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58자)

쓴 차

시어머니로 빙의한 악녀 며느리 · 진새온

왕대비가 보낸 찻잔은 흰 자기였다⁠. 잔마다 테두리에 금으로 백합을 그렸고⁠, 받침 바닥에 왕대비전의 작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잔은 다섯 개였다⁠. 시종장⁠, 공작⁠, 젊은 공작부인⁠, 대공작부인⁠, 그리고 하나는 여벌이었다⁠.

코르넬은 찻잔을 주방 탁자에 늘어놓고 한참 노려보았다⁠. 잔을 들어 불빛에 비춰 보고⁠, 엄지로 안쪽을 쓸고⁠,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깨끗한 자기라고⁠. 깨끗해서 더 싫다고 했다⁠. 오딜은 찻잔을 씻을 때 자기가 직접 씻겠다고 우겼고⁠, 씻은 뒤 앞치마로 닦지 않고 새 행주를 꺼내 닦았다⁠. 하녀들이 시녀장을 보고 수군거렸다⁠. 시녀장님이 왕궁 찻잔을 보물처럼 닦는다고⁠.

연회 사흘 전 저녁이었다⁠. 헌상서에 서명이 끝난 지 스무 날이 지났고⁠, 오렐리앙은 스무 날 동안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식탁에서 소금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셀레스타가 대신 소금을 건넸다⁠. 셀레스타는 스무 날 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대신 내 찻잔이 비면 말없이 채웠다⁠.

나는 오딜에게 하나만 일렀다⁠. 오늘 저녁 찻상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놀라지 말라고⁠. 그리고 찻상이 끝나면 내 잔이든 누구 잔이든 남은 잔을 하나도 주방에 내려보내지 말라고⁠.

“⁠마님⁠, 뭘 하시려고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 좋겠고⁠.⁠”

오딜이 과자를 입에 넣으려다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요즘 오딜은 과자를 자주 도로 넣었다⁠.

*

오후에 벨랑제에서 사람이 올라왔다⁠. 부두 일꾼들의 우두머리였다⁠. 쉰 남짓한 사내였는데⁠, 손등이 밧줄에 쓸려 가죽처럼 두꺼웠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얼굴에 소금기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사흘 밤낮 말을 갈아타며 올라왔다고 했다⁠. 공작을 만나러 왔다가 공작이 마구간에서 안 나온다는 말을 듣고 북쪽 방 문을 두드렸다⁠.

“⁠대공작부인⁠, 공작님이 항구를 왕실에 바친다는 말이 벨랑제에 돕니다⁠. 수도 짐꾼들이 배에 실어 보낸 말입니다⁠.⁠” 우두머리가 모자를 쥐었다⁠. 가스파르가 대문 앞에서 쥐던 것과 같은 모양으로 구겨졌다⁠. “⁠왕실 곳간 관리들이 부두에 오면 우리 품삯을 반으로 깎는다고들 합니다⁠. 제국 배가 세 배를 불러도 왕실은 밀을 곳간에 넣고 문을 잠근다고요⁠. 세 해 전 대공작부인께서 하신 것처럼요⁠.⁠”

우두머리는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거두지 않았다⁠.

“⁠맞는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세 해 전에 내가 그랬어요⁠.⁠”

우두머리가 눈을 들었다⁠. 대공작부인이 제 입으로 맞다고 할 줄은 몰랐던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헌상서에는 이미 서명이 있었다⁠. 연회까지 사흘⁠.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듣는 것⁠. 나는 우두머리를 화로 곁 의자에 앉히고 부두 이야기를 들었다⁠. 부두에 일꾼이 몇이고⁠, 딸린 식구가 몇이고⁠, 지난겨울 얼음 깨는 데 손가락 잃은 사람이 몇인지⁠. 우두머리는 숫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숫자를 말할 때마다 사람 이름을 붙였다⁠. 나는 이름을 하나씩 따라 말했다⁠. 혀가 아직 맛을 알 때였다⁠.

*

왕대비전 시종장은 키가 크고 손이 하얬다⁠. 쉰쯤 되어 보였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빗어 넘겼다⁠. 웃을 때 이가 고르게 드러났다⁠. 시종장 뒤에 옛 집사가 서 있었다⁠. 왕실의 흰 옷을 입고 손을 모은 채였다⁠. 공작저 식당에 들어서며 옛 집사는 벽에 걸린 촛대와 식탁보와 은수저를 하나씩 보았다⁠. 열네 해 동안 닦던 물건들이었다⁠. 눈이 물건 위에서 한 박자씩 머물렀다⁠.

저녁 식사는 조용히 지나갔다⁠. 시종장은 코르넬의 사슴 고기 스튜를 칭찬했고⁠, 오렐리앙은 고맙다고만 했고⁠, 셀레스타는 시종장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시종장은 수도 빵값 이야기를 했다⁠. 밀 이삭 빵집 다섯 군데 앞에만 줄이 길다고⁠. 수도 사람들이 요즘 로슈몽 빵이라고 부른다고⁠. 대공작부인께서 인심을 크게 쓰셨다고⁠. 칭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칭찬이 아니라는 건 식탁의 모두가 알았다⁠.

식사가 끝나고 찻상으로 옮겼다⁠. 안방이었다⁠. 셀레스타가 차를 내렸다⁠. 왕대비가 보낸 흰 잔 다섯 개가 찻상에 놓였다⁠. 옛 집사가 쟁반을 들고 셀레스타 곁에 붙었다⁠. 셀레스타가 차를 따르면 옛 집사가 잔을 받침째 들어 한 사람씩 앞에 놓았다⁠. 시종장의 잔⁠, 공작의 잔⁠, 대공작부인의 잔⁠. 마지막으로 셀레스타의 잔⁠. 옛 집사는 셀레스타의 잔을 놓을 때 받침을 한 번 돌렸다⁠. 백합 그림이 셀레스타 앞으로 오게⁠.

“⁠왕대비 마마께서 젊은 공작부인께 이 잔으로 첫 차를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장이 웃었다⁠. “⁠연회 사흘 전에 공작가 안주인이 왕실 잔으로 차를 마시는 건 좋은 징조라고요⁠.⁠”

셀레스타가 잔을 들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셀레스타⁠, 잠깐만요⁠.⁠”

모두가 나를 보았다⁠. 시종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렐리앙의 얼굴이 굳었다⁠. 스무 날 만에 처음 나를 보는 얼굴이 이런 얼굴이었다⁠.

“⁠이 집에서는 새 찻잎은 내가 먼저 맛봐요⁠. 열두 해 그랬어요⁠.⁠” 열두 해 동안 마르셀린이 그랬다는 건 오딜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새 찻잎이 들어오면 마르셀린이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다시를 하든지 말든지 했다⁠. 하인들은 이 버릇을 트집이라 불렀다⁠. “⁠왕실 찻잎이잖아요⁠. 내가 먼저 봐야죠⁠.⁠”

셀레스타가 잔을 들고 망설였다⁠. 오렐리앙이 낮게 말했다⁠. 어머니⁠, 손님 앞에서 또 시작이세요⁠. 시종장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대공작부인의 혀는 수도가 다 아는 혀입니다⁠. 시종장이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이 너무 빨랐다⁠.

셀레스타가 잔을 내게 건넸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남쪽 산 찻잎이었다⁠. 좋은 찻잎이었다⁠. 첫맛이 단단하고 끝이 맑았다⁠. 맑은 끝 아래에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혀뿌리에서 쇠를 핥은 것 같은 쓴맛이 올라왔다⁠. 차의 쓴맛이 아니었다⁠. 찻잎은 혀 위에서 둥글게 쓰고⁠, 이건 혀 밑에서 날카롭게 썼다⁠. 녹슨 못을 입에 문 맛이었다⁠. 혀끝이 금세 저려 왔다⁠.

원작의 한 줄이 떠올랐다⁠. 「⁠겨울 연회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찻잔에 손을 댔고⁠, 며느리는 그 차를 마시고 쓰러졌다⁠.⁠」 원작은 연회 날이었다⁠. 오늘은 연회 사흘 전이었다⁠. 원작대로 가는 길이 사흘 당겨져 있었다⁠.

나는 잔을 든 채 생각했다⁠. 짧게⁠. 회사에서 사고 터진 날 회의실 문을 열기 전 삼 초처럼⁠.

독이라고 말하면 증거가 없다⁠. 시종장은 대공작부인이 며느리의 잔에 무엇을 넣고 독이라 우긴다고 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내가 잔을 받기 전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내 혀만 안다⁠. 혀는 증인이 될 수 없었다⁠. 잔을 내려놓으면⁠, 옛 집사가 쟁반을 들고 와서 잔을 치운다⁠. 치운 잔은 왕궁으로 간다⁠. 셀레스타에게는 다른 날 다른 잔이 간다⁠. 연회 날의 잔이⁠.

시종장이 웃고 있었다⁠. 옛 집사는 쟁반을 든 채 내 손에 들린 잔을 보고 있었다⁠. 셀레스타가 나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지 재는 눈이 아니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처음으로 겁내는 눈이었다⁠.

나는 잔을 끝까지 마셨다⁠.

찻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혀 전체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가 곧 아무 느낌이 없어졌다⁠. 빈 잔을 받침에 내려놓았다⁠. 달각⁠. 손이 떨려서 소리가 두 번 났다⁠.

“⁠찻잎이 좋네요⁠.⁠” 내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처럼 멀었다⁠. “⁠근데 셀레스타 입엔 안 맞을 거예요⁠. 다른 잔으로 마셔요⁠.⁠”

시종장이 천천히 일어났다⁠. 웃음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웃음이 굳어 있었다⁠.

“⁠대공작부인께서 며느님 찻잔에 손을 대셨군요⁠.⁠” 시종장이 또박또박 말했다⁠. 원작의 문장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찻상이 기울었다⁠. 아니⁠, 내가 기울었다⁠. 의자 등받이가 등에서 멀어졌고 천장의 천사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뛰었다⁠. 누가 소리를 질렀다⁠. 오렐리앙이었다⁠. 어머니⁠. 열다섯 살 아이 목소리였다⁠. 오딜이 찻상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오딜은 나를 받지 않고 내 빈 잔을 받았다⁠. 잔을 앞치마 속에 넣고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옛 집사가 쟁반을 든 채 오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코르넬이 문간에서 옛 집사의 어깨를 잡았다⁠. 코르넬의 화상 자국 난 팔뚝이 흰 옷 위에서 붉었다⁠.

바닥에 닿기 전에 누군가 나를 받았다⁠. 붉은 곱슬머리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 셀레스타였다⁠. 셀레스타의 숨에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맛을 볼 혀가 이미 없었다⁠.

*

눈을 떴을 때 북쪽 방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입안에 젖은 솜이 가득 차 있었다⁠.

오딜이 물을 가져왔다⁠.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입안을 지나갔다⁠. 차가운 것이 지나간다는 것만 알았다⁠. 코르넬이 데운 수프를 가져왔다⁠. 한 숟가락 떠 넣었다⁠. 뜨거운 것이 지나갔다⁠. 짠지 싱거운지⁠, 바다 소금인지 바위 소금인지⁠,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혀가 입안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남의 혀 같았다⁠. 이번에는 정말 남의 혀가 되었다⁠.

코르넬이 숟가락을 든 내 손을 보았다⁠. 숟가락이 국그릇 위에서 멈춰 있었다⁠. 코르넬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국을 물리던 혀가 국 앞에서 멈춰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아챘다⁠. 코르넬이 고개를 돌렸다⁠. 화덕 앞에서 열두 해를 버틴 사람이 북쪽 방 창가에서 어깨를 떨었다⁠.

오딜이 은 상자를 열어 오렌지 껍질 과자를 하나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씹었다⁠. 껍질이 이 사이에서 질기게 버텼고⁠, 설탕 알갱이가 혀 위에서 서걱거렸다⁠. 쌉싸름한 맛도 단맛도 오지 않았다⁠. 질긴 것과 서걱거리는 것만 있었다⁠. 오딜이 내 얼굴을 보다가 과자 상자를 닫았다⁠. 닫고 나서 제 입에도 하나 넣지 않았다⁠. 손목을 자른다는 말에 열두 해 동안 아무도 못 열던 상자를⁠, 오딜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덮었다⁠.

왕궁 의원이 왔다가 갔다⁠. 의원은 내 혀를 들여다보고 혀가 데었다고 했다⁠. 쓴 가루가 혀를 태웠고⁠, 삼킨 양이 한 잔이라 목숨은 건졌다고⁠. 맛이 돌아올지는 모른다고 했다⁠. 의원은 모른다는 말을 할 때 내 눈을 피했다⁠. 회사에서 실적 전망을 묻는 사장님 앞에서 재무팀장이 피하던 눈이었다⁠.

오후에 셀레스타가 왔다⁠. 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문간에서 오래 서 있었다⁠. 연분홍 드레스 소매에 어젯밤 쏟아진 찻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갈아입지 않은 옷이었다⁠. 셀레스타는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시종장은 어젯밤에 돌아갔어요⁠. 집사도요⁠. 코르넬이 붙잡고 있었는데 시종장이 왕실 사람이라 놓아줘야 했어요⁠.⁠” 셀레스타가 무릎 위에서 손을 쥐었다⁠. 반지 낀 손이 하얬다⁠. “⁠공작님은 밤새 어머님 방문 앞에 앉아 계셨어요⁠. 지금은 검은 말 빗기러 가셨고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혀가 둔해서 말이 굴러 나오지 않았다⁠.

셀레스타가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왜 마셨어요⁠?⁠” 목소리가 낮았다⁠. 마르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건 제 잔이었어요⁠. 왕대비 마마가 보내신 잔이었고⁠, 제가 마시라고 보내신 거였어요⁠. 어머님이 아니라 제가요⁠.⁠”

나는 혀를 굴려 보았다⁠. 무겁고 둔했다⁠. 그래도 말은 나왔다⁠.

“⁠알아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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