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38자)

초대장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누구세요⁠?⁠”

셀레스타의 물음 앞에서 나는 부채를 펴고⁠, 접고⁠, 다시 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서울의 출판사 마케팅 부장이 소설을 읽다 잠들어 당신 시어머니 몸에 들어왔다고 하면⁠, 다음 날 아침 나는 수녀원이 아니라 정신 요양원에 가 있을 것이다⁠.

“⁠셀레스타⁠, 내가 몇 살이에요⁠?⁠”

“⁠쉰한 살이요⁠.⁠”

“⁠쉰 넘으면 사람이 바뀌어요⁠. 몸에서 열이 오르다 식고⁠, 밤에 잠이 안 오고⁠, 어제 미웠던 게 오늘은 안 미워요⁠. 우리 동네에서는 그걸 갱년기라고 해요⁠.⁠”

셀레스타가 나를 오래 보았다⁠. 믿지 않는 눈이었다⁠. 그래도 반박할 말도 없는 눈이었다⁠.

“⁠그럼 저도 변할게요⁠, 어머님⁠.⁠” 셀레스타가 숄을 여미며 몸을 돌렸다⁠. 문고리를 잡고 한마디를 더했다⁠. “⁠어머님이 변하신 만큼요⁠.⁠”

문이 닫혔다⁠. 나는 찻상 의자 세 개의 눌린 방석을 보았다⁠. 갱년기라는 말을 던져 놓고 나니 정말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 몸은 실제로 쉰하나였다⁠.

*

사흘 동안 초대장이 한 장도 오지 않았다⁠.

오딜의 말로는 공작부인 앞으로 오는 초대장이 보통 한 주에 대여섯 장이었다⁠. 백작 부인의 음악회⁠, 자작 부인의 카드 놀이⁠, 대주교 조카의 시 낭송회⁠. 마르셀린은 대부분 가지 않았지만⁠, 초대장이 오는 것과 안 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했다⁠. 오지 않는다는 건 수도의 귀부인들이 공작부인 이야기를 공작부인 없는 자리에서 하기로 정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 뜻을 몸으로 알았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반 학부모 단톡방에서 내가 조용히 빠진 적이 있었다⁠. 운동회 날 간식 당번을 회사 일 때문에 못 했더니⁠, 다음 주에 「⁠3반 엄마들(⁠수정⁠)⁠」이라는 새 방이 생겼고 거기에 내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내보내지 않았다⁠. 새 방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침 회의는 북적였다⁠. 하인 스물두 명이 이제 카펫에 앉아 있었고⁠, 맨 앞줄 하녀는 무릎을 떨지 않았다⁠. 마부는 검은 말이 아픈 이유가 귀리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집사 나리가 바꾼 귀리에 곰팡이가 슬었다고⁠. 세탁부는 비누가 모자란 게 진짜라고 했고⁠, 이번에는 뒤집지 않았다⁠. 나는 각자 할 일을 정해 주고 회의를 마쳤다⁠. 마치면서 “⁠수고하셨습니다⁠”를 했더니 이번에는 아무도 주저앉지 않았다⁠. 하녀 둘이 서로 보며 킥킥 웃었다⁠. 회의가 끝나고 오딜이 찻상에 앉아 소식 바구니를 열었다⁠.

“⁠비올렌 후작부인 댁 목요일 살롱이 오늘이에요⁠. 젊은 마님은 초대받으셨고⁠, 마님은 안 받으셨어요⁠. 지난주 살롱에서 나온 말이 지금 하녀들 사이에도 돌아요⁠. 로슈몽 공작부인이 열네 해 일한 집사를 하루 만에 쫓아내고⁠, 며느리 손에서 반지를 빼려다 공작님한테 혼났다고요⁠.⁠”

“⁠순서가 틀렸네요⁠. 반지가 먼저고 집사가 나중인데⁠.⁠”

“⁠수도 사람들은 순서 안 따져요⁠. 재미만 따져요⁠.⁠”

비올렌 후작부인은 수도 사교계의 방장이었다⁠. 단톡방 방장⁠. 누구를 초대하고 누구를 빼는지⁠, 누구 이야기를 웃으며 하고 누구 이야기를 목소리 낮춰 하는지가 비올렌의 목요일 찻상에서 정해졌다⁠. 원작에도 나왔다⁠. 「⁠비올렌 후작부인의 살롱에서 셀레스타는 처음으로 수도의 따뜻함을 느꼈다⁠.⁠」 독자들이 「⁠언니 같은 후작부인 최고⁠」라고 썼던 인물이었다⁠.

나는 일어났다⁠. 오딜이 과자를 문 채 따라 일어났다⁠.

“⁠마님⁠, 초대 안 받으셨다니까요⁠.⁠”

“⁠알아요⁠.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초대받고 가면 손님이지만⁠, 초대 안 받고 가면 이야기가 되잖아요⁠.⁠”

나는 코르넬에게 남쪽 산 찻잎 한 상자와 오렌지 껍질 과자 두 상자를 싸 달라고 했다⁠. 빈손으로 가는 단톡방은 없었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마구간에 들렀다⁠. 검은 말이 짚 위에 누워 있었고⁠, 오렐리앙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공작이 맨손으로 말 배를 문지르는 모습은 원작 어디에도 없었다⁠. 원작의 오렐리앙은 늘 셀레스타 곁에서 망토를 벗어 주고 있었다⁠.

“⁠귀리 때문이래⁠.⁠” 내가 말했다⁠.

“⁠알아요⁠. 마부가 아침 회의에서 말했다면서요⁠.⁠” 오렐리앙이 말 배에서 손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 회의가 하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요⁠. 마님이 수고했다고 하면 이제 진짜 수고한 거래요⁠.⁠”

칭찬인지 놀림인지 몰라 나는 헛기침을 했다⁠. 오렐리앙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들고 있는 과자 상자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비올렌 후작부인 댁 가세요⁠? 초대도 안 받으셨잖아요⁠. 셀레스타 혼자 가게 두세요⁠. 어머니가 가시면 셀레스타가 또 불편해요⁠.⁠”

“⁠셀레스타가 불편한지 네가 어떻게 알아⁠?⁠”

“⁠셀레스타가 그랬으니까요⁠.⁠” 오렐리앙이 말 갈기를 쓸었다⁠. 귀가 빨갰다⁠. “⁠어머니⁠, 제발요⁠. 창피하게⁠.⁠”

창피하게⁠. 서울의 아들이 같은 말을 했었다⁠. 중학교 입학식에 내가 회사 사원증을 목에 건 채 들어갔을 때였다⁠. 나는 사원증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고⁠, 아들은 입학식 날 저녁 내내 방에서 안 나왔다⁠. 나는 오렐리앙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은 말의 이마를 한 번 쓸었다⁠. 말이 콧김을 뿜었다⁠. 말은 내가 누구든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

비올렌의 저택은 강변의 노란 돌집이었다⁠. 하인이 현관에서 내 얼굴을 보더니 얼굴이 하얘졌고⁠, 안에 여쭙겠다며 들어가 오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복도 끝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문을 밀었다⁠.

살롱은 볕이 잘 드는 넓은 방이었다⁠. 소파 다섯 개를 둥글게 놓고⁠, 가운데 낮은 탁자에 은 찻주전자와 크림 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귀부인 열 명 남짓이 소파에 기대 있었고⁠, 가운데 소파에 셀레스타가 앉아 있었다⁠. 연분홍 드레스에 붉은 곱슬머리가 소파 등받이까지 흘러내렸다⁠. 셀레스타 곁에 앉은 여자가 비올렌이었다⁠. 마흔여덟⁠, 밤색 머리를 높이 감아 올리고⁠, 목에 에메랄드를 둘렀다⁠. 웃는 입가에 주름이 깊었다⁠.

웃음소리가 멈췄다⁠. 열 명의 찻잔이 동시에 받침에 내려앉았다⁠. 달각⁠, 달각⁠, 달각⁠. 회의실에 사장님이 들어올 때와 같은 소리였다⁠.

“⁠어머⁠, 우리 공작부인⁠.⁠” 비올렌이 먼저 일어났다⁠. 일어나는 속도가 아주 느렸다⁠. “⁠초대장을 못 받으셨을 텐데요⁠.⁠”

“⁠받았는데 비에 젖어서 글씨가 번졌나 봐요⁠. 목요일인 것만 보이더라고요⁠.⁠” 나는 코르넬이 싼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벨랑제 과자예요⁠.⁠”

오렌지 껍질 냄새가 탁자 위로 퍼졌다⁠. 귀부인 둘이 동시에 상자를 보았다⁠. 셀레스타가 일어나 내게 자리를 내주었다⁠. 어머님⁠, 여기 앉으세요⁠. 목소리가 정답고 공손했다⁠. 귀부인들의 눈이 셀레스타의 공손함과 내 얼굴 사이를 오갔다⁠. 착한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에게 자리를 내주는 그림이었다⁠. 나는 셀레스타가 비운 자리에 앉지 않고 맞은편 빈 의자에 앉았다⁠.

하녀가 찻잔을 내왔다⁠. 한 모금 마셨다⁠. 혀가 멈췄다⁠.

남쪽 산 찻잎이었다⁠. 첫맛이 단단하고 끝이 맑았다⁠. 우리 집 앞줄 맛⁠. 석 달 전부터 우리 집 찻상에서 사라진 찻잎이 비올렌 후작부인의 은 찻주전자에서 나오고 있었다⁠. 집사가 바꿔 빼돌린 우리 찻잎이 어디로 갔는지⁠, 혀가 먼저 알았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차가 좋네요⁠, 후작부인⁠. 어디 거예요⁠?⁠”

“⁠남쪽 산 거예요⁠. 아는 상인이 싸게 넘겨 줘서요⁠.⁠” 비올렌이 웃었다⁠. 웃는 눈가가 한 번 떨렸다⁠.

귀부인들은 다시 시어머니 흉으로 돌아갔다⁠. 내가 앉아 있어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라는 듯 더 크게 했다⁠. 자작 부인 하나는 시어머니가 해마다 성탄절에 손주 이름을 틀리게 부른다고 했다⁠. 백작 부인 하나는 시어머니가 신혼 첫날 밤 침실 문 앞에 하녀를 세워 두었다고 했다⁠. 다들 웃으며 셀레스타를 보았다⁠. 너도 말해 봐⁠, 우리 다 알아⁠. 셀레스타는 고개를 저으며 어머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했다⁠. 귀부인들이 감동한 얼굴로 셀레스타의 손을 토닥였다⁠. 저렇게 착한 아이를⁠. 반지 낀 손이 토닥임을 받았다⁠.

나는 크림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우리 시어머니는요⁠.⁠” 내가 말했다⁠. 방이 조용해졌다⁠. “⁠일요일 아침마다 사람을 보내셨어요⁠. 아홉 시 정각에요⁠. 와서 묻는 말은 늘 같았어요⁠. 아범 밥은 챙기냐⁠. 열여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내 밥은 안 물으셨어요⁠.⁠”

귀부인들이 눈을 깜박였다⁠. 로슈몽 공작부인에게도 시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떠올린 얼굴들이었다⁠. 자작 부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공작부인은 어떻게 하셨어요⁠?

“⁠일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구 분마다 숨을 크게 쉬었어요⁠. 그리고 받았어요⁠. 네⁠, 어머님⁠. 챙겼어요⁠, 어머님⁠.⁠” 나는 과자를 한 입 먹었다⁠. 설탕이 너무 달았다⁠. “⁠그러다 시어머니가 됐더니 나도 아들 밥만 묻고 있더라고요⁠.⁠”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둘이⁠, 셋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자기 얘기를 들킨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백작 부인이 자기도 지난주에 며느리한테 아들 밥 물었다고 실토했다⁠. 방 안의 공기가 반쯤 바뀌었다⁠. 셀레스타는 웃지 않았다⁠. 찻잔을 들고 나를 보았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재는 눈이었다⁠.

*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비올렌이 나를 복도 끝 작은 방으로 불렀다⁠. 문을 닫자 웃음이 얼굴에서 내려갔다⁠.

“⁠찻잎 이야기⁠, 다른 데서 하실 건가요⁠?⁠”

“⁠안 해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비올렌의 어깨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갔다⁠. 부탁이라는 말이 협박보다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의 어깨였다⁠.

비올렌이 숨을 내쉬었다⁠. 살롱의 은 찻주전자도⁠, 크림 과자 산도⁠, 목의 에메랄드도 체면이었다⁠. 후작이 노름으로 빚을 지고 있었고⁠, 비올렌은 목요일 찻상을 지키려고 싼 물건을 사 왔다⁠. 집사가 넘긴 찻잎이 공작가에서 빼돌린 것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알았어도 샀을 거라고도 했다⁠. 솔직해서 좋았다⁠. 비올렌은 덧붙였다⁠. 후작가의 대부인⁠, 그러니까 비올렌의 시어머니가 아직 살아서 저택 삼 층에 계시는데⁠, 목요일 찻상이 초라해지는 날이면 지팡이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린다고⁠. 이십 년 시집살이에 바닥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어느 찻잔이 싼 건지 안다고⁠. 나는 비올렌의 손을 보았다⁠. 에메랄드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끝이 하얬다⁠. 수도 사교계의 방장도 집에 가면 며느리였다⁠.

“⁠다음 주부터 우리 집 찻잎을 원가에 보내 줄게요⁠. 후작가 포도주도 벨랑제 배에 같이 실어 줄게요⁠. 대신 초대장은 다시 보내 줘요⁠. 그리고 셀레스타가 어디 다니는지 알려 줘요⁠.⁠”

비올렌이 나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수도에서 이십 년 동안 본 로슈몽 공작부인은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남의 약점을 쥐면 앉은 자리에서 터뜨리는 사람이었다고⁠.

“⁠터뜨리면 찻잎 한 상자로 끝나잖아요⁠. 안 터뜨리면 후작부인이 남고요⁠.⁠”

비올렌이 웃었다⁠. 이번에는 눈가까지 같이 웃었다⁠. 그리고 에메랄드를 만지작거리다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공작부인⁠, 며느님이 닷새마다 어디 가는지 정말 모르세요⁠? 왕대비전이에요⁠. 마차를 강변 뒷문에 대고 들어가요⁠. 그리고 수도에 이 말을 아는 사람은 저뿐인데요⁠.⁠” 비올렌이 한 박자 쉬었다⁠. “⁠왕대비께서 며느님한테 손수 차를 따라 주신대요⁠. 이 나라에서 왕대비께서 손수 따른 차를 받아 본 사람은 젊은 왕비마마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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