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5,286자) · 명지수 · 8월 25일(수)

7종

독침 (3차대전 3부작 제3부) · 네오

8월 25일 0540, 진천의 사격지휘차 화면에서 목록이 한 줄씩 지워지고 있었다. 지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다섯 줄이 위에서부터 차례로 사라졌다가 2초 뒤에 같은 순서로 다시 떴다. 세 번 그랬다. 통신병이 데이터망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끊긴 게 아니라 흔들리는 거라고 했다. 서해 쪽에서 누가 전파를 덮고 있었다. 네 번째로 지워졌다가 떴을 때 지수는 셋째 줄을 봤다. 상태 칸은 여전히 대기였고, 그 옆에 사흘 전 지수가 붙인 표시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입력자 이의.

“대위님, 표시까지 지우고 다시 쓰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누가 지웠는지가 남아. 이번엔 화면 말고 종이에도.”

통신병이 수신기 볼륨을 줄였다.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던 잡음이 긁는 소리에서 끓는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지난주까지는 없던 소리였다. 지수는 이 소리가 사흘 뒤에 얼마나 커질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화면이 다시 지워질 때마다 셋째 줄이 몇 초 만에 돌아오는지를 셌다. 2초, 2초, 3초.

0610에 흔들림이 멎었다. 지수는 화면에 뜬 다섯 줄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셋째 줄 옆에는 이의라고 두 글자를 따로 적었다. 대대장은 그 종이를 반합 뚜껑으로 눌러 놓고 서울에서 오늘 회의가 있다고만 했다. 무슨 회의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

0900, 서울. 국가안보회의가 열리는 지하 회의실은 창이 없었다. 긴 탁자 머리에 등받이 높은 의자가 하나 있었고, 대통령은 그 의자에 앉아 회의 내내 탁자 쪽을 보고 있었다. 벽 쪽 참고인 자리에서는 그 사람의 뒤통수와 귀 한쪽만 보였다. 윤석주는 그 참고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직위 해제된 지 한 달이었다. 정복이 아니라 회색 양복을 입었고, 무릎 위에 수첩 하나를 올려놓고 있었다. 원본이었다.

사이버작전사령관이 일어섰다. 소장이었고 손에 든 것은 종이 석 장이 전부였다.

“발신자란이 빈 자료 다섯 건은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확정했습니다. 회선 중계 노드 한 곳에 6월 중순부터 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섯 건 모두 표적 상태를 한 방향으로만 올렸습니다. 대상은 전부 서쪽입니다.”

“어디서 들어왔습니까?”

국방장관이 물었다. 사령관은 한 박자 쉬었다.

“거쳐 온 길은 셋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출발지는 추정만 있습니다. 이 방에서 추정을 확정처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화면에 사진 석 장을 띄웠다. 접힌 자국이 닳아 결이 일어난 종이였다. 앞뒤와 여백까지 둥근 글씨가 줄지어 있었고, 사이사이에 모난 글씨가 몇 줄 끼어 있었다. 사령관이 날짜를 하나씩 짚었다.

“전방 발사대대 확인자의 수기 기록입니다. 서울 쪽 회선 기록과 시각이 다섯 건 모두 맞습니다. 6월 26일 2340, 이 회선으로 산둥 비행장 두 곳이 참고에서 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이 종이에는 이튿날 1310에 그 두 줄이 다시 참고로 내려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서울에서 되돌린 시각과 같습니다.”

그는 다음 줄로 손가락을 옮겼다.

“7월 2일 새벽의 산둥 사격은 이 침입이 올려 둔 표적에 우리가 확인 회신을 붙여 내려보낸 결과였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환기구 소리만 같은 높이로 깔렸다. 작전본부장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 종이는 8월 3일에 전량 파기 명령이 나간 기록 아닙니까?”

“파기 확인서는 접수돼 있습니다. 서명도 있습니다.”

사령관은 그 말만 하고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확인서에 서명이 있는데 종이가 여기 떠 있었다. 방 안의 모두가 그 둘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았다. 국가안보실 차장 한도겸이 낮게 말했다.

“그 서명 덕에 오늘 이 방이 7월 2일을 압니다. 누가 했는지는 묻지 맙시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합참 작전본부장이 탁자 위에 깍지 낀 손을 풀었다가 다시 꼈다. 7월 2일의 회신은 그의 본부에서 나갔다. 한도겸은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오래 화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우리를 밀어 넣었습니다. 7월부터 나는 그걸 짐작했고, 그래서 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짐작이 아닙니다.”

작전본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차장님 짐작이 맞았습니다. 인정합니다. 7월에 윤 중령 수첩을 본 적이 없는 걸로 하자고 한 것도 저였고, 7월 2일 회신과 8월 파기 명령도 제 본부에서 나갔습니다. 그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8월 공세는 짐작이 아닙니다. 판단서가 28일 전후로 날짜를 좁혔습니다. 우리가 밀렸든 안 밀렸든 저쪽은 그날 옵니다. 지금 안 쏘면 맞기만 합니다.”

“밀린 대로 쏜 게 7월 2일입니다. 또 쏘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작전본부장은 사진 속 둥근 글씨를 한참 봤다. 그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한 줄이 먼저 나왔다.

“그러면 이번엔 우리 이름으로 쏜다.”

그러고는 탁자 머리 쪽을 향해 고쳐 말했다.

“남이 올린 줄 말고, 우리가 고르고 우리가 확인하고 우리가 서명한 표적으로. 현무-5 사용 준비를 건의드립니다.”

*

1020, 휴정 시간에 석주는 화면 앞에 혼자 남았다. 사진은 아직 떠 있었다. 그는 둥근 글씨를 처음부터 읽었다. 6월 날짜들, 7월 날짜들, 여백에 세로로 두 줄, 귀퉁이의 작은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7월 13일 줄 끝에 붙은 네 글자. 대위님 두 번. 확인자 칸에는 같은 이름이 줄마다 되풀이돼 있었는데 사진에서는 그 칸만 검게 가려져 있었다.

사이버작전사령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한 잔을 석주 앞에 놓았다.

“이 글씨 쓴 사람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석주가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사령관은 잔을 내려놓고 사진을 같이 봤다.

“부대와 이름은 이 방 밖으로 안 나갑니다. 다만 중령님께는, 원하시면 따로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종이가 중령님 표와 짝입니다.”

석주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쓰고 뜨거웠다. 그는 무릎 위 수첩 뒤표지 안쪽을 엄지로 한 번 눌렀다. 6월 27일에 접어 끼운 종이가 아직 거기 있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왜요?”

“이 사람은 제가 누군지 몰라서 끝까지 적었을 겁니다. 누가 같이 적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덜 적었을지도 모르고요. 저는 서울에서 적었고 이 사람은 거기서 적었습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사령관은 더 권하지 않았다. 석주는 화면 속 둥근 글씨를 한 번 더 보고, 수첩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

1140, 회의가 다시 열렸다. 국가안보실장이 안건을 읽었다. 현무-5 사용 준비. 사용 결정이 아니라 준비였다. 결정은 따로 대통령이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한도겸이 손을 들었다.

“반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한 것은 누가 우리를 이 전쟁 안으로 밀었다는 겁니다. 밀린 걸 알았으면 멈추는 게 먼저입니다. 현무-5를 준비하는 순간 저쪽은 그걸 읽습니다. 그리고 그게 저쪽이 처음부터 바란 겁니다.”

“저쪽이 바란 건 우리가 남의 손에 쏘는 겁니다. 우리 손으로 쏘는 건 저쪽이 바란 게 아닙니다.”

작전본부장의 대답이었다. 둘은 탁자 양쪽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탁자 머리 쪽을 봤다. 등받이 높은 의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1408에 실장이 표결을 불렀다. 손이 차례로 올라갔다. 한도겸의 손만 올라가지 않았다.

1412, 서울. 실장이 의결문을 읽었다. 국가안보회의는 현무-5 사용 준비를 의결한다. 소수 의견 있음. 한도겸은 소수 의견을 기록관에게 불러 주지 않았다. 의결문 아래 빈칸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 만년필로 직접 적었다. 밀린 전쟁을 우리 전쟁으로 바꾸는 결정에 반대함. 글씨가 작고 곧았다.

*

1412, 진천. 사격지휘차 데이터망 출력기가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이동 지원 요청서였다. 지수가 받아 들었다. 맨 위 보급 분류 칸에 7종(전차·발사대 같은 주요 장비를 묶는 군수 분류)이라고 찍혀 있었다. 탄약도 부품도 아닌 장비 한 덩어리가 오고 있었다.

품목란은 비어 있었다. 수량란도 비어 있었다. 중량란에만 숫자가 있었다. 71,400킬로그램. 목적지 칸에 대대 진지의 좌표가 있었고, 도착 예정은 오늘 2300 전후였다. 요청 부대 칸에는 접근을 위해 임도 폭을 확인해 달라는 한 줄이 붙어 있었다.

도현이 어깨 너머로 그 숫자를 읽었다. 한참 읽었다.

“대위님, 그거 들어갈 갱도가 없는데요.”

“갱도에 넣으라는 말은 없어. 임도 폭만 보래.”

“71톤이면 임도가 버팁니까?”

“버티게 하라는 거지.”

대대장이 들어와서 종이를 받아 읽었다. 품목란에서 오래 멈췄다. 그는 종이를 사격지휘차 벽 집게에 물리고 지수와 도현을 차례로 봤다.

“물어보지 마. 짐작은 해도 돼.”

“짐작하는 게 맞습니까?”

“오늘은 그 말 안 한다. 판단서 날짜가 28일 전후로 좁혀졌다. 사흘이다.”

1530부터 공병 넷과 대대원 여섯이 임도 입구까지 2킬로미터를 걸으며 폭을 쟀다. 굽은 곳 두 군데에서 참나무 가지를 베어 냈다. 도현은 줄자 끝을 잡고 걸었다. 땀이 줄자 눈금 위로 떨어져 숫자가 번졌다. 해가 지기 전에 다 쟀다. 굽은 곳 하나가 50센티미터 모자랐다. 공병 상사가 비탈 흙을 깎아 냈다. 삽날이 돌에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

2250, 방공 분대가 서쪽에서 무인기 하나가 온다고 알렸다. 대대의 불이 전부 꺼졌다. 임도 입구 쪽에서 무언가 큰 것이 엔진을 끄는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지수는 사격지휘차 안 어둠 속에서 시계 바늘의 야광만 봤다. 무인기 소리가 진지 위를 한 번 지나고, 임도 위를 따라가다가, 임도 입구 위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기 무엇이 서 있는지 지수는 몰랐다. 저쪽도 아직 모를 것이었다. 방공 분대 재머가 켜졌다. 소리가 흔들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지수는 숨을 세었다. 열네 번째 숨에서 소리가 원을 풀고 북쪽으로 멀어졌다. 2304였다. 14분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2330에 도현이 사격지휘차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은 안 보였고 목소리만 들어왔다.

“대위님, 하나가 더 왔습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도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지수도 묻지 않았다. 대대 차량 명부에 없는 차였다. 명부에 없는 것은 일지에도 적지 않았다. 지수는 일지를 펴고 2330 칸을 비워 두었다. 대신 시계만 봤다.

2340에 데이터망으로 회신 하나가 들어왔다. 사흘 전 올린 입력자 확인서에 대한 답이었다. 한 줄이었다. 검토 중. 발신자란에 이름이 있었다. 합참 작전본부가 아니라 국가안보실이었다.

지수가 그 줄을 읽고 있을 때 대대장이 차 문턱에 와서 섰다. 그는 손전등을 끈 채였다. 오늘 오후에 서울에서 무엇이 정해졌는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날짜 하나를 말했다.

“금요일 밤, 대통령이 결정한다.”

대대장이 돌아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사격지휘차 벽 집게에 요청서 한 장이 물려 있었다. 품목란과 수량란은 끝까지 비어 있었고, 독서등 불빛은 중량란의 숫자 하나에만 닿아 있었다.

3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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