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5,223자) · 명지수 · 8월 27일(금)
재밍
독침 (3차대전 3부작 제3부) · 네오
8월 27일 2300, 진천 진지로 들어오는 임도의 굽은 자리에서 위장망 두 겹이 밤바람에 느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공병이 비탈 흙을 깎아 폭을 낸 그 자리에 그저께 밤 들어온 차량 하나가 서 있었다. 갱도에는 들어가지 않는 차였다. 대대 장비 목록에 없는 차였다. 이동 지원 요청서에는 7종(장비) 한 줄만 있었고 품목란은 비어 있었으며, 중량 칸에 71,400킬로그램이 적혀 있었다. 그 차를 부르는 이름을 대대 안의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열여덟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수는 사격지휘차 안에서 시계를 봤다. 금요일 밤이었다. 대대장이 그저께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말한 그 밤이었다. 22일에 올린 정정 요청서에는 그저께 밤 국가안보실 이름으로 회신이 왔는데, 검토 중이라는 네 글자뿐이었다. 화면 옆에 붙여 둔 그 출력지 모서리가 손때로 말려 있었다.
2341에 무인기 소리가 갱도 위를 한 번 지나갔다. 아무도 위를 보지 않았다. 20일 밤 옮겨 온 이 진지는 지도에 연필 점 하나로만 있었다. 버리고 온 자리는 27시간 만에 불탔다. 여기가 들키면 다음은 몇 시간일지 아무도 몰랐다. 도현이 사격지휘차 문틀에 기대 앉아 방탄복 안주머니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종이가 거기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었다.
2350에 대대장이 임도 굽은 자리로 걸어 내려가 위장망 모서리를 들쳤다. 손전등 불빛이 바퀴 하나를 비췄다. 사람 허리보다 높은 바퀴였고, 고무 홈마다 남쪽 어디서 묻혀 온 붉은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수가 뒤따라가 그 옆에 섰다.
“검토 중이 닷새면, 누가 그 줄을 읽기는 읽었다는 거다. 안 읽었으면 벌써 반려가 왔어.”
“읽고 나서 어느 줄을 고를지는 모릅니다.”
“그건 오늘 밤 서울이 안다. 우리는 그다음에 안다.”
대대장은 위장망을 도로 내렸다. 내리면서 모서리를 바퀴 밑에 한 번 접어 넣었다. 바람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손이었는데, 그 손이 바퀴 고무에 닿는 동안 조금 오래 머물렀다.
*
0140에 통신 상자 안의 유선 팩스가 울었다. 감열지가 한 줄씩 밀려 나왔다. 롤러 열에 데워진 종이는 손에 닿자 미지근했고,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지수는 종이가 다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머리부터 읽었다. 국가안보회의 결정문 사본이었다. 1항, 0400 현무-3 포화, 대대 할당 2발, 표적은 산둥 반도 해안 레이더 기지 두 곳. 2항, 현무-5 대기. 3항, 대기 표적의 좌표 한 줄, 그리고 그 줄 끝의 괄호.
괄호 안에 세 글자가 있었다. 자기 이름이었다. 서울에서 온 종이에 자기 이름이 활자로 찍혀 있는 것을 지수는 처음 봤다. 손끝이 그 괄호 위에서 한 번 멈췄다.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던 도현이 숨을 들이켰다.
“대위님, 그거 대위님 이름입니다.”
“알아. 현무-3부터 본다.”
대대장이 사격지휘차로 올라와 종이를 받았다. 그는 3항에서 오래 멈추지 않았다. 1항의 두 좌표를 손가락으로 짚고 지수에게 돌려주었다.
“3항은 대기다. 대기 줄은 쏘기 전에 다시 본다. 지금은 0400만 생각해. 두 발이 먼저다.”
“쏘기 전에 세 번 보겠습니다.”
지수는 1항의 두 좌표를 지도에 얹었다. 도현이 축척을 두 번 키웠다. 둘 다 바다로 튀어나온 곶 끝이었고 반경 2킬로미터 안에 지붕이 없었다. 도현이 숨을 길게 내쉬었고, 지수는 이번에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
0151에 무전기가 먼저 죽었다. 죽는 소리가 났다. 지글거리는 잡음이 한 채널씩 덮쳐 오더니 어느 순간 모든 채널이 같은 소리를 냈다. 재밍(전파를 흐려 조종과 영상을 끊는 것)이었다. 통신병 노승재가 헤드셋을 반쯤 벗고 다이얼을 돌렸다. 돌릴 때마다 같은 소리였다.
0153에 데이터망이 끊겼다. 사격지휘차 화면이 한 번 얼었다가 다시 켜졌는데, 켜진 화면의 표가 엉망이었다. 칸마다 같은 숫자가 줄지어 박혔고 시각 칸에는 내년 날짜가 떴다. 승재가 손을 떼고 지수를 돌아봤다.
“밖에서 들어온 겁니다. 망 전체가 이렇습니다.”
발사 제원은 이 화면에서 발사대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망이 죽으면 숫자는 발사대 콘솔에 손으로 넣어야 했고, 손으로 넣으려면 숫자가 종이로 그 앞까지 가야 했다. 2호차까지는 유선이 살아 있었다. 3호차 선은 이 진지로 옮겨 온 뒤 아직 깔지 못했다. 3호차는 갱도 반대편 능선 밑 400미터였다.
“제가 갑니다.”
도현이 먼저 말했다. 지수는 대답 대신 팩스 종이를 그의 앞에 놓았다. 도현이 1항의 제원을 두 장에 옮겨 적었다. 지수가 그 두 장을 원본과 대조했다. 한 번,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맞았다. 도현은 한 장을 방탄복 안주머니에, 다른 한 장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유선 드럼 하나를 어깨에 걸었다. 가는 길에 선을 깔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0204에 도현이 갱도를 나갔다. 드럼이 풀리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
0226에 무인기 소리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지나가지 않았다. 능선 위에서 낮게 원을 그렸다. 지수는 갱도 입구 모래주머니 뒤에 엎드려 소리가 도는 쪽을 셌다. 도현이 지금 어디쯤인지 몰랐다. 드럼 선이 풀리던 소리는 몇 분 전에 멎어 있었다. 멎은 것이 엎드렸다는 뜻인지 다른 뜻인지, 소리로는 알 수 없었다.
0238에 무인기 소리가 북쪽으로 빠졌다. 0241에 3호차 쪽 어둠 속에서 손전등이 두 번 깜박였다. 짧게, 쉬고, 짧게.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지수는 그제야 모래주머니에서 팔꿈치를 뗐다. 팔꿈치 자국 둘이 젖은 모래에 깊게 패어 있었다.
0244에 2호차가 유선으로 불렀다. 콘솔의 자기 위치 값이 튀고 있다고 했다. 위성으로 잡는 위치가 1분 사이에 400미터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하늘에서 흐린 것은 무전만이 아니었다. 자리가 400미터 틀리면 숫자를 아무리 맞게 넣어도 탄은 엉뚱한 바다에 떨어졌다.
지수는 사격지휘차 서랍에서 진지 측량 대장을 꺼냈다. 20일 밤 이 진지에 들어오면서 공병이 말뚝을 박고 손으로 적어 둔 종이였다. 2호차 사격 위치의 좌표가 연필로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줄을 수화기에 대고 한 자리씩 불렀고, 2호차 조종수 정한솔이 따라 불렀다. 위성 값을 끄고 종이의 값을 넣었다. 3호차 몫은 하민재가 말뚝 옆에서 손전등을 입에 문 채 받아 적었다. 넣고 나서 지수는 한 번 더 불렀다. 두 번째에도 같은 숫자가 돌아왔다.
0250에 일이 터졌다. 무전기 잡음이 한순간 걷히고, 맑은 목소리가 대대 호출부호를 불렀다.
“사격 보류. 반복한다, 0400 사격 보류. 상급 지시다.”
승재가 반사적으로 인증을 요구했다. 목소리는 망설임 없이 인증 단어를 댔다. 승재의 얼굴이 굳었다. 어제 날짜의 단어였다. 다시 묻기도 전에 잡음이 돌아와 목소리를 덮었다.
대대장이 사격지휘차 계단에 서 있었다. 지수는 그를 올려다봤다.
“어제 인증입니다.”
“우리 호출부호는 맞게 불렀다.”
“그래서 더 아닙니다. 진짜 상급이면 어제 단어를 쓸 리가 없습니다. 종이에는 오늘 서명이 있습니다. 저 목소리에는 어제 날짜가 있습니다.”
“틀리면?”
“틀리면 제가 쏜 겁니다. 일지에 그렇게 적겠습니다.”
대대장은 팩스 종이의 서명란을 한 번 더 봤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의 서명이 감열지 위에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는 종이를 지수에게 돌려주었다.
“종이대로 간다. 일지는 내가 적는다.”
*
0320에 도현이 돌아왔다. 무릎까지 진흙이었고 왼쪽 손바닥이 드럼 손잡이에 쓸려 벗겨져 있었다. 3호차 사수 하민재가 콘솔에 숫자를 넣는 동안 그 옆에서 자기 종이와 화면을 한 줄씩 맞춰 보고 왔다고 했다. 유선은 3호차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수가 수화기를 들자 하민재의 목소리가 잡음 없이 들렸다.
“가는 길에 무인기가 머리 위에서 12분 돌았습니다. 참나무 뿌리 밑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드럼이 덜그럭거릴까 봐 배에 깔고 있었습니다.”
도현은 그 말을 보고하듯 했다. 지수는 벗겨진 손바닥을 봤고, 그가 드럼을 배에 깔고 엎드린 12분 동안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는 것을 그 손바닥으로 알았다. 그녀는 잘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구급 상자를 그의 무릎 위에 놓았다.
0330에 지수는 사격지휘차에서 내려 갱도 안을 걸었다. 무전이 죽은 대대에서 사람을 확인하는 길은 얼굴뿐이었다. 그녀는 계급도 번호도 부르지 않았다. 한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성을 떼고 이름만 불렀다. 통신 상자 옆의 승재가 헤드셋을 목에 건 채 대답했다. 운전병 유건은 크레인이 없어진 뒤로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비닐 조각을 손에 쥔 채 일어났다. 2호차 조종수 정한솔은 대답 대신 손을 들었고, 정비 하사 탁인호는 기름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닦고 나서 대답했다.
갱도 안의 나머지 여섯도 한 사람씩 불렀다. 임도 굽은 자리에서 위장망 밑 차를 지키는 둘도 불렀다. 유선으로는 2호차에 남은 둘과 3호차의 하민재와 다른 둘을 불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름마다 대답이 하나씩 돌아왔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했다. 대대에서 이름만 불리는 일은 휴가 신고 때 말고는 없었다. 셋째쯤부터는 아무도 왜 이름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대답하고 나서 다음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갱도 안에 고개 돌리는 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열여덟째가 도현이었다. 도현은 사격지휘차 문틀에 앉아 벗겨진 손바닥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지수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붕대 끝을 입으로 문 채 대답했고, 붕대가 입에서 떨어져 무릎으로 굴렀다. 지수는 그것을 주워 그의 손에 쥐여 주고 사격지휘차로 올라갔다.
*
0345에 2호차와 3호차가 나무 밑을 나와 사격 위치로 갔다. 위장망을 걷는 손들이 서둘렀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퀴가 흙을 누르는 소리, 나뭇가지가 차체를 긁는 소리, 누가 발을 헛디뎌 낮게 내뱉는 숨소리가 차례로 났다. 8월 새벽의 숲은 젖은 낙엽과 송진 냄새로 가득했고, 그 위로 경유 냄새가 한 겹 얹혔다. 0355에 발사관 둘이 섰다. 어둠 속에서 쇠가 서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유압이 밀어 올리는 낮은 숨소리가 두 번 났고, 그 뒤로 숲이 조용해졌다.
0358에 지수는 화면 앞에 앉았다. 망이 죽어 화면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었다. 믿을 것은 팩스 종이와 도현의 손가락이었다. 그녀가 2호차 제원을 한 자리씩 소리 내어 읽었다. 도현이 팩스 종이 위에서 같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2호차가 유선으로 같은 숫자를 되불렀다. 이어서 3호차였다. 하민재의 목소리가 한 자리에서 한 번 막혔다가 이어졌다. 지수는 그 자리를 처음부터 다시 불렀고, 이번에는 막힘 없이 같은 숫자가 돌아왔다.
0359에 지수가 마지막 숫자를 읽었다. 도현의 손가락이 감열지 위 마지막 숫자 밑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