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92자)

안성 공장

잘리기 전날 회장님 몸에 빙의 · 남이랑

구동학은 10월 21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 과장의 은색 경차를 몰고 안성 공장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는 것은 이십 년 만이었다⁠. 계기판 옆에 붙은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탐색 좀 그만해⁠.⁠” 동학이 화면에 대고 말했다⁠. “⁠내가 지은 공장이야⁠. 눈 감고도 간다⁠.⁠”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안성 가는 길에 동학은 휴게소에 두 번 들렀다⁠. 처음에는 화장실 때문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였다⁠. 여든한 살 몸은 아침에 죽 반 그릇이면 저녁까지 갔는데⁠, 마흔두 살 몸은 아침밥 두 그릇을 먹고도 한 시간 만에 꼬르륵거렸다⁠. 동학은 꼬치에 떡과 소시지를 번갈아 꿴 간식을 두 개 사서 하나는 걸으며 먹고 하나는 차에서 먹었다⁠. 두 번째 휴게소에서는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서 반을 갈라 속을 들여다보았다⁠. 팥이 가장자리까지 꽉 차 있었다⁠. 동학은 호두과자 봉지 뒷면의 회사 이름을 한참 읽었다⁠. 휴게소 매대 맨 앞줄은 남의 회사 과자로 꽉 차 있었다⁠.

정문 경비가 차창을 두드렸다⁠. 동학은 사원증을 내밀었다⁠. 경비는 사진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사원증 속 현배는 머리숱이 많았다⁠.

공장 건물은 1988년에 지은 그대로였다⁠. 붉은 벽돌 벽에 「⁠동학제과 안성공장⁠」 글자가 붙어 있었는데⁠, ‘⁠성⁠’ 자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가 「⁠안서공장⁠」으로 읽혔다⁠. 동학은 차를 세우고 한참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받침은 언제 떨어졌을까⁠. 공장장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공장장이 말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동학이 물은 적이 없었다⁠.

시험 생산실은 본관 뒤 작은 건물에 있었다⁠. 문을 열자 조청 졸이는 냄새가 훅 끼쳤다⁠. 엿기름과 보리가 함께 탄 듯한 냄새⁠, 1974년 을지로 골목 화덕 앞에서 맡던 냄새였다⁠. 커다란 구리 솥 앞에서 위생모를 쓴 반장이 나무 주걱을 젓고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영업부 육 과장입니다⁠. 보리별 남은 게 있다고 해서⁠.⁠”

“⁠영업부가 여긴 웬일이에요⁠.⁠” 반장이 주걱을 놓지 않았다⁠. “⁠한 솥 다 포장해서 상자 스무 개 남았어요⁠. 지난주에 회장님 회식 자리에 나간 것도 이 솥에서 나간 거고요⁠. 같은 솥이에요⁠.⁠”

“⁠누가 만들라고 했소⁠?⁠”

“⁠위에서요⁠. 누군지는 말하지 말래요⁠.⁠” 반장이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저거 보고 만들었어요⁠.⁠”

벽 선반에 누렇게 바랜 공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동학은 공책 앞으로 갔다⁠. 파란 볼펜 글씨가 기울어 있었다⁠. 「⁠조청은 손가락에 묻혀 실이 세 번 끊기면 내린다⁠」⁠.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영감은 불을 세게 한다⁠. 말려야 한다⁠」⁠.

동학은 공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아내 차옥분의 글씨였다⁠. 영감이라는 말 옆에 작게 그린 화난 얼굴까지 아내의 것이었다⁠.

“⁠과장님⁠?⁠”

“⁠불이 세요⁠.⁠” 동학이 솥을 가리켰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거품이 가장자리부터 올라오면 불을 줄여야 해요⁠. 지금은 가운데부터 올라오잖소⁠.⁠”

반장이 솥과 동학을 번갈아 보았다⁠. 주걱이 멈췄다⁠.

“⁠영업부 과장님이 조청을 어떻게 알아요⁠?⁠”

“⁠책에서 봤소⁠.⁠”

“⁠무슨 책이요⁠?⁠”

동학은 대답 대신 상자 스무 개를 차에 실었다⁠. 마지막 상자를 실을 때 반장이 쫓아 나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공책 첫 장을 복사한 종이였다⁠. 반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동학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

육현배는 오후 한 시⁠, 포장 라인 한가운데 서 있었다⁠. 회장의 무릎이 콘크리트 바닥 냉기를 그대로 받아 시큰거렸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꿀호박칩 봉지가 줄지어 흘러갔고⁠, 흰 위생복에 위생모를 쓴 직원 백여 명이 라인을 멈추고 회장을 둘러쌌다⁠.

비서 허기성이 귓속말을 했다⁠. “⁠회장님⁠, 그건⁠…⁠… 대표이사가 아니시라 공장 직원 소집은 원래⁠…⁠…⁠.⁠”

“⁠소집 아니야⁠. 인사하러 온 거야⁠.⁠” 현배는 손에 쥔 확성기를 들었다⁠. 공장 방송실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아이고⁠, 여러분⁠!⁠”

확성기에서 삐 소리가 났다⁠. 맨 앞줄 직원 몇이 귀를 막았다⁠.

“⁠아이고 여러분⁠, 얼굴들이 다 좋으십니다⁠. 점심은 드셨어요⁠? 여기 식당 제육이 맛있다면서요⁠.⁠” 현배는 저도 모르게 슈퍼 문을 열 때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안성 공장⁠, 안 팝니다⁠. 제가⁠, 아니 내가 주총에서 막습니다⁠.⁠”

박수가 반쯤 나오다 멈췄다⁠. 직원들이 서로를 보았다⁠. 맨 앞줄의 쉰 줄 남자 반장이 손을 들었다⁠.

“⁠회장님⁠, 안 팔면 위로금은요⁠?⁠”

현배는 확성기를 든 채 굳었다⁠.

“⁠저 내년에 정년이에요⁠. 지금 나가면 위로금이 이 년 치고⁠, 안 나가고 정년 채우면 퇴직금만 나와요⁠. 저는 나가고 싶은데요⁠.⁠” 반장 뒤에서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몇은 반장을 노려보았다⁠. “⁠회장님은 우리가 다 남고 싶은 줄 아세요⁠?⁠”

라인 저 끝에서 누군가 외쳤다⁠. “⁠난 남을 거야⁠! 애가 고등학생이야⁠!⁠”

“⁠나는 무릎이 나갔어⁠. 위로금 받고 나갈 거야⁠!⁠”

“⁠그럼 너 혼자 나가⁠!⁠”

포장 라인이 웅성거렸다⁠. 현배는 확성기를 내렸다⁠. 십구 년 동안 슈퍼 사장들은 한 번도 한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공장도 그랬다⁠. 현배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정문에서 셔터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흰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태블릿을 들고 줄지어 들어왔다⁠. 맨 앞에 구성준이 있었고⁠, 성준 옆에 은발을 짧게 깎은 남자가 탄산수 병을 들고 걸었다⁠. 하버라인 캐피털 한국 대표였다⁠.

“⁠회장님⁠, 여기 계셨네요⁠.⁠” 성준이 다가왔다⁠. 방진복 모자 아래로 은테 안경이 번들거렸다⁠. “⁠실사는 이사회 결정입니다⁠. 공장을 다 보여 드려야 값이 나옵니다⁠.⁠”

“⁠못 봐⁠. 나가⁠.⁠”

하버라인 대표가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회장님⁠, 팩트로 가시죠⁠.⁠” 대표가 태블릿으로 포장 기계를 비췄다⁠. “⁠이 라인은 로봇 팔 두 대로 바뀝니다⁠. 지금 서른 명이 하는 일을요⁠. 로봇은 위로금도 안 받고⁠, 정년도 없어요⁠.⁠”

현배는 포장 기계 앞으로 가서 팔을 벌렸다⁠. 회장의 팔은 짧고 가늘어서 기계의 반도 못 가렸다⁠. 그래도 벌렸다⁠. 남자 반장이 한숨을 쉬더니 현배 옆으로 와서 팔을 벌렸다⁠. 고등학생 아이가 있다던 직원도 왔다⁠. 무릎이 나갔다던 직원은 오지 않았다⁠. 팔을 벌린 사람이 열둘이 되었다⁠.

성준은 방진복 모자를 벗었다⁠. 직원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여러분⁠, 저 구성준입니다⁠. 회장님이 지금 여러분 손을 잡으시면 삼 년 뒤에 여러분 옆 사람⁠, 그 옆 사람⁠, 본사 사람까지 육백 명 손을 놓으셔야 합니다⁠. 제가 드린 숫자가 틀렸으면 지금 누구든 말씀해 주세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만 빈 채로 돌았다⁠.

“⁠위로금은 약속드린 대로 드립니다⁠. 이 년 치요⁠. 남으시는 분 자리는 제가 지킵니다⁠.⁠” 성준이 하버라인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실사는 다음 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은 회장님 손님이 계시니까요⁠.⁠”

실사단이 줄지어 나갔다⁠. 하버라인 대표가 문 앞에서 돌아보며 탄산수 병을 흔들었다⁠. 현배는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내릴 때를 놓친 팔이었다⁠. 옆의 남자 반장이 먼저 팔을 내렸다⁠.

“⁠회장님⁠, 팔 내리세요⁠. 저 위로금 받을 거지만⁠, 오늘은 같이 벌려 드린 거예요⁠.⁠”

*

육현배는 오후 세 시 반⁠, 공장 휴게실 소파에서 고개를 떨군 채 깼다⁠. 회장의 몸은 공장에 와서도 세 시를 잊지 않았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는데 자판기 커피 한 잔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성준이었다⁠. 방진복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은 채⁠, 혼자였다⁠.

“⁠설탕 두 개 넣었습니다⁠. 회장님 늘 그렇게 드시죠⁠.⁠”

현배는 종이컵을 받았다⁠. 너무 달았다⁠. 회장은 이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아까는 보기 좋았어요⁠.⁠” 성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팔 벌리신 거요⁠. 이십 년 전에 하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십 년 전⁠?⁠”

“⁠1998년이요⁠. 보리별 라인 닫을 때 백 명 넘게 내보냈잖아요⁠. 회장님은 그때 은행에 계셨고요⁠. 공장엔 어머니하고 제가 왔습니다⁠. 저 스무 살이었어요⁠.⁠” 성준이 자판기 불빛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머니가 봉투를 한 사람씩 나눠 드렸어요⁠. 봉투 하나 드릴 때마다 고개를 숙이셨고⁠, 백 번 숙이셨어요⁠. 저는 옆에서 봉투만 들고 있었고요⁠. 그날 저녁에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다음엔 숫자를 미리 봐서 이런 날을 만들지 말라고⁠.⁠”

현배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컵이 손바닥을 데웠다⁠.

“⁠그래서 숫자를 봅니다⁠. 삼 년 뒤에 어머니가 했던 일을 제가 육백 번 하지 않으려고요⁠.⁠” 성준이 일어났다⁠. “⁠회장님은 그날 얘기를 한 번도 안 하셨죠⁠. 오늘도 안 하실 거고요⁠.⁠”

성준이 휴게실을 나갔다⁠. 현배는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바닥에 녹지 않은 설탕이 깔려 있었다⁠. 회장의 혀는 설탕 단맛을 반가워했고⁠, 현배는 반가워하는 혀가 낯설었다⁠.

*

육현배는 해가 질 무렵 공장 주차장에서 제 은색 경차를 찾아냈다⁠. 트렁크에 보리별 상자가 가득 실려 있었고⁠, 운전석에 제 몸이 앉아 있었다⁠. 회장은 차창을 내리고 복사한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현배는 무릎을 짚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이 이렇게 좁은 줄 몰랐다⁠. 회장의 몸으로 앉으니 다리가 남았다⁠.

현배는 뒤를 돌아보았다⁠. 뒷좌석부터 트렁크까지 노란 봉지가 비치는 상자들이 들어차 있었다⁠.

“⁠저건 다 어디 쓰시게요⁠?⁠”

“⁠보리별 스무 상자⁠. 내일부터 면목동 돈다⁠. 만세슈퍼에서 가져오면 받는다고 했어⁠.⁠”

“⁠같은 솥 거잖아요⁠. 누가 둘이 같이 깨물었다가 또 바뀌면요⁠?⁠”

“⁠그러니까 한 사람한테 한 봉지씩만 판다⁠. 둘이 손잡고 오는 사람들한테는 안 팔아⁠.⁠” 회장이 백미러를 고쳤다⁠. “⁠그리고 내일은 새댁이 신경과 가재⁠. 네 머리 사진을 찍는단다⁠.⁠”

“⁠제 머리는 멀쩡하게 찍혀야 해요⁠. 회장님 생각이 찍히면 큰일 납니다⁠.⁠”

“⁠생각이 사진에 찍히냐⁠?⁠”

“⁠요즘 기계는 다 찍어요⁠.⁠”

“⁠포장 라인에 계셨어요⁠?⁠” 현배가 물었다⁠.

“⁠뒤에서 봤다⁠.⁠” 회장이 종이를 접었다⁠. “⁠확성기는 왜 들고 갔냐⁠. 공장 사람들은 확성기를 싫어해⁠. 사고 날 때만 들으니까⁠.⁠”

“⁠그것도 몰랐네요⁠.⁠”

“⁠나도 몰랐다⁠. 오늘 알았어⁠.⁠” 회장이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반장 말 들었지⁠. 나가고 싶은 사람도 있어⁠. 남고 싶은 사람도 있고⁠. 숫자로는 성준이가 맞다⁠. 공장 기계가 낡았고⁠, 사 줄 애들이 줄었어⁠. 오십육 년 동안 과자를 판 내가 하는 말이다⁠.⁠”

“⁠부회장님이 1998년 얘기를 하던데요⁠. 사모님이 봉투를 나눠 주셨다고⁠.⁠”

회장의 손이 운전대 위에서 멈췄다⁠. 한참 뒤에야 손이 다시 운전대를 쓸었다⁠.

“⁠그날 나는 은행에서 빚을 미루고 있었다⁠. 그것도 일이었어⁠.⁠” 회장이 말했다⁠. “⁠집사람이 다녀와서 밥을 안 먹더라⁠. 사흘을⁠.⁠”

현배는 회장의 손을 보았다⁠. 현배의 손이었다⁠. 손톱 밑에 조청이 까맣게 끼어 있었다⁠.

“⁠그럼 왜 과자를 다시 만들었어요⁠?⁠” 현배가 물었다⁠. “⁠팔 공장인데⁠. 나갈 사람들한테 줄 거면 수건이나 상품권이나⁠. 왜 하필 옛날 과자를 한 솥 다시 쪄서⁠, 회식 자리까지 들고 왔어요⁠?⁠”

회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앞 유리 너머로 「⁠안서공장⁠」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받침 빠진 자리만 어두웠다⁠.

“⁠먹고 싶어서⁠.⁠” 회장이 시동을 걸었다⁠. “⁠먹고 싶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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