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88자)

서명

광장 비둘기들의 복수 · 문들레

보좌관이 종이 한 장을 정학의 책상에 내려놓은 것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구슬은 새끼 둘을 가슴 밑에 품은 채 유리 너머로 보았다⁠. 종이에 까만 줄이 빼곡했다⁠.

“⁠사장님 후원회요⁠. 직원 열두 명 이름으로 나눠서 들어왔어요⁠. 의원님 후원회에도 넷 들어왔고요⁠. 제가 소개해 드릴 때 알았어요⁠. 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눠서 내면 다 합법이니까⁠.⁠”

보좌관은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코끝이 빨갰다⁠.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만둘게요⁠.⁠”

“⁠그만두지 마⁠. 오늘부터 서른 명 모아야 돼⁠.⁠”

정학이 종이를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했다⁠. 작은 열쇠⁠, 손가락만 한 영상⁠, 접은 종이⁠. 정학은 가방에서 다른 종이 묶음을 꺼냈다⁠. 첫 장에 굵은 글씨가 있었다⁠. 보좌관이 소리 내어 읽었다⁠.

“⁠「⁠먹이 금지·포획 법안 수정안⁠」 포획 조항 삭제⁠, 업체의 먹이 살포 처벌⁠, 시장 차양 교체 지원⁠, 지정 급식대 설치와 번식 줄이는 모이 사용⁠. …의원님⁠, 외국 도시 사례 빼라고 하셨잖아요⁠.⁠”

“⁠다시 넣어⁠. 몇 년 걸린다는 말도 넣고⁠. 몇 년 걸리니까 지금 시작한다고⁠.⁠”

*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의원회관 복도가 붐볐다⁠. 정학은 6층에서부터 한 층씩 내려가며 방문을 두드렸다⁠. 구슬은 짝에게 새끼를 맡기고 창틀을 따라 내려갔다⁠.

구슬은 혼자가 아니었다⁠. 광장 분수의 가장 높은 돌에 구슬이 올라선 뒤로⁠, 무리는 구슬이 뜨면 따라 떴다⁠. 외발이 앉던 돌에 앉는 새를 무리는 따랐다⁠. 정학이 5층 복도 끝 방에 들어가면 구슬이 정학이 든 방 창틀에 내려앉았고⁠, 열댓 마리가 구슬 옆 창틀에 줄지어 앉았다⁠. 정학이 방에서 나와 옆방으로 가면 무리도 옆 창틀로 옮겼다⁠. 창틀마다 잿빛 몸이 한 줄로 앉았다⁠.

“⁠의원님⁠, 의원님 오시면 비둘기가 따라와요⁠?⁠”

5층의 머리 하얀 의원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정학이 수정안을 내밀었다⁠.

“⁠요즘은 그렇습니다⁠.⁠”

“⁠우리 지역구 사람들이 이 비둘기 영상만 봐⁠. 내가 이 법에 손 얹으면 우리 동네 유튜브에도 나오나⁠?⁠”

“⁠나올 겁니다⁠.⁠”

머리 하얀 의원이 볼펜을 집었다⁠. 정학이 들고 다니는 종이 끝에 숫자가 하나 늘었다⁠. 보좌관이 문밖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열넷⁠.

5층 맞은편 방에서는 굽 낮은 구두의 여자 의원이 정학을 문간에 세워 두고 말했다⁠.

“⁠아침에 내 차 앞 유리에 하얀 거 다섯 개 떨어져 있었어요⁠. 그 비둘기들 데리고 와서 서명받으시는 거예요⁠?⁠”

“⁠데리고 온 게 아니라 따라온 겁니다⁠. 선배님 지역구에도 오래된 시장 있으시죠⁠? 차양 지원이 거기도 갑니다⁠.⁠”

여자 의원이 창틀의 무리를 노려보다가 수정안을 받아 들었다⁠. 차양 대목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한숨을 쉬고 서명했다⁠. 창틀의 비둘기 하나가 서명이 끝나는 순간 꽁무니를 들었고⁠, 여자 의원이 창을 손바닥으로 탕 쳤다⁠. 무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가 옆 창틀로 옮겨 앉았다⁠.

4층의 한 의원은 창틀의 무리를 보자마자 창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정학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저었다⁠. 3층의 한 의원은 수정안을 끝까지 읽고 서명하면서⁠, 창틀의 구슬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포획 빼면 우리 동네 동물단체가 좋아하겠네⁠. 상인들은 차양 받고⁠.⁠”

보좌관이 손가락을 접었다⁠. 스물하나⁠.

*

같은 당 중진 의원의 방은 8층에 있었다⁠. 창이 넓었고⁠, 창틀에 뾰족한 쇠침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구슬은 쇠침 사이에 겨우 발을 넣고 앉았다⁠. 다른 새들은 앉지 못하고 위층 처마로 올라갔다⁠.

중진의 신발은 끈이 없었다⁠. 발등을 덮은 반들반들한 가죽에 금색 장식 하나가 붙어 있었다⁠. 구슬은 끈이 없는 신발을 처음 보았다⁠. 쪼아 당길 것이 없는 신발이었다⁠.

“⁠앉게⁠.⁠”

정학은 앉지 않았다⁠. 수정안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중진은 수정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원안이 당론이야⁠. 원안대로 가⁠. 수정안 내면 자네 다음 공천은 없다고 생각해⁠.⁠”

“⁠포획 조항 빼면 반대하던 쪽 의원들도 손을 듭니다⁠. 상인들 차양 지원은 그대로고요⁠.⁠”

“⁠업체는⁠?⁠”

“⁠업체가 시장에 비둘기를 불렀습니다⁠. 새벽마다 먹이를 뿌려서요⁠. 영상이 있습니다⁠.⁠”

중진이 처음으로 수정안을 집어 들었다⁠. 한 장을 넘기고 내려놓았다⁠. 끈 없는 구두가 카펫 위에서 한 번 까딱였다⁠.

“⁠그 사장⁠, 우리 당 사람들 후원회에 이름 올린 사람이야⁠. 자네만 받은 줄 알았나⁠?⁠”

“⁠저는 안 받았습니다⁠.⁠”

“⁠자네 서랍에 있는 건 자네 거고⁠.⁠”

정학의 구두가 멈췄다⁠. 구슬은 쇠침 사이에서 정학의 구두를 보았다⁠. 중진이 웃었다⁠. 사장처럼 웃지 않았다⁠. 입만 웃었다⁠.

“⁠비둘기 법 하나로 초선이 이름 날렸으면 됐어⁠. 원안 통과시키고⁠, 봉투는 조용히 돌려주고⁠, 다음 선거 나가⁠. 그게 자네한테도 상인들한테도 좋아⁠.⁠”

중진이 일어나 창으로 왔다⁠. 쇠침 사이의 구슬을 보았다⁠. 창을 열고 손을 휘저었다⁠.

“⁠훠이⁠. 여기는 침 박아 놨는데도 와⁠.⁠”

구슬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목털을 부풀리고 쇠침 사이에서 버텼다⁠. 중진이 손을 더 크게 휘저었다⁠. 손끝이 구슬의 날개를 스쳤다⁠. 구슬은 끄르륵 울며 중진의 손등을 쪼았다⁠. 중진이 손을 움츠렸다⁠.

“⁠이놈이⁠!⁠”

정학이 수정안을 탁자에서 집어 들었다⁠.

“⁠선배님⁠. 그 새⁠, 제 구두 끈 쪼는 놈입니다⁠. 선배님 구두는 끈이 없어서 손을 쪼았나 봅니다⁠.⁠”

정학이 방을 나갔다⁠. 구슬은 쇠침 사이에서 빠져나와 아래층 창틀로 내려갔다⁠. 처마에서 기다리던 무리가 따라 내려왔다⁠.

*

이튿날 아침 광장의 벤치 앞에는 신문지가 평소보다 넓게 깔려 있었다⁠. 구슬의 무리가 신문지 위에서 쌀을 쪼았다⁠. 신문지 한가운데에 큰 사진이 있었다⁠. 우산을 든 정학의 얼굴이었다⁠. 구슬은 사진 속 정학의 얼굴 위에 서서 쌀을 쪼았다⁠. 할아버지가 신문지 귀퉁이를 들어 소리 내어 읽었다⁠.

“⁠「⁠초선 의원 서랍 속 돈 봉투⁠… 방역 업체 ‘⁠의원 쪽이 요구⁠’⁠」 허⁠, 의원 양반⁠. 받을 거면 쌀이나 받지⁠.⁠”

고무 장화가 쌀 포대를 안고 왔다⁠. 손수레 없이 두 팔로 안고 왔다⁠. 상인회장은 포대를 벤치 옆에 내려놓고 할아버지 앞에 섰다⁠. 쪼그려 앉지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형님⁠. 경찰서에서 밥은 줬어요⁠?⁠”

“⁠줬어⁠. 니 쌀보다 낫더라⁠.⁠”

상인회장이 웃으려다 말았다⁠. 장화 코로 신문지 끝을 밀었다 당겼다⁠.

“⁠형님 가게 넘어갈 때 보증 선 거⁠, 내가 갚았어야 했는데 못 갚았어요⁠. 내가 형님 가게 날렸어요⁠.⁠”

할아버지가 쌀을 한 줌 쥐었다⁠. 구슬의 무리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뿌렸다⁠.

“⁠알어⁠. 처음부터 알었어⁠.⁠”

“⁠아셨으면서 쌀을 받았어요⁠?⁠”

“⁠쌀이 무슨 죄여⁠. 애들 밥인데⁠.⁠”

할아버지가 쌀 한 줌을 상인회장에게 내밀었다⁠. 지난번처럼⁠. 상인회장은 이번에는 손을 내밀어 받았다⁠. 받은 쌀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한참 쥐고 있다가⁠, 허리를 굽혀 장화 앞에 뿌렸다⁠. 서툴게 뿌려서 쌀이 한곳에 몰렸다⁠. 구슬의 무리가 장화 앞으로 몰려들었다⁠. 장화 코의 하얀 얼룩 위에 비둘기 하나가 올라섰다⁠. 상인회장은 발을 빼지 않았다⁠.

*

점심때 구슬은 창틀로 돌아와 새끼들 입에 젖빛 먹이를 흘려 넣었다⁠. 새끼들은 며칠 새 솜털 사이로 잿빛 깃 끝이 돋아 있었다⁠. 큰 부리를 벌리고 아무것에나 달려들었다⁠. 구슬의 부리에도⁠, 짝의 부리에도⁠, 창틈으로 들어온 정학의 손가락 끝에도⁠.

정학은 창틈에 손가락 하나를 넣어 보고 있었다⁠. 새끼 하나가 정학의 손가락을 부리로 덥석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먹이를 내놓으라는 짓이었다⁠. 정학이 손가락을 빼지도 못하고 굳었다⁠.

“⁠야⁠, 나 먹이 없어⁠. 아저씨 손가락이야⁠.⁠”

구슬이 끄르륵 울며 정학의 손가락을 쪼았다⁠. 정학이 손가락을 빼고 털었다⁠. 손가락 끝이 빨갰다⁠. 정학이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었다⁠. 구슬이 정학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학이 화면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목소리가 시장 말투로 바뀌었다⁠.

“⁠응⁠, 엄마⁠. …봤어⁠? 응⁠. 안 받았어⁠. 서랍에 석 주 넣어 놨어⁠. 돌려주려다가⁠, 못 돌려줬어⁠.⁠”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구슬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정학은 한참 듣기만 했다⁠.

“⁠엄마 이자 날 있잖아⁠. 그날 밤에 열어 봤어⁠. 세어 보다가 말았어⁠. 반쯤 세다가⁠.⁠”

정학은 또 한참 들었다⁠. 들으면서 창틀의 새끼들을 보았다⁠. 새끼 하나가 회색 깃털을 부리로 물고 잡아당겼다⁠.

“⁠응⁠. 내일 다 말할게⁠. 본회의장에서⁠. …응⁠. 깨끗하게는 못 했어⁠, 엄마⁠. 말이라도 깨끗하게 할게⁠.⁠”

전화를 끊은 정학은 셔츠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서랍은 이제 비어 있었다⁠. 봉투는 책상 위에 나와 있었다⁠. 정학은 열쇠를 서랍 손잡이에 꽂아 둔 채 다시는 빼지 않았다⁠.

*

오후에 정학이 광장에 나왔다⁠. 카메라 줄이 정학을 에워쌌다⁠. 정학의 손에 우산이 없었다⁠. 구슬은 가장 높은 돌에서 내려다보았다⁠.

“⁠의원님⁠, 봉투 받으셨습니까⁠?⁠”

“⁠업체가 의원님 쪽이 요구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정학은 카메라를 하나씩 보았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내일 표결 때 본회의장에서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만 말하겠습니다⁠.⁠”

“⁠지금 못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거기서 해야 기록에 남으니까요⁠.⁠”

정학이 걸어 나왔다⁠. 왼쪽 구두 끈이 풀려 있었다⁠. 구슬은 높은 돌에서 내려와 정학의 구두 앞에 내려앉았다⁠. 끈 끝을 물었다⁠. 정학이 멈췄다⁠. 카메라들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정학은 쪼그려 앉아 구슬이 끈을 물고 있는 채로 끈을 묶었다⁠. 매듭이 구슬의 부리 바로 앞에서 지어졌다⁠. 구슬은 끈을 놓았다⁠. 정학이 일어났다⁠. 카메라 하나가 끝까지 바닥을 찍었다⁠.

*

표결 전날 해 질 녘⁠, 보좌관이 손가락을 다 접고 하나를 펴 보였다⁠.

“⁠스물아홉이에요⁠. 하나 모자라요⁠.⁠”

정학은 6층 복도 반대편 끝 방 앞에 서 있었다⁠. 반대편 당의 초선 의원 방이었다⁠. 구슬은 짝에게 새끼를 맡기고 초선 의원 방 창틀로 날아갔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반대편 초선 의원은 사무실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하얀 운동화 앞코에 흙이 묻어 있었다⁠. 구슬은 흙을 보았다⁠. 광장 잔디의 흙이었다⁠. 이 의원은 점심때 광장 잔디를 가로질러 다니는 운동화였다⁠. 늘 김밥을 흘렸다⁠.

“⁠피 의원님 법 처음 나왔을 때 제가 제일 크게 반대했던 거 아시죠⁠?⁠”

“⁠압니다⁠.⁠”

“⁠포획 빠진 거 좋아요⁠. 업체 처벌도요⁠. 근데 의원님 봉투 기사 보고 서명 안 하려고 했어요⁠. 봉투 받은 사람이 업체 처벌하자는 거⁠, 누가 믿어요⁠?⁠”

“⁠안 받았습니다⁠. 석 주 동안 서랍에 넣어 뒀습니다⁠.⁠”

“⁠그게 받은 거예요⁠.⁠”

정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대편 초선 의원이 볼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제가 서른 번째 할게요⁠. 조건이 있어요⁠. 내일 본회의장에서 봉투 얘기 의원님 입으로 직접 하세요⁠. 영상이랑 같이요⁠. 어물쩍 넘어가면 저 그 자리에서 서명 철회해요⁠.⁠”

정학이 창밖을 보았다⁠. 창틀에 구슬이 앉아 있었다⁠. 구슬 뒤로 해가 의사당 둥근 지붕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구슬은 돌아가야 했다⁠. 새끼 둘이 젖빛 먹이를 기다렸다⁠.

“⁠하겠습니다⁠.⁠”

반대편 초선 의원이 볼펜을 다시 들었다⁠. 서명하는 소리가 창틈으로 들렸다⁠. 사각사각⁠. 구슬은 소리가 끝나기 전에 창틀을 박찼다⁠.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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