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12자)

겨울 연회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연회장은 하얬다⁠. 흰 대리석 기둥이 두 줄로 늘어섰고⁠, 기둥마다 백합 화환이 감겨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샹들리에 열두 개에 초가 다 켜져 있었다⁠. 해가 가장 짧은 날이라 오후 네 시인데 창밖이 벌써 푸르스름했다⁠.

나는 연회장 한가운데⁠, 단 아래에 서 있었다⁠. 양옆에 병사가 하나씩 붙었다⁠. 손목을 묶지는 않았다⁠. 짙은 자주색 벨벳 드레스는 북탑에서 이틀 밤을 지나 무릎이 해졌고⁠, 진주 목걸이는 그대로였다⁠. 부채도 그대로였다⁠. 병사들은 부채가 무기가 될 줄 몰랐다⁠. 사실 무기는 아니었다⁠. 손이 떨릴 때 쥘 것이었다⁠.

단 위에 의자가 셋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 젊은 왕이 앉았다⁠. 스물둘⁠, 어머니를 닮아 몸이 가늘었고⁠,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왕홀을 만지작거렸다⁠. 왕 오른편에 왕대비 아델하이드가 앉았다⁠. 검은 레이스 아래 흰머리⁠, 무릎 위에 포갠 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왕 왼편에 젊은 왕비가 앉았다⁠. 왕비는 나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연회장 양쪽에 귀족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올렌이 귀부인들 맨 앞줄에 있었다⁠. 에메랄드를 다시 걸었다⁠. 내 눈과 마주치자 부채로 얼굴 반을 가렸다⁠. 가린 부채 위로 눈만 보였다⁠. 웃지 않는 눈이었다⁠.

연회장 맨 뒤⁠, 기둥 너머 바깥뜰에는 수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겨울 연회 날 왕궁은 바깥뜰을 열고 빵을 나눠 주었다⁠. 왕대비가 세 해 전 겨울 뒤로 만든 관습이라고 했다⁠. 바깥뜰 사람들 사이에 회색 숄이 보였다⁠. 로뱅의 어머니였다⁠. 회색 숄 곁에 소금기가 하얗게 앉은 얼굴⁠, 벨랑제 부두 우두머리가 있었다⁠.

단 바로 아래⁠, 왕대비 쪽 자리에 오렐리앙과 셀레스타가 서 있었다⁠. 오렐리앙은 공작 예복을 입었다⁠. 셀레스타는 연분홍 드레스 위에 흰 숄을 둘렀다⁠. 손에 금박 백합 테두리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헌상서였다⁠. 셀레스타 곁에 일흔 살 노인이 서 있었다⁠. 하르덴 백작이었다⁠. 북탑에서 오늘 아침 내려왔다⁠. 왕대비가 헌상서를 받는 자리에서 직접 풀어 주겠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노인은 손가락 셋 남은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었다⁠.

*

시종장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로슈몽 대공작부인 마르셀린⁠. 겨울 연회 사흘 전⁠, 왕대비 마마께서 젊은 공작부인께 내리신 찻잔에 손을 대어 독을 탄 죄⁠. 대공작부인은 답하시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샹들리에의 초 타는 소리가 들렸다⁠. 원작의 장면이었다⁠. 원작에서 마르셀린은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안 탔다⁠, 저 계집이 꾸민 일이다⁠. 독자들은 「⁠끝까지 며느리 탓ㅋㅋ⁠」이라고 썼다⁠. 다음 줄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수녀원으로 보냈다⁠.

나는 부채를 쥐었다⁠. 손바닥이 젖어 상아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회사에서 처음 신간 기자간담회 사회를 볼 때 이랬다⁠. 기자 서른 명 앞에서 마이크를 쥔 손이 떨려서 마이크를 두 손으로 쥐었다⁠. 지금은 부채를 두 손으로 쥐었다⁠. 연회장의 귀족은 기자보다 많았다⁠. 기자들은 적어도 질문은 했다⁠. 여기 사람들은 질문 대신 결론을 들고 와 있었다⁠.

회사에서 사고가 터지면 사과문을 내가 썼다⁠. 삼 년 전 우리 출판사 책 한 권에서 표절이 나왔을 때도 내가 썼다⁠. 원칙은 셋이었다⁠. 주어는 우리⁠. 변명은 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반만 말하면 나머지 반은 기자가 쓴다⁠.

“⁠독은 안 탔어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연회장 천장까지 올라갔다⁠. 혀가 둔해서 말이 느렸다⁠. 느려서 오히려 또렷하게 들렸다⁠. “⁠잔에서 쇠 맛이 났고⁠, 나는 증거가 없어서 잔을 마셨어요⁠. 그 뒤로 내 혀는 맛을 몰라요⁠. 그건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오늘 내가 답할 죄는 따로 있어요⁠.⁠”

시종장이 왕대비를 보았다⁠. 왕대비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말하게 두라는 뜻이었다⁠. 죄인이 스스로 죄를 늘리겠다는데 막을 까닭이 없었다⁠.

“⁠세 해 전 겨울⁠, 강이 일찍 얼었을 때⁠.⁠” 나는 숨을 골랐다⁠. “⁠남쪽 항구 벨랑제 곳간에 가을 밀이 가득 있었어요⁠. 썰매로라도 수도에 올릴 수 있었어요⁠. 나는 곳간 문을 잠갔어요⁠. 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면 빵값이 세 배가 되니까요⁠. 정말 세 배가 됐어요⁠. 강변 빵집 앞에서 사람들이 밀려서 열한 명이 죽었어요⁠.⁠”

연회장이 웅성거렸다⁠. 귀족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로슈몽 대공작부인이 제 입으로 세 해 전 겨울을 말했다⁠. 수도의 누구도 이 말을 공작부인 입에서 들을 줄 몰랐다⁠.

나는 바깥뜰을 보았다⁠. 회색 숄이 기둥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한 명 중에 로뱅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열두 살이었어요⁠. 새벽에 빵 사러 나갔어요⁠.⁠” 나는 이름을 혀로 굴렸다⁠. 맛은 없었다⁠. 이름은 있었다⁠. “⁠나머지 열 명의 이름은 몰라요⁠. 왕대비 마마는 다 아신다고 하셨어요⁠. 나는 오늘부터 알아 갈 거예요⁠.⁠”

바깥뜰에서 회색 숄이 움직였다⁠. 로뱅의 어머니가 기둥 사이로 한 걸음 들어왔다⁠. 병사가 막으려다 멈췄다⁠. 여자가 연회장 안을 향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대리석 천장이 목소리를 받아 연회장 끝까지 날랐다⁠.

“⁠열 명 이름은 내가 알아⁠. 장례를 같이 치렀으니까⁠. 알고 싶으면 빵 사러 와⁠. 동전 셋 들고⁠. 거스름은 내가 세 줄게⁠.⁠”

바깥뜰에서 누가 웃었다⁠. 웃음이 연회장 안까지 굴러 들어왔다가 흩어졌다⁠. 귀족 몇이 얼굴을 찡그렸다⁠. 비올렌이 부채 뒤에서 어깨를 떨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거스름을 틀린 공작부인 이야기는 수도에 이미 다 돌았다⁠.

왕대비의 무릎 위에서 검지가 엄지를 한 번 쓸었다⁠.

“⁠그리고 하르덴 백작은 죄가 없어요⁠. 곳간 문을 잠근 건 이 손이었어요⁠. 하르덴 백작은 이 손 대신 세 해를 북탑에서 살았어요⁠.⁠” 나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이 소매 속에서 손을 꺼냈다⁠. 손가락 셋이 떨렸다⁠. “⁠사과는 안 받으신대요⁠. 받으면 세 해가 가벼워진다고⁠. 그래서 사과 대신 말만 해요⁠. 하르덴 백작은 죄가 없어요⁠.⁠”

*

“⁠다 하셨습니까⁠, 공작부인⁠.⁠” 왕대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느렸다⁠. 연회장의 웅성거림이 낮은 목소리 하나에 가라앉았다⁠.

“⁠아직요⁠. 잠근 곳간 문 안의 밀이 어디로 갔는지가 남았어요⁠.⁠”

왕대비의 눈이 나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곳간 문은 겉으로만 잠겼어요⁠. 밤에는 열렸어요⁠. 흰 백합 깃발을 꽂은 수레 스무 대가 들어와서 밀을 실어 갔어요⁠. 우리 아들이 강둑 길에서 봤어요⁠. 우리 시녀장이 창문으로 봤어요⁠. 수레는 비어서 돌아올 때 금화 자루 마흔 개를 싣고 왔어요⁠. 자루마다 백합 봉랍이 달려 있었어요⁠.⁠”

오렐리앙이 단 아래로 걸어 나왔다⁠. 품에서 빈 금화 자루 한 묶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끈마다 흰 봉랍이 매달려 있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봉랍의 백합 위에서 반짝였다⁠.

연회장이 술렁였다⁠. 왕대비 뒤에 선 시종장의 얼굴이 굳었다⁠. 시종장 뒤의 옛 집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공손한 각도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왕대비는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아무것도 없었다⁠. 놀람도⁠, 노여움도⁠.

“⁠그렇습니다⁠. 제가 샀습니다⁠.⁠”

연회장이 숨을 멈췄다⁠.

“⁠공작부인이 잠근 밀은 바다 건너로 갈 참이었습니다⁠. 그 겨울에도 제국 상인들이 벨랑제 앞바다에 와 있었지요⁠. 공작부인은 제국 배와 값을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국보다 금화를 조금 더 얹어 밀을 샀습니다⁠. 수레에 왕실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왕실이 공작가와 흥정했다는 말이 돌면 수도가 더 뒤집혔을 테니까요⁠.⁠” 왕대비가 무릎 위에 손을 포갰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제가 사지 않았다면 그 밀은 수도가 아니라 제국 사람들 입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 겨울 열한 명이 아니라 백열한 명이 죽었겠지요⁠.⁠”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보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왕대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반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봄에 푸셨죠⁠.⁠” 내가 말했다⁠. “⁠강이 녹고 빵값이 제일 높을 때요⁠. 세 배 값에⁠.⁠”

“⁠그 값으로 곳간을 새로 지었습니다⁠.⁠” 왕대비가 바로 받았다⁠. “⁠왕실 곳간 셋을 더 지었습니다⁠. 올겨울 제국이 굶어도 수도 빵집에 밀이 남아 있는 건 그 곳간 덕입니다⁠. 공작부인이 이레에 한 척씩 올려 보내는 밀만으로는 수도가 못 버팁니다⁠. 공작부인도 아시지요⁠.⁠”

맞는 말이었다⁠. 가스파르가 지난주에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 배만으로는 다섯 빵집이 한계라고⁠. 회의에서 상대가 내 약점을 정확히 짚으면 반박할 말보다 고개가 먼저 끄덕여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하르덴은요⁠?⁠” 내가 물었다⁠. “⁠하르덴 백작은요⁠? 밀을 산 손을 숨기려고⁠, 밀이 지나간 문을 벌하셨잖아요⁠.⁠”

“⁠작은 집 하나였습니다⁠.⁠” 왕대비가 말했다⁠. 셀레스타 앞에서⁠, 하르덴 백작 앞에서⁠, 똑같은 높이의 목소리로⁠. “⁠작은 집 하나로 왕실과 큰 집과 수도를 함께 살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그 빚을 갚으려고 합니다⁠. 헌상서를 받고⁠, 하르덴 백작을 풀어 드리고⁠, 하르덴의 이름을 돌려 드립니다⁠. 공작부인 말이 다 맞다 치지요⁠. 그래서 공작부인이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남쪽 항구를 공작부인 손에 다시 두는 것입니까⁠? 세 해 전 곳간 문을 잠근 그 손에⁠?⁠”

연회장의 눈이 내 손으로 왔다⁠. 부채를 쥔 오른손⁠. 첫날 아침 찻잔을 던지려던 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왕대비는 내 손을 이겼다⁠. 내 손은 실제로 곳간 문을 잠근 손이었다⁠.

*

셀레스타가 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연분홍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서 물결쳤다⁠. 붉은 곱슬머리가 흰 숄 위로 흘렀다⁠. 손에 금박 백합 테두리 양피지를 들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서 금빛 인장 반지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았다⁠. 연회장의 눈이 내 손에서 셀레스타의 손으로 옮겨 갔다⁠.

왕대비가 셀레스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얼굴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웃음이었다⁠. 닷새마다 찻상에서 셀레스타에게 차를 따라 주던 얼굴이었다⁠.

“⁠젊은 공작부인⁠. 헌상서를 올리시지요⁠.⁠”

셀레스타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양피지를 들고 왕대비 앞을 지나쳤다⁠. 왕대비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셀레스타는 가운데 의자 앞에서 멈췄다⁠. 젊은 왕 앞이었다⁠.

셀레스타가 금박 백합 테두리 양피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품에서 다른 양피지 한 장과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양피지에는 테두리가 없었다⁠. 맨 아래 빨간 봉랍에 밀 이삭이 찍혀 있었다⁠. 가죽 주머니가 셀레스타의 손에서 짤랑 울었다⁠. 놋쇠 소리였다⁠. 셀레스타의 드레스 밑단에 마른 진흙이 묻어 있었다⁠. 밤새 말을 타고 반나절 길을 다녀온 진흙이었다⁠.

“⁠전하⁠.⁠” 셀레스타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고르고 맑았다⁠. 차 맛처럼⁠. “⁠로슈몽 공작가가 오늘 바치는 문서는 이것이에요⁠.⁠”

연회장 맨 뒤에서 누가 밀치고 들어왔다⁠. 둥근 몸이 기둥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가스파르였다⁠. 가스파르 뒤로 바느질 주머니를 찬 오딜이 따라 나왔다⁠. 오딜은 손수건으로 싼 흰 찻잔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셀레스타 곁에서 하르덴 백작이 소매 속에서 손을 꺼냈다⁠. 손가락 셋 남은 손으로 딸의 어깨를 짚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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