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57자)
안방의 차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셀레스타가 가죽 주머니를 열어 젊은 왕 앞 단 위에 쏟았다.
놋쇠 패 스무 개가 대리석 위에서 굴렀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패였다. 앞면에 하르덴 통행문의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 백합이 찍혀 있었다. 패 하나가 단 끝까지 굴러가 젊은 왕의 신발 앞에서 멈췄다. 왕이 허리를 굽혀 패를 집었다. 뒷면을 보았다. 왕의 얼굴이 하얘졌다.
“왕대비전 곳간 패입니다.” 셀레스타가 말했다. “세 해 전 겨울, 로슈몽 밀을 실은 수레 스무 대가 하르덴 통행문을 지나며 이 패를 냈어요. 왕실 수레는 통행료를 안 내요. 이 수레들은 냈어요. 왕실 수레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이 패를 받은 지 사흘 만에 잡혀가셨어요. 패는 제 방 창 밑 돌 속에 있었어요. 어젯밤에 꺼내 왔어요.”
하르덴 백작이 딸 곁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수레 스무 대를 자기가 셌다고. 맨 앞 수레의 마른 사내가 이건 왕대비 마마 개인 수레라고 말했다고. 노인은 말을 마치고 손가락 셋 남은 손으로 옛 집사를 가리켰다. 연회장의 눈이 왕대비 뒤에 선 마른 사내에게 쏠렸다. 옛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 공손한 각도가 무너졌다.
가스파르가 앞으로 나왔다. 둥근 몸으로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세 해 전 겨울 밤, 조합 짐꾼들을 시켜 수레의 밀을 내렸다고. 내린 곳은 왕실 곳간이 아니라 왕대비전 뒷마당의 창고였다고. 봄에 창고의 밀이 세 배 값에 수도 빵집으로 나갈 때도 조합 손을 거쳤다고. 허가를 지키려고 세 해 동안 입을 다물었다고. 가스파르는 말을 마치고 조끼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깨물었다. 연회장 한가운데서. 버릇이었다. 귀족 몇이 웃음을 참았다.
오딜이 손수건을 풀었다. 흰 찻잔 하나가 나왔다. 테두리에 금 백합, 바닥에 왕대비전 문장. 오딜은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말했다. 겨울 연회 사흘 전, 왕대비 마마가 젊은 공작부인께 보내신 다섯 벌 중 하나라고. 대공작부인이 마시고 쓰러진 잔이라고. 깨졌다고 하고 밤새 품고 있었다고. 공작저 주방장이 잔 바닥에서 왕궁 곳간의 밀 벌레 쫓는 가루 냄새를 맡았다고.
“잔은 공작저 사람이 품고 있었습니다.” 시종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한 뼘 높아져 있었다. “공작저 사람들이 무엇이든 묻힐 수 있었지요.”
“가루는 제가 봤어요.”
젊은 왕비였다. 왕비가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땋은 금발 끝이 떨렸다. 연회장이 다시 숨을 멈췄다. 왕비가 공식 자리에서 입을 연 것을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회 나흘 전 밤에 왕비전 뒤뜰을 걷다가 봤어요. 시종장이 저 사람한테 작은 종이 꾸러미를 건네는 걸요. 꾸러미에서 쇠 냄새가 났어요. 저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두 해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처럼요.” 왕비가 왕대비를 보았다. 처음으로 똑바로. “어마마마, 제 차는 숨 한 번만 더 식히면 된대요. 다시 할 차가 아니래요.”
왕대비가 왕비를 보았다. 무릎 위에 포갠 손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던 손이 풀렸다.
*
셀레스타가 테두리 없는 양피지를 젊은 왕 앞에 펼쳤다.
“로슈몽 공작가는 남쪽 항구를 바치지 않아요. 대신 벨랑제의 겨울 밀을 수도에 약속해요. 첫서리부터 봄까지, 벨랑제 밀은 먼저 수도 빵집으로 가요. 조합 손을 거쳐 가을 값에요. 남는 밀은 왕실 곳간에 제값에 넣어요. 그리고 곳간 문은 겨울 동안 잠그지 않아요. 공작가가 잠그려 하면 벨랑제 부두 일꾼들이 막을 수 있어요.” 셀레스타가 바깥뜰을 보았다. 부두 우두머리가 소금기 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이 서명하셨고, 제가 반지를 찍었어요.”
연회장 맨 뒤에서 누가 박수를 쳤다. 바깥뜰이었다. 한 사람이 치고, 둘이 치고, 회색 숄이 쳤다. 귀족들은 치지 않았다. 비올렌이 부채를 접었다. 접은 부채로 손바닥을 한 번, 아주 작게 쳤다.
젊은 왕이 놋쇠 패를 손바닥에 쥐었다. 오래 쥐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지 않고 말했다.
“하르덴 백작을 오늘 풀어 준다. 이름과 영지를 돌려준다.” 왕의 목소리가 가늘었다. 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종장과 옛 집사는 북탑에 든다. 어머니는.” 왕이 숨을 골랐다. “어머니는 내일 별궁으로 가 계세요. 겨울을 거기서 나세요.”
원작의 마지막 장이 떠올랐다. 아들이 어머니를 수녀원으로 보내는 장면. 독자들은 박수를 쳤다. 오늘은 다른 아들이 다른 어머니를 보냈다. 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왕이 나를 보았다. “대공작부인.”
“네, 전하.”
“세 해 전 곳간 문을 잠근 죄를 스스로 말했으니, 벌도 정해야 하오.” 왕이 셀레스타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벨랑제로 내려가시오. 겨울마다 곳간 문 앞에 계시오. 잠갔던 손으로, 이제 문을 지키시오.”
나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다. 연회장 한가운데서. 오렐리앙이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
이튿날 아침 별궁으로 가는 마차는 흰색이었다. 왕궁 뒷문 앞에 서 있었다. 왕대비는 검은 레이스 아래 흰머리를 단정히 하고 마차 문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곁 탁자에 김이 오르는 잔이 있었다. 맹물이었다.
내가 가자 왕대비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았다. 왕대비가 시녀를 시켜 내 앞에도 맹물을 놓게 했다.
“맛을 잃으셨다지요.” 왕대비가 말했다. “이제 공작부인도 약해지지 않으시겠습니다. 좋은 차가 없어도 괴롭지 않으실 테니.”
“약해져도 돼요. 맛봐 줄 사람이 다섯이에요.” 나는 맹물을 마셨다. 따뜻했다. “아니, 이제 여섯.”
왕대비가 나를 보았다. 무릎 위의 손은 다시 포개져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다음 흉년에 수도는 저를 찾을 겁니다. 공작부인 약정은 마음씨 좋은 문서입니다. 마음씨는 흉년을 못 버팁니다.”
“그때는 곳간 셋이 있잖아요. 마마가 지으신 거요.”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곳간은 마마가 지으셨고, 문은 우리가 지킬게요. 하나는 마마 몫으로 쳐 둘게요.”
왕대비가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조금 웃었다. 입꼬리가 한 번 움직였다가 돌아왔다.
“누구시든.” 왕대비가 일어났다. 소리가 없는 동작이었다. 시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셀레스타한테 전해 주시지요. 그 아이 차는 처음부터 맛있었다고. 한 번도 다시 하라고 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고.”
마차가 떠났다. 흰 마차가 흰 눈길을 지나 흰 왕궁 담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맹물 잔을 들고 오래 서 있었다. 맹물에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원래 아무 맛도 없는 물이었다.
*
공작저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오렐리앙이 맞은편에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공작 예복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다시 채웠다. 할 말이 있는 손이었다. 서울의 아들도 할 말이 있으면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어머니, 벨랑제는 언제 가세요?”
“첫서리 지났으니까, 이레 안에. 곳간 문 지키라고 하셨잖아.”
“봄에는 올라오세요?”
“부르면.”
“부를게요.” 오렐리앙이 단추를 채웠다. “셀레스타가 그러는데요, 시어머니가 일요일마다 사람 보내서 밥 먹었냐고 물으면 며느리가 숨을 크게 쉰대요. 어머니가 살롱에서 그러셨다면서요.”
“그랬지.”
“그러니까 일요일에는 보내지 마세요. 다른 날 보내세요.” 오렐리앙이 창밖을 보았다. 귀가 빨갰다. “밥은 먹을게요.”
“응.”
내가 한 글자로 대답했다. 오렐리앙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응, 이 아니라요. 어머니도 밥 챙겨 드세요. 맛 몰라도요. 벨랑제 생선이 맛있대요. 맛 몰라도 씹는 건 아시잖아요.”
말이 길었다. 아들이 나한테 한 말 중에 가장 길었다. 나는 마차 창에 이마를 대고 강을 보았다. 강물이 얼기 시작하는 가장자리가 하얬다. 서울의 아들도 언젠가 이렇게 길게 말할 것이다. 내가 듣지 못해도. 그거면 됐다.
공작저 현관에서 셀레스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왕대비의 말을 전했다. 처음부터 맛있었다고. 한 번도 다시 하라고 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고. 셀레스타가 한참 서 있다가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셀레스타는 말을 마치고 내 팔을 잡았다. 계단 세 칸을 오르는 동안 놓지 않았다. 북탑에 끌려가던 날 아들이 잡았던 팔의 반대편이었다. 두 팔이 다 붙잡히고 나서야 쉰한 살 무릎이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
오후에 안방 찻상에 의자 여섯이 다 찼다.
오딜이 앉았고, 코르넬이 앉았고, 가스파르가 앉았다. 하르덴 백작이 앉았다. 북탑에서 나온 지 하루 만에 수염을 다듬었다. 오렐리앙이 앉았다.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턱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남은 의자 하나에 내가 앉았다. 볕이 드는 자리였다. 셀레스타는 앉지 않았다.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허리에 열쇠꾸러미를 찼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금빛 인장 반지를 끼었다.
아침에 나는 셀레스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건넸다. 북쪽 방 화장대 맨 아래 서랍의 은 상자였다. 오렌지 껍질 과자. 셀레스타가 상자를 받아 들고 한참 보더니 오딜에게 넘겼다. 오딜이 벨랑제 부두 앞에 가게를 낼 때 밑천으로 쓰라고. 오딜이 상자를 껴안고 울었다. 울면서 과자를 하나 입에 넣었다.
비올렌한테서 아침에 포도주 한 상자가 왔다. 쪽지는 없었다. 상자 뚜껑 안쪽에 부채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가스파르가 포도주 값을 따져 보려다 오딜에게 손등을 맞았다.
셀레스타가 차를 따랐다. 물이 끓고 나서 숨 두 번 식혀서. 찻물이 잔 테두리 아래 손가락 한 마디에서 멈췄다. 하르덴 백작이 딸이 따른 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눈을 감았다.
“남쪽 산이로구나.” 노인이 말했다. “벨랑제 배로 올라온.”
셀레스타가 내 잔을 채웠다. 나는 잔을 들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김이 얼굴에 올라왔다.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것이 혀 위를 지나 목으로 내려갔다. 첫맛도 끝맛도 오지 않았다. 남쪽 산인지 꽃잎 섞은 묵은 잎인지 혀는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찻상이 조용했다. 다섯이 나를 보았다. 셀레스타가 주전자를 든 채 나를 보았다. 열두 해 동안 이 찻상에서 나온 말이 하나 있었다. 이 집 사람들은 다 이 말을 알았다.
“다시.” 내가 말했다.
오딜이 과자를 떨어뜨렸다. 코르넬이 숨을 멈췄다. 오렐리앙이 반쯤 일어났다. 셀레스타의 주전자가 공중에서 멈췄다. 나는 잔을 내밀었다. 빈 잔이었다.
“한 잔 더. 맛은 몰라도 따뜻해서.”
오렐리앙이 먼저 웃었다. 열다섯 살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가스파르가 따라 웃다가 앞니 빠진 자리로 바람 새는 소리를 냈고, 오딜이 바람 새는 소리에 또 웃었다. 하르덴 백작이 수염을 쓸며 고개를 저었다. 셀레스타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떨어지기 직전에서 멈추는 눈물도, 이기는 얼굴도 없는 웃음이었다.
셀레스타가 내 잔을 다시 채웠다. 높은 창으로 겨울 오후의 햇빛이 들어와 찻상 위에 길게 누웠다. 햇빛이 셀레스타의 붉은 곱슬머리를 지나 반지 위에서 한 번 반짝이고, 김이 오르는 내 잔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맛은 없었다. 잔은 따뜻했고, 끝까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