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70자)
S급은 길을 모른다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백해원
셀린 바크는 열여섯 살에 처음 탑에 들어갔다. 그날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지 못해 반나절을 헤맸고, 결국 다른 파티의 짐꾼이 셀린의 소매를 잡아 계단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짐꾼은 셀린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셀린도 짐꾼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열두 해가 지나 S급이 되는 동안 셀린은 탑에서 한 번도 혼자 길을 찾지 않았다. 늘 누군가 앞에 있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셀린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46층의 마지막 얼음 계단 위에서, 셀린은 앞에 선 짐꾼의 등을 보며 그 생각을 했다.
노아 렌의 배낭은 아침보다 낮게 메여 있었다. 엉덩이 바로 위까지 내려온 배낭 밑동이 걸음마다 노아의 허리를 받쳤다. 얼음 계단에서 노아는 발을 들지 않았다. 신발 바닥으로 얼음을 밀듯이 올라갔고, 뒤의 짐꾼 셋이 그 발자국을 그대로 밟았다. 넷이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계단 끝 표석까지 서른 걸음이 남았을 때 칼렌이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 만에 미끄러졌다. 칼렌은 엉덩이로 얼음 계단 열두 칸을 도로 내려왔다. 계단 한 칸마다 엉덩이가 얼음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퍽, 퍽, 퍽. 시오가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시작하려다 피나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셀린은 칼렌을 지나 표석까지 걸어 올라갔다. 노아는 표석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옆으로 비켜섰다. 셀린이 손을 얹었다. 표석은 사람 체온만큼 따뜻했다. 처음 알았다. 열두 해 동안 표석에 손을 얹으면서 셀린은 돌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빛이 층에 번지는 동안 셀린은 손을 떼지 않고 물었다.
“왜 비켰어? 기록 가지고 싸운다며.”
“기록은 칼렌 부리더님하고 싸웁니다. 리더님하고는 안 싸웁니다.”
“나도 헌터야.”
“리더님은 이번 시즌에 아직 한 층도 직접 안 여셨습니다. 44층은 끌려오셨고, 45층은 부리더님이 뛰셨습니다.”
셀린은 표석에서 손을 뗐다. 칭찬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뒤에서 칼렌이 얼음에 젖은 엉덩이를 털며 올라왔고, 하름은 그 엉덩이를 보지 않으려고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볼 것이 없었다. 하름은 오래 천장을 보았다.
*
47층은 젖은 쇠 냄새가 났다. 비 온 뒤 녹슨 철문을 핥으면 이런 맛일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서자 발밑으로 바닥이 끝나고, 협곡이 시작되었다. 협곡은 깊었다. 안개가 아래를 덮고 있어서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었다. 협곡 왼쪽 벽을 따라 사람 둘이 겨우 나란히 설 만한 바위 턱이 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노아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입 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지난밤 야영지에서 노아는 짐꾼들의 배낭 끈에 돼지기름을 먹였다. 고리마다, 버클마다, 끈이 쇠에 닿는 곳마다 손가락으로 기름을 밀어 넣었다. 칼렌이 짐꾼 냄새 난다고 투덜댔지만 노아는 대꾸하지 않고 헌터들 쪽으로도 기름 단지를 내밀었다. 하름만 받았다. 셀린은 받지 않았다. S급 갑옷에 돼지기름을 바르는 헌터는 없었다.
이제 셀린은 그걸 후회했다. 바위 턱을 걸을 때마다 셀린의 가죽 갑옷이 삐걱였다. 앞의 짐꾼 넷은 소리가 없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걷는 짐꾼들이 고양이처럼 조용했고, 짐 없는 헌터들이 소달구지처럼 시끄러웠다.
안개 속 어딘가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돌 두 개를 맞부딪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다음엔 오른쪽 아래에서, 그다음엔 머리 위에서. 소리가 협곡 벽에 부딪혀 사방에서 되돌아왔다.
노아가 손가락 셋을 접었다가 폈다. 세 마리라는 뜻이라고, 셀린은 짐작했다. 아니면 서른 마리일 수도 있었다.
안개가 한 번 갈라지면서 그것이 보였다. 몸통은 늑대만 했고, 다리는 거미처럼 길었고, 머리에는 눈이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귀가 꽃잎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그 귀들이 셀린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셀린의 갑옷이 또 삐걱였다. 셀린은 숨을 멈췄다.
그 순간 앞에서 노아가 몸을 돌렸다. 노아는 소리 없이 셀린의 팔을 잡아 바위 벽 쪽으로 붙였다. 셀린은 자기가 바위 턱 바깥쪽, 안개 쪽으로 반 걸음 나가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길이 꺾이는 데서 셀린 혼자 똑바로 걸어가 있었다. 노아는 셀린의 팔을 놓으며 손가락으로 벽을 두 번 두드렸다. 44층에서 셀린이 두드렸던 그 두 번이었다.
셀린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탑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
딸깍 소리가 다시 났다. 이번에는 짐꾼 줄 쪽이었다.
맨 뒤의 도르가 바위 턱이 좁아지는 곳에서 몸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도르의 배낭 밑바닥에서 쇠붙이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맑고 높은 소리였다. 45층에서 노아가 도르의 배낭 맨 아래에 넣어 준 칼렌의 은도금 무릎 보호대 두 짝이었다. 기름을 먹인 끈은 조용했지만, 배낭 안에서 서로 맞닿은 갑옷 조각까지 조용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안개 속의 귀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다음은 빨랐다. 짐승 하나가 협곡 벽을 거꾸로 타고 내려와 도르의 배낭을 덮쳤다. 도르는 짐승을 어깨로 받아 냈다. 짐승이 바위 턱 밖으로 튕겨 나가 안개 속으로 떨어졌고, 그 반동에 도르의 발이 바위 턱 끝에서 미끄러졌다. 스물두 관에 도르의 몸무게까지 더해진 무게가 한꺼번에 허공으로 쏠렸다.
짐꾼 줄이 팽팽해졌다. 도르 앞의 시오가 끌려가며 바위 턱에 배를 대고 엎어졌고, 시오 앞의 피나가 비명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맨 앞의 노아가 바위 턱 위의 튀어나온 돌에 줄을 한 바퀴 감고 배낭을 진 채 주저앉았다. 노아의 다리가 바위를 밀었다. 줄이 노아의 어깨를 다시 먹었다. 어제 감은 붕대 위로 피가 번졌다.
도르는 협곡 벽에 매달려 있었다.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줄 하나에 짐꾼 셋의 무게가 걸려 있었고, 줄은 조금씩, 한 뼘씩 협곡 쪽으로 끌려 나갔다.
따로 매. 지난밤 셀린이 한 말이었다. 숯불을 보며 오래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다. 헌터 줄과 짐꾼 줄이 하나였다면 지금 저 줄 끝에는 하름의 방패와 셀린의 무게까지 걸려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다 같이 끌려갔을까? 셀린은 그 셈을 끝내지 못했다. 셈을 끝내기 전에 몸이 먼저 짐꾼 줄 쪽으로 움직였는데, 바위 턱 위로 기어 오는 두 번째 짐승이 그 길을 막았다.
셀린이 칼을 뽑아 바위 턱을 기어 오는 다른 짐승의 다리를 잘랐다. 하름이 방패로 또 하나를 막았다. 루카는 지팡이 끝에서 불을 피웠다가 그 소리에 짐승이 더 몰려오자 불을 껐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가로로 입에 물었다.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루카 나름의 방법이었고, 비싼 흑단 지팡이에 이빨 자국이 깊게 남았다. 셀린이 짐꾼 줄 쪽을 돌아보았을 때, 칼렌이 이미 거기 있었다.
칼렌은 허리의 단검을 뽑아 들고 시오와 도르 사이의 줄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칼렌!”
셀린이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 협곡에서였다. 칼렌은 셀린을 보지 않았다.
“셋이 같이 떨어지게요, 리더님? 하나 대신 셋이 사는 겁니다. 줄 따로 매자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죠.”
단검이 줄을 갈랐다. 기름 먹인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칼렌은 두 번, 세 번 단검을 그었다. 줄의 마지막 가닥이 끊기는 순간, 도르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도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 큰 몸으로 안개 속에 떨어졌다. 칼렌의 은도금 무릎 보호대도 도르의 배낭 밑바닥에 든 채 같이 떨어졌다.
줄이 풀리자 시오와 피나가 바위 턱 위로 굴러 올라왔다. 노아는 바위에 줄을 감은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줄 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
짐승들은 도르가 떨어진 쪽으로 몰려 내려갔다. 협곡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 속에서 노아가 일어섰다. 배낭은 내려놓지 않았다.
노아는 칼렌 앞으로 걸어갔다. 바위 턱이 좁아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자리는 한 걸음뿐이었다. 셀린은 노아의 얼굴을 보았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화난 얼굴보다 나빴다. 짐을 셈하는 얼굴이었다.
“도르 씨는 스물두 관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중 부리더님 무릎 보호대가 두 관입니다.”
“그래서요?”
“같이 떨어졌습니다. 부리더님 갑옷이요.”
칼렌의 입가가 처음으로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셀린은 그 얼굴을 보며 칼렌이 이 순간에도 금화 마흔 닢을 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짐꾼 하나랑 무릎 보호대 하나. 둘 다 아까워요. 그래도 셋이 살았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저 줄 끝에 짐꾼 셋이 다 매달려 있었을 거고, 당신도 끌려갔을 거예요.”
“도르 씨 데리러 내려갑니다.”
하름이 방패를 등에 돌려 메며 한 걸음 나섰다.
“나도 간다. 내가 줄을 잡아 주마.”
“하름.”
칼렌이 이름만 불렀다. 하름의 걸음이 멈췄다. B급 방패잡이는 A급 부리더의 목소리를 몸으로 먼저 알아들었다. 하름은 방패끈을 쥔 채 노아를 보았고,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름 씨는 위에서 줄을 지켜 달라는 몸짓이었다. 하름은 그 자리에 섰다. 섰지만 방패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칼렌이 다시 노아 쪽으로 돌아섰다.
“뭐라고요?”
“지고 올라오겠습니다.”
노아가 줄을 다시 사리기 시작했다. 끊긴 줄을 이어 붙이고 바위에 감고 매듭을 지었다. 피나가 울면서 매듭 하나를 거들었다. 시오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칼렌이 셀린을 돌아보았다.
“리더님, 말리세요. 짐꾼이 짐 지고 협곡 바닥까지 내려가겠다는 거예요. 저 안개 밑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려가면 계약 끝이라고 말씀하세요.”
셀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등급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짐꾼 하나, 계약금, 다음 층, 승급 심사, 남은 물, 남은 날. 열두 해 동안 셀린은 사람을 그 표 위에 올려놓고 셈했다. 그 셈이 틀린 적이 없어서 S급이 되었다.
“노아.”
셀린이 불렀다. 노아가 매듭을 다 지은 뒤에야 돌아보았다.
“짐은 두고 가. 무거우면 못 올라와.”
“짐이 있어야 도르 씨를 업을 수 있습니다. 아래에도 바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 나도…….”
셀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노아는 줄을 잡고 바위 턱 밖으로 몸을 내렸다. 열 관 넘는 배낭을 진 몸이 천천히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셀린은 바위 턱에 무릎을 꿇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짐꾼의 배낭 끈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난밤 노아가 손가락으로 기름을 밀어 넣은 끈이었다. 그래서 셀린은 노아가 어디까지 내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
셀린은 안개를 향해 노아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협곡이 그 이름을 두 번 되돌려 보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