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12자)

북탑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북탑 꼭대기 방은 둥글었다⁠. 돌벽이 둥글게 돌아갔고⁠, 바닥에 짚이 깔려 있었고⁠, 높은 곳에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나 있었다⁠. 창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겨울바람이었다⁠. 바람이 돌벽을 한 바퀴 돌아 나가면서 내 진주 목걸이를 차갑게 식혔다⁠. 병사들은 진주 목걸이를 빼앗지 않았다⁠. 판결 전까지 대공작부인은 대공작부인이라고 했다⁠.

벽 한쪽에 쇠창살이 박힌 구멍이 있었다⁠. 어른 머리 하나 들어갈 크기였다⁠. 창살 너머가 옆방이었다⁠. 옆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늙은 기침이었다⁠.

저녁에 간수가 수프를 넣어 주었다⁠. 나무 그릇에 회색 국물이 반쯤 담겨 있었다⁠. 나는 한 숟가락 떠먹었다⁠. 미지근했다⁠. 미지근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는데 창살 너머에서 목소리가 났다⁠.

“⁠오늘 수프는 어제 수프에 물을 부어 늘린 맛이오⁠. 어제 수프는 그저께 수프에 물을 부어 늘린 맛이었고⁠. 맛을 따라 올라가 보면⁠, 내가 들어온 첫날 끓인 수프 한 솥이 세 해째 늘어나는 중이오⁠.⁠”

웃음이 터졌다⁠. 북탑 꼭대기에서 웃을 줄은 몰랐다⁠. 창살 너머로 얼굴이 보였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볼이 깊게 패었다⁠. 눈이 맑았다⁠. 차 맛으로 배가 어디서 왔는지 맞혔다는 사람의 눈이었다⁠. 노인이 창살을 잡고 있었다⁠. 오른손에 손가락이 셋뿐이었다⁠.

“⁠하르덴 백작님이세요⁠?⁠”

“⁠하르덴은 이제 없소⁠. 그냥 늙은이요⁠.⁠” 노인이 나를 보았다⁠. 촛불이 없어서 창으로 든 저녁 빛만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은빛 섞인 금발⁠, 회청색 눈⁠.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내려갔다⁠. “⁠아⁠. 로슈몽 공작부인이시군⁠.⁠”

노인이 창살에서 손을 뗐다⁠. 짚 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바람이 돌벽을 한 바퀴 돌았다⁠.

“⁠세 해요⁠.⁠” 노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공작부인 곳간 때문에 내가 여기서 세 해를 살았소⁠. 아내는 내가 들어온 이듬해 봄에 죽었소⁠. 장례에 못 갔소⁠. 딸이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 반지를 팔았다는 소식은 간수한테 들었소⁠. 공작부인은 세 해 동안 무엇을 했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마르셀린이 세 해 동안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몰랐다⁠. 아침마다 찻잔을 물리고⁠, 하인들을 내보내고⁠, 장례 날 웃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미안해요⁠.⁠”

“⁠사과는 받지 않겠소⁠.⁠” 노인이 눈을 감았다⁠. “⁠받으면 세 해가 가벼워지오⁠. 가볍게 하고 싶지 않소⁠.⁠”

비올렌이 했던 말과 같았다⁠. 사과 받으면 더 비참해진다는 말⁠. 나는 사과를 거두었다⁠. 거두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남았다⁠.

“⁠셀레스타가 차를 잘 내려요⁠.⁠”

노인이 눈을 떴다⁠.

“⁠물이 끓고 나서 숨 두 번 식히고 부어요⁠. 찻물이 잔 테두리 아래 손가락 한 마디에서 멈춰요⁠. 찻잎 꺼내는 때도 정확하고요⁠. 우리 주방장보다 나아요⁠.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했어요⁠.⁠”

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셋 남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덮은 손 아래로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바람 소리만 났다⁠. 나는 창살에서 눈을 돌려 창을 보았다⁠. 창 너머로 왕궁의 지붕들이 보였다⁠. 흰 지붕들 사이에서 왕비전 뒤뜰의 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렸다⁠.

*

밤이 깊어 노인이 다시 창살로 왔다⁠. 간수가 지나가고 한참 뒤였다⁠. 목소리를 낮췄다⁠.

“⁠공작부인⁠, 하나 물어보겠소⁠. 세 해 전 겨울에 공작부인 곳간의 밀은 어디로 갔소⁠?⁠”

“⁠왕실 곳간이요⁠. 흰 백합 깃발을 단 수레 스무 대로요⁠. 금고에 빈 금화 자루 마흔 장이 있었어요⁠. 자루마다 백합 봉랍이 달려 있고요⁠.⁠”

노인이 숨을 들이켰다⁠. 오래 들이켰다⁠.

“⁠스무 대였소⁠. 내가 셌소⁠.⁠” 노인이 창살을 쥐었다⁠. “⁠하르덴 통행문은 강과 강둑 길을 같이 막는 문이오⁠. 강이 얼면 수레가 강둑 길로 다니고⁠, 통행문을 지나는 수레는 다 통행료를 내오⁠. 왕실 수레만 빼고⁠. 왕실 수레는 통행료를 안 내는 것이 법이오⁠. 그런데 그 밤에 온 수레들은 냈소⁠. 수레마다 놋쇠 통행패를 하나씩 내고 갔소⁠. 왕대비전 백합이 찍힌 패였소⁠. 왕대비전 곳간에서 쓰는 패요⁠. 왕실 수레인데 왜 통행패를 내느냐고 물었더니⁠, 맨 앞 수레의 마른 사내가 웃으며 그러더이다⁠. 이 수레는 왕실 수레가 아니라 왕대비 마마 개인 수레라고⁠. 왕실 이름이 붙으면 안 되는 짐이라고⁠.⁠”

노인이 말을 끊었다⁠. 나는 마른 사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공손한 각도로 고개를 숙이는 사내였다⁠.

“⁠그 놋쇠 패 스무 개를 나는 버리지 않았소⁠. 이상했으니까⁠. 통행료를 받는 사람은 이상한 돈을 버리지 않소⁠. 사흘 뒤에 병사들이 와서 나를 잡아갔소⁠. 곡물선을 막고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수도까지 끌려오는 길에 알았소⁠. 내가 받은 뇌물이 그 놋쇠 패 스무 개라는 것을⁠. 왕대비 마마는 밀을 산 사람을 숨기려고 밀이 지나간 문을 벌했소⁠.⁠”

“⁠패는 어디 있어요⁠?⁠”

노인이 웃었다⁠. 세 해 묵은 수프 이야기를 할 때와 같은 웃음이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딸만 아는 곳에 있소⁠. 셀레스타가 어릴 때 과자를 숨기던 자리요⁠. 그 애는 단것을 아껴 먹었소⁠. 동생이 찾아 먹을까 봐 창 밑 돌 하나를 빼서 그 안에 숨겼지⁠. 돌이 헐거워진 줄은 나만 알았소⁠. 모른 척했소⁠. 아이가 숨기는 걸 아비가 다 찾아내면 아이가 숨을 데가 없으니까⁠. 통행문 집⁠, 딸 방 창 밑 돌⁠. 잡혀가던 날 아침에 거기 넣었소⁠. 딸한테 말할 틈이 없었소⁠. 딸은 아마 아직 과자를 숨긴 줄 알 거요⁠.⁠”

노인은 마지막 말을 하고 짚 위에 누웠다⁠. 곧 숨소리가 길어졌다⁠. 세 해 동안 아무에게도 못 한 말을 하고 난 사람의 잠이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둥근 방을 한 바퀴 걸었다⁠. 열두 걸음이었다⁠. 안방에서 북쪽 방까지 마흔 걸음⁠, 북쪽 방에서 북탑까지 강 하나⁠. 이 나라에 와서 내 방은 자꾸 작아졌다⁠. 회사에서 승진할 때마다 방이 커졌던 것과 반대였다⁠. 방이 작아질수록 이상하게 할 일이 분명해졌다⁠.

창으로 별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별을 못 봤다⁠. 아파트 거실 창으로 보이는 건 맞은편 동의 불빛뿐이었다⁠. 밤 열한 시 사십 분이면 맞은편 동의 불이 반쯤 꺼졌고⁠, 불이 꺼질 무렵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다⁠. 나는 소파에 누워 「⁠밥은⁠?⁠」을 보냈고⁠, 아들은 「⁠ㅇㅇ⁠」을 보냈다⁠. 이 나라에 온 첫날 밤에는 두 글자가 서운했다⁠. 지금은 두 글자가 고마웠다⁠. 아들이 밥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그거면 됐다⁠. 엄마가 다 확인하지 않아도 아들은 밥을 먹었다⁠.

나는 짚 위에 앉아 연회를 생각했다⁠. 왕대비는 연회 날 마르셀린을 판결하려고 기다린다⁠. 며느리 찻잔에 독을 탄 시어머니로⁠. 원작대로⁠. 판결을 피하는 길은 없었다⁠. 대신 판결받을 죄를 바꿀 수는 있었다⁠. 탄 적 없는 독 대신⁠, 실제로 지은 죄로⁠. 이 손이 잠근 곳간 문으로⁠. 그러면 곳간 문 안의 밀이 어디로 갔는지도 같이 말해야 했다⁠. 회사에서 사고를 덮지 않고 보고할 때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말해야 한다⁠. 반만 말하면 나머지 반은 남이 말한다⁠. 남이 말하는 반은 늘 더 나쁘다⁠.

*

새벽에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둘이었다⁠.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무거웠다⁠. 간수가 문을 열었다⁠. 간수 뒤에 땋은 금발이 보였다⁠. 젊은 왕비였다⁠. 왕비가 시녀 옷을 입고 망토 두건을 썼다⁠. 왕비 뒤에 붉은 곱슬머리가 보였다⁠. 셀레스타였다⁠. 뒤따라 문틀에 머리를 부딪친 오렐리앙이 이마를 문지르며 들어왔다⁠.

“⁠북탑 열쇠는 왕비전 뒤뜰 문하고 같은 고리에 걸려 있어요⁠.⁠” 왕비가 속삭였다⁠. “⁠어마마마는 모르세요⁠. 아시면 저도 이 방에 들어와야 하고요⁠. 그러니까 짧게요⁠.⁠”

왕비가 문간에 서서 계단 아래를 살폈다⁠. 시녀 옷이 왕비에게 맞지 않았다⁠.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다 드러났고⁠, 두건 밑으로 땋은 금발 끝이 삐져나왔다⁠. 이 나라 왕비가 시어머니 몰래 남의 시어머니를 보러 북탑 계단을 올라왔다⁠. 서울 같았으면 단톡방 하나가 통째로 뒤집혔을 일이었다⁠.

셀레스타가 창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창살 너머 노인이 짚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셀레스타가 창살 사이로 손을 넣었다⁠. 노인이 손가락 셋 남은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셀레스타가 아버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모자란 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셀레스타는 울지 않았다⁠. 떨어지기 직전에서 멈추는 눈물도 없었다⁠. 그냥 오래 쓸었다⁠.

오렐리앙이 내 곁으로 왔다⁠.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둘렀다⁠. 원작에서 셀레스타에게 둘러 주던 망토였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머니⁠, 밤새 추우셨죠⁠.⁠” 오렐리앙이 목소리를 낮췄다⁠. 창살 앞의 아내와 장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목소리였다⁠. “⁠셀레스타가 어젯밤에 말했어요⁠. 금화 자루 이야기요⁠. 그리고 제가 어머니한테 물었던 거⁠, 왜 그러셨냐고 물었던 거요⁠.⁠”

“⁠응⁠.⁠”

“⁠이제 안 물을게요⁠. 어머니가 모르신다고 하셨잖아요⁠.⁠” 오렐리앙이 망토 자락을 내 목 앞에서 여며 주었다⁠. 손이 서툴렀다⁠. 사냥 매듭을 묶는 손이었다⁠. “⁠모르셔도 돼요⁠. 그 겨울 어머니가 뭐가 무서웠는지는 몰라도⁠, 지금 어머니가 뭘 하시는지는 알아요⁠.⁠”

나는 아들의 손을 보았다⁠. 매듭이 비뚤었다⁠. 서울의 아들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운동화 끈을 이렇게 비뚤게 묶었다⁠. 내가 다시 묶어 주면 울었다⁠. 자기가 묶은 게 좋다고⁠. 나는 비뚤어진 매듭을 그대로 두었다⁠.

“⁠아버지⁠.⁠” 셀레스타가 말했다⁠. “⁠왕대비 마마가 겨울 연회 날 아버지를 꺼내 주신댔어요⁠. 헌상서만 올리면요⁠. 공작님이 서명하셨어요⁠. 사흘만⁠, 아니⁠, 이제 하루만 참으세요⁠.⁠”

노인이 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를 보았다⁠. 그리고 딸에게 말했다⁠. 통행문 집⁠, 네 방 창 밑 돌⁠. 놋쇠 패 스무 개⁠. 왕대비전 백합⁠. 마른 사내⁠. 노인은 짧게 말했다⁠. 간수가 계단에서 헛기침을 했다⁠.

셀레스타의 손이 창살 사이에서 굳었다⁠. 셀레스타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고 상자에서 뜯어 온 흰 봉랍이었다⁠. 백합이 찍힌⁠. 셀레스타는 봉랍을 손바닥에 놓고 오래 보았다⁠. 왕대비전 찻상에서 닷새마다 보던 백합⁠, 빈 금화 자루에 매달린 백합⁠, 아버지가 숨겼다는 놋쇠 패의 백합⁠.

“⁠닷새마다 차를 따라 주셨어요⁠.⁠” 셀레스타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이 나라에서 왕대비 마마가 손수 차를 따라 준 사람은 저하고 왕비마마뿐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를 가둔 손으로 따른 차였어요⁠. 저는 그 차를 맛있다고 했어요⁠. 매번⁠.⁠”

왕비가 고개를 숙였다⁠. 왕비도 같은 손이 따른 차를 마셨다⁠. 이 년 동안⁠. 다시⁠, 다시⁠, 하는 소리를 들으며⁠.

“⁠셀레스타⁠.⁠” 오렐리앙이 아내를 불렀다⁠.

셀레스타가 일어났다⁠. 봉랍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북탑 꼭대기의 둥근 방에서⁠, 오렐리앙의 망토를 두른 시어머니를⁠.

“⁠통행문 집은 수도에서 말 타고 반나절이에요⁠. 창 밑 돌은 제가 알아요⁠. 다섯 살 때부터 과자를 숨긴 자리예요⁠.⁠” 셀레스타가 허리의 열쇠꾸러미를 쥐었다⁠. 쇠 소리가 났다⁠. “⁠연회에서 헌상서는 제가 올릴게요⁠. 공작님 서명 받은 그대로요⁠. 왕대비 마마가 기다리시는 그대로요⁠.⁠”

“⁠셀레스타⁠…⁠…⁠.⁠”

“⁠어머님은 제 옆에 서 계세요⁠.⁠” 셀레스타가 말했다⁠. 오렐리앙을 보지 않고⁠, 왕비를 보지 않고⁠, 나만 보았다⁠. “⁠죄인 자리 말고요⁠. 제 옆에요⁠. 시어머니 자리에요⁠.⁠”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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