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5,409자) · 강태우 · 7월 30일(금)

1,400

독침 (3차대전 3부작 제3부) · 네오

7월 30일 0450, 남쪽 끝선에서 북쪽으로 1,400미터째 되는 자리에 시설대대 병사 둘이 엎드려 흰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붓이 아니라 롤러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가 페인트 통을 비췄고, 롤러가 지나간 자리마다 젖은 흰 줄이 아스팔트 위에 번들거렸다. 남쪽 끝선은 어젯밤에 그었다. 활주로의 진짜 남쪽 끝, 무너진 격납고 앞에는 깃발이 몰린 구멍 셋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 셋 바로 북쪽에 그었다. 두 줄 사이가 이제 활주로였고, 그 바깥은 아직 구멍이었다.

태우는 그 줄에서 20미터 떨어진 열둘째 구멍 위에 서 있었다. 어젯밤 2300에 부은 보수재가 다 굳었는지 보려고 군화 뒤꿈치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꺼지지 않았다. 곽 상사가 손전등을 들고 와서 같은 자리를 두 번 구르더니 배치도에 12를 적었다.

델가도 상사의 반은 일주일 내내 무너진 강화 격납고의 콘크리트를 치웠다. 굴착기 둘이 밤낮없이 돌았고, 남쪽 유도로에 쌓였던 잔해가 덤프트럭 스무 대 분량으로 빠져나갔다. 구멍은 곽 상사가 셌고 길은 델가도가 텄다. 두 도면은 아직 번호가 반대였지만, 이번 일주일 동안에는 서로의 1번이 부딪칠 일이 없었다.

0600에 기지 운영과에서 공문 한 장이 게시판에 붙었다. 최소 운영 활주로 1,400미터 개방, 남쪽 구간. 태우는 지나가다 그 한 줄을 읽었다. 6월 4일 저녁 1,620이 붙었던 자리였다. 같은 게시판, 같은 압정 구멍이었다. 7월 2일 이후로 이 자리에 활주로 길이가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

0930, 동쪽 하늘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정비반 여덟과 태우가 격납고 앞에 섰다. 곽 상사의 대원들도 삽을 세우고 섰다. 아무도 줄을 맞추라고 하지 않았는데 다들 비슷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넷이었다. 낮게 들어와 기지 위를 한 바퀴 돌고, 하나씩 내렸다. 첫째가 남쪽 끝선을 막 넘어서 바퀴를 내리고 아스팔트를 긁었다. 타이어 연기가 짧게 일었다. 기체가 1,400 안에서 속도를 죽이는 동안 태우는 숨을 참았다. 메운 자리 열둘을 바퀴가 하나씩 밟고 지나갔다. 꺼진 자리는 없었다. 첫째가 북쪽 흰 줄 300미터 앞에서 멈췄다. 둘째가 내렸다. 셋째, 넷째.

KF-21이었다. 태우는 그 기체를 사진으로만 봤다. 날개 모양이 KF-16보다 각졌고 꼬리날개가 두 장이었다. 넷이 유도로를 따라 격납고 쪽으로 오는 동안 태우는 꼬리 번호를 읽었다. 번호 넷을 한 번에 외웠다. 외우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름 아홉을 외울 때처럼 저절로 들어왔다. 숫자를 읽었을 뿐 조종석 안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헬멧 바이저가 해를 받아 모두 같은 은색이었다.

1030에 분견대 정비반장 엄 상사가 오상혁을 찾았다. 분견대는 조종사 넷에 정비사 여섯을 데려왔다. 무장사는 둘뿐이었다.

“착륙 후 점검 손 좀 빌려주십쇼. 저희 애들은 이 기지 처음입니다. 기록부엔 지원 정비사로 이름 올리겠습니다.”

오상혁과 태우가 첫째 기체의 바퀴와 하부를 봤다. 메운 자리를 밟고 온 바퀴였다. 타이어 접지면에 자갈이 박힌 데가 없는지 손전등을 비스듬히 대고 한 바퀴를 돌았다. 깨끗했다. 오상혁이 기록부에 이름을 쓰고 태우가 그 아래에 썼다. 확인 조종사란은 비어 있었다. 조종사들은 브리핑실로 들어간 뒤였다.

*

1352, 경보가 울렸다. 서해 쪽이었다. 태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서쪽 하늘 높은 데서 흰 줄 여러 개가 엇갈리고 있었다. 우리 쪽 F-15K 편대가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J-16 편대가 남쪽을 향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매일 1400 전후에 긁고 가던 그 편대였다. 오늘은 긁고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에 활주로가 있었다.

“전원 대피! 활주로 비워!”

곽 상사의 대원들이 삽을 던지고 뛰었다. 태우는 도영의 방탄복 어깨끈을 잡고 가장 가까운 콘크리트 배수로로 뛰어들었다. 오상혁이 뒤따라 들어왔다. 배수로 바닥의 고인 물이 무릎으로 스몄다.

1358에 서쪽에서 작고 빠른 점들이 낮게 들어왔다. 멀리서 쏘고 돌아가는 유도폭탄이었다. 기지 방공 진지에서 요격탄이 솟았다. 첫 요격탄이 바다 위에서 점 하나를 잡았다. 공중에서 터진 불꽃이 늦게 소리를 보냈다. 둘째 요격탄이 하나를 잡았다. 점은 넷이었다. 둘이 남았다.

1359에 첫 번째가 떨어졌다. 땅이 아래에서 위로 한 번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배수로 벽에서 흙이 떨어져 헬멧을 두드렸다. 두 번째는 3초 뒤였다. 이번에는 더 멀었다. 귀가 먹먹해진 채로 태우는 도영의 헬멧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도영이 몸을 웅크린 채 턱끈을 두 번 당기는 것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1405에 바다 위 높은 데서 하얀 것이 하나 펴졌다. 낙하산이었다. 바람을 받아 천천히 남쪽으로 흘렀다. 배수로에 엎드린 사람들이 고개만 들어 그것을 봤다. 누구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기지 스피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상혁이 무전기에 귀를 대고 있다가 짧게 말했다.

“저쪽 거다. 해경이 건지러 간대.”

도영이 낙하산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하얀 천이 수평선 근처에서 바다에 내려앉아 작게 접혔다. 저쪽 사람도 저 아래에서 누군가 건지러 오기를 기다릴 것이었다. 도영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태우도 하지 않았다.

1412에 해제가 났다. 태우는 배수로 턱을 넘어 활주로를 봤다. 하나는 북쪽 흰 줄 너머, 아직 구멍투성이인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하나가 문제였다. 남쪽 끝선에서 700미터, 1,400의 한가운데였다. 아침에 KF-21 넷이 바퀴로 밟고 지나간 자리였다. 구멍 가장자리의 아스팔트가 꽃잎처럼 바깥으로 들려 있었고 바닥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1,400미터가 반으로 잘려 700과 700이 됐다. 700으로는 아무것도 못 떴다.

KF-21 넷은 격납고 안에 있었다. 격납고 문짝 하나에 파편 자국이 서너 개 났을 뿐 기체는 멀쩡했다. 그러나 활주로가 없는 기지에 있는 전투기는 격납고 안의 짐이었다. 브리핑실에서 나온 조종사 하나가 격납고 문 앞에 서서 구멍 쪽을 오래 봤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

1430, 곽 상사가 새 구멍 둘레를 돌았다. 지름이 사람 키 하나 반이었다. 그는 무전기로 골재장에 트럭을 불렀다. 덤프트럭이 아니라 델가도 상사의 굴착기가 먼저 왔다. 굴착기 삽이 구멍 테두리에 일어선 아스팔트 조각을 걷어 내는 동안 델가도가 곽 상사의 배치도를 들여다봤다. 카투사 상병이 옆에서 말을 옮겼다.

“이건 우리 도면 순서로 하면 맨 마지막 번호랍니다. 그런데 지금 먼저 하자고 합니다. 오늘 밤 안에요.”

곽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우는 그 짧은 끄덕임을 봤다. 일주일 전 보닛 위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1번을 확인하던 때보다 훨씬 빨랐다.

1500부터 자갈을 부었다. 굴착기 삽이 한 번에 사람 열이 한 시간 퍼낼 양을 떴다. 그래도 다짐은 사람 몫이었다. 태우와 도영과 오상혁이 가장자리를 다지고, 미군 병사 둘이 진동 다짐기를 잡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손짓이 통했다. 태우가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면 미군 병사가 다짐기를 그 자리에 한 번 더 댔다. 해가 기울수록 구멍 속 그늘이 맞은편 벽으로 기어 올라갔다. 굴착기 배기가스와 자갈 먼지가 섞여 목구멍이 칼칼했고, 미군 병사 하나가 자기 물통을 태우에게 내밀었다. 미지근한 물에서 철 냄새가 났다. 태우는 반만 마시고 돌려줬다. 보수재를 부은 것이 1910이었다. 굳으려면 네 시간이었다.

*

1830, 엄 상사가 정비반 사무실로 두꺼운 바인더 하나를 들고 왔다. 겉표지에 KF-21 무장 장착 교범이라고 찍혀 있었고 그 아래 붉은 도장이 둘이었다.

“분견대 무장사 둘로는 하루 출격 몇 번 못 합니다. 이 기지 무장 하는 분이 강 병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읽어 두십쇼. 기체가 손에 안 익으면 손이 거짓말을 합니다.”

태우는 바인더를 받았다. 무거웠다. 손이 모르는 무게였다. 엄 상사는 오전 점검 기록부도 돌려주고 갔다. 확인 조종사란이 채워져 있었다. 태우는 무심코 자기 이름이 쓰인 줄을 봤다. 강태우라는 세 글자 바로 오른쪽, 확인란으로 넘어가기 전 빈자리에 파란 잉크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펜 끝을 종이에 대고 한참 떼지 않으면 생기는 점이었다. 잉크가 종이 결을 따라 작게 번져 있었다. 그 오른쪽 확인란에 조종사의 서명이 있었다. 휘갈겨서 읽을 수 없었다.

태우는 그 점을 손톱으로 한 번 쓸어 봤다. 마른 잉크였다. 누가 왜 거기서 펜을 멈췄는지 태우는 알 수 없었다. 오상혁의 이름 옆에는 점이 없었다. 기록부를 덮었다.

2000, 기다리는 동안 도영이 공구함을 들고 왔다. 손잡이 옆 걸쇠에 작은 놋쇠 자물쇠가 하나 걸려 있었다. 오후에 미군 병사 하나가 도영에게 10밀리 렌치를 돌려주러 왔다고 했다. 다짐기 옆에 떨어져 있던 것을 자기네 공구인 줄 알고 챙겼다가, 손잡이에 긁힌 표시를 보고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둘째 서랍의 그 렌치였다.

“이제 섞입니다, 형님. 공구가 두 나라 거라서요. 잠가 두겠습니다.”

“열쇠는?”

“하나뿐입니다. 제 인식표 줄에 걸었습니다.”

도영이 목에서 인식표 줄을 꺼내 보였다. 쇠 인식표 두 장 사이에 작은 놋쇠 열쇠가 하나 끼어 있었다. 태우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구함은 둘이 같이 쓰는 것이었고, 열쇠는 하나였다. 그 하나가 도영의 목에 걸려 있었다.

2310, 곽 상사가 새 구멍 위에서 두 번 굴렀다. 꺼지지 않았다. 그는 배치도에 13을 적고, 흰 줄 북쪽의 다른 새 구멍 자리에는 볼펜으로 동그라미만 쳤다. 내일이었다. 오늘 아침 열둘이었던 숫자는 내일 밤이면 열넷이 될 것이었다. 1,400은 다시 1,400이었다. 남은 것은 하루 늦어진 KF-21의 첫 출격이었다.

오상혁이 굳은 보수재 위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댔다. 아직 미지근했다. 그는 손바닥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 넷, 내일부터 하루에 몇 번씩 뜰 거다. 분견대 무장사 둘로는 못 버텨. 결국 니가 단다.”

“교범 받았습니다.”

“읽어 봤어?”

“아직입니다.”

“읽고 나서 손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손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교범이 맞다고 해도.”

오상혁이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바닷바람이 활주로를 건너와 보수재 위에 남은 김을 한쪽으로 쓸어 갔다.

태우는 격납고 구석 작업대에서 교범을 폈다. 작업등 아래에서 종이가 노랗게 보였다. 7월 30일이었다. 8월 27일까지 스무여드레였다. 첫 장은 기체 제원이었고 둘째 장부터 무장 장착점 그림이 나왔다. 날개 밑에 매달린 장착대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태우는 그 그림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이 아는 모양이 아니었다. 그는 KF-16 교범의 같은 그림을 머릿속에 겹쳐 놓고 한 줄씩 대조했다. 걸쇠의 위치가 달랐다. 고정 핀의 굵기가 달랐다. 장착대에 탄을 들어 올리는 각도가 달랐다. 6월 4일부터 두 달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 손이 기억한 것이 여기서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는 교범 여백에 연필로 작게 적었다. KF-16과 다름. 연필 끝이 그 옆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그림 속 KF-21 날개 밑 무장 장착대의 규격은 그가 아는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았다.

2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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