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4자)

혀 없는 시어머니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아침 회의에 국 한 그릇이 올라왔다⁠. 코르넬이 끓인 양파 국이었다⁠.

나는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했다⁠. 따뜻한 것 말고는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찻상을 둘러보았다⁠. 북쪽 방 화로 곁에 다섯이 앉아 있었다⁠. 오딜⁠, 코르넬⁠, 가스파르⁠, 그리고 비올렌이 앉던 자리에 벨랑제 부두 우두머리가 앉아 있었다⁠. 부두 우두머리는 수도에 남아 연회를 보고 가겠다고 했다⁠. 공작부인이 항구를 어떻게 잃는지 자기 눈으로 봐야 부두에 가서 말할 수 있다고⁠.

“⁠이 국 짜요⁠?⁠” 내가 물었다⁠.

“⁠짜요⁠.⁠” 오딜이 말했다⁠.

“⁠안 짜요⁠.⁠” 코르넬이 말했다⁠.

“⁠백에 셋쯤 짭니다⁠.⁠” 가스파르가 말했다⁠.

부두 우두머리는 국을 한 숟가락 떠먹더니 바닷물보다 싱겁다고 했다⁠. 다들 우두머리를 보았다⁠. 우두머리가 머쓱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부두에서는 바닷물을 기준으로 맛을 본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웃는 동안 혀가 입안에서 굴렀다⁠. 맛은 없어도 웃을 때 혀가 움직이는 건 알았다⁠. 회사에서도 이런 회의가 있었다⁠. 사장님이 해외 출장 가고 없는 날⁠, 팀원들이 서로 사장님이라면 이 표지를 고르실까 안 고르실까를 두고 반나절을 싸웠다⁠. 결론은 없었고⁠, 반나절짜리 회의가 이십 년 회사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다⁠.

“⁠앞으로 맛은 여러분이 봐요⁠.⁠” 내가 말했다⁠. “⁠나는 이제 못 하니까⁠. 짜다는 사람이 둘이면 짠 거고⁠, 안 짜다는 사람이 둘이면 안 짠 거예요⁠. 조합장님은 백에 셋 말고 그냥 짜다 싱겁다로만 말씀해 주시고요⁠.⁠”

“⁠숫자 없이는 말이 안 나옵니다⁠.⁠” 가스파르가 투덜거렸다⁠. “⁠백에 둘로 하겠습니다⁠.⁠”

*

국그릇을 치우자 오딜이 앞치마 속에서 흰 찻잔을 꺼냈다⁠. 어젯밤 내 빈 잔이었다⁠. 오딜은 밤새 앞치마를 벗지 않고 잤다고 했다⁠. 잔을 손수건에 싸서 배에 대고⁠. 잔 바닥에 찻물 몇 방울이 말라붙어 갈색 고리를 남겼다⁠. 고리 가장자리에 하얀 가루가 아주 조금 엉겨 있었다⁠.

나는 잔을 코르넬에게 건넸다⁠. 코르넬은 잔을 받아 들고 머뭇거렸다⁠. 혀를 대려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코르넬이 코를 잔 가까이 댔다⁠. 오래 맡았다⁠. 그러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얼굴이 하얬다⁠.

“⁠마님⁠, 저 열여섯에 왕궁 주방에서 일했어요⁠. 막내였죠⁠.⁠” 코르넬이 팔뚝의 화상 자국을 쓸었다⁠. “⁠가을마다 왕궁 곳간에서 밀 벌레를 쫓으려고 가루를 태웠어요⁠. 곳간 문을 다 닫고⁠, 가루를 태우고⁠, 사흘 동안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어요⁠. 들어갔다가 쓰러진 짐꾼이 있었거든요⁠. 그 냄새예요⁠. 쓰고⁠, 쇠 같고⁠, 코 안쪽이 따가운 냄새요⁠. 왕궁 곳간에만 있는 가루예요⁠. 수도 약방에서는 안 팔아요⁠.⁠”

가스파르가 잔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 창고에서도 왕실 곳간 짐을 받을 때 가끔 같은 냄새가 묻어 온다고 했다⁠. 짐꾼들이 이 냄새를 왕실 냄새라고 부른다고⁠.

왕궁 곳간의 가루⁠. 옛 집사는 이제 왕대비전 곳간 일을 본다고 했다⁠. 빵집 앞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직접 말했다⁠.

“⁠증거가 되겠어요⁠?⁠” 부두 우두머리가 물었다⁠.

“⁠잔 하나⁠, 냄새 둘⁠.⁠” 가스파르가 손가락을 폈다⁠. “⁠왕실 앞에서는 셋 다 약합니다⁠. 잔은 공작저 사람이 밤새 품고 있었고⁠, 냄새는 공작저 주방장과 공작부인 편 조합장이 맡았지요⁠. 시종장은 공작저 사람들이 짜고 가루를 묻혔다고 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회사로 치면 우리 팀 사람들끼리 우리 팀이 옳다고 쓴 보고서였다⁠. 감사팀은 그런 보고서를 첫 장도 안 넘겼다⁠.

오딜이 찻잔을 다시 손수건에 싸며 말했다⁠. 과자를 입에 넣지 않은 채였다⁠.

“⁠마님⁠, 저도 하나 말씀드릴게요⁠. 손목 자른다고 하셔서 세 해 동안 안 한 말이요⁠.⁠” 오딜이 손수건 매듭을 꼭 묶었다⁠. “⁠그 겨울 밤에 저 하녀 방 창문으로 봤어요⁠. 우리 곳간 앞마당에 수레가 스무 대 들어왔어요⁠. 흰 백합 깃발을 꽂은 수레요⁠. 짐꾼들이 밀 자루를 밤새 실었어요⁠. 마님은 이 층 안방 창가에 서서 내려다보셨고요⁠. 촛불도 안 켜고요⁠.⁠”

“⁠왜 그때 안 말했어요⁠?⁠”

“⁠누구한테요⁠?⁠” 오딜이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마님한테요⁠? 마님이 시키신 일인데요⁠. 공작님한테요⁠? 그때 공작님은 벨랑제에 계셨어요⁠. 하인이 왕실 깃발 본 걸 말하면 누가 믿어요⁠. 하인 말은 증거가 아니라 소문이에요⁠.⁠”

오딜은 매듭 지은 손수건을 다시 앞치마 속에 넣었다⁠. 하인의 말⁠, 주방장의 코⁠, 조합장의 코⁠, 공작의 눈⁠. 하나씩은 다 약했다⁠. 나는 찻상에 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다섯이 각자 하나씩 들고 있었다⁠. 회사에서 증거가 약할 때 하던 일이 있었다⁠. 약한 증거는 하나씩 내지 않는다⁠. 한꺼번에 낸다⁠.

*

점심이 지나 옛 집사가 왔다⁠. 왕실 흰 옷을 입고 현관에 서서 하녀에게 말했다⁠. 왕대비 마마께서 보내신 찻잔 다섯 벌을 거두러 왔다고⁠. 연회 날 왕궁에서 다시 쓸 잔이라고⁠.

나는 오딜의 팔을 짚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리가 아직 휘청거렸다⁠. 현관에는 오렐리앙이 먼저 나와 있었다⁠. 오렐리앙은 밤새 내 방문 앞에 앉아 있었다고 셀레스타가 말했었다⁠. 눈 밑이 검었다⁠. 아들은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반대편 팔을 잡았다⁠. 계단 세 칸을 아들의 팔에 기대 내려왔다⁠. 스무 날 만이었다⁠.

오딜이 쟁반에 흰 찻잔 넷을 담아 내밀었다⁠. 옛 집사가 잔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벌이었습니다⁠.⁠”

“⁠넷이에요⁠.⁠” 오딜이 말했다⁠. 과자를 입에 문 채였다⁠. 오랜만에 문 과자였다⁠. “⁠어젯밤 마님 쓰러지실 때 하나 깨졌어요⁠. 조각은 쓰레기와 같이 강에 버렸고요⁠.⁠”

옛 집사가 오딜을 보았다⁠. 열네 해 동안 같은 지붕 아래 산 두 사람이었다⁠. 오딜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과자를 천천히 씹었다⁠.

“⁠집사⁠.⁠” 내가 불렀다⁠. 옛 집사가 나를 보았다⁠. 공손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세 해 전 겨울⁠, 강둑 길로 간 수레 스무 대⁠. 흰 백합 깃발⁠. 맨 앞 수레에 당신이 탔죠⁠. 우리 아들이 봤대요⁠.⁠”

옛 집사가 오렐리앙을 보았다⁠. 오렐리앙이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옛 집사가 말했다⁠. 웃음이 얼굴에 얇게 붙어 있었다⁠. “⁠마님은 그 겨울 금화를 마흔 자루 받으셨습니다⁠. 수레가 비어서 돌아올 때 금화 자루가 실려 있었지요⁠. 어디서 받으셨는지는 마님이 아실 겁니다⁠. 기억이 안 나신다면 열쇠꾸러미에 물어보시지요⁠. 금고 맨 아래 선반⁠, 왼쪽 끝 상자요⁠.⁠”

옛 집사는 찻잔 넷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님⁠, 혀는 좀 어떠십니까⁠?⁠”

오렐리앙이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아들의 팔을 붙잡았다⁠. 옛 집사는 현관을 나가 마차에 올랐다⁠. 공손한 각도는 끝까지 그대로였다⁠.

셀레스타가 금고에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금고 맨 아래 선반⁠, 왼쪽 끝 상자⁠. 셀레스타가 상자 뚜껑을 열어 내게 보였다⁠. 금화가 아니었다⁠. 빈 금화 자루 마흔 장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자루마다 아가리 끈에 작은 봉랍이 매달려 있었다⁠. 흰 봉랍이었다⁠. 백합이 찍혀 있었다⁠.

셀레스타가 봉랍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오래 보았다⁠. 왕대비전 찻상에서 닷새마다 보던 백합이었다⁠.

“⁠이게 뭐예요⁠, 어머님⁠?⁠” 셀레스타의 목소리가 작았다⁠.

“⁠몰라요⁠. 이 몸이 받았대요⁠.⁠” 내 혀가 느리게 굴렀다⁠. “⁠세 해 전 겨울에 우리 곳간 밀이 왕실 깃발을 달고 나갔고⁠, 이 자루들이 금화를 담고 돌아왔대요⁠. 백합 봉랍을 달고⁠.⁠”

셀레스타가 자루를 하나 더 들췄다⁠. 셋⁠, 넷⁠. 모두 같은 봉랍이었다⁠. 셀레스타는 자루를 상자에 도로 넣지 않았다⁠. 봉랍 하나를 끈에서 뜯어 손바닥에 쥐었다⁠.

“⁠왕대비 마마는 로슈몽이 곳간 문을 잠가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셨어요⁠.⁠” 셀레스타가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손바닥 속 봉랍에게 하는 말이었다⁠. “⁠잠근 문 안의 밀을 누가 사 갔는지는 말씀 안 하셨어요⁠.⁠”

*

해 질 무렵 시종장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병사 여섯을 데려왔다⁠. 시종장이 현관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맨 아래 백합 봉랍이 찍혀 있었다⁠.

“⁠로슈몽 대공작부인 마르셀린은 왕대비 마마께서 젊은 공작부인께 내리신 찻잔에 손을 대어 독을 탄 죄로 북탑에 든다⁠. 판결은 해가 가장 짧은 날 겨울 연회에서 온 조정 앞에서 내린다⁠.⁠”

오렐리앙이 내 앞을 막았다⁠. 문틀에 닿을 만큼 큰 몸이었다⁠.

“⁠어머니가 마셨어요⁠. 제 눈앞에서 끝까지 마시셨어요⁠. 누가 자기가 탄 독을 마셔요⁠?⁠”

“⁠들킨 사람은 그럽니다⁠, 공작님⁠.⁠” 시종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대공작부인께서는 며느님 잔을 빼앗아 들고 한참 보셨지요⁠. 무엇을 넣었는지 들켰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래서 마셔 버리셨지요⁠. 증거를 없애려고요⁠. 수도 사람들은 그렇게 압니다⁠. 비올렌 후작부인 살롱에서 오늘 오후에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비올렌의 살롱⁠. 연회 전날 열겠다던 왕대비를 위한 살롱이 하루 당겨져 있었다⁠. 원작대로 가는 길이 또 당겨졌다⁠.

“⁠공작님이 왕명을 막으시면 공작님도 북탑에 드십니다⁠.⁠” 시종장이 두루마리를 말았다⁠. “⁠그러면 헌상서는 누가 올리지요⁠? 장인어른은요⁠?⁠”

오렐리앙의 어깨가 굳었다⁠. 나는 아들의 등을 보았다⁠. 넓은 등이었다⁠. 서울의 아들은 등이 좁았다⁠. 등이 좁은 아들도 등이 넓은 아들도⁠, 어머니 앞을 막아설 때는 똑같이 떨었다⁠.

“⁠오렐리앙⁠, 비켜⁠.⁠”

“⁠어머니⁠.⁠”

“⁠비켜⁠. 공작이 막으면 이 집이 끝나⁠. 엄마는 탑에서 이틀 자고 오면 돼⁠.⁠”

엄마⁠. 이번에도 오렐리앙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비켰다⁠. 천천히⁠. 병사 둘이 내 양팔을 잡았다⁠. 원작에서 하인들이 마르셀린의 손목을 잡았던 것처럼⁠. 원작에서는 하인이었고⁠, 지금은 병사였다⁠. 손목을 잡히는 감촉은 같았다⁠.

하인들이 복도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아침 회의에 오던 스물두 명이 다 나와 있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부가 모자를 벗었고⁠, 세탁부가 따라 벗었고⁠, 등잔지기가 등잔을 내려놓았다⁠. 회사에서 구조조정 날 짐 싸서 나가는 부장을 팀원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나는 늘 배웅하는 사람이었다⁠. 배웅받는 자리에 서 보니 현관까지 가는 복도가 생각보다 길었다⁠. 코르넬이 주방 문간에서 앞치마를 쥐어뜯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현관 기둥 뒤에서 병사 여섯의 수를 손가락으로 세고 또 셌다⁠. 몇 번을 세어도 여섯이었다⁠.

현관 계단 위에 셀레스타가 서 있었다⁠. 열쇠꾸러미를 허리에 차고⁠, 손에 백합 봉랍 하나를 쥐고 있었다⁠. 셀레스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저 입이 한마디만 하면⁠, 잔은 셀레스타의 잔이었고 시어머니가 빼앗아 마셨다고 한마디만 하면⁠, 시종장의 말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셀레스타의 한마디가 아버지를 북탑에 한 겨울 더 둘 수도 있었다⁠. 셀레스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병사에게 끌려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췄다⁠. 병사들이 당겼다⁠. 나는 버티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셀레스타⁠.⁠”

셀레스타가 나를 보았다⁠. 봉랍을 쥔 손이 하얬다⁠.

“⁠차는 이제 네가 내려요⁠.⁠” 내가 말했다⁠. 혀가 무거워서 말이 느렸다⁠. “⁠내 혀는 이제 맛을 몰라⁠. 안방 찻상에 의자 여섯⁠, 다 채워요⁠.⁠”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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