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69자)

업고 올라온다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백해원

셀린은 칼띠에서 헌터 줄의 매듭을 풀었다. 매듭은 아침에 칼렌이 묶은 것이었는데, 너무 단단해서 손톱이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풀렸다. 셀린은 풀린 줄 끝을 하름에게 던졌다.

“하름, 노아 줄 옆에 이거 하나 더 내려. 내가 붙잡고 내려간다.”

“리더님이 내려가신다고요?”

칼렌이 단검을 칼집에 넣다 말고 물었다.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았다.

“리더가 짐꾼 따라 협곡 바닥으로 내려간다고요? 그럼 여긴 누가 지휘해요?”

“네가 해. 부리더잖아.”

“리더님이 저 밑에서 길을 잃으면요?”

셀린은 줄을 손에 감으며 잠깐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그게 제일 그럴듯한 걱정이었다.

“그래서 짐꾼 따라가는 거야. 앞에 짐꾼이 있어야 내가 길을 안 잃어.”

피나가 울다가 웃음이 터져서 콧물이 나왔다. 시오가 소매를 내밀었다. 피나는 시오의 소매에 코를 풀고, 그 소매를 노아가 내려간 줄 쪽으로 가리켰다. 빨리 가시라는 손짓이었다. 셀린은 줄을 잡고 바위 턱 밖으로 몸을 내렸다.

*

안개 속은 젖은 쇠 냄새가 더 짙었다. 줄을 따라 손을 바꿔 잡으며 내려가는 동안 셀린의 장갑이 축축해졌고, 협곡 벽의 이끼가 갑옷 무릎에 묻어 미끄러웠다. 위에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어느 순간 위의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아래의 소리만 들렸다. 물 흐르는 소리와, 멀리서 딸깍거리는 소리였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셀린은 넘어졌다.

머리 위에 솜이불이 내려앉았다. 44층에서 겪은 그 무게였다. 협곡 바닥은 아직 열리지 않은 47층의 일부였고, 탑은 거기서도 빈 몸을 눌렀다. 셀린은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버텼다. 버티는데 몸이 조금씩 아래로 접혔다. 칼을 바닥에 꽂아도 칼은 무게가 되어 주지 않았다. 칼은 손에 든 것이지 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셀린은 바닥을 더듬었다. 손에 머리통만 한 바위가 잡혔다. 셀린은 그 바위를 끌어당겨 가슴에 끌어안았다. 바위의 무게가 가슴을 누르자 머리 위의 솜이불이 반쯤 가벼워졌다. 셀린은 바위를 안은 채 일어섰다.

S급 헌터 셀린 바크가, 협곡 바닥에서, 바위를 아기처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리더님.”

안개 속에서 노아의 목소리가 났다. 다섯 걸음 앞이었다. 노아는 배낭을 진 채 바위 그늘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도르가 누워 있었다. 노아가 셀린의 품에 안긴 바위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의 입꼬리가 한 번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웃었지?”

“안 웃었습니다.”

“방금 입꼬리.”

“바람 때문입니다.”

*

도르는 왼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무릎 아래가 이상한 각도로 꺾였고, 도르는 그 다리를 보지 않으려고 하늘 쪽 안개만 보았다. 떨어지면서 배낭이 먼저 바위에 부딪쳤다. 배낭이 도르를 살렸다. 배낭 안의 물통 두 개가 터져 바닥이 젖어 있었다.

“짐승은?”

“저쪽으로 보냈습니다.”

노아가 협곡 안쪽을 가리켰다. 멀리서 맑은 쇳소리가 났다. 데구루루, 땡, 데구루루. 무언가가 바위에 부딪히며 계속 굴러가고 있었고, 딸깍거리는 소리가 그 쇳소리를 쫓아갔다.

“뭘 던졌는데?”

“부리더님 가슴판입니다. 제 배낭 밑에 있던 거요. 비탈 위에서 굴렸더니 한참 갑니다.”

셀린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바위를 안은 채로 웃어서 바위가 들썩였다. 금화 마흔 닢짜리 갑옷의 마지막 조각이 지금 소리 짐승 떼를 끌고 협곡 저편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칼렌이 알면 너 죽이려 들 거야.”

“이미 줄을 끊으셨습니다.”

웃음이 거기서 멎었다.

노아는 도르의 다리를 부목으로 고정했다. 배낭에서 여분의 칼날 두 개를 꺼내 다리 양쪽에 대고 붕대로 감았다. 도르가 이를 악물었고, 이 사이로 소 울음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셀린은 그 손을 잡아 주었다. 도르의 손은 셀린의 손보다 두 배 컸다.

“무겁다.”

도르가 말했다. 노아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안.”

“도르 씨는 서른 관도 안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열네 관짜리 소금 자루 두 개를 한 번에 졌습니다.”

“소금은…… 안 운다.”

“도르 씨도 지금 안 우시잖습니까.”

도르가 고개를 돌려 노아를 보았다. 그러고는 울었다. 슬픈 노래가 없어도 울었다.

*

문제는 짐이었다. 노아가 도르를 업으려면 자기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야 했다. 그러면 도르의 배낭이 남았다. 물통 두 개가 터졌어도 도르의 배낭에는 아직 밧줄과 마른 빵과 붕대가 열 관 넘게 들어 있었다.

“두고 갑니다.”

노아가 그렇게 말하리라고 셀린은 생각했다. 그런데 노아는 도르의 배낭을 내려다보며 다른 말을 했다.

“리더님, 이거 지실 수 있습니까?”

셀린은 품에 안은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바위를 내려놓았다. 머리 위의 솜이불이 다시 무거워졌다. 셀린은 무릎을 꿇은 채 도르의 배낭에 팔을 끼웠다.

끈이 꼬였다. 왼쪽 어깨끈이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갔고, 가슴끈은 등 뒤에서 잠겼다. 셀린이 끈을 당기자 배낭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셀린의 옆구리에 매달렸다. S급 헌터는 배낭과 씨름하며 바닥에 반쯤 엎어졌다.

“이거 왜 이래?”

“거꾸로 메셨습니다.”

“배낭에 앞뒤가 있어?”

“있습니다.”

노아가 다가와 끈을 풀고 다시 채웠다. 어깨끈 길이를 맞추고, 허리끈을 엉덩이뼈 위에 걸고, 가슴끈을 쇄골 아래에서 잠갔다. 마지막으로 어깨끈을 엄지로 한 칸 조였다. 셀린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바위 없이 섰다.

“이게 열 관이야?”

“열한 관입니다.”

셀린은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드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짐이 몸을 누르는데, 그 누르는 힘이 탑의 바람을 막았다. 짐꾼들은 열두 해 동안 셀린 앞에서 이 무게로 길을 찾았다.

노아는 도르를 등에 업고 자기 배낭을 가슴에 매달았다. 줄 두 가닥이 위에서 내려와 있었다. 노아가 줄을 두 번 당겼다. 위에서 줄이 팽팽해졌다. 하름의 손이었다. 하름의 손 뒤에 피나와 시오의 손이 있었다.

*

바위 턱 위로 올라오는 데 반 시간이 걸렸다. 노아가 도르를 업고 줄에 매달려 한 손씩 올라왔고, 위에서 넷이 줄을 당겼다. 칼렌은 줄을 잡지 않았다. 바위 턱 끝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노아는 도르를 업은 채 47층 표석까지 걸어갔다. 아무도 앞서 뛰지 않았다. 칼렌도 뛰지 않았다. 노아가 표석에 손을 얹자 흰 빛이 협곡을 따라 번졌고, 안개가 걷히면서 협곡 바닥이 처음으로 보였다.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사람 키 열 배쯤이었다. 바닥 한쪽에 은도금 조각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칼렌이 그 반짝임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노아를 돌아보았다.

“저거 내 가슴판이죠?”

“예.”

“짐꾼이 헌터 갑옷을 협곡에 던졌어요?”

“소리 짐승이 도르 씨 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쇠붙이 소리가 제일 멀리 갑니다. 부리더님 갑옷이 아르센에서 제일 좋은 소리를 냅니다.”

하름이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기침으로 끝나지 않고 어깨가 들썩였다. 칼렌이 하름을 쏘아보았다. 하름은 방패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무릎 보호대는 줄 끊을 때 떨어졌고, 가슴판은 짐꾼이 던졌고. 남은 건 어깨받이 둘에 팔 보호대 넷이네요. 그것도 짐꾼 배낭에 있죠?”

시오와 피나가 동시에 자기 배낭을 끌어안았다.

“심사 때 어깨받이만 차고 서실 수는 있습니다.”

노아가 말했다. 칼렌은 대답하지 않고 48층 계단으로 먼저 올라갔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아까보다 컸다.

48층은 계단을 오르자마자 끝났다. 바닥이 없었다. 계단 끝에서 돌다리 하나가 허공을 가로질러 건너편 표석까지 놓여 있었다. 다리 입구에 커다란 돌 저울이 박혀 있었고, 저울 눈금 위에 흰 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루카가 저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한 번에 이 금 넘는 무게가 올라가면 다리가 가라앉는대요. 지난 시즌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칼렌이 다리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다친 짐꾼은 여기 둡니다.”

노아가 걸음을 멈췄다. 도르가 노아 등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르 씨를 업으면 제 무게가 금을 넘는다는 말씀입니까?”

“넘죠. 짐꾼 하나에 짐꾼 하나에 배낭까지. 다리가 가라앉으면 건너편에 먼저 간 사람들도 다 끝이에요. 다친 짐꾼은 여기 계단에 두고, 내려갈 때 데려가면 돼요.”

“내려갈 때까지 혼자 둡니까? 소리 짐승이 있는 층 바로 위에요?”

“47층은 열렸잖아요. 짐꾼이 열었다면서요.”

칼렌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줄을 끊은 손의 미안함이 하나도 없었다.

셀린이 칼렌 앞으로 나섰다. 도르의 배낭을 진 채였다. 끈이 어깨를 누르는 걸 느끼며 셀린은 칼렌을 내려다보았다. 셀린이 칼렌보다 작았는데, 지금은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칼렌, 비켜.”

“리더님, 파티 규약에 있어요. 부상자가 파티 전체를 위험하게 하면 부리더가 판단해 둘 수 있다고요.”

“그 규약 맨 앞줄에는 리더 명령이 먼저라고 적혀 있어.”

“그 명령이 틀리면요?”

“그럼 길드에 올려. 네 승급 심사 서류에 같이 끼워서.”

셀린은 칼렌의 어깨를 밀고 다리 입구에 섰다. 그러고는 저울을 보았다.

“노아는 도르만 업고 건너. 노아 배낭은 내가 앞에 멘다. 나 혼자 두 개 지고 먼저 건너고, 그다음 네가 건너. 그러면 금 안 넘어.”

“리더님이 짐꾼 배낭 두 개를요?”

“한 개는 이미 지고 있잖아.”

칼렌은 비켰다. 비키면서 셀린의 귀에만 들리게 말했다.

“오늘 일은 다 보고서에 올라갈 거예요.”

“올려. 글씨 예쁘게 써.”

*

셀린이 배낭 두 개를 앞뒤로 메고 다리를 건넜다. 두 번 길을 잘못 들 뻔했다. 다리는 한 줄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노아가 도르를 업고 그 뒤를 건넜고, 짐꾼과 헌터들이 한 사람씩 건넜다.

건너편 표석 앞에서 셀린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멈췄다. 그러고는 피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얹어.”

“제가요? 저 짐꾼인데요?”

“그러니까.”

피나가 표석 앞에 섰다.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노아를 한 번 보고, 다시 올렸다. 헌터 시험에 두 번 떨어진 손이었다. 손바닥이 표석에 닿자 피나가 작게 말했다.

“따뜻해요.”

물과 붕대가 다 떨어져, 백야는 거기서 다시 내려왔다. 30층 하역장에 닿은 것은 이틀 뒤 저녁이었다. 엘리베이터 쇠문이 열리자 석탄 연기 너머로 붉은 제복이 보였다. 왕실 병사 넷이 하역장 기둥마다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풀 냄새가 석탄 냄새를 이겼다. 종이 맨 위에 굵은 글씨가 있었다.

「짐꾼 등반 금지령 — 왕실 탑 감독관 오스왈드.」

병사 하나가 도르를 업은 노아를 보더니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엘리베이터 쇠문에 붙였다. 풀이 마르기 전이라 종이 끝이 노아 쪽으로 펄럭였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업고 올라온다 ·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