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2자)

고씨상회

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 남이랑

구동학은 10월 22일 금요일 아침 여덟 시⁠, 만세슈퍼 계산대 앞에 보리별 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뜯자 노란 봉지 마흔 개가 빼곡히 누워 있었다⁠. 방옥란 사장이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짜 가져왔네⁠.⁠”

“⁠가져오면 받는다면서요⁠.⁠”

“⁠말이야 했지⁠.⁠” 사장이 봉지를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별 과자 부딪는 소리가 사락사락 났다⁠. “⁠우리 영감 제사상에 하나 올려야겠다⁠. 얼마야⁠?⁠”

동학은 대답을 못 했다⁠. 값을 정하지 않고 왔다⁠. 오십육 년 동안 값은 기획실이 정했고⁠, 동학은 정해진 값을 보고받았다⁠.

“⁠사장님이 정하시오⁠.⁠”

“⁠뭐⁠?⁠”

“⁠이 동네에서 이걸 얼마면 사겠소⁠?⁠”

사장이 돋보기 너머로 동학을 노려보았다⁠. “⁠육 과장⁠, 너 진짜 어디 아프지⁠? 십구 년 동안 한 번도 나한테 값을 물은 적이 없어⁠.⁠”

“⁠이번에 처음 묻소⁠.⁠”

“⁠천오백 원⁠.⁠” 사장이 봉지를 계산대 앞 선반에 세웠다⁠. 지난번 웨하스를 올려 둔 바로 옆자리였다⁠. “⁠천오백 원이면 노인네들이 손주 하나씩 사 준다⁠. 이천 원이면 안 사⁠. 그리고 하나 더⁠. 봉지에 날짜가 너무 짧다⁠. 11월 4일이 뭐야⁠. 다음엔 길게 찍어 와⁠.⁠”

“⁠날짜는⁠…⁠… 사정이 있어서⁠.⁠”

동학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만세슈퍼 · 보리별 · 1⁠」 아래에 적었다⁠. 「⁠천오백 원 · 날짜 길게⁠」⁠.

금요일 하루 동안 동학은 열네 곳을 돌았다⁠. 상봉동 골목 끝 대박슈퍼의 젊은 사장은 봉지를 보자마자 휴대전화부터 꺼내 사진을 찍었다⁠.

“⁠형님⁠, 이거 요즘 레트로로 팔면 터져요⁠. 할머니 과자 감성⁠. 인스타에 올리면 애들이 이거 사러 와요⁠.⁠” 사장이 사진을 이리저리 돌렸다⁠. “⁠봉지 진짜 촌스럽다⁠. 완벽해요⁠.⁠”

“⁠촌스러우면 좋은 거요⁠?⁠”

“⁠요즘은 촌스러운 게 제일 비싸요⁠.⁠”

중화동 시장 입구의 할머니 슈퍼는 봉지를 뜯어 하나를 먹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딱딱해⁠. 이가 안 들어가⁠.⁠” 동학은 봉지를 도로 받아 들었다⁠. 침으로 녹여 먹던 만세슈퍼 영감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이가 안 들어간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메모장에는 열한 줄이 생겼다⁠. 동학은 은색 경차 운전석에서 열한 줄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슈퍼 이름⁠, 몇 상자⁠, 사장이 한 말 한 줄⁠. 회장실에 앉아 있을 때 동학에게 올라오던 보고서에는 사장이 한 말 한 줄이 없었다⁠.

*

구동학은 저녁 여섯 시⁠, 신경과 대기실 의자에서 순정 옆에 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저녁 뉴스 예고가 흘렀다⁠. 「⁠출생아 수 또 역대 최저 · 아동 식품 시장 축소 우려⁠」⁠. 동학은 자막을 읽고 휴대전화 메모장을 내려다보았다⁠. 열한 줄은 텔레비전 자막 한 줄보다 짧아 보였다⁠.

“⁠육현배 님⁠.⁠”

의사는 동학의 머리 사진을 화면에 띄우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깨끗하신데요⁠. 뇌 나이로 치면 서른다섯쯤이에요⁠. 운동을 하세요⁠?⁠”

“⁠계단을 두 칸씩 뜁니다⁠.⁠”

“⁠좋네요⁠.⁠” 의사가 순정에게 돌아앉았다⁠. “⁠보호자분⁠, 남편분 어디가 걱정되세요⁠?⁠”

“⁠말투요⁠.⁠” 순정이 바로 답했다⁠. “⁠갑자기 저를 새댁이라고 불러요⁠. 한자로 된 신문을 읽고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베란다에서 맨손 체조를 해요⁠. 원래 일곱 시 반에 제가 세 번 깨워야 일어나는 사람이에요⁠.⁠”

의사가 동학을 보았다⁠. 동학은 의사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다 좋은 버릇인데요⁠.⁠”

“⁠그러니까 이상하죠⁠!⁠”

*

구동학은 밤 열 시⁠, 식탁 위에 보리별 한 봉지를 올려놓았다⁠. 다솔은 잠들었고⁠, 순정은 설거지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벗던 참이었다⁠. 신경과에서 돌아오는 내내 순정은 말이 없었다⁠.

“⁠의사가 멀쩡하대잖아⁠.⁠” 동학이 먼저 말했다⁠.

“⁠멀쩡하니까 더 화가 나⁠.⁠” 순정이 고무장갑을 개수대에 던졌다⁠. “⁠멀쩡한 사람이 왜 위로금을 차⁠? 회장님한테 다시 가⁠. 가서 넣어 달라고 해⁠. 나 빼 달라고 한 거 없던 걸로 해 달라고⁠.⁠”

“⁠마감 지났어⁠.⁠”

“⁠회장님이 빼 줬으면 넣어 줄 수도 있겠지⁠!⁠” 순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다솔의 방문을 보고 확 낮아졌다⁠. “⁠칠천이야⁠. 두 달 남았어⁠. 나 반찬가게에서 한 달에 백팔십 받아⁠. 당신 월급은 회사 문 닫으면 끝이야⁠. 부회장이 그랬다며⁠, 삼 년⁠.⁠”

“⁠삼 년이면 길다⁠.⁠”

“⁠애 키우는 집에 삼 년은 내일이야⁠.⁠”

동학은 대답하지 못했다⁠. 1998년⁠, 아내 차옥분이 공장에서 돌아와 사흘 동안 밥을 안 먹던 부엌이 떠올랐다⁠. 아내도 이렇게 고무장갑을 던졌다⁠. 동학은 자기가 무슨 말로 대답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대답을 안 했는지도 몰랐다⁠.

순정이 식탁 위 봉지를 보았다⁠. “⁠이건 또 뭐야⁠?⁠”

“⁠회사에서 다시 만든 과자⁠.⁠”

순정이 봉지를 집어 들었다가 손을 멈췄다⁠. 노란 종이에 빨간 별 하나⁠. 순정은 봉지를 뜯지 않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뜯어 별 하나를 꺼내 깨물었다⁠. 바삭 소리가 부엌에 크게 울렸다⁠.

순정이 씹다가 멈췄다⁠. 눈가가 붉어졌다⁠.

“⁠우리 아빠 가게에 있던 거다⁠.⁠”

동학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면목동 시장 뒤에 고씨상회라고 있었어⁠. 구멍가게⁠. 내가 열두 살 때까지 이거 팔았어⁠.⁠” 순정이 남은 반쪽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계산대 옆에 이 노란 봉지를 쌓아 놨거든⁠. 아빠가 나 숙제하면 하나 주고⁠, 받아쓰기 백 점 맞으면 두 개 줬어⁠. 어느 날 영업 아저씨가 와서 이제 안 나온다고 하더라⁠. 1998년⁠. 아빠가 아저씨한테 소주 한 병 사 줬어⁠. 둘이 가게 앞 평상에서 그거 다 마셨어⁠.⁠”

“⁠아버님은⁠…⁠…⁠.⁠”

“⁠가게는 2004년에 닫았어⁠. 길 건너에 대형마트 생기고⁠.⁠” 순정이 웃었다⁠. 웃는데 눈이 젖어 있었다⁠. “⁠그 아저씨가 가게 닫는 날 또 왔어⁠. 이제 동학 과자 영업도 안 하면서⁠. 아빠한테 남은 웨하스 두 상자 사 가더라⁠. 아빠가 그거 오래 얘기했어⁠. 동학 사람들은 의리가 있다고⁠.⁠”

동학은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과장의 손이었다⁠. 손톱 밑에 아직 조청이 남아 있었다⁠. 고씨상회에 드나든 영업 아저씨가 누구였는지 동학은 몰랐다⁠.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이거 다시 팔아⁠?⁠” 순정이 봉지를 흔들었다⁠.

“⁠팔 거야⁠.⁠”

“⁠팔면 나 하나 산다⁠.⁠” 순정이 봉지 입구를 돌돌 말아 접었다⁠. “⁠그래도 칠천은 넣어 와⁠. 이 과자랑 칠천이랑은 따로야⁠.⁠”

“⁠알았다⁠.⁠”

“⁠알았다⁠?⁠” 순정이 동학을 빤히 보았다⁠. “⁠당신⁠, 진짜 누구야⁠?⁠”

*

육현배는 10월 23일 토요일 아침⁠, 평창동 회장 집 거실에서 컵라면에 김치를 얹어 먹고 있었다⁠. 회장의 몸은 라면 국물을 반기지 않았다⁠. 혀가 짠맛에 움찔거렸고 틀니 사이로 면발이 자꾸 끼었다⁠. 그래도 현배는 먹었다⁠. 두부와 요구르트로 일주일을 버틴 끝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허기성이 서류 봉투와 돋보기 하나를 들고 현관에 서 있었다⁠.

“⁠회장님⁠, 주총 자료 가져왔습니다⁠. 주주 명단이랑 우리사주 조합 현황이요⁠. 돋보기는 새것으로⁠…⁠…⁠.⁠” 비서가 거실 탁자의 컵라면을 보았다⁠. 말이 끊겼다⁠.

“⁠들어와⁠. 하나 더 끓여 줘⁠?⁠”

비서는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 문턱에 선 채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를 열었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회장님⁠, 제가 삼 년 동안 회장님 하신 말씀을 다 적어 왔는데요⁠.⁠” 비서가 화면을 읽었다⁠. “⁠「⁠라면은 사람 먹을 게 못 된다⁠」⁠. 2025년 3월⁠. 「⁠직원 안부는 인사팀이 묻는 거다⁠」⁠. 작년 가을⁠.⁠”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난주부터 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메모랑 하나도 안 맞습니다⁠.⁠”

현배는 라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국물 한 방울이 회장의 조끼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래서⁠…⁠… 회장님⁠, 아니시죠⁠?⁠”

현관에 찬 바람이 들어왔다⁠. 현배는 비서의 얼굴을 보았다⁠.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도망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누구면 좋겠는데⁠?⁠”

“⁠모르겠습니다⁠.⁠” 비서가 침을 삼켰다⁠. “⁠저 사실 부회장님한테 회장님 하루를 날마다 보고드려요⁠. 몇 시에 일어나셨는지⁠, 누구를 만나셨는지⁠. 부회장님이 시키셨어요⁠. 회장님 건강 때문에요⁠.⁠” 비서가 휴대전화를 내렸다⁠. “⁠어제 보고에는 회장님이 라면 드셨다는 거 안 썼습니다⁠. 오늘도 안 쓸 거고요⁠.⁠”

“⁠왜⁠?⁠”

“⁠회장님이 지난주 회식 다음 날 아침에 제 이름을 물으셨잖아요⁠. 삼 년 모셨는데 처음 물어보셨어요⁠.⁠” 비서가 서류 봉투를 신발장 위에 내려놓았다⁠. “⁠누구시든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비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현배는 신발장 위 봉투를 열었다⁠. 맨 위 장에 「⁠우리사주 조합 · 지분 6% · 조합원 412명⁠」이 박혀 있었다⁠. 현배는 새 돋보기를 코에 걸었다⁠. 숫자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

육현배는 10월 24일 일요일 저녁 일곱 시⁠, 평창동 회장 집 식탁에 성준과 마주 앉아 있었다⁠. 식탁은 여덟 사람이 앉는 크기였고 두 사람이 앉으니 양 끝이 휑했다⁠. 성준이 마트 봉투에서 두부조림과 시금치나물⁠, 갈치구이를 꺼내 놓았다⁠. 반찬통 뚜껑마다 반찬가게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냉장고에 두부랑 요구르트밖에 없으실 것 같아서요⁠.⁠” 성준이 젓가락을 놓았다⁠. “⁠일요일에 오는 건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입니다⁠.⁠”

현배는 갈치 살을 발랐다⁠. 회장의 손가락이 생선 가시를 아주 잘 골랐다⁠. 손은 오십 년 동안 갈치를 먹은 손이었다⁠.

“⁠무슨 일로 왔냐⁠.⁠”

“⁠주총 앞두고 한 번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회사에서는 못 할 얘기라서⁠.⁠”

성준이 밥을 한 숟가락 떴다가 내려놓았다⁠. 은테 안경을 벗어 식탁에 놓자 얼굴이 몇 살은 젊어 보였다⁠.

“⁠은행 빚에 제 집을 걸었습니다⁠. 연대보증이요⁠. 작년 봄에 공장 설비 대출 한도를 늘릴 때 은행이 대표이사 말고 한 사람 더 서라고 해서요⁠. 회장님 연세가 많으셔서⁠.⁠”

현배는 젓가락을 쥔 채 굳었다⁠.

“⁠공장 안 팔고 삼 년 버티다 문 닫으면 저희 집이 먼저 나갑니다⁠. 아내는 아직 몰라요⁠.⁠” 성준이 시금치나물 통을 현배 앞으로 밀었다⁠. “⁠이 얘기 하는 건⁠, 제가 집 때문에 판다고 생각하실까 봐서요⁠. 그래서 그동안 안 했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요즘 저를 보시는 눈이 꼭 남 보시는 눈 같아서요⁠.⁠”

현배는 성준의 얼굴을 보았다⁠. 안경을 벗은 마흔아홉 살 남자의 눈가에 피곤이 고여 있었다⁠. 현배는 아버지의 몸으로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회장이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열흘 동안 지켜본 회장은 이럴 때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애 아빠로서 그 마음은 나도 알아⁠.⁠” 현배가 말했다⁠.

성준이 눈을 들었다⁠. “⁠네⁠?⁠”

“⁠아니⁠, 애 아빠였던 사람으로서⁠.⁠”

성준이 잠깐 웃었다⁠. 오 년 만에 처음 본 웃음이라는 것을 현배는 몰랐지만⁠, 성준은 웃고 나서 스스로 놀란 얼굴로 안경을 다시 썼다⁠.

“⁠주총에서 반대하셔도 됩니다⁠. 회장님 지분이니까요⁠. 다만 반대하시면 제 집이랑 공장 사람 삼백 중에 하나를 고르시는 거라는 건 알고 하셨으면 해서요⁠.⁠” 성준이 젓가락을 들었다⁠. “⁠식겠습니다⁠. 드세요⁠.⁠”

현배는 갈치를 한 점 집었다⁠. 회장의 혀는 생선 살의 단맛을 정확히 알았고⁠, 현배의 혀는 한 번도 갈치를 그렇게 알아본 적이 없었다⁠. 맞은편에서 성준이 말없이 두부조림을 먹었다⁠. 둘이 앉은 여덟 자리 식탁 위에서 젓가락 소리만 오래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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