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86자)
짐 안 지면 안 갑니다
S급 헌터들의 짐꾼입니다만 · 백해원
탑 1층에서 12층까지는 계단이 육백열두 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동화 열 닢이었고, 톰은 그 열 닢을 아끼려고 걸어 올라갔다. 노아는 톰의 빈 버섯 바구니 다섯 개와 물 두 통과 톰의 점심을 지고 그 뒤를 따랐다. 짐은 세 관도 안 됐다.
“노아 씨, 안 힘들어요?”
“안 힘듭니다.”
“저는 죽을 것 같은데요.”
“톰 씨가 지금 지고 계신 건 칼 하나입니다.”
“칼이 무거워요.”
톰은 300계단째에서 한 번, 450계단째에서 두 번 쉬었다. 쉴 때마다 콧수염을 만졌다. 그 콧수염이 F급 헌터라는 말보다 먼저 사람을 헌터처럼 보이게 해 준다고 믿는 눈치였다. 12층에 닿자 축축한 흙냄새가 계단 위로 밀려 올라왔다. 천장까지 닿는 갓버섯이 숲처럼 서 있었고, 그 그늘마다 손바닥만 한 은빛 버섯이 무리 지어 돋아 있었다. 사흘 전보다 갓이 많이 펴 있었다.
톰은 칼을 뽑아 들고 버섯 숲으로 뛰어들었다. 버섯을 칼로 딸 생각이었다. 노아가 뒤에서 톰의 허리띠를 잡아 끌어당겼고, 톰이 엉덩방아를 찧는 것과 동시에 톰이 서 있던 자리의 갓버섯이 퍽 소리를 내며 노란 포자를 뿜었다. 포자 구름이 천천히 내려앉자 그 아래 이끼가 순식간에 누렇게 시들었다.
“칼로 건드리면 갓이 터집니다. 손으로, 밑동을 비틀어서 따세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열네 살 때 여기서 터뜨려 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사흘 동안 재채기를 했습니다. 재채기할 때마다 코에서 노란 게 나왔습니다.”
톰은 칼을 칼집에 도로 넣고 장갑을 꼈다. 노아는 바구니를 내려놓지 않고 등에 진 채 허리를 숙여, 톰이 딴 버섯을 어깨 너머로 받아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 다섯 개를 등에 층층이 쌓은 짐꾼이 버섯을 받아 넣는 모습을 보고, 근처에서 이끼를 긁던 다른 F급 둘이 자기네 짐꾼은 어디서 구하느냐고 물었다. 노아는 조합 값을 말해 주었다. 둘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반값 버섯이었다. 그래도 바구니 다섯 개가 다 찼다.
해 질 무렵 1층 문을 나서자, 톰은 동화 서른 닢을 노아의 손바닥에 쏟았다. 손바닥이 동화의 무게만큼 차가워졌다.
“조합 값은 은화 한 닢이죠. 나머지는 나중에 꼭 갚을게요.”
“나머지는 없습니다. 오늘 값은 이겁니다.”
노아는 동화 열 닢을 세어 톰에게 돌려주었다.
“내일 엘리베이터 타세요. 칼이 무거우시잖습니까.”
톰은 동화를 쥔 채 한참 서 있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노아가 짐꾼 골목으로 꺾어 드는 동안 톰의 콧수염이 저녁 바람에 한쪽만 날렸다.
*
저녁 여덟 시, 셋째 숙소 앞마당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은빛 머리를 한 여자가 골목 입구에서부터 짐꾼들에게 길을 묻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그 여자는 첫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둘째 골목으로 나왔고, 둘째 골목으로 다시 들어가서 하수구 끝에서 길을 잃었다.
여덟 시 반, 피나가 그 여자를 데리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숙소 열두 채의 창문이 동시에 열렸다. 창마다 짐꾼 얼굴이 하나씩, 어떤 창에는 둘씩 매달렸다.
“선배! 손님이요! 아니, 리더님이요! 아니, S급이요!”
셀린 바크는 헌터 갑옷 대신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이마의 상처에 붙인 반창고가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다. 그녀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숙소 열두 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기 다 똑같이 생겼네.”
“그래서 숙소에 번호를 붙여 놨습니다. 문 위에 있습니다.”
노아가 셋째 숙소 문 앞 계단에 앉은 채 말했다. 셀린이 문 위의 숫자 3을 올려다보고, 다시 노아를 보았다.
“번호를 봐도 몰라. 내가 원래 그래.”
“알고 있습니다, 리더님.”
“그래?”
“44층에서 벽을 확인하셨잖습니까.”
어느 창문에서 누가 웃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셀린은 그 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노아 옆 계단에 털썩 앉았다. S급 헌터가 짐꾼 숙소 계단에 앉자, 열린 창문 몇 개가 조심스럽게 닫혔다.
“루카가 다 말했어. 길드에서는 못 하고 나한테만. 누가 날 끌고 갔는지, 칼렌이 뭐라고 명령했는지. 그리고 하나 더.”
셀린이 외투 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연필로 그린 지도였다. 계단과 기둥과 갈라진 바닥이 그려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47」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지난 시즌에 우리가 46층에서 멈췄을 때, 루카가 지팡이를 47층 계단에 떨어뜨렸지. 그걸 주우러 혼자 올라간 짐꾼이 있었다고. 돌아와서 이걸 루카한테 그려 줬다고.”
노아는 지도를 보지 않았다. 손톱 밑에 낀 12층 흙을 보았다.
“지팡이가 비쌌습니다.”
“47층은 아직 아무 헌터도 못 밟았어.”
“밟은 사람은 있습니다. 헌터가 아니라서 안 셀 뿐입니다.”
*
셀린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외투에서 쇠기름 냄새가 났다. 검을 닦는 기름이었다.
“칼렌이 조합에 편지 보낸 거 알아. 그건 내가 막을게. 대신 이번 시즌에는 짐꾼으로 말고 지도 담당으로 와. 백야의 다섯 번째 자리. 맨 앞에서 길만 봐 줘. 짐은 다른 짐꾼이 지고.”
마당이 조용해졌다. 닫혔던 창문 하나가 다시 반쯤 열렸다. 지도 담당은 헌터 파티의 정식 자리였다. 거기 앉은 사람의 이름은 등반 기록에 올라갔다. 짐꾼 골목에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짐 안 지면 안 갑니다.”
“왜?”
“40층 위에서 짐을 안 지면 저도 리더님처럼 눕습니다.”
“내가 언제 누웠어?”
“44층에서요. 끌려오셨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셀린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그럼 가벼운 짐만 져. 물 한 통쯤.”
“물 한 통이면 두 관입니다. 두 관으로는 46층 바람도 못 버팁니다. 열 관은 져야 합니다.”
“열 관을 지고 지도를 어떻게 봐?”
“지금까지 그렇게 봤습니다.”
셀린이 일어섰다. 마당 돌바닥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 단 낮아졌다. 파티에서 명령할 때 쓰는 목소리였다.
“노아 렌. 내 말 잘 들어. 짐을 지면 너는 화물이야. 지도를 들면 사람이고. 이름이 남는 건 사람 쪽이야. 너는 지금 그 차이를 내가 정해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거야.”
노아도 일어섰다. 노아가 셀린보다 반 뼘 컸다.
“그럼 화물로 가겠습니다.”
“뭐?”
“제가 지도를 들고 앞에 서면 짐은 누가 집니까? 피나가 지고, 도르가 집니다. 그 사람들은 계속 화물로 남습니다. 저 혼자 사람이 되면 저는 그 사람들을 뒤에 두고 올라가는 겁니다. 저는 짐꾼으로 열겠습니다. 짐을 지고 표석에 손을 얹겠습니다. 그래야 다음 짐꾼도 셉니다.”
마당에 짐꾼 열두 채가 다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셀린은 한동안 노아를 노려보았다. S급 헌터의 눈은 등급표처럼 사람을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눈이 노아의 붕대 감긴 어깨에서 멈췄다가 배낭 끈 자국이 깊게 팬 쇄골에서 다시 멈췄다.
“너 진짜 고집 세다.”
“짐꾼은 고집으로 집니다, 리더님.”
“팔로 지는 거 아니었어?”
“팔은 금방 빠집니다.”
*
대문이 쾅 열렸다. 가렛이 마님을 끌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술은 마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S급께서 짐꾼 골목엔 웬일이시오?”
“짐꾼을 사러 왔어요, 조합장님.”
“백야 계약은 칼렌 하웰 부리더가 끊는다고 편지를 보냈소.”
“그건 부리더가 쓴 편지고, 이건 리더가 쓰는 계약이에요.”
셀린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백야의 흰 달 인장 옆에 셀린 바크라는 이름이 이미 쓰여 있었다. 그녀는 오기 전에 이것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래서 길을 세 번 잃으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짐꾼 넷. 40층 위 등반 동행. 값은 조합 값의 세 배. 내 이름으로 직접 고용하니까 칼렌은 손 못 대요. 30층 아래 보급 계약 열두 명도 그대로 두고요.”
가렛이 종이를 받지 않았다. 대신 노아를 보았다.
“넷이라고?”
“노아 하나로는 안 되니까요. 저 짐꾼이 혼자 열두 관에 사람 넷을 끄는 꼴을 두 번은 못 봐요.”
셀린이 노아를 보지 않고 말했다. 가렛은 오래 아무 말이 없었다. 마님이 바닥을 두 번 긁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피나, 도르, 시오. 노아까지 넷이오. 하나라도 덜 데려오면 백야 짐꾼은 아르센에서 끝이오.”
창문 뒤에서 피나가 비명을 질렀다. 기뻐서 지르는 비명인지 겁나서 지르는 비명인지 본인도 모르는 소리였다.
셀린이 골목을 나간 뒤, 셋째 숙소 일 층 부엌에 이름이 불린 넷이 모였다. 시오가 맨 나중에 들어왔다. 스물셋의 시오는 짐을 지면서 노래를 부르는 짐꾼으로 골목에서 유명했는데, 노래 실력보다 가사를 그 자리에서 지어 붙이는 버릇으로 더 유명했다. 시오는 문간에 서자마자 노래를 시작했다.
“사십 층 위에는 바람이 분다네, 짐꾼 넷이 간다네, 하나는 말이 많고, 하나는 말이 없고…….”
“하나는 노래를 못 하고.”
피나가 끊었다. 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줄을 지었다.
“돌아올 때 몇이 오나, 넷이 가서 몇이 오나…….”
부엌이 조용해졌다. 도르가 고개를 숙였다. 큰 어깨가 들썩였다. 피나가 시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봐, 울렸잖아! 도르 아저씨 앞에서 슬픈 노래 하지 말라고 했지!”
“슬픈 노래 아닌데? 넷이 다 온다는 노래로 끝낼 거였는데?”
“그럼 끝까지 하든가!”
도르는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해 달라는 끄덕임이었다. 시오가 헛기침을 하고 마지막 줄을 붙였다. 넷이 가서 넷이 오네, 하나는 등이 안 굽었네. 노아는 그 줄에서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듣고 부엌을 먼저 나왔다.
*
새벽 네 시, 조합 사무실에는 등잔 하나만 켜져 있었다. 가렛은 의자에 앉아 마님의 가죽끈을 풀고 있었다. 의족을 떼어 책상에 기대 놓자, 무릎 아래가 둥글게 끝난 바짓단이 의자 밑으로 늘어졌다. 노아는 6년 동안 가렛이 의족을 벗는 것을 두 번 보았다. 두 번 다 누가 죽은 날이었다.
“계약서는 가져가라.”
“예.”
“노아.”
가렛이 등잔불을 보고 있었다. 노아를 보지 않았다.
“49층에서는 멈추지 마라.”
노아가 숨을 멈췄다. 20년 동안 가렛은 다리를 잃은 층을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해도, 비가 와서 마님이 밤새 울어도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마라. 누가 넘어져도. 네가 넘어져도.”
등잔 심지가 툭 소리를 내며 꺾였다. 사무실이 반쯤 어두워졌고, 가렛은 그 어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