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21자)

인감

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 남이랑

육현배는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두 시⁠, 만세슈퍼 앞 평상에 앉은 제 몸을 찾아냈다⁠. 회장은 와이셔츠 소매를 걷은 채 보리별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방옥란 사장과 봉지 날짜를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날짜를 길게 찍어 오라니까 또 4일이야⁠?⁠”

“⁠이게 마지막 상자요⁠. 다음 솥부터 길어져요⁠.⁠”

현배는 무릎을 짚으며 평상 앞으로 갔다⁠. 사장이 고개를 들어 백발 노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르신은 누구세요⁠?⁠”

“⁠동학제과 회장입니다⁠.⁠” 현배가 말했다⁠. 사장의 입이 벌어졌다⁠. 현배는 사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육 과장님⁠.⁠”

회장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사장은 계산대로 들어가는 척하며 유리문 안쪽에 바짝 붙었다⁠.

“⁠면목동 담당⁠, 동그라미⁠.⁠” 현배가 평상에 털썩 앉았다⁠. 회장의 엉덩이뼈가 나무판에 부딪혀 욱신거렸다⁠. “⁠회장님이 치셨대요⁠. 제 이름 옆에⁠. 위임장은 회식 사흘 전에 쓰셨고요⁠.⁠”

“⁠성준이가 보여 줬구나⁠.⁠”

“⁠왜 말 안 하셨어요⁠?⁠”

회장은 보리별 봉지 하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렸다⁠. 노란 종이가 볕을 받아 반짝였다⁠.

“⁠면목동이 제일 적게 팔았다⁠. 거래처는 제일 많은데 매출은 제일 적었어⁠. 숫자대로 쳤다⁠.⁠”

“⁠그럼 회식에는 왜 오셨어요⁠? 과자는 왜 들고 오셨고요⁠?⁠”

“⁠자른 사람 얼굴 보려고⁠.⁠” 회장이 봉지를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1998년에 집사람이 그랬다⁠. 다음에 또 자르게 되면 그땐 당신이 가서 얼굴 보고 자르라고⁠. 그래서 갔다⁠. 얼굴을 봤더니 소주 일곱 잔 마시고 나한테 대들더라⁠.⁠”

현배는 말이 막혔다⁠. 유리문 안에서 사장이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성준이 집 걸었다⁠. 나도 안다⁠. 은행에서 나한테 먼저 전화가 왔어⁠.⁠”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반대하면 성준이 집이 날아가⁠. 너는 삼 년을 버는 거고⁠. 삼 년 버는 동안 공장 기계는 더 낡는다⁠.⁠”

“⁠그래서 파시겠다고요⁠? 제 몸으로 돌아가서 주총 날⁠?⁠”

“⁠그래서 위임장을 써 줬다⁠.⁠”

“⁠위임 거둘 겁니다⁠.⁠” 현배가 평상을 짚고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위임은 철회할 수 있대요⁠. 허 비서가 찾아 줬어요⁠. 위임한 사람이 직접 철회한다고 알리면 된대요⁠. 위임한 사람은 지금 저고요⁠.⁠”

“⁠내 도장이다⁠.⁠”

“⁠지금은 제 손에 있어요⁠.⁠”

회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마흔두 살 무릎이 현배를 내려다보았다⁠.

“⁠해 봐라⁠. 네 손으로 내 이름을 쓸 수 있으면⁠.⁠”

“⁠써지던데요⁠. 아주 잘⁠.⁠”

현배가 골목을 걸어 나가는 동안 유리문이 드르륵 열렸다⁠. 사장이 고개를 내밀고 회장에게 속삭였다⁠.

“⁠육 과장⁠, 너 회장님한테 반말 들어⁠? 회장님이 너한테 존댓말 하고⁠?⁠”

*

구동학은 11월 1일 월요일 아침 아홉 시⁠, 평창동 주민센터 앞 은행나무 아래 서 있었다⁠. 노란 잎이 과장의 어깨에 자꾸 떨어졌다⁠. 동학은 현배가 인감증명서를 떼러 올 것을 알았다⁠. 위임을 거두는 통지에 인감을 찍고 인감증명서를 붙여야 진짜로 인정된다⁠. 평창동 주민센터는 동학의 주소지였다⁠.

검은 승용차가 주민센터 앞에 멈췄다⁠. 허기성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었다⁠. 동학의 몸이 무릎을 짚으며 내렸다⁠.

“⁠허 비서⁠.⁠” 동학이 불렀다⁠. “⁠너까지 이러냐⁠.⁠”

비서는 육 과장의 얼굴을 보며 한참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알아챈 얼굴이 되었다⁠. 얼굴이 하얘졌다가 빨개졌다⁠.

“⁠회장님⁠, 그건⁠…⁠… 아니⁠, 육 과장님⁠? 아니⁠…⁠…⁠.⁠” 비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말을 고르다가 결국 고르지 못했다⁠. “⁠두 분 다 저한테는 회장님이세요⁠. 저는 차 문만 열어 드린 겁니다⁠.⁠”

현배가 주민센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이 다섯 칸이었는데 회장의 무릎으로는 한 칸마다 쉬어야 했다⁠. 동학은 계단 아래에서 현배의 팔을 붙잡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붙잡으면 여든한 살 팔목이 비틀릴 것이었다⁠. 비틀리는 팔목은 동학의 팔목이었다⁠.

“⁠잡으세요⁠, 회장님⁠. 잡아 보세요⁠.⁠” 현배가 계단 셋째 칸에서 돌아보았다⁠.

“⁠내 몸 다칠까 봐 못 잡는다⁠.⁠”

“⁠저도 회장님이 제 몸으로 뭘 할까 봐 보름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이제 반반이네요⁠.⁠”

현배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동학은 유리문 너머로 제 몸이 민원 창구 앞에 앉는 것을 보았다⁠. 직원이 작은 기계를 내밀었고⁠, 동학의 몸이 검지를 기계 위에 올렸다⁠. 기계가 짧게 울렸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도 화면 글자가 보였다⁠. 「⁠본인 확인되었습니다⁠」⁠.

동학은 은행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오십 년 동안 동학의 지문은 동학만 증명했다⁠. 오늘 아침 동학의 지문이 다른 사람을 동학이라고 증명했다⁠.

십 분 뒤 현배가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도 한참이었다⁠. 현배는 동학 앞을 지나며 걸음을 멈췄다⁠.

“⁠우체국 가서 내용증명으로 보낼 거예요⁠. 부회장님한테⁠, 회사에⁠.⁠”

“⁠그 종이 한 장 보내면 성준이 집이 날아간다⁠.⁠”

“⁠안 보내면 이백삼십구 명이 날아가요⁠.⁠” 현배가 봉투를 가슴에 붙였다⁠. “⁠회장님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너 하나 빼 주면 공평하냐고⁠. 회장님 아들 하나 지켜 주면 공평해요⁠?⁠”

동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행잎 하나가 동학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과장의 앞머리 벗어진 자리에 얹혀 오래 붙어 있었다⁠.

*

육현배는 11월 1일 오전 열한 시⁠, 광화문 우체국 창구 앞에서 허기성이 서류를 세 부로 복사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증명은 같은 글을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받는 사람에게⁠, 한 부는 우체국에⁠, 한 부는 보내는 사람이 갖는다고 창구 직원이 일러 주었다⁠. 현배는 철회 통지문 맨 아래에 회장의 도장을 세 번 찍었다⁠. 손이 도장을 쥐는 모양을 이제는 현배도 알았다⁠.

허기성이 복사본을 들고 돌아와 현배 옆에 앉았다⁠. 한참 말이 없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진짜 회장님은 지금 육 과장님 몸에 계신 거죠⁠?⁠”

“⁠응⁠.⁠”

“⁠그럼 제가 지난주에 라면 끓여 드린 분은 육 과장님이시고요⁠.⁠”

“⁠응⁠. 맛있었어⁠.⁠”

비서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 메모가 다 틀린 게 아니었네요⁠. 회장님 말씀이 메모랑 안 맞았던 게⁠, 회장님이 아니셔서였어요⁠.⁠” 비서가 손을 내렸다⁠. “⁠부회장님께는 오늘 일 보고 안 드립니다⁠. 들키면 저 잘려요⁠.⁠”

“⁠잘리면⁠?⁠”

“⁠그럼 저도 보리별 팀 들어가야죠⁠. 막내 대리님이 방 이름 바꾸셨다면서요⁠.⁠”

창구 직원이 번호를 불렀다⁠. 현배는 봉투 세 개를 창구에 밀어 넣었다⁠. 우체국 직원이 봉투마다 도장을 쾅쾅 찍었다⁠. 회장의 도장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다⁠.

*

육현배는 11월 2일 화요일 아침 아홉 시⁠, 회장실 책상 앞에서 성준을 맞았다⁠. 성준은 노크를 하지 않았다⁠. 손에 우체국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위에 빨간 글씨로 「⁠내용증명⁠」이 찍혀 있었다⁠.

“⁠회장님⁠, 이거 정말 회장님 뜻입니까⁠?⁠”

“⁠내 도장이야⁠. 내 지문이고⁠.⁠”

성준이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현배는 성준의 손이 떨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회장님이 지난달에 저한테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남은 사람은 네가 지키라고⁠. 그 말 믿고 제가 은행에 집을 내놨고⁠, 하버라인을 붙잡았고⁠, 삼백 명한테 통보를 했습니다⁠.⁠” 성준이 안경을 벗었다⁠. “⁠회장님은 오 년 동안 저를 안 믿으셨는데⁠, 저는 지난달에 처음으로 회장님을 믿었어요⁠. 바보 같죠⁠.⁠”

“⁠성준아⁠.⁠”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현배는 부르고 나서 놀랐다⁠. 회장의 입이 오 년 만에 아들 이름을 부른 것인지⁠, 현배의 입이 남의 아들 이름을 부른 것인지 몰랐다⁠.

성준이 한참 현배를 보았다⁠. 그러다 안경을 다시 썼다⁠.

“⁠주총은 그대로 갑니다⁠. 회장님 표는 회장님이 직접 던지세요⁠. 다만 회장님 옆에 계신 분은 정리하겠습니다⁠.⁠” 성준이 문으로 걸어갔다⁠. “⁠육 과장님이요⁠. 회장님이 저보다 육 과장님 말을 더 들으시는 건⁠, 아들로서는 못 보겠어서요⁠.⁠”

문이 닫혔다⁠. 현배는 책상 위 내용증명 봉투를 보았다⁠. 빨간 글씨가 볕을 받아 더 빨갰다⁠.

*

구동학은 11월 2일 화요일 오후 다섯 시⁠, 반찬가게 「⁠엄마손반찬⁠」에 보리별 두 봉지를 들고 들어갔다⁠. 사장에게 하나⁠, 순정에게 하나 줄 생각이었다⁠. 문을 열자 계산대 앞에 은테 안경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성준이었다⁠.

“⁠아⁠, 육 과장님도 오셨네요⁠. 잘됐습니다⁠.⁠” 성준이 몸을 돌렸다⁠.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두 분께 같이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순정이 계산대 뒤에서 앞치마를 움켜쥐었다⁠. 반찬가게 사장은 주방 안쪽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회사로 내용증명이 왔습니다⁠. 회장님이 위임을 거두신다고요⁠. 인감증명서까지 붙여서요⁠.⁠” 성준이 동학을 보았다⁠. 안경 너머 눈이 피곤했다⁠. “⁠육 과장님이 지난 이 주 동안 회장님 곁에서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회장님이 육 과장님 희망퇴직을 빼 주시고⁠, 공장에 같이 가시고⁠, 차에 같이 앉아 계시고⁠, 반대표를 모으러 다니셨어요⁠. 회장님이 원래 안 하시던 일을요⁠.⁠”

“⁠그래서 뭘 원하시오⁠?⁠”

“⁠육 과장님을 내일 징계위원회에 올렸습니다⁠. 철수 지시를 어기셨고⁠, 회장님께 부당한 영향을 끼치셨다는 사유로요⁠. 징계 해고가 나오면 위로금은 없습니다⁠.⁠” 성준이 서류 봉투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 전에 하나 드릴 게 있습니다⁠.⁠”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희망퇴직 재신청 시 위로금 원안 지급 · 기본급 24개월분 · 11월 3일 징계위원회 전까지 서명⁠」⁠.

“⁠내일 징계위원회 들어가시기 전에 여기 서명하시면 징계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위로금은 처음 조건 그대로⁠, 일억 사천이요⁠.⁠” 성준이 순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모님⁠, 저도 집을 걸고 있는 사람이라서요⁠. 전세 만기가 두 달 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순정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영업본부장님이요⁠. 육 과장님 사정을 잘 아시더라고요⁠.⁠”

“⁠그 대신 뭘 바라시오⁠?⁠” 동학이 물었다⁠.

“⁠회장님 곁에서 떠나 주세요⁠. 회사에서도요⁠.⁠” 성준이 봉투를 순정 앞으로 조금 밀었다⁠. “⁠제가 아버지를⁠, 아니 회장님을 지키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성준이 나가자 유리문의 종이 오래 흔들렸다⁠. 동학은 들고 온 보리별 두 봉지를 계산대에 내려놓지 못했다⁠. 아들이 남의 아내 앞에서 아버지라고 했다가 회장님으로 고쳐 부르는 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

구동학은 밤 열 시⁠, 빌라 식탁에서 순정과 마주 앉아 있었다⁠. 순정이 반찬가게에서 들고 온 봉투를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 봉투 위에 볼펜 한 자루를 가로로 얹었다⁠.

“⁠회장님⁠.⁠” 순정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다솔의 방에서 잠꼬대 소리가 났고⁠, 순정은 방문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동학을 보았다⁠. 봉투 위에 얹은 손을 떼지 않았다⁠. “⁠이거 서명하실 수 있죠⁠? 제 남편 손으로요⁠.⁠”

동학은 볼펜을 보았다⁠. 과장의 손이 볼펜을 쥐면 과장의 글씨가 나올 것이었다⁠. 몸은 제 주인의 이름을 아주 잘 썼다⁠. 어제 아침 동학의 검지가 현배를 동학이라고 증명했듯이⁠.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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