상에 앉았다⁠. 코르넬이 찻주전자를 새로 내왔고⁠, 오딜이 과자 상자를 가운데로 밀었고⁠, 가스파르는 크림 과자를 세 번째 접시까지 비웠다⁠. 빈 의자는 하나 남았다⁠.

*

손님들이 돌아간 뒤 나는 오딜을 붙잡았다⁠. 찻잔을 치우던 오딜의 손에 오렌지 껍질 과자를 두 개 쥐여 주고 물었다⁠.

“⁠세 해 전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오딜이 과자를 내려다보았다⁠. 늘 과자부터 입에 넣던 사람이 이번에는 넣지 않았다⁠. 과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찻잔을 마저 쟁반에 올렸다⁠.

“⁠마님⁠, 그 겨울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마님이 직접 이르셨어요⁠. 꺼내는 하인은 손목을 자른다고요⁠.⁠”

“⁠그것도 진짜로 자른 적 없죠⁠?⁠”

“⁠없어요⁠. 다들 입을 다물었으니까요⁠.⁠” 오딜이 쟁반을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춰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빵집 앞에서 사람이 죽은 겨울이에요⁠. 그것만 말씀드릴게요⁠. 나머지는 마님 몸이 아시잖아요⁠.⁠”

몸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빈 찻상 앞에 앉아 혀끝으로 입천장을 눌렀다⁠. 아까 뜯어 먹은 빵의 분필 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원작의 첫 장은 봄이었다⁠. 셀레스타가 벚꽃 아래서 오렐리앙을 만나는 장면이었고⁠, 댓글 첫 줄은 「⁠표지 미쳤다⁠」였다⁠. 봄 이전의 겨울을 원작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독자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

셀레스타는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저녁 무렵 나는 오렐리앙의 서재 앞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셀레스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진짜로 떨어지는 눈물인지 아닌지 문밖에서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님이 오늘 상인 앞에서 제 계약을 뒤집으셨어요⁠. 살롱에서도 그랬고요⁠. 저는 이 집에 석 달을 살았는데 아직 손님이에요⁠. 곳간 열쇠 하나⁠, 반지 하나⁠. 어머님은 그것까지 다 다시 가져가려 하세요⁠.⁠” 셀레스타가 숨을 골랐다⁠. “⁠당신이 공작이잖아요⁠. 안방을 저한테 주세요⁠. 공작부인의 안방을요⁠. 그래야 사람들이 저를 이 집 사람으로 봐요⁠.⁠”

오렐리앙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이윽고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고 지친 목소리였다⁠.

“⁠알았어⁠. 내일 어머니께 말할게⁠.⁠”

나는 문틈에서 물러나려다 멈췄다⁠. 셀레스타가 서재 문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젖은 얼굴로 문을 나서던 셀레스타가 복도에 선 나를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치더니⁠, 복도 촛불 아래에서 나를 향해 똑바로 섰다⁠.

“⁠들으셨죠⁠, 어머님⁠.⁠” 목소리가 다시 낮고 마른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안방 비워 주세요⁠. 의자 다섯 개에 앉힌 분들도 같이 데리고 나가 주시고요⁠.⁠”

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밀가루에 분필 ·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